타자의 시선 
 병장 이승일 06-08 06:07 | HIT : 376 





 이전 예술의 시대에
 석공들은 대단히 조심스럽게 일하였다네
 매 순간, 보이지않는 부분에서
 왜냐하면 신은 어디든지 보고있기 때문이라네. 

- 롱펠로 

In the elder days of art,
Builders wrought with greatest care 
Each minute and unseen part, 
For God sees everywhere.



 유럽의 여러 거대한 성당들을 직접 본 사람은 대개 그 웅장함보다는 오히려  섬세함에 더 놀라게 된다. 내부와 외부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수많은 문양과 조각상들. 그것도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숨결없는 모습이 아니라 모두 나름대로의 이야기와 생명력을 지니고 살아있는 듯한 모습이니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당시의 석공들이 끌과 망치를 가지고 하나하나 그것을 조각했음을 상상해보라. 대체 무엇이 사람에게서 그러한 열정과 성실함을 이끌어낼 수 있겠는가? 오늘날 이러한 종류의 섬세함을 이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유인책은 오직 돈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막대한 돈일 것이다. 아무도 그정도의 돈을 들여서 그러한 섬세함을 구경하고자 하지는 않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더 이상 과거의 건축물을 흉내낼 수 없다. 
 중세 석공들에게서 놀랄만한 열정과 성실함을 이끌어낸 것은 경제적 보상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경제적 보상이라고 해봐야 먹고살 수 있는 정도의 재화가 전부였다. 그 누구도 그정도 돈을 받고서 뼈빠지게 오버해가며 끌과 망치를 두드릴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그러한 성당 건축이 보통 수십년씩 걸린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하다. 그들이 '대단히 조심스럽게' 일한 것은 누군가가 그 모든 痼?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볼 때, 특히 의미있는 누군가가 볼 때, 우리는 비로소 해야 할 일을 하게된다. 

 오늘날 우리는 삶의 깊숙한 곳과 마음 구석 구석을 누군가가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때문에 이러한 영역에 대해 우리는 더 이상 해야할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누군가가 본다고 생각하는 새로운 영역들이 생겨났다. 우리의 외모, 패션, 직업 등이 그것이다. 상당수의 현대인들은 '타인의 시선' 을 의식하며 외모를 가꾸고 멋진 옷을 입는다. 그런데 이 시선이란 구체적인 실체라기 보다는 추상적인 어떤 것이다. 이 시선은 길거리의 특정한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추상명사로서의 '사람들' 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근사한 직업의 근사함을 인식하는 주체도 구체적인 사람들이라기 보다는 'somebody' 에 더 가깝다. 현대인은 자신을 지켜보고 알아주는 누군가에게 잘보이고자 노력한다. 이 '누군가' 와 중세석공의 신이 가진 차이점이라면, '누군가' 는 시각적으로 드러나있는 나의 표피들만을 관찰하지만, 중세석공들의 신은 그들의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사밀한 행동과 마음을 말이다. 

 이 '누군가'의 시선은, 그러나 꼭 완전히 추상적인 형태로 존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친구들의 시선일 수도,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일 수도 있다. 그러나 타인이 실제로 보고있을 때 뿐 아니라 그렇지 않을 때에도 그 시선을 의식한다면, 그것은 이미 추상적인 영역에서의 시선이라고 불러야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사밀한 장소에까지 권력을 행사하는 시선을 스스로 창조해내기도 한다. 스스로를 어떠한 '이야기' 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러한 경우이다. 이러한 사람은 스스로의 삶을 문학작품의 하나로 간주한다. 이 작품의 작가는 자신이 창조해낸 또 다른 자아이다. 이들은 고통이 허무보다 견딜만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항상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결국 그것을 잘 견디며, 심지어 그 고통을 아름답게 여기기까지 한다. 마치 자신을 비극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며 '아름답게' 최후를 맞이한 네로황제처럼. 

 고대 중국인들은 '역사의 시선' 을 항상 의식하며 살았다고 한다. 후세에 의해 어떻게 평가받을지가 그들에겐 가장 의미있는 시선이었고, 그 시선의 평가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목숨조차 버릴 각오가 되어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시선은 중국 뿐 아니라 근대 유럽, 그리고 현대 사회에까지 남아있다. 

 재밌는 것은 이와 같은 시선에 대한 의식이 수치스럽거나 바보같은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찌되었건 <그 시선이 향하는 영역에 있어서는> 인간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끈다는 점이다. 표피적인 영역으로 향한 대중의 시선은 어찌되었건 그 표피적인 영역은 개선시킨다. 멋진 옷을 입고, 잘나가는 직업을 갖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만든다. 자아의 자아에 대한 시선은, 어찌되었건 삶이 고통의 무게에 압사당하는 상황은 막아준다. 심지어 '양심' 이라는 이름으로 도덕적인 면모까지 갖게끔 만든다. 역사의 시선에 대한 의식은 개인으로 하여금 조야한 일상적 존재를 넘어서게 한다. 역사적 시선은 최초로 '위대한' 이라는 수식어에 의미를 부여하는 차원이다. 
 그런데 이 모든 시선들은 사실 어떤 종류의 '믿음' 으로부터 출현하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이 우리를 '인식하고 있는지' 에 관하여 확신을 가질만한 아무런 결정적 증거도 갖고 있지 않지만, 어쨌건 그렇다고 믿는다. 절대자의 시선은 당연히 믿음이므로 말할 필요도 없으며, 자아의 시선은 나 자신을 타자처럼 간주하는 믿음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역사적 시선 역시 나의 사후에 진행될 평가에 대한 믿음을 통해 존재한다. 
 가장 표피적인 부분에서 가장 위대하고 성스러운 영역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시선의 지배하에서, 그리고 그 시선의 힘을 통해 고양된다. 우리가 의식하는 시선, 그 시선이 우리의 주인이며 우리의 삶은 결국 그 시선을 위해 존재할지도 모른다. 이름없는 대중을 위해, 주위의 친구들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아를 위해, 역사를 위해, 그리고 신을 위해. -  그 어떤 시선의 지배도 받지 않는 사람의 경우에는 무를 위해.  


 병장 양각산 
( 입을 활자로 다물고 진중히 고개를 끄덕이며 성실히 10회 가량 박수를 친 뒤) 
 가지로~! 06-08   

 병장 김광철 
 글쎄요....그 시선의 부정적 측면에 대해서는 고려해보시지 않으셨는지요? 
 예컨데 푸코의 판옵티콘이랄지. 아니면 <1984>에서 등장하는 빅브라더의 시선말입니다. 06-08   

 일병 정영목 
 저 개인적으로는 역사의 시선을 아주 강하게 의식하는 편입니다. 결국 이것도 믿음이겠지요. 그러나 그 믿음이 있기에 '빅브라더' 같은 존재가 나타나면 격렬히 저항하겠다는 의지를 굳히곤 합니다. 물론, 그 의지마저도 '빅브라더'가 의도한거라면 쥐쥐. 

 아.. 쥐쥐치면 안되겠죠. 좌절은 금물이니. 머 여튼, 우리가 '어떤 다양한 시선'을 의식한다는 건 분명해 보이니, 그렇다면, 표피적인 것뿐만 아니라 심층적인 면에도 관심을 가지는 '시선'을 계발하는 게 좋은 선택이겠네요. 06-08   

 병장 이승일 
 광철 / 그 시선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까요? 그 누구도 빅브라더가 좋은 뜻을 가지고 우리를 감시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을테니까요. 

 영목 / 저도 예전에 그랬었습니다.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한 방편일 뿐이지요. 그러나 롱펠로의 말이 사실인 것을 알게된 이후부터는 제가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시선을 '계발' 하는 행위는, 일종의 위버맨쉬적인 행위인데, 제가 보기에는 결코 충분한 형태로 가능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허구라는 것은 자기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아니까요. 06-08 * 

 병장 이건룡 
" 우리가 허무주의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보수주의에 의해 불가능하다고 선포된 것을 열망한다고 선언하면서이고, 무에의 욕망에 대항하여 진리들을 긍정하면서이다. 모든 사랑의 만남, 모든 과학적 재정립, 모든 예술 적 발명과 모든 해방의 정치적 계열이 우리 눈앞에서 펼쳐 보이는,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이야말로 진리들의 윤리학-그 실질적 내용이 죽음을 결정하는 것인 '잘사는 것'의 윤리에 대항하는-유일한 원리이다." 

 바디우의 <윤리학>에서 발췌해 보건데 제시하시는 문제 유형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 봅니다. 승일님의 글을 잘 읽었지만 여기저기 이해하는 꼬인 줄이 있어 도움을 빌려 읽어 봅니다. 의도와 태도에 대해 보건데. 빅브라더가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롤펠로 말처럼 '신'이 보고 있는데 굳이 '좋은 뜻(의도)' 이라는 표현을 붙여야 할 필요가 의문입니다(분명히 해야 할 태도가 있다 생각하건데 물음에 관해선 타자성에 관한 에세이인 만큼 레비나스에 의존했습니다-짧지만). 

" 유한 성 속에서 나에게 드러나는 대로의 타자는, 그 넘어섬이 고유한 윤리적 경험일 순수하게 무한한 타자에의 거리의 현시이여만 하다."라는 레비나스의 표현을 빌어 (승일님이 말씀하고 계신) 타자에 대한 유한한 헌신의 존재는 외재해 있는 (표현할 수 없는) 신에 대한 원리적인 무한한 헌신과 그에 따라 존재할 '윤리'의 필요성에 보다 분명히 자신감을 갖아야 할 필요가 있다 생각합니다. 06-08   

 병장 이승일 
 건룡 / 혹시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 에 나오는 구절인가요? 명확하게 이해는 못했지만, 건룡님의 의도를 추측해보건데 여기서 '좋은 의도' 가 문제인 것인가요? 음 제가 이해한 수준 내에서만 우선 생각해볼게요. (만약 창조주가 있음을 가정한다면) 일단, 빅브라더와 신의 첫번째 차이는 빅브라더는 '나' 를 존재론적으로 소유하고 있지 않은 반면, 신은 그러하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 의 존재함 자체가 신에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레비나스는 개인의 존재가 전적으로 모든 타자에 의존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타자에 대해 반사적으로 자아를 형성하기 때문에, 타자가 있어야 자아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만약 이 생각을 끝까지 밀고 나가면, 이 '타자' 는 타인 뿐 아니라 모든 존재를 포함해야하고, 이는 결국 신을 의미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여기서의 타자가 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레비나스의 주장은 오류라고 밖에 생각할 수가 없어요. 우리는 인식론적으로 타인에게 의존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존재론적으로 의존하고 있지는 않거든요. 
 두번째로, 빅브라더와 신의 차이점은 신이 완전히 선하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차이이기 때문에 굳이 '좋은 의도' 라는 말을 붙여야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신이 선함에 따르고 있다기 보다는 신의 의지가 곧 선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예를 들어 1m 를 정의하는 막대기가 있다면, 그 막대기는 '필연적으로' 1m 이듯이, 신은 필연적으로 선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뭐 이거야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요. 어찌되었건 신의 관찰은 우리를 파괴하거나 관리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우리를 존재하게 하고, 더 나은 방식으로 존재하게 하고자 하는 의도이기 때문에 이를 지적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건룡씨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빗나간 답변을 단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잘못된 점이 있으면 지적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06-09 * 

 병장 이건룡 
 레비나스에 의하면 유한한 타자는 무한한 타자의 존재에 대한 실측가능케 하죠. 

 좀더 읽어 보면 윤리학차원에서는 선함을 의식한다기는 보다는 다신교적인 주이상스(향락)이 아닌 레비나스의 주이상스(향유)의 측면으로의 이행. 즉 신에 의해 정화된 향략으로써 파악할 필요가 있다 생각합니다. 따라 좀더 바꿔 읽어 볼 차원은 선/악등의 정치판단차원이 아닌 (윤리적인) 신에 대한 무한한 헌신으로써 신성한 난교축제적 엑스터스를 좀더 고상화할 측면에서의 윤리학의 명시입니다. 

* 저도 이해가 부족한 수준에 승일님의 글을 읽자니 답변을 하면서 난감하군요. 제 독서 습관으로 읽자니 답변을 하는데 무리가 많네요. 비슷한 부분을 관해서 최근 읽고/생각하는 중인데 꽤나 어렵운 경험을 하고 있는 점을 떠올리면. 

 그리고 롱펠로란 인물에 호감이 가는데 짧막한 소개해주시면 안될까요? 06-09   

 병장 김광철 
 승일/ 우선 첫번째 지적은 매우 정확하십니다. 레미나스의 타자는 결국 절대저 무한자 즉 신의 모습을 닮아 있지요. 타자를 주체의 인식론적 소유물이 아닌, 주체를 존재론적으로 가능케하는 조건으로 기술하려고 하는 것이 사르트르와 레비나스로 이어지는 타자론의 공통된 특성이랍니다. 

 그리고 두번째 문제는 저도 '좋은 의도'라는 용어를 건룡님이 왜 문제삼으셨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느나, 레비나스와 관련해서 나름대로 생각해보자면, 레비나스에게 있어서 타자는 적극적으로 기술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즉 어떤 긍정적인 술어도 붙을 수 없는, 마치 부정신학의 일자(一者)와 같은 존재가 바로 타자입니다. 따라서 심지어 "선하다"라는 술어도 타자에겐 붙을 수 없는 것이지요. 타자는 주체의 표상채계에 포섭되지 않는, 즉 주체가 그 존재를 적극적으로 기술할 수 없다는 절대적 부정성으로서만 출현합니다. 

 그런데 이거 괜히 눈치없이 두 분 논의에 끼어든것 같군요...;; 06-09   

 병장 이승일 
 건룡 / 롱펠로에 관해서는... 영국의 문필가라는 사실밖에는 저도 알지 못합니다. 인용한 구절은 예전에 어떤 책에서 보고 메모해두었던 것입니다. 

 제가 건룡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광철님의 말씀과 유사한 점이 있는 것 같기에 광철님의 리플을 기준으로 말해보자면. - 
' 어떠한 긍정적 술어도 붙을 수 없는 존재' 란 Nothing 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정신학은 무와 신을 혼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사실 이런 일은 아주 자주 있는 일이라고 여겨집니다. 
 어떠한 긍정적 술어도 붙을 수 없는 존재는, 어떤 속성도 갖지 않는 존재이고 그것은 사실 존재가 아니지요. 신은 (만약 존재한다면) 모든 것이 아닌 존재라기보다는 오히려 모든 것을 포함하는 존재여야합니다. 그것이 완전하다는 말의 의미이겠지요.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척도는, 분명 불완전하지만, 신의 척도의 한 파편이자 부분을 이루어야할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척도들은, 분명 신의 척도와는 일치하지 않지만, 그 일치하지 않는 정도에 있어서는 각각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척도의 예를 생각해보죠. (물리적 크기가) 크다-작다, 똑똑하다- 멍청하다, 선하다-악하다, 아름답다- 추하다, 옳다-그르다, 비싸다-싸다 , 훌륭하다-볼품없다. ... 등등 우리에겐 수많은 척도들이 있습니다. 이 척도 중 그 어떤 것도 신의 척도와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 말은 맞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중 어떤 것은 그 척도에 더 가깝고, 어떤 것은 덜 가까울 것입니다. 그래서, 예컨대, '선하다' 라는 술어는 가장 적합한 술어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 타자' 로서의 신은 출발점이지 결론이 아닙니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 신이 정말로 나를 포함한 모든 존재를 창조했다면, 신은 오히려 '나' 자신보다 덜 타자적인 존재일 것입니다. 신은 결코 부정으로써 발견될 수 없습니다. 부정으로 지각되는 것은 단지 nothing 일 뿐입니다. 06-10 * 

 병장 이건룡 
 제가 너무 아리송하게 적었나 봅니다. 이야기의 요점에 대한 갈피를 잡기 위해 여러 가지 애를 썼지만 그다지 용의치 않는 생각들이 떠오르더군요. 필요한 요소가 빠졌다는 생각과, 분명치 못한 발상을 물고 물어 졌지만요. 괜한 번거로운 발걸음을 하시게 했는지 미안한 마음도 듭니다. 확신하는 차원이 아니었음에 불구하고. 

" 유한 성 속에서 나에게 드러나는 대로의 타자는, 그 넘어섬이 고유한 윤리적 경험일 순수하게 무한한 타자에의 거리의 현시이여만 하다."는 다시 말하면 타자에 대한 인식이 유한한 경험을 초월하는 타자성의 원리에 떠 받쳐져야 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순수이 윤리의 이해 가능성 차원에서. 레비나스는 이 원리를 전혀-다른-타자로 신의 윤리적 이름으로 봅니다. 다시 말하자면, "같지 않은 자에 대한 유일한 헌신이 있는 것은, 오로지 그의 밖에서 존재하는 것에 대한 원리적인 무한한 헌신이 있는 한에서이다."이고 즉 표현될 수 없는 신이 있는 한에서만 윤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디우의 의하면) 레비나스 철학은 신학에 의해 폐기된 (그리스적 의미에서의) 철학이자, 신의 정체성과 특질을 통한 신적인 것에 접근을 전제하는 신의 학문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윤리학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좀 더 읽어 보자면 '선'이라는 관념보다는 '구원'으로 읽을 필요가 있으며, 좋은 의도나 뜻이니 하는 것보다 사명으로써 좀 더 명확히 표기하는 걸 추가했으면 하는 바램이었습니다(사명감을 가지고 진리를 믿음이 아닌 구원으로). 승일님 글을 가지고 이랬음을 좋겠는데 하는 건 잘못이지만 그만큼 정말 잘 읽었다는 애착으로 받아 주시여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웃음) 잘 읽었습니다. 06-12   

 병장 이승일 
 건룡 / 저도 리플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현상학 수업에서 <시간과 타자> 를 읽었었는데, 그 때도 참 어렵다고 느꼈었는데, 역시 어렵긴 어려운가봐요. 어떻게 레비나스에 관심을 갖게 되셨는지 참 궁금합니다. 
 제가 기억하는 한에 따르면, 레비나스가 타자에 대한 헌신, 윤리적 의무를 주장하는 것은 타자가 '자아' 라는 존재의 근원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레비나스는 '나' 라는 개념, 혹은 정체성이 다른 것들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 반사적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기억합니다. 나의 존재가 전적으로 타자에 의존해있기 때문에, 타자에 대한 헌신은 당연한 윤리적 의무이며 무엇보다도 '절대적 타자'는 그 모든 윤리성의 원천이라고 주장한 것 같아요. 왜냐하면 오직 절대적 타자만이 나의 유한성 안으로 환원되지 않을 수 있고, 따라서 반사적 존재인 '나'를 절대적으로 보장해줄 수 있으니까요. 뭐 대충 이런 식인 것 같은데.. 

 제가 이 글을 '타자의 시선' 이라는 제목으로 쓰긴 했지만, 사실 타자에 대한 성찰을 통해 신에 대한 관념을 갖게되는 것은 엄밀히 말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현상학적 방법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은 단지 無에 가까운 어떤 것이 아닐까 합니다. 위 리플에서도 말했듯이, 그것은 신이라기 보다는 무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그것으로부터 어떠한 윤리적 요청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저로써는 받아들이기가 힘든 것 같애요. 無가 우리에게 무언가를 명령할 수는 없으니까요. 또한 근본적으로, 저는 레비나스가 말하듯이 자아가 타자에 대한 인식에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인식과 존재의 차원을 뒤섞은 논의라고 생각해요. 내가 타자를 인식한다는 것이 나의 존재를 함축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나의 존재가 타자에 대한 인식을 함축할 수는 있겠지만 말입니다. 

 저는 레비나스가 지적한 측면이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한가지 측면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요. 건룡씨가 말씀하신대로 그것은 분명 '사명' 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사명은 선한 의지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윤리는 결코 단지 타자성에 의해서 발생할 수는 없어보입니다. 윤리란, 신이 인격적 존재라는 사실, 그리고 그가 우리의 존재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 - 레비나스가 말하듯 현상학적인 방식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방식으로 - 에 의해 정당화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이 타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가장 본질적인 의미에서 '소유' 하고 있기 때문에 윤리가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자기 것에 관하여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정당하니까요. 이러한 엄격성과 자의성에도 불구하고 윤리가 파괴적인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은 오직 신의 의지가 선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레비나스를 읽고 계신 것 같은데 존경스럽습니다. 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