컵라면
1.
내가 컵라면이라는 문명의 이기를 맨 처음 접했던 때는 초등학교 2학년때이다. 솔직히 말해서, 그 이전에는 컵라면이라는 편리한 물건이 있는줄 모르고 살았다는게 정확한 말인거 같다. 그때 맨 처음 접한 컵라면은 다름아닌 육개장. 어렸을때 나는 유난히 매운음식에 약했고, 그 때문에 초등학교 5학년때까지 육개장 컵라면은 신라면과 더불어 나에게는 꽤나 고약한 음식으로 인식되어졌던 웃지못할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
그때문일까, 어렸을때 내가 가장 많이 먹었던 컵라면은 우동이었고, 주변에서는 어떻게 그렇게 느끼한 물건을 눈하나 깜짝안하고 먹어대는지 무척이나 신기해 했었다. 하지만 나에게 컵라면이라는 존재는 단지 한끼 점심, 저녁에 지나지 않았고, 남들처럼 '맛있는 라면'이라는 인식은 하지 못했다. 컵라면을 끓여먹는 가장 큰 이유는 밥을 먹기 힘들어서였으니까.
2.
이런 나에게도, '맛있는 라면'의 인식을 가져다 준 시기가 있었으니, 다름아닌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주변에서는 공부안하고 맨날 동아리 활동만 한다고 갈궈댔지만, 그래도 성적관리는 꽤나 했던 편이었는지, 학교에서 상위 20%안에는 항상 들어가있었고, 수학성적을 제외한다면 기숙사에 들어갈수도 있었을 성적이었다. 물론, 당연히 수학성적은 바닥이었기 때문에, 기숙사에서 학력을 키운다는건 나에게 다른세상 이야기였고, 또 동아리 활동을 포기하면서까지 그렇게 할 생각은 추호에도 없었다.
아무래도 이래저래 하는일이 많아지다보니까, 가뜩이나 피골이 상접한 내 몸은 피골상접의 극치로 달려들었고, 키가 180이 되면서, 체중은 53kg에 불과한 이른바 '스켈레톤의 등장'으로까지 불리울 정도가 되었다. 더군다나 한참 자랄때다보니, 뱃속에 있던 거지의 개체수는 급속도로 증가하고, 이는 오전과 오후, 그리고 저녁시간때 매점에 출근을 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걸로는 뭔가가 부족했다. 오전 7시부터 밤 10시까지 학교에서 자율학습을 한다거나, 동아리실에서 이런저런 활동을 하는데 필요한 에너지원을 보충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학교 매점은 7시 이후에도 계속 영업을 하지만, 그 이후에는 고작 과자밖에 팔지 않는다. 최소한 햄버거나 피자조각정도 되어야 제대로된 칼로리 섭취가 가능한데, 햄버거는 7시쯤 되면 매진이고, 피자조각 역시 마찬가지가 되어버린다. 라면은 7시 이후에는 영업을 안하고.
...결국 그때 찾은 대체품은 컵라면이었다. 그때 매점에서는 800원이라는 폭리로 컵라면을 팔고 있었기 때문에, 돈을 아끼고자 한 우리들은 용감하게 바깥에서 500원에 육개장을 공수해오는 방법을 애용하곤 했다. 뜨거운물은 학교에서도 있었으니까, 구태여 위험을 무릅쓰고 오랜시간 바깥에서 라면을 먹지 않아도 되었다. 컵라면을 가지고 와서, 뜨거운물을 받은 뒤에 학교 어느 한구석에 짱박혀서 먹는 라면의 맛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3.
아무래도 이런 컵라면 휴대가 일상화가 되어가다보니, 고 2가 되자 컵라면을 먹는건 너무나도 익숙한 일이 되었다. 가끔씩 돈이 부족하거나, 밥을 기다리기 귀찮을때면 컵라면을 꺼내서 먹는게 너무나도 당연했다. 물론 그래봐야 저녁때만 컵라면 신세를 졌기 때문에, 라면의 장기복용으로 인한 속을 버린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아마 내 후배 Y군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컵라면이 등장하는건 이맘때의 일일것이다.
동아리 공채 9기를 받을때, 여학생들은 (일단 외모가 출중하고)단 4명이라는 이유로 전원 합격을 시켰지만, 남정네들은 20명 넘게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철저하게 정리해고를 하기로 우리 8기 동기들이 합심을 했었다. (여학생 한명을 뺀) 세명의 동기생이 꼭꼭 뭉쳐서, 이들 9기들에게 온갖 테스트 - 고소공포증, 발음, 체력, 기본소양 - 를 했다.
그 가운데 후배들이 치를 떨면서 가장 싫어했던 난관은, (교통사고로 목을 다쳤던)내가 맏았던 면접이었다. 무슨 입사면접처럼 엄청 까다롭게 봤는데, 공부할 마음이 없으면 탈락. 술담배를 즐겨도 탈락. 맨날 공부만 해도 탈락이요, 무능해도 탈락, 싹수가 없어도 탈락이었다. 단순히 그뿐이었으랴, 무려 세번이나 면접을 봤으며 그 가운데 한차례만 실수해도 탈락이었고, 아무런 이유 없이 면접에 불참해도 탈락이었다. 오히러 죽어라 애들을 학교 뒤편에서 굴리던 내 동기 K군이 더 착하다는 느낌을 가질 정도로, 그런 속칭 '재수없는' 이미지는 거의 1년동안 유지가 되었고, 그 뒤에는 전설이 되어버린거 같다.
그때, Y군은 저녁때 나와 면접을 하기로 했었다. 그것도 정확히 오후 6시 20분에 말이다. 20분의 여유가 있으니, 밥을 먹고 와도 되겠다는 생각을 한 Y군은, 매점에서 밥을 먹고 왔는데 너무나도 사람이 많았던 탓일까, 다 먹고 허겁지겁 동아리방으로 올라왔을때의 시간은 6시 30분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어디에서 가져왔는지 짐작할수 없는 단무지와, 분명 땡땡이치고 바깥에서 사들고왔을 '특식' 왕뚜껑을 막 열고 있던 나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Y군은 갑자기 내 앞에서 싹싹 비는것이다. 제발 부탁이니까, 이번 한번만 용서해 달라고. 밥 안먹고 기다릴줄은 상상못하고 있었다고 말이다. 사실은 가벼운 분위기를 이끌어내려고 면접하면서 컵라면을 먹을 생각이었는데, 요놈이 약간 늦는 바람에 먼저 컵라면을 먹으려 했던것인데, 저놈은 내가 식사시간을 놓치고선 컵라면으로 때우는줄 알았던 모양이다. 거의 울상을 하고 내 앞에서 싹싹 비는 모습을 보고, 나는 황당해서 라면을 먹을수가 없었다.
"...Y군. 라면좀 먹을래?"
"네."
Y군은 라면을 먹고선 무사히 면접을 통과했다. 그것이 모든 면접 내용의 총 합이었다.
이게 바로 9기가 졸업한 이후, 가끔씩 8기와 9기가 술자리에서 만담을 늘어놓을때 나오는 '컵라면 공채'의 전설이다.(웃음)
4.
군에 들어와서, 가장 기억에 남는 컵라면은, 뭐니뭐니해도 훈련소때 먹던 바로 그 컵라면이다.
어느 비오던 저녁, 갑자기 조교들이 사병 식당으로 가라고 하던 그때. 단 이주일만에 컵라면에 대한 욕구가 끓어오른 우리들은 그렇게 좋을수가 없었다. 우리는 한손에 육개장을, 한손에 지금은 없어진 쌀국수를 들고선 식당으로 가서 뜨거운 물을 받고,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이 얼마나 기대되고, 행복했었는지를 지금은 감히 상상할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것에 만족하지 못한 우리는, 용감하게도 컵라면 하나를 빼돌리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훈련소 내무반으로 가져오는것까지 성공하기에 이른다. 거기다가 때는 한겨울. 당연히 뜨거운물을 주는게 원리원칙이다. 그 일당들은 불침번을 서면서, 뜨거운물을 받은 컵라면을 먹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뒤처리는 완벽했다. 내가 훈련소를 나가기 전까지, 그 당사자들 빼고 누구도 그 사실을 몰랐으니까.
아니, 딱 한사람, 당사자들 빼고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사람이 하나 있었다. 지금은 전역한 유조교인데, 이런저런 정황을 봤을때, 그 사람은 분명 그 일당들이 라면 먹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우리가 퇴소하는 그날까지 누구한테도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아마 그 일당중 한명이 유조교의 친구였기 때문일까, 라는 생각을 해보지만, 그 친구가 흡연으로 적발되어 고생한걸 생각하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거 같다. 하지만 그게 뭔지는 병장 달기 직전인 지금도 전혀 짐작할수가 없다.
고등학교때 후배에게 권한 컵라면, 그리고 훈련소때 비내리는 겨울날 먹었던 컵라면의 맛이야 말로 내게 잊을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그리고 그 추억의 연장선이기 때문일까, 그 뒤로, 내가 컵라면을 먹은건 열손가락 안에 꼽는 일이 되버렸다. 왠지 모르게 군대 안에서 먹는 컵라면은 맛이 없는걸로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컵라면 보급이 나오면, 내 컵라면은 건빵과 교환되기 일쑤였고, 그나마 한두개 남은 컵라면은 철야근무 할때 뽀글이 대용으로 소모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오늘 밤에 옛날일을 되새기면서, 후임들이랑 같이 컵라면 한번 먹어보는걸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비록 그때의 맛을 따라할수는 없겠지만,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는것처럼, 옛날의 행복을 다시 떠올린다는건 꽤 기분좋은 일이니까.(웃음)
병장 김동환 (2006/04/27 12:46:42)
저에게 '고등학교 + 컵라면'이라는 수식을 풀이하라면
저는 너무다도 당연하게 '장염'이라는 답을 달겠어요.
축복받으셨군요.
상병 이영준 (2006/04/27 14:36:47)
고등학교 저녁때 밥 먹기가 싫어질 때면 컵라면 하나면 성대한 만찬이 되었어요.
아무래도 친구들과 라면 한개를 나눠먹어서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드네요.
근데, 이제 쌀국수 안나오는 거에요? 저 그거 되게 좋아하는데...
병장 김영서 (2006/04/27 15:20:27)
면발이..땡겨요...흑흑
병장 노지훈 (2006/04/28 03:28:40)
라면은 역시 끓여 먹어야... 컵라면은 설거지하기 귀찮을 때만
상병 채인영 (2006/04/28 06:47:00)
훈련소에서 야간행군끝나고 먹었던 라면이 생각나네요.
어찌나 맛있던지.. 쥐도새도 모르게 헤치워버렸던..
병장 이재승 (2006/04/28 10:08:35)
어래?? 우리는 나와요 쌀국수...
상병 조용준 (2006/04/28 12:14:22)
저희는 쌀국수 안나오는 대신, 컵라면의 양이 늘어버렸죠. 동네마다 사정이 약간씩 다른듯.
(...사정 아는곳은 거의 다 쌀국수가 안나온다는. (땀))
상병 송희석 (2006/04/28 12:27:55)
영준/ 영준님같은 경우는 소속 부대에서 1종계원을 잡아 족치셔야 합니다.
병장 조상욱 (2006/04/28 12:46:43)
맞습니다. 조금 매콤해져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었지만,
이제는 적응이 되어서 밥 말아먹기 딱 좋은 얼큰한 쌀국수 님이 나오신답니다. (웃음)
상병 박진욱 (2006/04/28 14:47:29)
소속 부대 1종 계원을 잡아 족치셔야 합니다.
증식에 관해 위쪽에서 내려온 지침서라도 보여달라고 하시면 아마 1종 계원 꽤나 땀 흘릴겁니다.
상병 조용준 (2006/04/28 15:11:46)
아하하... 저희는 문서가 나왔어요. 군 특성상 그런거 회전은 엄청 빠르다는.(...)
상병 송희석 (2006/04/28 15:30:42)
용준/ 그정도 문서쯤은 위조할수 있는 기본능력은 다들 갖추고있답니다.
병장 주영준 (2006/04/28 15:41:35)
어라. 제가 개인급여품 단에서 받아 대대로 나누는 업무(도) 하는데, 타군은 모르겠는데 옹군은 작년 어느땐가 문서 나와서 '비선호 품목인 쌀국수 없애고, 컵라면 지급량 1개/월 추가' 어쩌고 하는 문서 받은 기억이.
상병 송희석 (2006/04/28 17:19:36)
영준/ 옹군은 그렇군요. 아무래도 옹군쪽은 민우님이 빠삭하게 알고 있을텐데,
지상군쪽은 제가 가장 잘 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웃음)
상병 조용준 (2006/04/28 17:37:58)
영준,희석 // 저도 옹군입니다(웃음). 아마 전자문서로 올라왔죠. 영준님은 아마 저~ 위쪽에 계신듯 하고, 저는 말단에서 (그것도 혼자서 사무실을 지키며)일하는 사람인지라.
그 문서 올라온지 한달정도 지나자, 쌀국수는 엄청난 프리미엄 - 예컨데 쌀국수 하나에 컵라면 두개 - 가 붙었죠. 뭐 지금은 쌀국수 자체가 씨가 말라서리.
상병 송희석 (2006/04/28 18:41:08)
용준/ 솔직히 말하면 요즘 증식에 대한 가치가 과연 얼마만큼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 든답니다.
요즘같이 px 혹은 bx에서 라면을 손쉽게 살수 있는데 말이죠.
참고로 요즘 저희부대는 단백질합성물질로 인해서 우유 하나가 컵라면 2개 정도 프리미엄이 붙는답니다.
상병 이남혁 (2006/04/28 23:36:38)
건빵 = 컵라면
쌀국수 = 컵라면 2개
우유 = 컵라면 2개
컵라면이 군대에서는 화폐대용이군요(웃음)
병장 이승환 (2006/04/29 05:41:15)
저의 첫 컵라면은 "짜장범벅" 이었습니다.
초등 1학년땐가.. 수영배우러 다녔는데
수영이 끝나면 항상 동생이랑 짜장범벅 한사발을 때리곤 했었죠
한동안 안나오는듯 하다가 몇년 전부터 다시 나오더군요~
상병 정창호 (2006/04/30 16:08:27)
푸훗, 재미있게 읽었어요.
어쩌면 글을 이렇게 맛갈나게 쓰시는지.
저도 라면을 상당히 좋아한답니다. 하하.
아참, 저희도 쌀국수가 아직 나와요(웃음)
병장 정치훈 (2006/05/01 06:11:46)
전 자대 배치 이후 1주일에 컵라면 4개 이상씩은 꼬박꼬박 먹은 것 같네요. 한창 먹을때는 하루에 두개씩.. 교대근무 때문에 어쩔수가 없어요. 입대 전에도 집에서 폐인생활 할 때 컵라면 자주 먹었고..
병장 박진우 (2006/05/01 10:23:15)
승환//짜장범벅~!
요즘에 새로 나와요. 으하하. 그맛이란 여전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