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H.I.S - Scene 8  
상병 이석재   2009-01-20 20:10:12, 조회: 53, 추천:0 

Scene 8– 노랑머리 


자, 이제 중국으로 떠났던 우리의 마음을 유럽으로 돌려봅시다. 로마가 멸망한 이후에 서로마지역은 여러 게르만민족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졌지만 동로마지역은 온전히 남아 유스티니아누스의 지도 아래 발전하게 되지요. 이번 8번째 장면은 이 비잔티움 제국부터 먼저 설명하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밀라노 칙령에서 기독교를 국가가 공인한 종교로 삼은 이래 비잔티움의 동로마제국 또한 기독교를 통한 종교적인 색채를 띄어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서로마와 다른 점은 이른바 ‘필리오퀘’라고 불리우는 단어 하나서부터(주1) 여러 종교적인 행동, 황제를 종교최고지도자로 일치시키느냐 아니면 왕과 교황은 다른 존재인가, 에서부터 궁극적으로는 우상을 숭배하는가 숭배하지 않는가(주2)의 문제까지 서쪽의 카톨릭과 동쪽의 그리스 정교는 같은 본류였지만 다른 가지가 되어버린 것이지요. 마치 동아시아의 어느나라처럼…


이렇듯 카톨릭이 점차 게르만족에게 전파되고 있는 사이, 비잔티움제국에서는 유스티니아누스가 나타나 로마제국의 복귀를 꿈굽니다. 그는 정벌군을 일으켜 동고트 왕국이 세운 동고트 왕국을 재정복하고, 반달족이 세운 반달왕국을 아프리카에서 정벌, 이탈리아, 아프리카, 그리고 스페인 남부를 재정복하게 됩니다. 이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를 최후의 로마황제라고 부르는 이유는 바로 이때문입니다. 유스티니아누스 이후 이탈리아를 회복하려는 시도는 가끔씩 있었지만 결국 실패하고 나중에 노르만족에게 이탈리아의 마지막 본거지인 바리까지 점령당하면서 이탈리아는 말 그대로 꿈으로 남게 되는 것이죠. 이탈리아 반도 자체가 정복사업으로 인해 피폐해지면서 사람들은 비잔틴이나 게르만이나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겁니다. 결국 오래 정복할 수는 없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유스티니아누스는 로마법 대전을 통해 법을 정비하였고 여러가지 문화사업을 통해 비잔틴인들이 수백년간 먹고 살 유산을 남겨주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사후 비잔틴제국의 영토는 점차 줄어들게 되지요.


그리스 정교의 비잔티움이 북쪽의 마자르족(주3)이나 동쪽의 사산조 페르시아와 싸우는 사이 서부에서는 프랑크 왕국이 점차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번에도 말했듯이 이 프랑크 왕국은 카톨릭을 받아들임으로서 피지배자들과 동화되려고 노력했고, 특히 자신들의 정복지를 교황에게 일부 떼어줌으로서 이른바 ‘교황령’의 시초가 되는 일을 해냈지요. 거기에 감동먹은 교황은 대뜸 사를마뉴 대제를 ‘로마 제국의 왕’으로 삼아버립니다. 교황이라는 신성에서 황제의 권위가 나왔다 하여(주4) 신성로마제국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프랑크 왕국을 신성로마제국이라고 한건 아니지만 후에 신성로마제국의 원형이 된 것이지요. 


이제 비잔티움은 뒤집어진겁니다. 어디서 굴러먹던 돌이 갑자기 나타나서는 로마제국의 황제를 참칭하다니! 로마제국의 황제는 자신들밖에 없거늘! 이런 어이없는 사실이 이러면서 신성로마를 규탄하려고 하지만 그게 될리가 있나요. 비잔티움은 주위에 쳐들어오는 이민족들을 막기에도 벅찼으니까요. 결국 그들은 신성로마를 승인해야만했습니다. 물론 그 자존심은 세서 단지 신성로마가 ‘바실레오스’ 즉 왕이라는 칭호가 사용 가능하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12사도와 동격인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보다는 한수 아래로 인식하게 만들긴 했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로마인이 아닌 황제가 된 최초의 시도로서, 앞으로 수많은 사례를 만들어내게 되는 그 시초가 된 것입니다.


프랑크 왕국은 교황령을 수립하는 것을 지원하여 교황이 영토를 통치하는 사례를 제공했으며,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하고 올라오는 이슬람 군대를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격파(주5) 카톨릭 유럽을 보호하는데 수훈을 세웠으며, 더욱이 사를마뉴의 가문 이름인 ‘카롤링거 르네상스’(주6)를 통해 라틴어를 프랑크 왕국 전역에 보급하고 고대의 책을 필사하여 보존했고 고딕양식을 발전시키며 그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그래도 아직은 비잔티움의 문화보다는 덜했지만 말이지요. 비잔티움의 문화는 그 당시 주위국가들중 아무도 따라올 자가 없었으며 성 소피아 성당이나 온갖 화려한 장식품들 등, 콘스탄티노플은 그 시대 최고의 부유한 도시였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물론 이 수많은 문화들이 성상파괴 운동이나, 후에 언급할 4차 십자군의 약탈 등으로 소실된 점은 안타까운 점이지만 말이지요. 그래도 아직은 비잔티움이죠?


이렇게 프랑크왕국과 비잔티움 제국은 중세 초기를 이끌어나가는 두 기둥으로서 활약해 왔습니다. 이때부터 고대는 끝났다고 볼 수 있으며 중세의 특징답게 이동권한이 없는 농노로 경작이 이루어지는 장원이나, 자급자족 체제, 종교에 기반한 정치등이 두드러진 특징으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 장원제와 봉건제는 계급사회를 지향하던 중세시대에 중요한 두 기둥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지요. 고대 말기의 라티푼디움에서부터 시작된 물결이였습니다. 하지만 이 두국가는 점차 나타나는 다원적인 물결에 휩쓸리게 됩니다. 특히 프랑크왕국에서 그 문제가 더욱 두드러졌는데 사를마뉴 대제 이후 왕국이 3개 국가로 갈기갈기 갈라진 것입니다. 이 국가들을 서프랑크, 중프랑크, 동프랑크라고 불렀는데 왜 나뉘어졌을까요? 제 첫번째 습작인 Side and Side를 유심히 보신 분이라면, 게르만족은 ‘살리카 법’이라는 계승법 아래 남자 아들이라면 유산을 똑같이 받는, 똑같이 받지 못하더라도 차등으로 받는 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둘째,셋째가 모두 유산을 받아야만 했던 것이지요. 사를마뉴도 역시 자신의 형이 일찍 죽어버렸기 때문에 그 유산을 모두 차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를마뉴의 아들은 셋이나 되었기 때문에 그 세명은 프랑크 왕국을 삼등분하여 받은 것이고, 그 아들들끼리 치고박고 싸우다가 결국 베르됭조약,메르센 조약으로 인해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의 원형이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후에 로마제국 황제의 위는 동프랑크 왕국을 번영시킨 오토대제에게 돌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뭐 하여튼 그건 나중의 일이고


비잔티움도 유스티니아누스의 발전 이후 점차 이민족, 페르시아, 이슬람의 공세를 받기 시작합니다. 러시아인들도 쳐들어오지요. 특히 이슬람이 문제여서 콘스탄티노플이 무려 3번에 걸친 공세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겨우 방어하긴 했지만 이집트, 중동등을 모두 잃어버리고 아나톨리아로 영토가 축소되기 되었던 것이지요. 물론 중동을 잃어버린건 여러 종교적인 문제(주7)도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결국 비잔티움은 그리스와 아나톨리아에 걸친, 방어하려면 양면을 다 상대해야 하고 그러자니 확장하긴 벅찬 그런 어정쩡한 제국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발칸반도도 역시 세르비아, 불가리아인들 등 비(非)그리스인들의 독립으로 인해 영토가 축소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어정쩡했음에도 1000년이상 가긴 했지만요. 로마제국 시기까지 합하면 2천년정도 되는 시기니까, 세계 최고(最古)의 제국이라고는 할 수 있겠군요.


이렇게 양 제국간의 역사를 살짝 살펴보았습니다. 프랑크 왕국은 중세의 특징인 자급자족 경제체제에 충성을 요구하는 봉건제 등을 탄생시킨 주역이라고 할 수 있고, 비잔티움은 카톨릭문화를 발전시켜 후에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발판이 되는 고대문화를 유지,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이들의 전성기가 지나간 후 유럽세계는 스페인의 이슬람, 프랑크왕국, 잉글랜드왕국, 신성로마제국,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국가, 헝가리, 폴란드, 비잔티움 등등으로 나뉘어 서로 치고박고 사랑하고 깨지고 하는 역사가 반복되는 것이지요. 카를 4세의 합스부르크 왕가, 프랑스의 나폴레옹 등 유럽을 통일하고자 하는 시도는 많았지만 더 이상 거대국가로 유럽이 통일되는 일은 없게 되었습니다. 아, 1940년대의 독일은 제외하도록 하지요. 나중에 20세기 후반에야 나타나는 유럽연합의 체계전까지, 앞으로의 유럽은 전쟁과 갈등의 역사가 될 테니까요. 다음 시간은 설을 지나고 나서 아프리카, 아메리카 등의 좀 마이너한 지역 역사를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잇힝



주1 필리오퀘 – 성부, 성자, 성령을 삼위일체라고 하지요? 그중 ‘성령으로부터’를 라틴어로 하면 필리오퀘가 됩니다. 이 필리오퀘는 서로마지역의 카톨릭에서는 인정했지만, 동로마지역의 그리스정교는 인정하지 않은 내용이지요. 비잔티움의 그리스 정교는 '성령'의 존재를 카톨릭에서처럼 예수와 하느님처럼 동일시 하지는 않은 것이지요.


주2 우상숭배 – 사실 그리스 정교가 우상숭배를 거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시간이 지나면서 그리스 정교 또한 우상의 효능성, 즉 이민족들을 쉽게 교화할 수 있고 더욱이 자신들에게 심미적인 포만감을 안겨줄 수 있는 우상숭배를 점차 허용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비잔티움제국에서 우상파괴운동이 일어난 것은 특기할 만한 사실.


주3 마자르족 – 지금의 헝가리인들입니다. 훈족의 아틸라가 급서한 이후 라인,도나우강 이북지역의 패권을 잡았다고 할 수 있겠군요. 비잔티움서부터 이탈리아까지 곳곳을 약탈하지만 결국 사를마뉴 대제에게 정복당하게 됩니다. 이 마자르족 말고도 페체네그족등 아직 강 이북에는 수많은 이민족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주4 콘스탄티누스: 수천년간 계속된 거짓말중 하나는, 콘스탄티누스가 교황에게 황제의 임명권을 넘겨준 인증서가 있다는 것이였습니다. 교황이 황제의 위에 있다는 인증서로 한동안 받아들여졌지요. 하지만 현대 과학자들이 조사한 결과 그 인증서는 고대시대에 만들어 진 것이 아닌 12~14세기 사이에 만들어졌다고 하지요. 너그럽게 봐 줄수 있는 문제일까요?



주5 롤랑의 노래: 이곳에서 중세 서사시중 유명한 ‘롤랑’의 노래가 나오는 것입니다. 물론 4LEAF의 그 롤랑이 아닙니다. 허허. 아군 배신자에게 속아 후퇴하던 프랑크군을 이슬람군이 후미에서 들이치자 후미에 있던 롤랑이 최대한 시간을 끌어 사를마뉴 대제가 구원군을 이끌고 올때까지 버티려 했으나 결국 황제가 오기 바로 직전에 사망하여 대제가 슬퍼했다. 뭐 이런 스토리의 서사시입니다. 



주6 르네상스: 르네상스가 후에 이탈리아 르네상스만을 가리키는 것도 있지만, 좀 크게 봤을 때 중세 시대에는 3번의 르네상스가 있었습니다. 지금 언급하는 카롤링거 르네상스, 중세시대 수도원에서 여러가지 책 필사를 통해 고대 지식을 보존하고 보급한 수도원의 르네상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이탈리아 르네상스, 이렇게 3번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각각의 르네상스는 고대와 근대를 연결해주는 중요한 다리가 되었으며, 고대의 지식을 지금까지도 보존, 유지하는데에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7 단성론: 예수가 하느님의 영혼과 예수의 영혼을 동시에 가지지 않는다는 단성론이 중동 전체에 퍼져있었습니다. 지금의 카톨릭은 예수를 하나님과 동격으로 보고 있지만 옛날에는 별별 희한한 이론이 다 나와있었지요. 앞에서 말한 필리오퀘서부터 시작하여 예수를 단지 선지자중 한명으로 격하시키는 네스토리우스파,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아리우스파등 여러 카톨릭 이교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종파들은 종교적인 색체가 강한 비잔티움 제국을 내부에서부터 갉아먹는 단초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6
13:41:51 

 

병장 홍승표 
  50년대 최고의 축구팀이였던 헝가리대표팀의 별명인 마자르 군단이 여기서 유래된거였군요...(웃음) 
4leaf의 롤랑이라면 창세기전3에서도 나왔던 그 캐릭터를 이야기 하시는건가요? 킥킥 2009-01-20
21:04:37
  

 

상병 김예찬 
  주4 부분은 현대 과학자들이 밝혀낸 것이 아니라 르네상스 시기의 인문주의자에 의해서 발견되었을 겁니다. (아 근데 이름이 생각이 안나! 으악!) 황제 임명권을 넘겨준 인증서, 가 아니라 카탈루냐 지방의 영토 소유권에 관한 문서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2009-01-21
07:47:42
  

 

병장 이동석 
  잇힝, 잘 읽었습니다. 2009-01-21
13:04:44
 

 

상병 김예찬 
  엥 내가 왜 카탈루냐라고 적었지 (당황) 카탈루냐가 아니라 교황령입니다. 2009-01-21
13:35:32
  

 

상병 이석재 
  아, 그랬던거 같군요. 역시 다시 도지는 가물가물병. 가물치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허허 2009-01-21
20: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