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취향
내가 원래 시력이 무척 안 좋은데 그 사실을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몰랐다.
칠판은 대충 띄엄띄엄 보이는 게 정상이고 사람들이 하늘에 별이 쏟아질 것처럼 반짝인다고 할 때 속으로 ‘뭐 그래’ 라고 생각하며 TV는 코가 화면에 딱 붙어야 대충 스토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5m 떨어진 곳에서 사람을 알아본다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한 줄 알았다. 그런데 5학년 신체검사할 때 대충 숟가락으로 한쪽 눈 가리고 읽어야 하는 표를 보고 딱 굳어서 난감해하는 나를 선생님이 꼭 안과에 가보라는 통지서를 써주셔서 어머니 손을 잡고 처음으로 안과를 찾았다.
의사선생님도 경악하시고 어머니도 경악하셨던 그날 내가 거의 반장님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안경을 처음 맞춰 쓰던 날 ‘야 세상이 이런 거구나’ 라고 처음으로 발견한 것이 과연 무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칠판도 보이고 교탁 앞에 선 선생님도 보이고 제일 뒤에 앉은 반 친구도 보이고 TV에 글도 보이고 하늘에 별도 보이고 책을 눈앞에 딱 갖다 붙이지 않아도 잘 보이는 세상이 있더란 것이다. 부모님은 네가 어려서부터 어두운데서 책보고 TV보고 그래서 그렇다고 나를 압박했지만 나는 새로 찾은 세상이 너무 좋아서 그 두꺼운 안경이 무거운 줄도 모르고 신이 났다.
사람에게는 오감(五感)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고장이 나면 보완작용으로 나머지가 예민해진다. 그래서 나는 소리와 냄새에 민감한 편이다. 남들보다 잘 들리는 주제에 귀에 거슬리는 소리는 참기가 힘들고 (아주 최근에 시계소리를 극복했다) 집에 가면 내가 오기 한 시간 전에 뭘 시켜먹었는지 알 수가 있고, 집안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을 참지 못해 초와 향을 피워대다 불낼 뻔한 일도 생기는 것이다.
사람이 한군데 불편한곳이 있으면 무척이나 까다로워진다.
잘 안보이게 되면 눈으로 보는 것보다 냄새나 소리를 더 신뢰하고 경험치를 통해 확신을 하기 때문에 스스로도 피곤하지만 주변 사람들도 피곤해지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불편함은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장애를 정당화시켜 스스로 감수하기보다 주변사람들의 배려를 강요 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괴팍스러워 지거나 까탈 맞은 사람이 되어버리는 이유다
미각이 예민해지니 맛에 대한 까다로운 점이 이것이다. 나는 맛도 맛이지만 재료의 식감에 예민한데 재료 본연의 식감이 나의 예상을 빗나가면 슬슬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이유는 여러 가지일 것이다. 재료가 신선하지 못하다거나 조리가 잘못되었다거나 만든 지 한참 오래된 것이리라. 그렇지만 부아가 난다고 해서 딱히 뭐 어찌하지는 못한다. 그냥 혼자 투덜거리다 성의 없는 항의를 하거나 숟가락을 놓아버리고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수준의 투정을 부린다. 우동의 탱탱한 면발, 잘 만죽된 수제비의 쫄깃함, 풍미를 남기며 살짝 씹히는 냉장육 스테이크, 입안에서 톡톡 터지는 날치알 연어알 가득올린 캘리포니아 롤, 튀김옷 얇게 입혀 바삭거리며 부서지는 새우튀김, 씹기도 전에 입안에서 사르륵 녹아버리는 훈제연어, 올리브 오일에 발사믹 식초만 있어도 충분한 파닥거리는 샐러드는 내가 눈을 빛내며 달려드는 것들이다.
처음 혼자 살면서 세 들어 살게 된 집이 지은 지 20년도 넘은 아파트였다. 혹시 그런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밤에 한참자다 갑자기 눈이 번쩍 떠져서 도대체 내가 왜 깼을까 생각을 하는데 집이 뚝뚝 하며 소리를 내는 것이다.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어두운 천정을 얼마나 노려보았는지 정신이 들자 훤한 아침이었다. 다음날 집을 나서 놀이터에 앉아 가만히 쳐다보니 벽에 자잘한 균열이 있는 것을 보고 그런 생각을 했다. 집이 너무 오래 되서 힘이 든다고 비명을 지르는 구나 그것도 남들 다 자는 밤에... 내가자고 있는 동안에 집이 무너지지는 않겠지만 다음번 이사 갈 때는 그 집이 얼마나 튼튼하게 지어졌는지 꼭 다시 살피게 되었다.
거기다 윗 층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 싸이클도 중요하다. 나는 잠이 많아서 늦어도 11시전에 잠이 들어 6시 까지는 자야 한낮에 시체처럼 걸어 다니는 걸 피할 수 있는데 윗집에 무슨 모임이라도 있어 왁자지껄하거나 부부싸움이라도 할라치면 그 쿵쿵거리는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방 저 방 베게를 안고 배회를 한다. 도대체 왜 부부싸움은 꼭 밤에 하는지 모르겠다. 어쩌다하는 부부싸움 칼로 물 베기라는데 낮에 전화로 싸우거나 초저녁에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끝장내고 한밤중에는 사이좋게 머리 맞대고 자면 도저히 안 되는 걸까
다행히 얼마 전 이사 온 윗집 사람들은 얼마나 조용한지 적막감이 돌 정도여서 아주 대 만족이다.
무슨 소리를 하려고 이렇게 장황한가 하면 사실 내가 유독 비쥬얼에 약한 이유를 설명하려 했는데 나도 모르게 변명이 줄줄이 늘어났다. 나도 알고 가족도 알고 친구도 알고 또 여러분 모두가 아시다시피 이 사람이 칠칠하지 못하고 또 세상 온갖 남루한 이유들을 꿰고 사는지라 뭔가에 대한 이해를 바라자면 변명이 이렇게 장황할 수밖에 없는 사람 되어 버린다. 대충 나의 이상한 취향은 이것으로 설명이 된다.
나의 취향은 내게 허락되지 않았던 부분에 대해 집착함으로 얻어진 집요함의 산물이다.
이 취향이란 것이 참 그렇다.
우리도 알다시피 타인의 취향을 존중해주어야 하는 것이 지극히 마땅한데도 사소한 몇 가지 취향은 숨겨야만 사는 게 편하고 또 왜 그런지 모르지만 비웃음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내가 아는 한 후배는 부모님의 지탄을 받으며 액션 피켜를 모으기도 하고 밤에 보면 무서워서 움찔 할 만큼 실사에 가까운 구체관절인형에 빠져서 웬만큼 사람 옷값과 맞먹는 인형 옷 쇼핑에 잔뜩 열이 올라있다. 가끔 집에 놀러오면서 얘를 데리고 와서 가뜩 찮아도 심약한 나를 놀래키곤 한다.(얘는 정말 사람처럼 쳐다본다)
몇 년 전 십자수를 해보겠다고 장만했던 재료를 버리려다 동생 갖다 주겠다고 달라고 했던 남자후배가 몇 달 후 나에게 작은 허브액자를 선물하며 선배 때문이라며 눈을 흘겼고 워낙 잘생기고 성격도 좋은 한 친구는 정말 멋진 여자 만날 거라는 기대을 깨고 만나는 여자마다 뚱뚱하고 나이 많은 연상의 여자여서 나를 놀라게 한 적도 있다.
또 내가 좋아하는 한 선배언니는 정말 교양 있고 우아한데 꼭 손톱에 꽃분홍색의 촌스런 메니큐어를 바르고 정말 화장 안 해도 예쁜 얼굴에 갖가지 색깔로 그림을 그린다.
내가 정말로 그 사람을 좋아한다면 이런 취향을 다 받아주어야겠지만 여전히 십자수를 한다는 남자후배를 비웃고 인형 모으는데 정신없는 후배를 시집이나 가라고 핀잔을 주고 그 잘생긴 친구의 여자친구 흉을 본다. 사람이 좋아서 이런 못된 성깔을 부리는 나를 받아주고 있지만 사실 내가 그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이 나의 취향임을 알고 있다. 참 좋은 사람들 곁에서 인정머리 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왜 모르겠는가
그리고 그 취향이란 것이 지극히 개인적이고 굳이 이해를 바탕으로 하지 않아도 되지만 사실 너무 쉽게 다른 사람의 취향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참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B급 영화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4시간짜리 킹 덤을 틀어놓고 중간 중간 ‘재밌지’ 눈을 반짝이며 확인을 하는 후배에게 어찌 지루해서 미치겠다고 하겠는가. 신선한 재료를 좋아한다고 큰맘먹고 회를 사겠다는 친구에게 나 회 못 먹는다고 도저히 얘기를 못해서 초장만 실컷 먹고 있는데 양이 많아서 아무리 먹어도 회가 안준다고 좋아하는 친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무리 가까워도 가끔은 이런 식으로 취향은 서로 충돌하기 마련이지만 친구가 ‘어때’ ‘어때’하며 나의 의견을 간절히 바란다면 ‘어 그래 좋아 딱 네 취향이네’하며 웃어주기 바란다.
병장 노지훈 (2006/02/27 19:05:32)
맛깔나는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병장 김형진 (2006/02/27 19:09:06)
구체관절인형이라 하심은, 돌피 말씀이시군요.
저도 돌피 좋아라 하는데.
병장 김석윤 (2006/02/27 20:40:01)
진심어린 마음이란 못마땅해 보이던 타인의 취향도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법이라니까요..
내 취향을 남에게 강요하는 건 나쁜 거지만 남을 너무 배려한다고 내 취향을 나만 즐기는 것도 어쩌면 이기적인 것 같아요.. 서로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이라면 내 것을 있는 그대로 그 사람에게 보여 줄 법도 한데 말이죠.. 진심어린 마음이 담겨 있으면 그 사람도 나의 취향을 받아주지 않을까요? (웃음)
상병 박진우 (2006/02/28 00:47:08)
큭큭.
B급 무비의 하지연님.
병장 송자영 (2006/02/28 00:53:56)
잘 읽었습니다.
사람은 역시 자기의 관점에서 보기 마련이죠..
병장 김태경 (2006/02/28 09:24:14)
타인의 '취향'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자신의 '취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생각을 해봤어요. 글로 적으려다가 몇번이나 멈췄는데, 지연님 글을 읽으니 또 생각이 나네요. 우린 너무 취향을 강요받고 있는건 아닌가. TV에 나오는 대로 자신의 취향을 정하지는 않나. 그저 남들이 좋다는대로 끌려다니는 건 아닌가하는 것말이죠.
병장 김동환 (2006/02/28 09:56:57)
아.구체관절인형을 돌피라고 하나요?
저도 아는 누나가 그 인형을 두명이나 갖고 있는데 머리 스페어가 하나에 30만원한다고 해서
머리만 하나 달라고 했다가 피자로 맞을뻔 했드랬지요.
하루는 그녀석(그 구체 관절인형. 이름은 오스카.)이 입고 있는 옷이랑 신발가격을 얘기해주길래
속으로 내가 입고 있던거랑 가격비교를 해봤는데. 걔가 4만 천원이나 더 비싸다는 사실에 좌절. 흑.
그나저나 저는 이때껏 별다른 취향이 없어서 큰일이에요.
병장 한상천 (2006/02/28 10:13:15)
시계소리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개인적으로 묻고 싶습니다.
저도 아직도 극복을 못해서 ..
상병 안대섭 (2006/02/28 15:24:28)
데어데블? (한대 맞을라...)
상병 이준요한 (2006/02/28 17:23:58)
역시 잘 읽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병장 정광훈 (2006/03/01 05:10:33)
맛깔나는 글입니다.
쩝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