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텍스트 비평과 『백년동안의 고독』 
 
 
 
 
오늘은 시간이 좀 남아서(Sun-im들이 모두 출타해서 또다시 간만에 최선임자리 획득), 이런 글은 한번 어떨까 하고 올려봅니다. 학창시절 끄적이던 글들도 주로 이런 류의 글들이었고, 독서후기와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조망할만한 필요도 있을 것 같아서 말이죠. (웃음)
글이 조금 길어지고 지루할수도 있습니다. 


- 들어가며

양차대전 이후 최대의 문학작품을 한권만 꼽으라 한다면, 상당히 고심을 해야하겠지만, 그러한 소위 ‘명작목록’에 빠질 수 없는 작품의 하나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동안의 고독’을 꼽는데 주저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책은 다른 ‘클래식’의 고전과는 달리, 지금까지도 중남미에서 ‘베스트셀러’ 목록 10위권 안에서 빠지지 않는 스테디셀러이며 (이 소설이 최근에 대두되는 신진 작가의 주목받는 작품과 같은 무게로 책을 팔아치운다는것은 경이로운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나라 대형서점 스테디셀러 Best20에서도 10년이 넘게 빠지지 않은 잘팔리는 소설중 하나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면서도 1983년 노벨문학상을 포함한 각종 문학상을 휩쓸었다는 사실은 이 작품이 아주 특이하고도 심오한 작품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좋은 예가 아닐까 싶습니다. 고등학교시절 톨킨을 읽은 이후로, 제가 가장 커다란 충격을 받은 소설이었으며 포스트모던 소설이 어디까지 진화할수 있는가에 대한 많은 문학이론의 회의적인 질문을 모두 때려부순, 진정한 메시아같은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기도 합니다.


- 백년동안의 고독. 마술적 사실주의. 옛날 이야기같은 즐거움의 스토리텔링

이 작품의 가장 커다란 매력은 ‘재밌다’는 것입니다. 마르케스가 창시했으며, 전세계적인 붐을 일으킨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용어는 신화나 민담에서 보여지는 흥미롭고 생경한 ‘경이로움’을 지극히 사실적인 사건으로 치환시키고, 일상적인 사건들을 지극히 비일상적으로 묘사함으로써,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지워버리는 마르케스 특유의 서사전개방식입니다. 경이와 환상은 인간의 상상력이 가장 훌륭하게 빛을 발하는 예술의 중요한 특징중 하나이며, 이것들은 인간 본연의 호기심과 모험적 욕구를 자극합니다. SF,판타지등 장르문학이나, 모험소설, 추리문학등 일련의 대중문학이 재밌게 읽힐 수 있는 이유도 이러한 생소함이 보편성을 가지는 (톨킨의 용어를 빌리자면) 내재적 리얼리티가 독자에게 머뭇거림으로 남게되는 짜릿한 즐거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마르케스의 소설은 이러한 서사 본연의 스토리텔링. 즉, 즐거움을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 당시에 붐소설은 판타지-신화적 내러티브의 흡수뿐만이 아니라, 마누엘 푸익이나, 요사, 보르헤스, 키로가등이 장르문학을 접목한, 소위 노벨라네그라Novella Negra-검은소설-이라는 장르를 탄생시키기도 하지요. 이에 대해서는 기회가 된다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이런 방식은 전래동화나 민담이 본질적으로 ‘즐거울수 밖에 없으며’, 그것이 서사의 기원이라고 말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유희본능설’과도 어느정도 관련이 있습니다. (또한 이미 폐기되었지만 문학의 주요개념중 하나로 여전히 자리잡고 있는 발라드댄스Balld Dance 기원설과도 연관이 있겠지요)
따라서 마르케스의 소설은 본질적으로 ‘재밌을 수 밖에’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옛날이야기처럼 어린이들도, 어른들도 모두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초월적 보편성을 획득하게 됩니다. 이는 일련의 사변소설이 가지는 치명적인 맹점들 - 쉽게 말해 읽히지 않고 어렵다는 - 을 아주 쾌활하게 비웃으면서 명작은 안 팔린다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명제를 가볍게 짓밟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단순히 재밌는 판타지소설-옛날이야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제 친구가 말했듯이, 이 작품에 대한 20자평을 가장 명쾌하게 내리자면, “쉽게 읽으면 한없이 쉬운 싸구려 판타지, 제대로 깊에 들어가면 파우스트급 무게감을 가진 걸작”이기 때문입니다.


- 신화적 상상력, 그리고 프라미 파시(Prima Facie)가 빚어내는 원형상징의 향연들.

바로 이점 때문에 마르케스가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소설가이며, 불후의 명작이라는 칭호를 받을수 있는 것입니다. 마르케스의 소설은 쉽고 재밌습니다. 하지만 끝없이 심오합니다. 그런데 문학 텍스트가 쉽고 재밌으면서도 심오할 수 있는가? 예로부터 문학의 교조성과 유희성은 양립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어 왔습니다. 호라티우스같은 문학가는 때문에 문학은 즐거움이라는 사탕으로 교훈적인 내용을 달콤하게 발라서 둘다 섭취할 수 있게 해야한다는 문학당의정설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마르케스의 소설은 그 이전 소설에 가지는 문학의 두 딜레마 저편으로 멀찌감치 떨어져있습니다. 왜냐면, 마르케스는 문학이 가지는 즐거움과 교조성의 이원론적 딜레마를 무시하는 텍스트적 모범을 가지고 이 소설을 써나갔기 때문입니다. 가장 널리 읽히면서도 삶의 심오함이 담겨있는 책. 바로 성서이자, 바이블입니다.
마르케스가 서술하는 방식(문체)은 신화가 쓰여지는 방식에 대한 패러디입니다. 현실에서 보여지는 환상적인 사건들은 환상으로서 현실에서 분리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자연스러운 ‘경이’(놀라움)의 하나로서 현실세계 안으로 편입됩니다. 텍스트 안에서 일어나는 기적은 기적이 아닌, 초자연적인 (혹은 불가항력적인) 신성(神聖)에 대한 응시 그 자체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텍스트에서는 그런 심오한 신성의 현상을 응시함으로서 작품 텍스트 자체에 형이상학적인 무의식적 에너지를 주입합니다. 이러한, 일상적인 세계 속에서 성스러움이 현현함을 자연스럽게 인식하고, 그것이 텍스트 안에서 하나의 내러티브화 하여 작용하는 현상. 이를 문학이론가들은 프리마 파시(Prima Facie)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그대로 번역하자면 ‘태초의 얼굴’입니다. 즉, 창조의 비밀. 사물에 담겨있는 본연의 의미. 물자체의 질서를 인식하려 한 인간 최초의 사유활동의 ‘표정’이 담긴 현상입니다. 엘리아데는 이 프라미파시의 현상을 인식함이 바로 종교의 성현을 인식하는 과정이라고 말할정도로, 이 프라미파시의 아우라는 매우 ‘종교적’입니다. 백년동안의 고독이 성서에 대한 패러디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점은 상당한 의미를 가질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작품의 이러한 모습들은 탄생자체부터가 엄청난 상징과 에너지를 안고 태어나게 되죠.
그러나, 백년동안의 고독에서 보여지는 엄청나게 다채로운 프리마 파시들(예를들면 호세 아르카디아노 부엔디아가 죽은뒤 그 피가 자신의 어머니께 달려가는 과정, 레메디오스가 양탄자를 타고 하늘로 날아가는 장면, 푸르실리오의 유령이 마콘도까지 찾아와 고독을 호소하는 모습등)은 종교적인 의미만을 가지고 있는 현상들이 아닙니다. 그렇게 된다면 이것은 종교소설이 되버리지, 뛰어난 ‘문학소설’로서 기능은 버려지게 될 것입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이 작품에서 이러한 프리마 파시들이 소설의 텍스트 내에서 플롯이 가지는 구조적 작용들, 즉 플롯의 내재성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원동력으로서 이 프리마 파시들은 가장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푸르실리오의 죽음의 응시와 고독성이라는 원초적 프리마파시는, ‘저주로 인하여 - 이 역시 프리마파시의 중요한 일부입니다-’ 부엔디아 가문에게로 전이되는 과정 자체가 바로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로 성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읽는 독자들인 이러한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상태로 단지, 재밌는 이야기로서만 이 소설을 읽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이 소설의 마력이자 최대의 마술입니다.)

따라서 프리마파시로 창조된 캐릭터와 플롯들은 이렇게 많은 아우라를 내포하면서도 ‘옛날 이야기’라는 가면을 쓰고 (혹은 그 얼굴 그대로) 소설 안에서 이야기되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쉽고 재밌게 읽히지만, 그 얼굴이 그대로 받아들여질수가 없습니다. 신화적 내러티브를 따온(성경을 패러디한) 이러한 이야기구조는 지극히 직선적이면서도 엄청난 다층성을 가집니다.


텍스트비평의 다원주의. 롤랑바르트의 신비평과 마르케스의 프리마 파시.

이제 이 작품이 위대한 이유를 설명해드려야겠습니다. 물론 위에서 제가 설명해드린 이유만으로도 세계 최고의 작품의 입지를 굳히기에 충분합니다만, 여기에 그만한 문학적 임팩트가 더 얹혀진다면, 이 작품을 도대체 어떻게 평가해야할까요? 지금부터 이 부분에 대해서 조심스레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이 작품은 프리마파시에 의해서 하나의 재밌는 우화로 읽힐수 있다고 앞서 말씀드렸습니다만, 프리마파시라는 그 태생적 소재로 인하여, 이 작품은 하나의 이야기 속에 엄청나게 다채로운 스펙프럼을 흡수하게 됩니다. 

먼저 이 소설은 성서에 대한 패러디입니다. 가문의 계약 위반에 의한 저주에 의해서 추방당하고, 묵시에 의해 멸망당한다는 구조는 성서에 담긴 내용에 대한 오마주입니다. 이것은 저주와 고독, 일간의 굴종과 해방에 대한 키워드로서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문학이라는, 예술이라는 장르만이 풀어줄수 있는 죽음의 문제에 대한 납득을 가지고 이야기합니다. 저주와 삶, 죽음에 대한 문제는 철학으로 풀어낼 수 있겠지만, 종교 자체가 철학에 대한 대답이기에, 이 작품은 카톨릭적인 혜안을 가지고 고독과 죽음에 대핸, 생성과 소멸에 대한 신화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독자들이 이 소설을 읽으면서 얻게 되는 지독한 고독함과 쓸쓸함을 느끼는 많은 부분은 성서의 내용에 기반하여 마르케스가 독자적으로 구축한 이러한 신화적 이야기에 기대고 있습니다. 신화적 내러티브는 그 구조자체가 그러한 삶의 본질적인 부분과 무의식적 작용들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는 다시 포스트모던 소설의 특징으로 치환되고 재구성되는 놀라운 특징들이 보여지고 있으나 여기서 이 부분은 생략하겠습니다. 

둘째로, 이 소설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유입니다. 이 소설은 성서에 대한 패러디이기도 하지만,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에 대한 패러디이기도 합니다. 이부분은 대다수의 일반 독자들(특히 동양의 독자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만, 마콘도에서 쫓겨난 부엔디아 가문이 배회하는 과정, 우르술라가 길을 개척하는 과정, 시청의 설립과 자본주의에의 반발, 아우렐리아노가 레콩키스타(라틴아메리카에서 일어난 반反레지스탕스운동)에 참여하는 과정과 독립하는 과정들 하나하나가 경이로운 프리마파시의 내용들이자 그 자체가 바로 라틴아메리카 역사의 그것에 대한 완벽한 우화로 표현됩니다. 따라서 라틴 아메리카에서 교과서보다 이 책이 더 많이 읽히는것은 재밌다는 이유 말고도 이러한 내재적인 내용들때문이기도 한것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개괄적인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를 알고 있는 상태에서 이 소설을 읽는다면 이 우화는 오웰의 ‘동물농장’의 그것과 맞먹는 엄청난 패러디의 유쾌함과 장엄함으로 새롭게 다가옵니다.

셋째는 당연하겠지만, 이 소설 자체의 이야기입니다. 이 소설은 물론 위에 살펴본 두 이야기에 대한 패러디요, 오마주이지만 작품 자체가 가지고 있는 탄탄한 이야기구조와 사건들이 본연의 내용들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이것은 포말리즘(형식주의) 비평가들에게 어느정도 인증된 내용들입니다만, 작품 자체가 가지는 즐거움과 이 소설이 가지는 독자적인 ‘메세지’들은 바로 여기에 기인하고 있는 마르케스의 천부적인 재능이라고 볼 수 있을것입니다.


그밖에도 각 캐릭터의 개성에 초점을 맞추면 전혀 새로운 인물들의 ‘인생사’이야기가 펼쳐지게 됩니다. 이러한 다채롭고 심층적이면서도 동시에 심오한 내용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백년동안의 고독은 가히 ‘20세기 최고의 소설’이라는 찬사를 받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나의 텍스트에서 다층적인 의미가 뽑혀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롤랑바르트를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롤랑 바르트는 ‘텍스트의 즐거움’에서 텍스트는 비어있고 시니피앙만이 언어적 연결을 맺으면서 공시의미의 외시의미 배반이라는 충격적인 글쓰기를 제시합니다. 즉, 저자의 죽음입니다. 쉽게 말해서, 텍스트는 그 자체가 하나의 ‘언어’이고 그 언어는 읽는 독자의 언어와 시니피앙(기표)만이 같을 뿐이므로 독자들은 당연히 텍스트를 읽을 때 자신의 언어로 텍스트를 재분배 한다는 것입니다. 바르트는 이 표현을 ‘저자의 죽음’이라고 말하며, 텍스트는 ‘독자의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쉬운 말로(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표현을 빌리면.웃음) 독자반응비평이라고도 합니다.

모든 사람은 살아온 환경도 다를 것이고, 그 환경에 의해서 그 사람 개개인마다 축적된 언어의 형식도 다릅니다. 바르트에 의하면 문학의 텍스트는 그러한 언어의 ‘기표’만 남아있고, 기의는 완전히 비어있기 때문에, 읽는 독자가 감응하는 언어적 기의의 유동성에 따라 개개의 독자에게 전달되는 의미가 각기 다르다고 말합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비어있는 언어의 시니피앙(기표)속에 자신만의 시니피에를 집어넣은뒤 텍스트를 읽게 되나는 것입니다. 이 개인의 언어에 대한 기의(시니피에)의 커다란 백과사전은 다분히 무의식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문학텍스트는 독자들의 깊은곳까지 침투한다고 바르트는 지적합니다.

백년동안의 고독이 이런 심층적인 의미로 읽힐수 있는 이유는 ‘프라미 파시’라는 종교적-신화적 키워드를 문학에 도입하면서 텍스트 자체가 원천부터 무의식속으로 침잠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러면서도 기표가 가지는 외시의미, 그러니까 라틴문화, 현대사적인 문화적 언어들을 프리마파시에의해 메타언어로 치환하므로써 교묘하게 여러 가지 시니피에들이 침투할수 있는 텍스트적 바탕을 깔아준 것입니다. 즉, 백년동안의 고독이라는 텍스트를 구성하는 언어는 완전히 열려있으면서도, 여러 길들을 안내할수 있는 표지판을 달아주고 있어서 어느 한쪽길을 택한 독자들에게도 자연스럽게 인도할수 있는 배려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 맺는말. 문학, 신비평을 넘어서.

바르트가 현대소설 텍스트를 분석하고 마르케스가 텍스트의 해체를 뛰어넘은 이 시점에서, 이제 소설에 더 이상 실험할 수 있는것은 없는것 처럼 보입니다. 이미 이 작품은 ‘환상적 사실주의’ 혹은 ‘경이적 사실주의’라고 불리는 현실과 환상의 거리감과 괴리감에 주목한 붐소설작품들의 끝자락에서 탄생된 작품이고, 이 작품으로 말미암아 붐소설은 마감되고, 포스트붐이라는 새로운 조류(포스트모더니즘 소설 이후의 소설)가 부상하게 됩니다. (그것인 시간의 공시성이 다시 통시성으로 돌아가는 백년동안의 고독 자체의 내러티브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뒤의 대안이 과연 없는것일까요? 90년대 이후 세계적으로 대두되는 초신화학과 노발리스에 대한 재조명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마르케스처럼 톨킨의 환상. 즉, ‘내재적 리얼리티에 대한 인간의 변용’이 월권행위처럼 느껴지는 것은 무엇때문일까요?
저는 이것에 대해서 더 알아보고 싶을따름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텍스트들은 여전히, 그리고 아직도 태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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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촉박해서 조금 난삽하게 썼습니다. 시간 안배를 안하고 썼더니, 정작 하고싶은 말은 맨 뒤에 조금밖에 못했네요. 곧 밥하러 갈 시간이라. (웃음)제가 가장 좋아하고 제일 아끼고 제일 놀라워했던 소설이기에, 이 소설에 대한 한마디정도는 해보고 싶었습니다. 
 

  
 
 
 
상병 조주현 (2006/05/13 10:45:08)

조화수 0 의 달콤함. 
선리플 후감상 
민우님/오랫동안 기다렸다니깐요    
 
 
병장 박형주 (2006/05/13 11:40:07)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언급하신 롤랑 바르트의 텍스트론에 관심이 가는데 참고할 만한 책이 뭐가 있을까요? 바르트 본인의 것도 좋고 다른 사람 것도 좋고, 물론 쉬우면 더 좋구요.    
 
 
상병 송희석 (2006/05/13 12:54:26)

롤랑 바르트 - 텍스트의 즐거움    
 
 
병장 오해성 (2006/05/13 17:54:20)

민우씨 그리스인 조르바에 대해 쓸 생각은 없어요?    
 
 
상병 황민우 (2006/05/13 18:09:17)

해성님// 여건이 되면 써보겠습니다. 참고로 그리스인 조르바는 최근에 읽은 가장 훌륭한 소설중 하나라서 제 머릿속에 많은것들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역자후기에서 써있듯이, 조르바를 읽을때 베르그송과 니체를 이해한 상태에서 소설을 탐독한다면, 뛰어난 철학적 혜안에 감탄을 금치 못하게 된답니다. (물론 이 소설은 마르케스의 작품들과는 다르게, 그 내용들이 누구나 이해할수 있는 조르바의 춤과 여러 행동들로 표출되는 점이 조금 다르겠지요. 그것 역시 니체적 변증법과 베르그송의 내적 자아의 주체와 관련이 있겠지만.. 기회가 되면 써보도록 할게요.)    
 
 
상병 황민우 (2006/05/13 18:29:38)

- 바르트가 현대소설 텍스트를 분석하고 마르케스가 텍스트의 해체를 뛰어넘은 이 시점에서, 이제 소설에 더 이상 실험할 수 있는것은 없는것 처럼 보입니다. 이미 이 작품은 ‘환상적 사실주의’ 혹은 ‘경이적 사실주의’라고 불리는 현실과 환상의 거리감과 괴리감에 주목한 붐소설작품들의 끝자락에서 -탄생된 작품이고, 이 작품으로 말미암아 붐소설은 마감되고, 포스트붐이라는 새로운 조류(포스트모더니즘 소설 이후의 소설)가 부상하게 됩니다. (그것인 시간의 공시성이 다시 통시성으로 돌아가는 백년동안의 고독 자체의 내러티브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 

이부분이 바로 보르헤스와 마르케스 소설의 결정적 차이중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보르헤스는 도서관을 우주로, 지하실을 알렙의 공간으로 치환하므로써 (일상적인 공간을 환상의 우주로 성화시키는, 이른바 환상적 사실주의기법) 시간과 공간에 대한 통시적 구조를 해체시킵니다. (이 시공간의 통시성 해체는 보르헤스가 카프카의 단편소설에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결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르케스의 중-후기 작품들부터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공시적 해체는 다시 일정한 이야기의 직선구조를 가진 통시적이고 직선적인 구조로 돌아오게 됩니다. (물론 카를로스 푸엔테스같은 작가들은 여전히 시공의 통시성을 훌륭하고 혼합하여 사용하기도 합니다.) 
일련의 포스트붐에서 회귀하는 붐소설의 '기법'에 대한 반발의 뿌리를 마르케스의 이작품에서부터도 찾을수 있다는 점은 상당히 흥미로운 사실중 하나입니다. 

내용을 덧붙일까 하다가 그냥 이파리에 추가설명으로 붙여둡니다. 참고하세요.    
 
 
 병장 노지훈 (2006/05/14 11:30:12)

글 잘 읽었습니다! 
이런 비평 형식으로 연재를 해보시는 것은 어떠신지?    
 
 
일병 김현동 (2006/05/15 09:06:54)

아하!    
 
 
병장 주영준 (2006/05/15 09:28:59)

문학비평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백년동안의 고독'에 그다지 높은 평점을 줄 수 없었던 저로서는. 비평이론을 하나도 모르는 저로서는.    
 
 
일병 이건룡 (2006/05/15 15:06:46)

읽느라 나름의 의미심장한 태도로 임했습니다. 허나 기본적으로 이책 저책들을 읽지를 않해서..... 민우 분의 글을 이해(향유)할려면 민우분의 발자취를 따라가야겠군요. 
역시 중요한건 다독이라는 감상을 남깁니다. 잘읽고 갑니다.    
 
 
 병장 박진우 (2006/05/26 09:20:26)

저도 쉽게 읽으면 한없이 쉬운 싸구려 판타지, 제대로 깊에 들어가면 파우스트급 무게감을 가진 걸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