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케이션에 관한 네 가지 이야기 
 
 
 
 
(산만하기 짝이 없는)커뮤니케이션에 관한 네 가지 이야기




1. '거시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대부분의 사람은 들을 일 없을법한 수업에서 이론을 소개하면서 드는 예가 있는데(누구의 이론인지는 모르겠다), 그것은 바로 폭력물에 관한 것이다. 폭력물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으로는 '친구'를 둘러싼 논란이 잘 보여주듯 폭력을 미화하고 모방심리를 불러 일으켜 범죄의 원인이 된다는 주장, 그리고 조폭 영화 유행에서 나타나듯 상업적인 목적에서 자극적인 소재를 끌어다 써 대중문화를 저급하게 획일화시킨다는 주장도 생각해 볼 수 있다(이 점에 대해서는 조폭 영화보다 무작정 총질하는 비현실적인 뮤직비디오들이 진짜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통념에 의거할 때 폭력물은 건전한 사회 분위기 조성을 위해 유해한 것 혹은 규제되어야 할 것으로 규정되곤 한다. 그래서 경관을 살해한 청소년이 영감을 받았다는 곡의 주인공인 갱스터 랩퍼 투팍에 대해 현직 미국 부통령은 공개적인 비난을 퍼부었는가 하면, 아이스 티의 메탈 프로젝트인 '바디 카운트'의 도발적인 곡 '캅 킬러'는 결국 판매금지 결정이 내려지기도 했다(정작 곡 자체는 평범하다). 물론 한국에서도 몇년전 DJ DOC의 '포조리'라는 곡이 비슷한 논란을 불러 일으킨 적이 있다. 

그런가 하면 폭력물이 이런 일반적 통념과는 정반대의 효과를 일으킨다는 주장도 있다. 이 주장에 의하면 폭력물의 기본적 세계관은 무력한 개인과 이에 대립하는 비정한 사회이고, 개인은 타인과 사회 구조와 제도를 신뢰해서는 안 된다. 악의 구조는 너무도 거대하고 자칫 방심했다가는 순식간에 목숨을 빼앗길 수 있는 것이 이 폭력의 세계다. 작품 내에서 폭력의 수위가 높아질수록 개인의 무기력함은 더욱 부각되고, 결국에는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정의가 승리하지만 작품을 대하는 사람들은 그 승리가 결국 그렇지 않은 현실의 소망을 담은 판타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오직 현실적인 것은 각종 위험이 도사리는 냉혹한 사회와 그 앞에서 너무도 나약한 개인이다. 그래서 이 약육강식의 무서운 사회에서 개인을 보호해 줄 강력한 '힘'이 필요하다. 악의 구조에 대항할 수 있는 선량한 힘, 현실에 존재하는 유일한 선량한 힘인 공적인 힘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폭력물이 일으키는 효과는 대중으로부터 공공의 힘에 대한 동의와 복종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2.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은 어떻게 1848년이나 1871년의 경우와 달리 그 체제를 비교적 오랫동안 지속시킬 수 있었을까? 여러 가지 이유를 댈 수 있지만, 큰 차이점으로 1789년에는 7월 14일 바스티유 함락 이후 고작 한 달도 안 되는 기간 안에 빠리나 도시뿐만 아니라 농촌에서도 구체제가 급속히 붕괴되었고 혁명 세력이 권력을 장악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7월 말의 이른바 '대공포le Grande Peur'라 불리는 농촌에서의 상황을 살펴보자.  

"당시 도시에서는 혁명 세력이 권력을 장악했지만 농민들이 요구하는 사항은 아무것도 충족되지 않았다. 봉건체제는 유지되고 있었으며 기근과 실업으로 말미암아 도적떼들이 출몰하는 것이 농촌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귀족계급이 혁명에 맞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문이 지방의 분위기를  더욱 악화시켰다. 반혁명의 내란을 일으키고 외국군이 쳐들어온다는 과장되고 모호한 소문은 도적떼가 쳐들어온다는 공포와 겹쳐져 농촌 사회에 대공포의 시기, 공황의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 공포는 사실 근거없는 것이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 소문의 사실 여부가 아니었다. 공포가 근거없는 것으로 판명났지만 농민들은 가상의 도적떼에 대한 무장을 해제하는 대신 영주의 성으로 화살을 돌려 성을 불태우고 영주를 목매달았다. 대공포의 분위기가 농촌봉기를 낳았고 그 봉기는 도시에서와 마찬가지로 봉건체제를 무너뜨렸다." A.Soboul - '프랑스 혁명' 

국내귀족들이 내란을 부추기고 망명귀족들이 외국 왕실과 결탁해 쳐들어온다는 식의 귀족계급 음모설은 그 실체가 모호한 것이었지만 1789년 이후 수년간 그 위력을 발휘했다. 중요한 것은 적에 대한 공포 그 자체인 것이지 소문의 진위 여부가 아니었다. 민병대와 농촌 봉기와 귀족에 대한 소요의 중심에는 항상 음모설이 있었고, 그것은 매번 혁명 체제가 위태롭거나 지지부진한 상황을 일거에 유리한 국면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대중 동원을 가능하게 했다. 



3.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우리 안의 파시즘'등의 책으로 알려진 임지현이라는 역사학자가 있다. 그는 영토나 교과서 문제를 제기하는 일본의 극우 세력이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저러한 사안에 대한 한국의 민족주의적 대응이 한 이유가 된다고 본다. 강력한 민족주의적인 대응이 다시 일본내 극우 세력을 결집시키고 지속적인 존립 근거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 반대도 가능하다. 다른 말로 하면 '적대적 공생' 관계인 것이다.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고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적이 강력할수록 좋다. 겉으로는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동북공정과 고구려사 문제에 대해서도 비슷하다. 과연 순수한 '우리' 또는 '남'의 역사라는 것이 가능한가? 만주지방을 둘러싼 고구려와 발해의 경우라면 문제는 더욱 복잡하다.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부족 구성이 다르고, 정부가 산골 구석까지 일일이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유목 생활을 하거나 농사를 지으며 각자의 방언을 사용하는 그 다양한 집단을 하나의 '국민'혹은 그 유사한 근대 이후에야 발명된 기준에 의거해 동일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언어에 대해서라면 지금도 제주도 방언과 일본말은 똑같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일 뿐인데 험한 산지로 분리되어 있던 과거의 사람들이 다른 말을 쓰는 사람들에 대해 '우리'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내셔널리즘에 내셔널리즘으로 대응하는 것은 결코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해결책으로는 민족사적 관점에서 변경사border history적 관점으로의 시각 전환을 주장하지만 이 비주류 역사학자의 의견에 대해 동의하든 말든 그건 각자의 몫이다.



4. 최근 국경일에 공영방송에서 내보낸 한 다큐에 관한 논란이 있었다. 주요 신문들은 사설을 통해 그것을 비판했고 이에 대해 담당 PD는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방송 시기가 부적절했다'는 의견을 밝혔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정말로 부적절한 것이었을까. 글쎄 잘 모르겠다. 울타리 안 도서관에 있던 에드가 스노의 책 기증자도 저만치 높으신 분이었는데.




 

  
 
 
 
병장 박형주 (2006/06/12 01:33:05)

이게 무슨 커뮤니케이션 이야기냐고 하신다면 뭐라 할 말은 없습니다.    
 
 
 병장 노지훈 (2006/06/12 03:51:00)

와 칼럼이닷~ 
첫 문단과 둘째 문단의 폭력물은 같은 것일까요?    
 
 
상병 송희석 (2006/06/12 05:02:07)

4번이 재밌네요. 으흐흐흐.    
 
 
병장 박형주 (2006/06/12 07:12:07)

지훈/글쎄 그것이 제가 저 수업을 안 들어서 멋대로 구성한 거긴 한데 어쨌든 쓸 때는 폭력물 일반을 가정하고 썼어요.    
 
 
병장 박형주 (2006/06/12 13:25:58)

희석/저 네줄을 쓰고자 머리 굴리면서 갖가지 쓸데없는 이야기를 가져다 붙인 것이지요-    
 
 
병장 김희곤 (2006/06/12 15:09:20)

흐음. 도대체 그 다큐가 무엇이었는지 궁금하군요. 저는 그날 텔레비전을 1분도 보지 못한터라.    
 
 
 병장 김동환 (2006/06/13 07:41:14)

물론 내셔널리즘에 내셔널리즘으로 대항하는건 별로 모양새도 좋지 않고 근본적인 
해결책도 아니지만 작금의 한중일은 각각 조금씩 다른형태의 내셔널리즘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특히 가장 진척되고 있는 중국의 동북공정 시리즈는 보다 현실에 초점을 맞춘 대응이 요구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것과는 별개로. 
저도 사설보고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게 정말 부적절한 것이었을까. 하는.    
 
 
병장 엄보운 (2006/06/15 10:05:00)

형주씨의 이런 글, 너무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