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장르소설의 정형화  
병장 김무준   2009-02-23 13:42:59, 조회: 361, 추천:0 

이 텍스트는 책가지에 있는 <장르소설의 역사>, <장르소설의 한계와 극복>에 이어지는 텍스트 입니다. 텍스트에서 사용하는 용어 중 일부를 위의 텍스트에서 차용해 온 것임을 말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책방에서는 비슷한 소설들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90년대 후반부터 대여점을 기반으로 하는 출판시장이 성장을 거듭했다. 비디오와 책 모두 대여점이 주 시장이라 한다면, 비디오시장은 영화나 드라마 시장의 2차 시장이기에 개봉작 추세에 따를 수밖에 없었으나, 비디오와 달리 책은 유행을 타지 않는 품목이었다. 독자층은 출판시기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고 소수의 매니아층을 제외한 대부분의 독자는 재미나 시간 때우기를 목적으로 대여점에서 장르소설을 소비하기 시작했다.

모든 대중문화가 마찬가지지만 대중문화는 상업성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연관관계에 있다. 돈이 되어야 한다는 소리인데, 이는 장르소설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순문학이 예술적 가치와 사회를 반영하는 의식이 포함되어야 한다면 장르소설은 시장에 진입해 꾸준히 소비될 수 있는 무기를 가져야 한다. 장르소설의 무기는 흥미다. 장르소설은 성장과정에서 재미를 극도로 추구하는 형태로 발전했고, 2세대에 접어들며 그 문제가 급격히 심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장르소설에 대한 대중의 호오는 분명히 갈린다. 그 따위 것들이 소설이냐 돈이 아까워서 볼 가치조차 없다는 부류와, 그래도 장르소설을 싸잡아 매도하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니 좀 더 이해가 필요하다는 부류로 나뉜다. 지나친 이분법적 논리일지는 모르나 사회가 판단하는 장르소설 현재는 두 부류로 나누어지는 듯하다. 전자는 초기 무협을 접한 기성세대와 현재의 장르소설을 접한 우리세대 중 보수적이며 비판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이들이다. 후자는 매니아층을 필두로 하는 이들로 장르소설과 그 성장을 함께한 집단이다. 그렇다면 전자의 의견이 맞을까, 후자의 의견이 바람직할까. 후자의 의견대로 장르소설을 매도하는 것은 사과 상자의 썩은 사과를 보고 ‘상자 속 사과는 모두 썩어있다’고 판단하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까?

답이 무엇이건 간에 현실은 참담하다. 장르소설이라는 사과박스 안의 모든 사과가 썩어있다고 할 순 없어도, 절반이 넘는 사과들이 썩어있는 것이 현재의 장르소설 출판시장이다. 시장은 이십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이상한 방향으로 변질되었다. 비판적 입장을 취하는 집단의 주장 ‘판타지가 어딜 봐서 소설이냐?’, ‘문학성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쓰레기’ 따위의 발언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텍스트를 작성하는 글쟁이가 장르소설을 지지하는 집단에 속해 있으나 이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므로 인정해야할 필요가 있다.

그럼 장르소설시장이 쓰레기장으로 변한 이유는 무엇이며,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이것에 대한 물음을 갖기 전에 시장의 실태를 확인해보면 시장을 장악하는 주류의 ‘장르’가 판타지와 무협임을 알 수 있다. 시장에는 게임, 퓨전 등 다양한 장르가 존재하고 있지만 게임과 퓨전의 경우 형태만 바뀐 판타지와 무협임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시장 점유율을 놓고 해석하면 절반 이상이 판타지와 무협이다. 장르소설시장이 판타지와 무협에 의해 점거된 까닭은 환상문학의 장르적 특성을 통해 풀이가 가능하다.

SF는 과학적 사상을 통해 창작되어야 하기에 기본적으로 텍스트를 생산하는 글쟁이는 과학에 대한 전반적인 기초지식을 갖추어야한다. 진입장벽이 높다는 문제로 한국 SF시장은 크게 발전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퇴마도 비슷한데, 무속신앙이나 종교는 과학만큼 다양하고도 전문적인 지식을 필요로 하는 소재다. 퇴마는 이우혁과 문성실 이후로 2세대에 이르러 대가 끊기고 말았다. 추리는 지적유희를 목적으로 하기에 이야기의 구조가 탄탄해야하며 문장이나 표현이 독자의 집중력을 끌어내야 하기에 글쟁이는 높은 수준의 문장력을 갖추어야 한다. 역사나 전쟁의 경우 철저한 고증이 필요하다. 장르소설에서 주류를 차지하지 못한 장르들은 모두 여러 가지 이유로 글쟁이들의 진입장벽이 높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와 달리 진입장벽이 굉장히 낮은 판타지와 무협, 이 두 장르가 시장을 점령한 것은 당연한 결과다.

주류 시장을 형성하는 판타지와 무협은 웹이 등장함과 동시에 텍스트의 엄청난 질적 하락을 겪는다. 익명성을 바탕으로 누구나 손쉽게 텍스트를 생산으로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으므로, PC통신의 장르소설이 지니고 있던 한계인 ‘접근성’과 ‘대량생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웹에서의 장르소설은 게시될 수 있는 공간이 무궁무진했고 그만큼 텍스트의 표출이 용이해졌다. PC통신 게시물의 조회 수가 일만 건 정도였다면 최근 소위 말하는 대박텍스트의 조회 수는 백만 건을 넘나든다. 재미있는 텍스트는 입소문을 타고 급격히 소비됐다. 자고 일어나니 스타가 되어있더라는 소리는 현실이 되었다. 삼룡넷에 연재되던 비뢰도의 작가는 비뢰도 하나로 순식간에 명예와 부를 거머쥐었다. 재미있는 텍스트를 생산하기만 하면 노다지를 캘 수 있는 신종 금광이 탄생한 것이다. 이와 함께 낮아진 진입장벽을 넘어 다수의 독자들이 노다지를 꿈꾸며 텍스트의 생산에 뛰어든다.

앨빈 토플러가 <부의 미래>를 통해 예견했듯 위와 같은 변화는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다. 소비와 생산을 함께하는 프로슈머들이 증가하며 출판시장은 제 2의 변화를 맞는다. 낮아진 진입장벽으로 유입된 새로운 글쟁이들은 빠르고 간단하게 텍스트를 생산했고 텍스트의 전체적인 질적 하락을 초래한다. 진입장벽이 낮은 까닭은 장르소설이 ‘환상’을 토대로 하기 때문이라 해석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각자의 환상을 갖고 살아가며 그것이 의식에서 유지되든 무의식에서 유지되든 어떠한 형태로든 환상을 꿈꾼다. 누구나 갖고 있는 환상을 글로 풀어내면 Fantasy가 되기에 텍스트의 생산이 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환상은 판타지와 무협으로 나뉘게 되었으며 틀에 갖힌 모습으로 환상 자체의 생명력을 잃고 있다.

왜일까. 장르소설의 정형화는 달리 말하면 주류를 차지하는 판타지와 무협의 정형화다. 정형화의 원인은 장르소설의 탄생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 PC통신에 등장한 초기 판타지는 톨킨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세대 작가들 대부분의 한계로, 톨킨이 창조한 중간계 세계관을 그대로 차용한 결과 한국의 판타지가 탄생할 수는 있었으나 톨킨의 세계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지경에 처하게 된다. 1세대 작가들이 톨킨과 서양신화를 가지고 텍스트를 생산했다면, 2세대 작가들은 1세대가 이루어놓은 것을 그대로 수용했다. 이 순환은 시장과 독자의 요구에 따라 계속되었으며 순환을 통한 정화가 아닌, 부패의 악순환이 되고 말았다.

초기 무협지의 탄생 벼경은 정확히 알지 못하나 한국 무협이 김용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의 아버지세대부터 시작된 무협시장은 판타지와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 한국무협의 탄생배경이 PC통신은 아닐 것이다. 추측을 통해 <동방불패>나 <의천도룡기>와 같은 홍콩무협영화의 성공으로 원작소설이 국내에 유입되었으며 그와 함께 무협시장이 본격적으로 활성화 되었다고 본다면 지금의 상황을 더욱 쉽게 풀이할 수 있다. 무협지 역시 대여점을 기반으로 하는 시장이었고, 흥미위주의 텍스트 생산이 주를 이루었으며 결과적으로 판타지와 같은 길을 걷게 된 것이 아닐까.

웹이 등장하며 새로운 글쟁이들이 등장하며 자연스레 초보 글쟁이를 위한 정보들이 웹으로 유입된다. 톨킨의 세계관 해석에서 출발한 판타지의 이론적 정리는 판타지 자체가 틀에 박히는 지독한 폐해를 가져왔다. <어스시의 마법사>를 쓴 어슐러 르 귄이나 <반지의 제왕>의 J.R.R. 톨킨, <해리포터 시리즈>의 J.K. 롤랑 등 영국 환상작가들과 그들의 세계를 보면 한국 판타지의 정형화된 세계관이 거의 존재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어딜 봐서 (윙 가르디움 레비오우사)나 (익스트로 페트로눔)이 마나를 통해 생성된 클래스 마법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나니아 연대기>나 <반지의 제왕>에서의 마법은 한국 판타지에서의 룬마법이나 마나체계를 따른다기보다는 의지를 통해 발현되는 언령 마법에 가깝다. 유럽 환상문학에 대한 이해 부족은 국적불명의 판타지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보의 무비판적 수용 탓이라 볼 수도 있다. 자신의 환상을 풀어 이야기하고는 싶지만 1,2세대 작가들의 소설을 읽으며 환상을 키워온 초보 글쟁이들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환상을 품었고 어떤 종류의 환상을 꿈꾸는 지는 불을 보듯 빤하다.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 탐구하고 이해하기 전에 기존의 정보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수용하는 글쟁이들의 의식부재도 장르소설의 질적 하락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무협도 상황이 비슷하다. 김용의 작품은 중원, 즉 중국대륙을 배경으로 한다. 실제 역사적 부분과 사실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김용의 소설들은 대하소설이나 역사소설에 가깝다. 톨킨 세계관의 수용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들이 무협에서도 그대로 생겨났다. 무협의 여러 소재들이 동양의학을 바탕으로 하며 동양 무술이 비슷한 체계를 가지고 있음을 생각하면 무협의 세계관 정리는 더욱 손쉬웠을 것이며, 훨씬 체계적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사오십 줄에 앉은 1세대 무협작가들은 김용의 세계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똑같은 무협 세계관을 강요하는 패러독스에 빠지고 말았다.

장르소설의 문제는 오랫동안 논의되어 왔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비슷한 탁상공론이 이어졌고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대중문화는 자본과 수요에 의해 움직일 수밖에 없다. 장르소설 시장은 돌고 돌고 돌아서 썩어가고 있다. 흥미를 끌 수 있는 다양하고도 새로운 소설들은 시장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장된다. 출판시장은 철저히 돈에 의해 움직인다.

여러 가지 이유로 대한민국의 환상은 사장되거나, 죽어가고 있다. 환상이 일정한 틀에 끼워 맞춰지면서 문제제기는 계속되어 왔지만 개선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글쟁이와 독자 모두가 왜 자신들의 환상이 ‘중국대륙’과 ‘소드 앤 매직’에 휘둘려야 하는지 원인을 해석하고 의문을 품지 않는다면, 몇 년 이내에 시장은 사라질지도 모른다.



뱀발. 다음 텍스트에서는 장르소설의 문학성 문제에 대해 다시 이야기해 보겠음.
뱀발 둘. 왜 이러고 있는 걸까. 하암.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9:18:28 

 

상병 홍도형 
  ... 이걸 알아주는 글쟁이들이 많으면 좋을텐데 말이죠. 라기보다, 
모두에게 인기 있는 이유는 그 세계관이 그 만큼 재미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려운말은 모르겠지만서도,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는 것 이니. 그 이유가 어디 영원하겠습니까, 곧 다른 흐름이 흐르겠지요. 


우리는 그 흐름을 주도하던가, 따라가던가, 욕하던가, 무시하던가, 넷중 하나를 선택하면 될 것 같습니다. 




으응? 아닌가요? 2009-02-23
14:09:14
  

 

상병 홍도형 
  근데 내가 뭔 소릴 한거지? 2009-02-23
14:09:53
  

 

상병 김예찬 
  D&D룰을 의식했건 의식하지 않았건 결국 표절했던 한국 판타지의 대표 작가들은 자신들의 출세작에 대해 유형 무형의 책임을 져야하겠죠. D/R은 양장판이 나오면서 이를 피하기 위해 살짝 꼼수를 쓴 것 같더군요. 홍정훈의 작품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네요. 

재밌는건 최근 등장하는 소설 중 많은 작품들은 이제 일본 라노베 계열의 세계관을 차용하고 있다는 거죠.. 그런 행태를 보면 아주 머리가 아픕니다. 장르 문학 팬덤 자체가 적극적으로 씬을 바꾸려는 노력을 보여주어야하는데 또 자기들끼리 무시하고 다투는데 정신이 없기도 하죠. 

예전의 <워터가이드>나 <거울>이 보여주는 시도들이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있긴 합니다만, 씬을 근본적으로 바꾸기에는 아직 역량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게다가 블로그 서비스들의 보편화가 팬덤의 근간을 이루는 '커뮤니티'들의 쇠퇴를 불러오기도 했구요. 2009-02-23
14:18:38
  

 

일병 송기화 
  요즘은 거의 환상의 정의가 끝나버린 것 같은 느낌입니다. 
옛날에 어디 신화에 나온 얼굴없는 혼돈씨는 얼굴을 그려서 정의하려 했다는 이유로 죽어버렸던데 말이죠. 
아, 그래서 환상이 죽어가는건가요? 2009-02-23
14:21:06
  

 

상병 구진근 
  무준씨가 말하는 정보의 무비판적 수용 중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가까운것은 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중성이라고 할까요? 우리는 오래전부터 게임을 해 왔고 또한 지금도 지금 시대에 맞는 유행성 게임이 등장하고 거기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게임을 보면 대부분 마법이 등장하고 그 마법에 대해 클래스라던지 특정 속성을 키운다던지 하는 그런 틀이 짜여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게임을 하면서 어느새 우리들은 세뇌되어 버린것일지도... 
어릴적부터 우리는 게임을 많이 해 왔습니다. 단순한 던전도마뱀이라던지 XX삼국쥐 등 온갖 마법이 등장하는 그런 게임말입니다. 
물론, 무조건 그것이 잘못되었다기보다 저는 그것이 저희의 생각의 틀을 정해버린것이 아닐까 걱정되는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어느새 우리는 그러한 마법이라는 것을 상식쯤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일단 가장 시급한 문제는 생각의 틀을 깨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09-02-23
14:36:51
  

 

상병 김상윤 
  구진근님의 말에 덧대어 설명하자면 클래스 개념의 자리잡음은 리X지가 크게 작용했을것 같은 생각이 드네요. 음음. 
장르문학의 대부분은 고등학교때 '수업시간'에 읽는 용도로 많이 사용되고 있는듯 합니다. 
부끄럽지만 저도 그 선두주자 였고요 2009-02-23
14:41:40
  

 

병장 김무준 
  그 세계관이 재미있기 때문이 아니라, 톨킨의 세계관 자체가 엄청나게 견고해 써먹기 딱 좋기 때문입니다. 좋게 말하면 차용, 나쁘게 말하면 표절이 용이하다는 겁니다.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이 무엇인가는 위에서 말했듯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같은 물음입니다. 한국의 판타지와 무협은 2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다람쥐 쳇바퀴 굴러가듯 돌돌 굴러가고 있습니다. 곧 다른 흐름이 온다고요? 

예찬씨가 지적하신 대로 일본 라이트 노블에서 차용해온 표현과, 세계가 뒤죽박죽으로 섞여 국적 불명의 환상소설이 탄생할 뿐입니다. 

던전 앤 드래곤의 경우 원래 D&D라는 보드게임의 설정을 그래픽으로 옮긴 게임입니다. 일본은 전국무쌍 등 다양한 게임을 자국의 색깔에 맞추어 개발하고 있는 반면, 한국 게임업계는 임진록 이후로 이렇다할 한국형 게임을 내놓지 못하고 있죠. 모바일은 그나마 나아서 일지매와 같은 게임이 나오기는 했지만요. 

기화씨가 말하는 혼돈의 이름은 중국 창세신화의 제강일 겁니다. 재미없는 옛날 이야기에 나와있을 거에요. 2009-02-23
15:12:38
  

 

상병 홍도형 
  아무리 써먹기 좋아도, 재미가 없으면 읽혀지지 않겠죠. 
읽혀지지 않으면 존재 이유가 사라지죠. 
게다가 출판사가 읽혀지지 않는 책을 출판해 줄 이유가 없잖아요? 2009-02-23
16:07:48
  

 

일병 신재호 
  환상문학의 정형화는 환상문학이 2세대로 넘어가면서 [소위 이계깽판물이 뜨기 시작할때] 굳어진 현상입니다 그 전까지는 참 참신한 작품이 많이 나왔는대 말이죠 [사실은 환상 문학시장이 너무 작았고 그때까지만해도 환상문학을 출판하려면 그 작품의 수준의 벽이 높았던걸로 알고있습니다 즉 출판사에서 일정 수준이상이 되지 않으면 아예 출판을 해주지 않았던거죠] 그런대 어느때부턴가 점점 출판사가 수준이 낮은 작품에 대해서도 관대해 지기 시작했고 작금의 상황에 이르게 된겁니다 여기에는 독자의 책임이 크다고 판단됩니다 사실 요즘 세대들은 [물론 저를 포함해서] 책을 거의 읽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가장 쉽게 접근할수있는 책이 흥미위주인 환상문학이었고 책을거의 읽지 않은 그 사람들 
의 소위 책을 보는 눈이라고 해야되나? 그런게 많이 낮습니다 음.. 그러니까 예를 들면 
이런겁니다 책을 거의 읽지 않은 제 친구는 귀xx 가 지은 늑x의 x혹 을 아주아주 재미있 
게 잘 읽었습니다 하지만 어느정도 책을 본 저의 다른 친구는 그 책을 1페이지만 넘겨보고 라면 받침대로 썼지요 [여담이지만 그때 그 친구의 감상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군요 
"나는 방금 활자 지옥을 다녀왔어"] 너무 극단적인 예인가요? 하지만 다들 느끼시리라고 믿습니다 어쟀든 이런 사람들은 질 낮은 텍스트에 대해서 거부감이 거의 없다 시피 합니다 사실 그게 왜 질이 낮은지 조차 깨닫지 못하죠 이런 사람들이 환상문학의 주 소비층 
이 되버리자 자연히 출판사도 환상문학의 질에대해 관대해 질수밖에 없는것입니다 2009-02-23
16:53:10
  

 

병장 김무준 
  톨킨의 중간계 3부작이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의 환상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입니다. <장르소설의 역사>에서도 설명했듯 기존 1세대 작가들은 톨킨의 세계관을 자신의 소설에 그대로 반영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드래곤라자의 표절과 금전적 문제가 대두되는 건 세계관 자체가 '지적재산'에 해당하기 때문이겠죠. 

상당수 PC통신의 1세대 판타지 작가들이 톨킨이 정립해놓은 세계를 이용했습니다. 일본의 뉴웨이브 문학처럼 다양한 환상이 자라날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음에도 그렇게 발전하지 못한 것은 웹가 식자층(매니아층)이 악기능을 한 탓입니다. 

출판사의 입장에서 재미있는 책을 출판하고자 하고, 좁은 독자층의 요구는 한결 같기에 시장이 변하지 않는 겁니다. 소수에게는 재미가 있겠죠. 하지만 위의 텍스트에서 언급한 이분법적 논리를 적용할 때 후자의 집단, 장르소설을 옹호하는 집단은 비판집단에 비해 굉장히 작은 소수 집단입니다. 현재 출판시장에서 1만부가 넘으면 베스트셀러라 칭하는 현실이, 어쩌면 음반과 순문학을 포함한 한국 문화에 전반적으로 벌어지는 현상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조회수와 매니아층, 대여점 수를 종합해 생각해 볼 때 책이 그렇게 많이 팔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중소 출판사들은 줄줄이 망해가고 있고, 청어람 등 대형 출판사만이 살아남는 실정입니다. 읽혀지는 책을 출판하는 것이 아니라, 읽혀질만한 책을 출판하는 겁니다. 이미 텍스트는 웹에서 1차 소비가 되었고, 책의 소장을 목적으로 2차 소비를 하는 소비자는 극소수. 대여점 수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지금의 정형화된 재미가 시장에 의해 독자에게 주입되는 재미인지, 아니면 진정 독자가 원하는 재미인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흥미의 척도는 지극히 주관적일 수 밖에 없으나, 이제는 구매력을 갖춘 기존 독자층의 전반적인 움직임과 사고를 보면 더이상 재미가 재미가 아님을 깨달으셨을 텐데요. 2009-02-23
16:57:58
  

 

상병 김예찬 
  재호님께 태클 거는 건 아닙니다만, 전 가끔 이른바 '판타지 매니아'들의 일부가 가지는 귀여니 류의 인터넷 로맨스 소설에 대해 가지는 알 수 없는 우월감이 그들의 질적 성장을 방해한다는 생각도 들긴 합니다. 자신들 보다 저급한 장르를 설정해 놓고 자신들의 취향에 대한 자족감을 느끼는거죠. 이건 어떻게 보면 오타쿠 문화의 특징이기도 합니다만. 2009-02-23
16:58:57
  

 

일병 신재호 
  음.. 하나 덧붙이자면 정형화된 "틀" 이란것은 생각보다 그렇게 나쁜것이 아닐수도 있습니다 정형화가 榮募째痼 그만큼 그 "틀"에 이점이 있다는 뜻이지요 "틀"속에서도 글쟁이 자신의 실력이 뒷받침된다면 충분히 재미있는 환상소설을 쓸수있다는게 제 지론입니다 
문제는 글쟁이들의 자신의 글에 대한 애착과 독자들이 환상문학을 보는 눈의 눈 높이일 겁니다 2009-02-23
16:59:06
  

 

병장 김무준 
  톨킨이 중간계 3부작을 쓰고 나서 자신의 세계를 사용해도 좋다고 지적재산의 포기를 선언했던 걸까요. 이와 관련한 정보가 필요하나 찾을 방법이 없군요. 쩝. 2009-02-23
17:02:46
  

 

일병 송기화 
  스포어라는 게임의 NDS판은 크리쳐라는 생물을 만드는 걸로 시작합니다. 
수많은 항목 중에서 자신이 원하는 눈, 원하는 팔, 원하는 다리, 원하는 입 등을 모아서 자신이 플레이 할 새로운 크리쳐를 만드는겁니다. 
플레이어는 내가 플레이 할 캐릭터를 내 마음대로 창조했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눈도 팔도 입도 정해진 것들 중에서 골랐을 뿐인거죠. 요즘 책들은 다 그런 느낌이더라구요. 2009-02-23
17:04:05
  

 

일병 신재호 
  상병 김예찬//음 제가 귀모양을 예로든것은 장르문학을 한번쯤 접해본 사람이라면 거의다 알고있을정도로 유명한 소설이라서 그런겁니다 2009-02-23
17:05:35
  

 

상병 김예찬 
  네, 재호님의 글과는 상관 없구요, 그냥 귀여니 떡밥이 등장해서 생각해 본겁니다. 가끔 판타지 문학 팬덤이 가지고 있는 인터넷 로맨스물에 대한 편견(약간의 질투가 섞여있다고 봅니다만)을 보면 그들의 성장을 방해하는게 과연 무엇인지 여실히 드러나는 것 같아서요. 오히려 판타지는 어느정도 보편적인 공감을 이끌어내는 로맨스물에 비해서 은근히 골수 독자층이나 시장 자체가 적은 편이죠... 2009-02-23
17:09:04
  

 

병장 양동민 
  <퇴마록>은 그런 의미에서 좀 이른시기에 변화를 꿈꿨던 소설이 아닌가 합니다. 
이우혁 스스로 말했듯이 '한국형 판타지'를 내세워 만들었고, 그 결과또한 성공적이었으니까 말이죵. (물론 혼세 이후의 스토리는 약간 짬뽕변형된 감이 없지않아 있지만) 2009-02-23
18:39:56
  

 

상병 최한들 
  [장르소설에서 주류를 차지하지 못한 장르들은 모두 여러 가지 이유로 글쟁이들의 진입장벽이 높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와 달리 진입장벽이 굉장히 낮은 판타지와 무협, 이 두 장르가 시장을 점령한 것은 당연한 결과다.] 

글쎄요. 동의하기 힘들군요. 무준님께서 말씀하신 듯이 현재 장르 시작은 쳇바퀴 굴리듯 계속되는 한심한 논의를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도 결국 예의 쳇바퀴 굴리는 짓일런지 모르겠지만. 

무준님께서 말하신 것을 그대로 따와 시점만 바꿔보죠. 

판타지와 무협, 두 장르는 쓰기도 쉽지만 읽기 또한 쉽습니다. 작가들이 자신의 편의를 위해. 혹은 글을 만드는데 있어서 수고를 아끼기 위해 판타지와 무협을 먼저 손댄다 라 하는데, 

실은 그건 독자가 많이 찾아서가 아닐까요? 

위해서 말하셨듯이 장르시장은 결국 돈이 되는 것을 찾지요. 

독자가 원하지 않는다면, 판타지와 무협은 나올 수가 없어요. 작가가 많이 만들어대기 때문에 독자가 별수 없이 읽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실은 원하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양의 글이 생산된 겁니다. 

라고 생각해요. 2009-02-23
21:00:55
  

 

상병 최한들 
  그리고 무준님께선 이렇게 장황하게 글을 써놓으시곤, 정작 해결책은 주지 않으셨습니다. 

이론만 주구장창 늘어놓고선 결론은 없다뇨. 이건 좀 슬픈 일입니다. 결국, 당신은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며 어쩌자는 것입니까. 
읽고 나서 당신이 원한다고 생각되는 것은 고작 
'이 글을 읽는 사람들만이라도 각성하여 판에 박힌 양성형 글을 쓰지 말자' 
라는 의도인것 같은데. 무준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정도로는 판도가 바뀌지 않을 겁니다. 

위에서 밝혔듯이,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모두 무준님 뜻대로 틀에 박힌 글을 쓰지 않는다 해서, 독자들이 그 글을 찾고 읽을까요? 아뇨, 그렇지 않을겁니다. 

우리는 하얀 로냐프 강이나 조커와 같은 새로운 개념의 판타지 소설들이 - 꽤나 훌륭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널리 읽히지 못하고 묻혀버렸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그것을 전재로 했을 때, 우리가 참신한 글들을 배출해 내어도 독자는 외면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죠. 결국 답은? 

독자의 개념이 바뀌어야 한다 이겁니다. 

사실 이 명제에 대해선 저도 할 말이 없습니다. 이렇다할 해결책이 없어요. 독자의 개념을 바꾸기 위해선 작가들이 노력하여 그만한 글들을 써야 하는데, 그런 글들이 써진다 해도 묻혀버리기 일쑤니까요. 2009-02-23
21:06:17
  

 

상병 최한들 
  그렇다면 이쯤에서 제가 미스테리한 질문 하나 하죠. 
왜, 어째서?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 같은 환상 문학은 잘 팔렸는데, 
하얀 로냐프강. 조커 같은 우리나라 환상 문학은 망했을까요? 

다시 말해, 비슷한 작품을 내도 어째서 외국 문학은 잘 팔리고, 우리나라 문학은 잘 안팔릴까요~? 

이건 축구의 원리와 같다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암만 K-리그 선수들에게 달려가서 
"니들은 왜 유럽 선수들만큼 축구를 못하니!" 
하고소리쳐봐야 별 수 없는 거예요. 

뭐, 축구와 소설은 분명히 다르긴 하죠. 
우리나라와 유럽의 축구는 확연히 실력차이가 있지만, 소설은 실력차이의 문제도 아니니. 다른 부분에서 원인을 찾아야 겠죠. 

제가 생각키로는, 분위기와 명성의 차이라 생각합니다. 
일본 소설들은 대부분 부드럽고 눅눅한 분위기입니다. 문체 자체가 그렇죠. 유럽의 소설들은? 제가 알기로는(물론 작가간의 개인적인 차이는 분명 존재하지만) 약간 가볍고 붕뜬 느낌이랄까요. 우리나라의 무게감있는 묵직한 글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죠. 
아무리 번역을 잘 해도(혹은 ㅈ같이 해도) 그 분위기는 남아있기 마련일겁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전 우리나라 판타지 소설에는 쉽게 지갑이 열리지 않더군요. 판타지 소설에 우리나라 사람의 이름만 들어가도 왠지 우습게 보여요. 

이건 우리의 뇌속에 박혀 버린 무의식 속의 관념이 아닐까요. 


뭔 횡설수설인지. 죄송합니다. 글을 못써서. 2009-02-23
21:25:06
  

 

병장 김무준 
  저기... 위에서 언급한 두 텍스트를 읽고 오시지 말입니다. 

계속해서 톨킨의 예를 드는데, 대한민국의 많은 초기 판타지들이 톨킨의 세계관을 차용해 생산되었음은 <드래곤라자>와 <비상하는 매> 등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일본의 <로도스 전기>는 기억하기로 D&D 진행된 게임의 기록에서 출발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서양의 환상문학이 기사도 문학에서 시작된 자연발생적 문학이라면 동양의 초기 유럽형 판타지는 톨킨과 D&D 게임의 스토리보드에서 출발했기에, 매니아층의 팬덤 문화가 가져온 일종의 부산물에 가깝습니다. 한국의 무협과 판타지 모두 시작부터가 타인의 세계를 차용해오는 형태로 출발했기에 두 장르가 틀에 박힌 모습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독자층은 새롭게 생겨난 환상문학이라는 ‘장르’에 흥미를 얻었지만, 그 흥미만큼 다양한 연구를 시도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과정이 작용하고 있는 지는 대충 위의 텍스트들 <장르소설의 역사>, <장르소설의 한계와 극복>, <장르소설의 정형화>에서 충분히 설명했습니다. 

웹이 등장하면서 PC통신의 1세대 판타지보다 매니아층은 증가했으나, 텍스트의 소장을 원하는 오히려 줄어들었습니다. 기존 순문학이 문예지나 신문을 통해 텍스트로의 발현이 이루어졌던 것과는 달리, 환상문학은 대부분 웹을 통해 최초의 발현이 진행됩니다. 거기다 불법 텍스트 공유 등 웹에서는 통신에서보다 어둠의 루트를 통해 정보를 가져오는 것이 무척 쉬워졌죠. 때문에 장르소설시장에서 '책을 산다'는 의미는 '소장한다'는 것에 가깝게 해석됩니다. 웹을 통해 1차로 소비한 매체를 책이라는 아날로그적 장치를 통해 2차 소비하려 하는 소비자들이 많을까요? 대다수 소비자들의 목적은 재미 찾기, 시간 때우기에 가까워 책이 구매되는 2차 소비는 쉽게 진행되지 않습니다. 

깽깽이가 텍스트를 생산하는 목적은 입이 아프도록 짖어 왔습니다. 단순한 자기만족을 위한 텍스트이기에 특별한 목적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판도를 바꾸려 했다면 다시 뜻 있는 사람들을 모아 웹에서부터 문제를 뜯어 고치려 전문적 지식을 쌓고 있었을 겁니다. 생산된 텍스트는 각종 거대 장르소설 사이트에 게시했겠죠. 현재 깽깽이가 생산중인 장르소설 시리즈는 이해가 부족한 비판집단과, 자신들의 문화가 어떤 것인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옹호집단 둘 모두를 위한 이야기입니다. 왜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였으며, 무엇이 문제인가를 이야기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모든 칼럼이 변화나 개혁, 계몽을 말 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떠한 형태로 한계를 극복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앞선 텍스트에서 이미 이야기했으므로 생략하겠습니다. 

‘제대로 된 환상문학을 생산하자‘는 논지의 논설문을 쓰고자하는 목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미 지난 몇 년간 아무리 짖는 들 말 그대로 소수의 울부짖음은 개소리에 가깝게 해석됨을 깨달았고, 독자와 시장 텍스트의 생산자 셋 모두 전혀 변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인지했습니다. 적당히 하겠습니다. 

분위기와 명성을 떠나서 외국 환상문학이 천대받지 않는 건, 그게 재미있기 때문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소설이라는 장르는 기사도 문학에서 탄생한 것으로, 기사도 문학의 출발을 이해한다면 (참조 - [060520]황민우(예)- 노벨라(Novella)와 『돈 키호테 데 라 만차』) 설명이 빠르겠습니다. 유럽에서의 판타지는 신화의 발생, 소설의 탄생에 이어지는 단계적 변화의 과정에서 탄생했습니다. 한국의 유럽형 판타지는 유럽의 그것을 가져와 소비하는 과정에서 탄생했고요. 기존 문학도들의 입장에서 보면 조금 이례적이고도 갑작스런 일이 ‘한국 장르소설의 발생’입니다. 

한국의 무협과 판타지는 타국의 것을 그대로 답습하는 형태로 발전했습니다. 유럽의 판타지가 유입되어 새로운 독자층에 제공되면서부터, 새로운 독자들의 환상은 ‘중세 유럽’과 ‘중국대륙’에서 시작합니다. 이러한 독자들이 후에 텍스트의 생산자로 발전하며, 시장은 다시 전체 대중에 비해 지극히 소수인 독자층을 위하여 텍스트를 선별하고, 출판합니다. 악순환의 반복입니다. 

왜 이런 악순환이 생겨났느냐 하면, 장르소설의 탄생 자체가 이례적이고 갑작스러웠기에 순기능을 해줄 식자층이 부족했기 때문으로 평가됩니다. 소수 아마추어 비평집단이 있었지만, 장르소설을 하나의 학문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부족했습니다. 기득권을 쥔 세력은 제 밥그릇 챙기기 바빴습니다. 평론가나 비평가는 부족한데, 이들 평론가와 비평가의 논지를 받쳐줄 이론적 장치는 순문학에서 그대로 가져와야만 했고, 결국 시장을 비판하고 평가해 줄 이들이 사라집니다. 독자층에 의문을 품게 해줄 식자층이 전멸했습니다. 비판적 수용이 함께하지 못하기에 장르소설은 웹을 통해 2세대로 넘어가는 발전 과정에서 기형적 형태로 자라났습니다. 

한국에서 톨킨, 롤랑, 르 귄의 책이 팔린 까닭은 유행에 편승한 탓입니다. <반지의 제왕>, <게드전기>, <나니아 연대기> 등 세계 3대 판타지라 불리는 작품들이 헐리우드에서 영화로 제작되었고, 기존 매니아층이 주도하던 시장에 대중이 유입되면서 흥미를 품은 대중들이 소비자층으로 변환되었습니다. <해리포터>야 말할 것도 없이 유럽에서 먼저 붐이 일어났고요. 이들의 명성이 높아서라고 해석하기 보다는 광고와 언론매체들의 지원사격 덕이라 생각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작품들 중 <해리포터>를 제외하면 매체에서 때려대기 전에(혹은 영화화 되기 전에) 한국에서는 장르소설의 매니아층에게서만 알려져 있던 것들이었습니다. 

어쨌거나 실험적 소설, 독창적 소설이 출판되지 않는 건 모험을 감행하려는 마음이 없는 출판시장의 잘못입니다. 소비자층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참신하고도 흥미로운 텍스트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1세대 독자층이 구매력을 갖추었지만, 2세대 3세대 작가들의 텍스트가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만큼 우수한 것은 아닙니다. 이영도와 윤현승의 <드래곤라자>, <폴라리스 랩소디>, <하얀 늑대들> 같은 소설이 양장본으로 재탄생 한 건 그만큼 수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소장을 목적으로 책을 소비하는 매니아층은 1세대에 그랬던 것처럼 ‘새롭고도 흥미로운’ 텍스트가 제공된다면 얼마든지 지갑을 열게 될 겁니다. <드래곤라자>, <묵향>, <비뢰도> 등은 그런 측면에서 수십만 권이 팔렸죠. 

말이 길어졌습니다만 이정도면 한들씨의 물음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나머지는 전의 텍스트들과 내글/후기에 있는 <반지제왕 보고서>, <환상소설과 문학의 범주에 대한 선전포고>를 참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더 설명하기도 귀찮아요. 2009-02-24
03:20:07
  

 

상병 홍도형 
  ... 파전이든 해물파전이든 김치전이든 똑같은 밀가루에서 탄생되었다고 해서 그 녀석들이 맛있다는 사실이 변하는건 아니잖아요. 

뭐 그러다 사람들이 그거에 질리면 녹두전도 먹고 하겠죠. 

왜 꼭 파전을 밀가루로만 만드느냐 하고 욕하기보단 다른 요리법을 소개해 보아요. 2009-02-24
08:33:53
  

 

상병 김호균 
  이전의 2개의 글 참 재미있게 읽었었는데, 또 써주셨군요 
천천히 잘 읽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