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H.I.S - Scene Four  
상병 이석재   2009-01-11 09:58:15, 조회: 93, 추천:0 

Scene Four – 희망과 절망속에서

이번 네번째 세계사 시간은. 이른바 ‘헬레니즘’시대와 로마 건국 초기를 다루고자 합니다. 물론 2개를 엮어버리면 양은 무지하게 늘어나겠지만 말이죠.


일단. 펠레폰네소스 전쟁으로 인해 점차 그리스의 폴리스 연합체가 몰락하기 시작한 것은 보셨을겁니다. 물론 지중해 전역에 그리스의 식민 도시들(남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이 있었지만 그들은 말이 식민도시였지. 실제로는 자기네들끼리 먹고 사는 자치권을 가진 도시였고. 본토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수수방관 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런 무주공산인 그리스 세계에, 마케도니아가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마케도니아는 남진하여 그리스 연합체를 굴복시킨후 자신에게 복속시키죠.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아테네나 군국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스파르타는 모두 일단 ‘그리스’인임을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쪽에서 내려온 이민족을 싫어했지만 전쟁에서 졌으니 어쩔 수 있나요. 그런 틈을 타 마케도니아는 간크게 페르시아를 공략할 준비를 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알렉산더의 아버지인 필리포스 2세가 먼저 준비하기 시작했지만 알렉산더가 그 왕위를 이어받은 이후(주1)에 그 정벌준비는 더욱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지요.


하여튼, 그들은 그리스인들을 이끌고 머나먼 페르시아 원정을 시작합니다. 물론 페르시아와의 병력 비율에서는 그리스인들이 한참 쳐졌지만, 그들은 ‘방진’이라는 전략적인 우세 상황을 점하고 있었습니다(주2) 이수스 전투,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알렉산더는 먼저 우두머리를 노리는 전략적인 선택과 마케도니아 기병대를 통한 우회기동을 통해 페르시아군을 적절히 쌈싸먹었고 어느새엔가 페르시아의 수도인 페르페폴리스마저도 점령해버린 것입니다.


페르시아의 왕은 결국 자신의 부하에 의해서 죽어버렸고, 알렉산더는 계속 동진하여 이란, 파키스탄, 인도마저 정복하여 진정한 ‘세계대제국’을 이룩하게 됩니다. 그 제국에서 알렉산더는 그리스인들만의 나라가 아닌, 전 아시아인들과 그리스인들이 결합하여 완벽한 나라를 만들어내려고 했었지요. 하지만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이 아시아인들에 비해 우위라는 생각을 언제나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인들과 아시아인들을 서로 결합시키려는 알렉산더의 정책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것이지요.(주3)


알렉산더가 더욱 오래 살았다면 세계는 또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알렉산더 본인 자신이 자신을 신으로 생각해버리고(그리스인들은 신과 인간은 별개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이 신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점차 정신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하여,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가 죽자 그 휘하의 장수들은 알렉산더의 아들은 무시한채 그 유산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싸웠고. 결국 마케도니아, 트라키아, 시리아, 이집트의 4개 국가로 갈기갈기 찢어졌습니다.


그 4개국은 서로 사이가 무지 안좋았기 때문에, 특히 시리아와 이집트는 서로 싸우지못해 안달이여서 서로가 서로의 배후국을 지원하기도 했고, 서로 공격하기도 했죠. 결국 이 두나라는 서로 싸우다가 힘을 소진하여 로마가 동지중해로 진출하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하여튼 이 헬레니즘 국가들은 사실 알렉산더 이후에는 서로 합쳐지려는 것을 거부하긴 했지만 그리스와 아시아에 걸친 양대 제국을 제일 먼저 창설했다는 점에서, 지금 세계에도 이루어내기 힘든 양 민족간의 융합을 추진했다는 점에서 가장 인상깊은 문화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렇게 그리스가 새로운 문화를 양산해가고 있을 무렵. 장화같이 생긴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로마세력이 한창 기세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신화상으로는 로마의 건국세력은 트로이 전쟁에서 도망쳐 나온 유민들이 흘러흘러 로마에 정착하였다. 라는 얘기가 있지만, 그거 말고는 ‘늑대젖을 먹고 자란 아이가 로마를 건국했다’(주4)뭐 이런걸 믿는것도 나쁘지는 않겠군요.


로마는 제일 처음 왕정으로 시작했습니다. 국가가 발전하기 가장 쉬운 형태는 예나 지금이나 중앙집권체제이기 때문이지요. 물론 장점과 같이 단점도 더 많이 수반되는 정치형태입니다만은 급격한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중앙집권과 독재가 필요한 부분도 없잖아 있습니다. 그렇게 왕정으로 성장했지만, 시민들의 민권의식 또한 점차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대시절에 그런 민권의식이 있다는 것 자체가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로마인들은 다르긴 달랐나봅니다. 그들은 자신의 권리를 신장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왕정을 타파하여 공화정체를 건립했습니다. 


그러나, 왕정은 타파했음에도 귀족세력과 평민세력간의 다툼은 여전했고, 평민세력은 계속적인 시위와 반란을 통해 자신의 권리를 인정받길 요구했습니다. 결국 여러법들로 인해 그들의 민권은 신장되었고, 나중에는 ‘호민관’이란 직책을 통해 귀족들의 입법체제에 끼어들 수 있는 권한까지 가지게 됩니다. 그 뒤로는 결국 법적으로 평민과 귀족은 동일하다라는 것까지 받아냄으로서 ‘명목상’으로는 평등을 이루어 냅니다(주5).


그렇게 내부적으로 굳건하게 다져진 로마는, 자신의 한때 주인이였고 주위의 강력한 국가였던 에리트레아까지 정복하고, 점차 남진하여 이탈리아 반도에 있던 ‘라틴족’이라고 불리웠던 여러 종족들을 자신의 편으로 편입시키기 시작합니다. ‘정복’이라고 하지 않은 이유는, 이때 로마인들은 주위국가들을 ‘자치적인 도시’로 구성했던 것이지요. 로마에 반항하지 않는 이상에야 도시 각자가 자신들의 정치를 해나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치적인 문제가 로마의 세력이 점차 늘어나게 되자 위험성을 내포하게 되었고(주6) 결국 로마는 공화정체제를 계속 지켜야 하는 지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던 것입니다.


로마는 그렇게 ‘표면적’으로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해 냈습니다. 물론 아직 ‘라틴족’이라는 전체적인 틀 아래 로마인, 그리스인, 기타 다른 민족들이 공존하는 연합구성체 정도의 국가였지만 이탈리아에 통일국가가 등장했다는 것은 주위국가들에게는 위험한 상황이였던 것이지요. 역사를 더듬어보면 한 국가가 주위에 다른 국가가 들어서는 것 만큼은 철저하게 반대하고는 했습니다. 이탈리아와 독일의 경우가 그렇지요. 특히 로마가 강력해지는걸 원치 않았던 국가는 페니키아인들의 나라인 카르타고와, 동쪽 마케도니아 였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그 견제의 결과물은 ‘포에니 전쟁’으로서, 로마와 카르타고간의 국운을 건 전쟁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포에니 전쟁에 대한 부분은 다음시간에.. 우훗훗



주1-암살: 사실, 필리포스 2세가 암살당했다는 소문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알렉산더가 어머니를 괴롭히는 아버지를 싫어하여 암살했다는 설도 있지만 역시 옛날일이기 때문에 사실을 확인할 방도가 없군요.


주2-방진: 고슴도치 전법이라고, 편하게 부르기도 합니다. 10X10정도의 인원들이 선다음, 맨 앞줄서부터 뒷줄까지 창을 세워가는 겁니다. 그런 상황으로 돌진! 보병이 기병에게 약하다는 기본적인 전략도 무시하고, 강력한 돌진력을 가지고 있지만 단점은 우회기동 등 기동력이 약하고 측면공격을 당하면 완전히 망하는 진입니다.


주3-결합: 이 결합이라는 문제는 아시아인과 그리스인들간의 결혼으로 시작됬습니다. 알렉산더 자신도 아시아인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던 것이지요. 나중에 인도지역에서는 ‘그리스’적인 색체, 즉 신체의 완벽한 묘사를 이용한 불상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그리스의 문화와 인도의 문화가 결합된 것이지요. 이런 것을 ‘헬레니즘’ 문화라고 합니다.


주4-늑대: 로마의 건국시조인 로물루스가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 라는 신화에서 나온 내용입니다. 그래서 로마시의 상징은 2명의 아이들인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늑대의 젖을 먹고 있는 그림입니다. 축구를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AS로마라는 팀도 아실텐데, 그 팀의 상징에도 역시 늑대젖을 먹고 있는 아기들이 등장합니다. 이렇듯 각 도시들에는 도시를 상징하는 물건들이 있는데, 이것들에 대해서 나중에 한번 다룰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군요.


주5-명목상: 하지만, 아직 로마에 노예제는 그대로 존속하고 있었고 노예들의 권리는 보장받지 못했기 때문에 명목상이라고 표기했습니다. 평등적인 국가가 등장하려면 근대가 넘어가야 하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등장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긴 안타깝습니다만 그러면서 인류가 발전해나가는 초석을 다지는 것이겠지요.


주6-위험성: 특히, 그리스인들 같은 경우에는 자신이 다른 사람 휘하에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알렉산더시절에도 끊임없이 반마케도니아편에 서기 위해 노력했다. 결국 로마의 시대에도 그런 성질이 이어졌는데. 결국 반란이 일어나자 로마는 그때까지 지키던 ‘자치권 부여’라는 여유를 버리고 반란이 일어난 도시를 철저하게 파괴, 더 이상의 여유는 허락하지 않게 됩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6
13:39:11 

 

상병 이지훈 
  로마인 이야기를 3권까지 봤는데 그 내용도 어느정도 포함되는군요.(언젠간 전 권을 다 보고 싶은데 말이죠) 로마의 역사도 우여곡절이 많아서 참 흥미롭더군요 허허 석재님 덕분에 머리속에서 찬찬히 잘 정리된 것 같습니다. 다음편에 나올 포에니 전쟁 부분도 기대되요 

방진이라...재밌군요. 이것이 나중에 로마 중보병 전술의 시초가 되는 걸까요? 2009-01-12
09:00:50
  

 

일병 한강수 
  부지런히 써 주시는 덕분에 
계속 해서 열렬히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꾸준히 쓰시기 힘드실텐데 
감사합니다. 2009-01-12
09:31:42
  

 

병장 이동석 
  이영도의 폴라리스 랩소디에 나온 망치와 모루 전략이 알렉산더의 마케도니아군이 썼던 그 방법 아닌가요? 
가물가물 가물치라, 급 질문. 
마케도니아 기병대로 망치질해서 방진의 보병대로 몰아부치는 전략- 

따지고 보면 거창하게 민권이니 자치니-까지는 아니겠지만, 오히려 역사시대 초반으로 갈수록, 오히려 그 이전으로 갈때 더 평등했다가 역사가 진행되오며 점점 불평등해지는 과정을 거쳤다는 생각이 듭니다. 

확실한 사료는 없겠지만, 어째서 동양과 서양의 역사진행양태가 달랐는지는 궁금하기 그지없군요. 무슨 차이일까요. (아 체온이 떨어진다.) 2009-01-12
13:43:09
 

 

상병 이석재 
  상병 이지훈/ 그렇습니다. 로마의 방진 체제는 그리스의 그것을 따왔는데요. 로마는 더욱 발전시켜 방진에 들어가는 병사의 숫자를 줄여서 더욱 기동성이 원활하도록 설정하였습니다. 100명보다 50명이 왔다갔다 하는게 더욱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으니까요. 

일병 한강수/ 봐주시는 분이 있으니 이렇게 자주 쓰고 있습니다. 허허 

병장 이동석/ 그렇습니다. 알렉산더의 마케도니아군이 망치와 모루 전략의 시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보병대를 모루로, 경기병대를 망치로 삼아 후드린것이지요. 나중에 이 망치와 모루 전략의 완성본을 보여주는 사람이 나폴레옹입니다. 나중에 Scene 50쯤 가야 등장하실 분이지요. 낄낄 2009-01-12
13:58:51
  

 

상병 이석재 
  병장 이동석/ 역사 진행양태라, 글쎄요. 인간이란 존재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상력의 동물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실 인류의 발전을 한 인간의 조그마한 뇌로 모두다 성찰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이동하기 힘든 중앙의 양쪽에서 서로 지들끼리 좋다고 발전한게 지금처럼까지 흘러온게 아닐까요. 여전히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쩝쩝. 2009-01-12
22:23:27
  

 

상병 이지훈 
  동석, 석재// 

동석님과 석재님이 생각하시는 동서양 역사진행양태의 차이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예는 어떤 것인가요? 선뜻 떠오르지 않아서요. 2009-01-13
08:59:53
  

 

상병 이석재 
  상병 이지훈/ 흠, 중앙에 가로막혀 있는 여러 지리적인 방해물을 사이로 같은 시기에 동서양은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지요. 서양이 '개인주의'적으로서 여러 비스무리한 국가들이 치고박고 싸우는 동안에 동양은 '중국'이라는 가장 큰 거대국이 변화하면서 그 주위국가들도 그에 영향을 받고, 문화도 전수받고 그런식으로 성장해 왔으니까요. 그 덕분에 '여러 머리'가 '치고박고 싸우면서' 발전해간 서양과, '하나의 머리가' '지들끼리 치고박고 싸우면서' '끌고나간' 동양의 발전은 그 진행양태에 차이가 있지 않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물론 인도나 아프리카, 그쪽의 역사는 별개로 치고 말이죠. 2009-01-13
21:25:45
  

 

상병 이지훈 
  석재// 

오호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답변이었어요. 그나저나 동양과 서양의 역사가 진행양태에 있어서 차이가 있지만 전 세계로 볼 때, 그러니까 세계 역사로 뭉뚱그려 보는 것도 필요한 것 같은데 말이죠. 문명교류학 같은 것들이 이 필요성을 채워주기 위해 나오고 있지만 아직은 동양과 서양(그 구분조차 명확하지 않지만)역사가 서로 멀게만 느껴지네요. 어쩔 땐 참 가까운 것 같은데 말이죠 흐흐 2009-01-14
12:15:03
  

 

상병 이석재 
  상병 이지훈/ 그렇죠. 지금도 두 지역간의 문화 차이는 여전하고 나머지 지역또한 특수한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문명교류학은 커녕 '문명의 충돌'같은 이론이 자주 등장하는 것이겠지요. 다문화는 사람들의 다양성을 보장해주지만, 더불어 공통성은 점차 사라진다는 얘기니까요. 2009-01-15
08:2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