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한 글이었다. 손에 닿을 듯 가까이 느껴지다가도 수평선 너머에서 손짓하듯 어른어른했다. 치열하게 읽었으되 결실은 적었다. 내무실 책장 한 켠에 꽂혀있는 것을 지나가듯 가벼이 뽑아 읽을 글이 아니었다. 판타지 소설을 읽으며 나는 소드마스터나 대마법사가 될 수 있었지만 ‘칼의 노래’를 읽으며 나는 이순신이 될 수 없었다. 대신 나는 밧줄을 당기던 포로가 되어 바위에 깔려 으스러졌고, 격군이 되어 내장이 뒤틀려 갑판에 쓰러져 먹은 것을 토해 냈다. 토사물에서 썩은내가 솟아 올랐다. 


이순신의 생애는 언제나 전투와 전쟁의 연장선에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함경도에서 여진족과 대치할 때부터, 노량 앞바다에서 철수하는 적의 주력을 맞아 싸우다 전사할 때까지, 그의 삶은 전쟁과 분리되지 않았다. 전쟁은 삶의 한 켠에 깊숙히 함몰되어 있었다. 그것은 비단 그 만의 문제는 아니리라. 임진왜란 기간에 걸쳐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 백성과 군을 가리지 않고 그 모두는 전쟁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살아야’ 했다. 전쟁은 매일 밥을 먹는 것처럼 일상적이었다. 그리고 무심코 죽었다. 죽음은 항상 삶의 근저에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그런 삶이 안정화 될 수가 없었다. 삶을 쫓은 자도 죽었고 죽음을 쫓은 자도 죽었다. 밀려오는 섬의 꽃향기는 송장 썩는 고린내와 포개져 뒤엉켰다.

그렇기에 어수선했다. 삶은 삶으로써 그리고 죽음은 죽음으로써 확연히 구분되어져야 했다. 실체와 헛것은 확연히 구분되어져야 했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 전쟁이라는 이계가 현재로 내포되면서 실체와 헛것은 뒤엉켰다. 천명이 넘는 길삼봉이 나타났으나 그 속에 길삼봉은 한 명도 없었고, 베어진 무수한 머리와 코에서 적과 아군은 구분되지 못했다. ‘임금을 기만하고 조정을 능멸한 대역 죄인’과 ‘나라 위해 몸을 잊고 나아가는 삼도수군통제사’는 대극이었으되 하나였다. 
명량에서의 승리 이후 내려진 ‘면사’라는 두 글자와 그 모순됨에 이순신은 무엇을 생각했을 것인가. 아마 그는 칼을 갈고 있었을 것이다. 언젠가 이 뒤엉킴을 끊어 내기 위하여. 

차고 푸른빛이 도는 어스름한 바다 너머로 이순신의 실루엣이 비쳤다. 나는 이순신이 되고 싶었다. 그를 붙잡고 싶었다. 나는 울부짖었다. 백성들의 무수한 울음들이 뒤섞여 통곡 소리가 되었다. 이순신은 이러한 울음에서 저마다의 개별적인 울음을 인식하였으나, 나는 자신의 울음 조차 그 정체를 인지할 수 없었다. 김훈은 당대의 어떠한 가치도 긍정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절박한 오류들과 더불어 혼자서 살 것이라고 했다. 나는 무심히 긍정했다. 사방에서 부풀어오른 가치와 담론들이 꾸역꾸역 넘쳐났다. 그것들은 어디에서도 존재했다. 책을 읽어도, TV를 보아도, 신문을 보아도 그것들은 틈새 사이사이에서 고개를 디밀었다. 밥을 먹듯이 그저 먹었다. 나는 그냥 살았다. 나의 울부짖음은 끝없이 무의미 했다. 이순신은 끊임없이 실체와 헛것 사이에서 갈등했다. 그는 모든 것이 눈에 보여지길 원했다. 그는 세상이 베어지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 무의미가 모두 베여 사라진 세상에서 그는 비로소 죽음을 갈구하려 했다. 



이순신은 칼이었으되 나는 엉킴이었다. 무의미를 정교하게 끼워 맞추어 만들어진 구조물이었다. 나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허구인지 모른다.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수면에 비친 달을 보며 진실의 달 인양 수월을 향해 소원을 바치고 있다. 그의 칼은 징징거리며 울지만 나에게는 칼이 없다. 한번도 나의 세계를 벗어 나려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나의 세계 바깥에 무언가 다른 세계가 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고인 물은 썪는다. 정체는 부패를 부른다. 그런 이유일 것이다. 나의 전신에서, 세포 하나 하나에서, 내가 써낸 글귀 하나하나에서 - 썩는 내가 진동을 하는 것은. 


이순신은 세상을 베고자 했다. 침략국과 맺는 평화협정이라는 모순된 정치적 상황 하에 ‘평화’라는 이름의 무의미함을 베고자 했다. 실과 허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엉켜져 버린 세상을 베고자 했다. 그는 백성을 사랑했으되 베어야 할 때 그는 서슴지 않았다. 일자진과 학익진의 전환을 끊임없이 훈련하여 허를 실로 만들었다. 그의 칼은 단순하고 그리고 순결했다. 명과 일본의 조약을 기다려 싸움을 회피하는 전략적 이득 대신 그는 나아가 스스로의 길을 관철시켰다. 그리고 뜻한대로 그의 칼은 노량 앞바다를 적의 피로 깊이 물들였다. 그는 총탄에 죽었으되 그것은 ‘적군의 칼’에 의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나아갔고, 스스로의 죽음을 완성하였다.


부끄럽지만 나 또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칼의 노래’는 나에게 있어서는 거울이었다. 스스로의 추함과 어리석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매끈한 동경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순신이 아니고 이순신은 내가 아니듯이 내가 그를 우러를지라도 그의 삶의 목표를 답습할 수는 없다. 방향성 없는 가치들이 가득 매운 세계에서 나는 겨냥조차 되지 않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나아감은 절대적으로 나 개인의 몫이겠지.
바라건데 나에게도 한 자루 칼이 허락된다면, 그 칼은 뒤엉킴을 끊어 낼 수 있을 만큼 순결해야 할 것이다. 나는 세상을 베고자 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나를 베고 싶다. 내 안의 모든 무의미함과 헛것 그리고 무가치함의 뒤엉킴들을 베어내고 싶다. 


나아가 한 가지 작은 욕심이 있다면 다음에 다시 이 책을 펼쳤을 때 - 그 순간 만큼은 -- 나는 이순신이고 싶다. 방향성 없는 세상의 모든 가치를 베어 자신의 모든 가치 마저 증발되어 버린 완벽한 죽음을 노래했던 그 이순신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