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어느 도시주의자의 고백 - 미아6동 최후의 날  
병장 김민규  [Homepage]  2009-01-21 22:26:15, 조회: 223, 추천:1 

어느 도시주의자의 고백 - 미아6동 최후의 날
2009. 1. 21, Minkiw


  고백하건대 나는 도시주의자다. 반듯반듯한 길들 사이에 우물정자 모양으로 촘촘히 들어선 비슷비슷한 모양의 아이보리색 벌집 한 칸에 살며, 그 정글짐같은 도시를 ‘ㄹ’자로 구불구불 지나다니는 파란색 버스 위에 올라타 한달음에 나를 저 다른 곳으로 데려다줄 지하철을 찾는다.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은 쾌적하고 깨끗하다. 푸른 잔디가 깔려있는 넓은 중앙공원, 신호등, 차, 학교, 태권도학원, 차, 아파트, 신호등, 횡단보도, 병원, 우체국, 주차장, 신호등, 아파트, 음식점, 피아노학원, 차, 아파트를 지나 또다른 음식점 앞에 내린다. 그러고보면 이곳은 모든 필요한 것들을 고배율로 복제해 놓은 세계의 모음집이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는 60명 정원의 반이 학년당 여덟 개씩 있었다. 그나마도- 3학년 땐가, 인근에 새로 학교가 하나 생기면서 한 반에서 대여섯명씩을 차출해 보내고 덩치를 줄인 덕분에 2800명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초등학교가 전교생 삼천명이라니, 너무 많잖아? 줄여.’

  모든 것을 한 곳에 집약해놓은 결과로,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다양한 ‘문화 혜택’에 기뻐했다. 동양 최대 사이즈라는 알쥐 백화점의 외벽에는 배용준이 사랑해요를 외치며 싱긋 웃고 있고, 경쟁이나 하듯 그 바로 옆에는 르까프 친구 까르프가 빵빵한 주차시설을 내세워 덤핑을 했다. 모든 것은 블록 단위로 조직되고 구성되었다. GPS 좌표를 찍듯 (241,375)블럭의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241,374)블럭의 문화센터에서 수영을 배운 후, (242,380) 블록의 동사무소에 들러 학교에 갖다 낼 주민등록초본을 발급받고, (237,375)블럭의 집 앞 문방구에서 새로 나온 기념우표가 없나 살펴보고는 돌아오는 것이 일상이었다. 내가 필요로 하는 소시민적 편의시설은 모두 주위에 있었고 그것은 아주 진보된, 신시대에 걸맞는 생활양식으로 생각되었다. 구질구질한 재래시장 따위, 냄새가 나는 데다 바닥에는 물까지 고여 있으니, 도저히 왜 가는지 알 도리가 없다.

  모든 것이 효율과 집적의 원리로 작동하는 이 도시에서, 에너지 활용의 문제를 같은 관점의 매커니즘으로 해결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도시 북쪽 끄트머리의 고속도로변에는, 재활용 쓰레기 수집장과 함께 열병합발전소가 80m짜리 굴뚝을 하늘높이 들이대며 하나의 스카이라인을 형성하고 있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탑 너머로 살짝 튀어나온 그 시뻘건 굴뚝은 이 도시를 돌아가게 하는 상징적 존재였다. 도시 안에서 배출된 모든 쓰레기는 이곳으로 와 태워졌고 그 열량은 고스란히 도시난방을 위한 온수를 덥히는 데에, 그리고 전기를 만드는 것에 쓰였다. 어찌된 영문인지 하늘에는 다이옥신이 떠다니고 발전소 옆 굴포천은 날이 갈수록 수질이 악화되었지만, 그 까닭을 따져 묻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쓰레기를 먹어치워주는 것도 고마운데 한 달에 삼만원도 안 되는 비용에 온수와 난방을 해결해 준다는 데에 환호하며, 그저 서울의 직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제촉하며 무심히 앞을 향해 달려갈 뿐이었다.

  시민들은 평준화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궁극적으로는 가진 재력의 정도에 따라 서로 다른 구역 -우리는 이것을 마을이라 불렀다- 에 살게끔 유도되기는 했지만, 대부분 삼사십대의, 자신을 중산층이라 칭하는 - 그러나 제대로 된 기준치를 적용해 보면 그저 소시민들에 불과했던 -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어떤 정서적 이질감이나 갈등의 소지는 없었다. 획일화된 사고방식은 오늘도 아침 일찍 출근하여 열심히 일하고 늦은 시간 곰 같은 마누라와 여우같은 자식 - 그래, 그들도 그 정도는 알았다 - 을 마주하며 TV 앞에 둘러앉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했다. 바로 문밖 옆집에 누가 사는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다만 윗층의 쿵쾅거리는 저 놈의 자식은 밤에 잠도 없는지를 궁금히 여기며 인터폰을 울려 정중한 항의를 했을 뿐이다. 관심사가 분산될 소지는 적었다. 주말이면 동네 공원에 나가 한 바퀴 돌며 배드민턴이나 치고, (245,378)블럭의 음식점에 들어가 외식을 하며 ‘오늘은 맑음’을 상기하면 충분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인생이었다.




  이것이 나의 열 살부터의 유년기를 지배하던 공간적 배경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막 익숙해지려는 순간, 나는 완전히 새로운 다른 풍경에 빠져들어야 했다. 한 학년에 80명밖에 없는 촌동네 학교로의 전학 - ‘광역시’라는 이름에 최소한의 집적도를 기대한 나의 허영은 무참히 깨졌다. 아파트 열 세동이 달랑 서 있는 논밭 한가운데의 ‘전원 벌집’으로 옮겨감과 동시에, 삶의 모양은 급속히 변해갔다. 길은 구불구불하고 고물 마을버스는 털털거리며 불규칙하게 왔다. 서점에라도 한 번 가려면 공사판의 2차선 도로를 굽이굽이 지나 ‘읍내’(물론 내가 살던 곳에도 그놈의 읍내에도 ‘동’이라는 점잖은 호칭이 붙어 있었다)에 나가야 했고, 그만큼 내가 현대적 문화를 맛볼 수 있는 기회는 극도로 축소되었다. 그 흔한 PC방 하나 생겨나지 않아, 그나마 집에 인터넷이 들어온다는 사실에 안도해야 할 판이었다.

  친구들의 배경은 모두가 제각각이었다. 처음 만난 한 녀석은 집에서 오리농장을 겸한 영양탕 식당을 한다고 했고, 두 번째 녀석은 짐작건대 외국인 노동자의 혼혈아였다. 어디나 그렇듯 유난히 주위의 이목을 끄는 사내녀석이 있었는데, 키도 훤칠한데다 얼굴은 순정만화에 나올 듯이 생겨서, 알고보니 논을 이만 평인가 갖고 있는 지역 유지의 아들이라 했다. (그당시 이미 그 집에는 50인치짜리 프로젝션 TV가 있었다) 그 다음에 만난 친구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NEXT와 김경호에 빠져 있었는데, 기스 때문에 온통 뿌연 은테 안경을 끼고 투덜대며 다니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았듯, 인근 부대 주임원사의 아들이라는 심상치 않은 배경을 갖고 있었다. 
  이런 ‘원주민’이 내 주변의 절반을 이루고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또 저마다의 사연들을 갖고 있었다. 집안의 사업 실패로 강남에서 건너왔다는 전교1등과(역시 전교1등은 전교1등인지, 중학생인 주제에 그래도 서울까지 매일 학원을 다녔고, 후의 일이지만 결국은 재수해서 약대를 갔다), 공무원 아버지를 둔 ‘품바’녀석, 새로 생긴 상가 문방구집 쌍둥이, 아버지가 무슨 고등학교 핸드볼 감독이라는 꺽다리까지, 모두의 특징은 ‘소위 중산층’의 자식들이라는 데 있었다. 모두는 급격한 환경변화에 생소해했지만, 또 그 또래의 호기심으로 그것을 극복하며 주변을 탐색해나갔다. 당연히 ‘토착민’과의 갈등이 자주 불거지곤 했지만, 양 패로 갈려 싸우기엔 우린 너무 어렸다. 그런 정치적 약삭바름을 실천하기에는 아직은 순진했던 까닭이다.

  나는 산과 들에서 노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별 희한한 종류의 놀이감들이 그곳에는 지천으로 널려있었다. 알라칸 하늘소라고 불렀던, 까만 등에 하얀 반점들이 듬성듬성 박혀 있고 그 몸통보다도 길었던 더듬이를 뱅뱅 돌리고서는 날아가곤 했던 그 녀석들을 뽕나무 주위를 서성이며 잡으면서, 욕심이 과해 두세마리를 한꺼번에 들고 있으려다 그 우왁스러운 턱에 물려 손가락에 피가 나면서도, 그 자체가 주는 신비감에 완전히 매료되었던 것 같다. 공간은 내가 알던 그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조직되어 있었다. 같은 격자라도 논의 격자는 매번 불규칙해서, 한치의 오차 없이 블록 단위로 모든 것이 짜여 있던 그 전의 모양과는 영 딴판이었다. 길은 곧게 뻗어가는 듯 하다가도 굽어져 그 끝에는 무엇이 튀어나올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어쩌다 사슴벌레라도 잡는 날에는, 학교에 들고가 어떻게 자랑을 할까 하는 마음에 밤잠을 못 이루곤 했었다. 아침이 되면 영락없이 힘이 죽 빠져 어제의 팔팔한 그 녀석이 아니었지만. 
  언젠가 한 번은, 농사를 짓는다는 친구네 집에 놀러갔던 적이 있었다. 논두렁 사이의 수로에 빠져 한참을 허우적거리며 놀다 그 뻘에 손을 집어 넣었는데, 큼지막한 조개가 잡혀 올라오지 않겠는가. 친구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어린 눈에는 입을 딱딱거리며 뭍에 꺼내놔도 돌아다니는 모양이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외지인’이라는 질투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나 스스로가 그런 편견을 안기에는 너무도 소박한 어린애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느리고 관대하게 세상을 살아갈 줄 아는 ‘토착민’들의 삶의 자세에 힘입은 바가 컸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산과 들에서의 경험은 일상속의 소소한 유희일 수는 있었지만, 그 자체가 일상은 아니었다. 여전히 아버지는 육차선 간선도로를 따라 통근을 했고, 입시에 대한 불안과 효율성을 향한 끝없는 경주는 그곳에라고 존재하지 않을 리 만무했다. 거기다 더욱 본격적인 재앙이 닥쳤다. 재활용 쓰레기 재처리시설 - 이라고 쓰고 소각로라고 읽는다 - 이 집 바로 코앞 야산에 들어오겠다며 공사를 시작하는 통에 주민들이 단체로 몰려가 시커먼 시멘트 차량 앞에 드러눕는가 하면(심지어 시멘트를 덮어쓴 사람도 있었다. 저항의 현장에서는 항상 저항하는 자가 극렬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극렬히도 비상식적인 대우를 받고야 만다는 것을 그때 알았어야 했다) 구불구불한 동네의 2차선 도로가 지겨웠던 이들은 전교생 500명짜리 초등학교 앞으로 6차선의 우회도로를 내기 시작했다. ‘읍내’로 향하는 길에는 지하철이 깔리고, 그 위에는 당연히 새로운 직선도로가 났다. 거기다 외곽순환고속도로가 공중으로 놓이고 놓여 내가 조개를 잡았던 그 수로를 집어삼키고야 말았고, 신공항 철도와 고속도로가 놓인 탓에 중학교와 집 사이에는 커다란 고가도로의 장벽이 생겼다. 그 정도였으면 다행이었으리라. 한강 하류의 만성적으로 불안정한 수위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표면적 이유를 내세운 사실상의 운하 공사는,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고가도로 아래를 지나 다리를 건너야만 하게끔, 깊은 개울을 만들어냈다. 편리해진 교통만큼이나 ‘읍내’의 아이들이 촌구석 학교로 유입되기 시작해, 전교생 250명에 불과했던 내 모교는, 지금에 와서는 천여명의 학생을 키우는 사층짜리 건물로 증축되었다.
  마을버스는 파란 시내버스로 대체되었고 한 시간씩 걸리던 시내까지의 거리는 이십여분으로 단축되었다. 슈퍼가 망하고 그 자리에 편의점이 들어오는 사이에, ‘알라칸 하늘소’도, 사슴벌레도, 그리고 수로의 민물조개도 이제는 옛 일이 되어 추억으로 기억될 뿐이다. 결국은 다시 문명 속으로 편입되어가는 전원을 바라보며, 아쉬움에 발을 구르기보다는 도리어 그간 누리지 못했던 문화적 혜택들을 되찾겠다는 보상심리를 강화했던 나다. 그리고 서울 한복판으로 이사를 했다.





  다시 돌아온 계획도시는 황홀했다. 서울에서도 특별히 공을 들여서, 논바닥을 갈아엎고 처음부터 차근차근 설계했다는 나무 많은 그 동네였다. 건물들은 미친듯이 올라갔다. 주거용 건물로는 국내에서 최고층 수준인 69층짜리를 필두로 해서, 그 옆에는 삼사십층을 가볍게 오르내리는 주상복합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 위에서는 여의도가 훤히 내려보인다느니, 비 오는 날이면 구름이 걸린다느니, 엘리베이터가 고속으로 올라가다 제때 못 멈추어 서 옥상에 부딪혀 사람이 죽었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이 떠돌았다. 인구의 고밀도 집적은 상권의 폭발적 팽창을 이루어냈다. 멀티플렉스 극장이 두 개나 들어왔고, 그 옆에는 각 브랜드별로 온갖 커피점이 다 들어섰다. 일방통행과 곡선이 많아 복잡해 보이기는 했지만, 막상 룰을 알고보니 전형적인 격자 설계였던 계획적 공간은, 치밀하게 사람들의 동선을 규정했다. 저 길 끝에 무엇이 있을지 나는 알 수 있었다. 최첨단을 달리는 외형만큼이나 생활의 모양 역시도 그러해서, 기가비트 랜카드를 장착하면 100mb를 넘어 130mbps까지 인터넷 속도를 올릴 수 있었고, 근처의 지하철은 십오분이면 나를 한강 고수부지에 데려다 주었다.

  조금 멀리 점프해 광화문에라도 가는 날에는, 그 깔끔한 교보 빌딩과 국세청 종로타워의 위압감있는 모습에 흠뻑 취했다. 과거의 기억이 준 교훈에 의하면 우중충한 종로 거리는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어차피 때가 되니 다 갈아엎고 재개발하던 장면을 두 눈으로 목격하지 않았던가. 소상인들이 자리를 떠난 자리, 그의 시장 재임시절 최대의 치적으로 평가받는 청계천 물길을 걸으며 세련됨의 추구가 불러오는 심미적 효과에 대해 생각했다. 가끔 헐리우드 극장 뒤편의 돼지국밥집에 들러 삼천 원짜리 국밥을 맛보면서도, 내가 느꼈던 생소한 안도감은 그저 논 사이 수로에서 민물조개를 잡았던 것 마냥 비일상적인 것이었을 뿐, 그 이상의 의미는 갖지 못했다. 골목이 주는 제각각의 이야기는 관심 밖이었다. 그랬기에, 나는 그토록 종로 거리를 쏘다니면서도 단성사에 눈길한 번 주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일 게다.

  심시티 매니아로 개발의 가능성을 철저하게 숭배해온 나였기에, 대학에 들어가 건물들에 서린 세월의 흔적을 보았을 때, 왜 저런 건물들을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인지 의아해하며 추진력없는 재단과 학교본부를 탓했었다. 후문 너머 아현동의 까마득한 연립주택 군락을 바라볼때마다, 서울 시내에 땅이 없다더니 아직도 개발여력이 저만큼이나 남아 있다고 말했었다. 가끔 부산 외할머니 댁에 찾아가면, 아미동에서부터 용두산공원에 이르기까지 그 넓은 땅에 펼쳐져 있는 저밀도 주거의 모습을 보며, 그것에 낙후의 낙인을 찍을만큼 나는 과감했다. 내가 원하는 도시의 이상향은 테헤란로에 있었다. 고밀도의 개발은 주위의 환경을 확실히 개선한다. 증가한 용적율만큼 지상에는 남겨둘 수 있는 여유분의 땅이 생긴다. 압구정 재개발의 청사진을 보면서, 저것이야말로 미래 주거의 모습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런 내게 용산 한복판의 저밀도 평지는, 두고 보기 안타까운 것이었다.





  강북으로 터전을 옮기고 미아6동이 뉴타운 개발이라는 명목하에 몽땅 잘려 나가는 - 말 그대로, 산 하나가 잘려나갔다. 래미안이 들어온 거대한 구덩이 사방에는 40m 높이의 거대한 축대가 세워졌다 - 풍경을 보면서 별다른 감흥을 받았을 리 없다. 철거민들이 농성을 벌이고 연일 현수막을 걸며 자신들의 처지를 알리고자 했지만, 높은 23층 아파트 위에서 그 장면을 내다보는 입장에서는, 그저 얄팍한 보상금 투쟁 이상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아마도 와닿지 않았을 것이다. 산과 들을 쏘다니던 유년 시절과는 달리, ‘원주민’과 나 사이에는 굳건한 담벼락이 놓여 있었다. 내게 있어서 지하철 역으로 내려가는 통로는 버스가 다니는 큰길 하나뿐이었다. 구획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구불구불한 골목길은, 자칫하면 길이나 잃어버리기 딱 좋은 미로일 뿐이었다. 게다가 서울에서도 유명한 달동네 아닌가. 굳이 찾아들어갈 이유는 없었다.

  정말로 미아6동 최후의 날은 임박해 왔다. 건물마다 각종 번호가 빨간 스프레이로 표시되고 문짝에는 철거예정을 알리는 집행통지서가 나붙었다. 이제는 더 이상 결집할 힘도 남아있지 않던 ‘토착민’들은, 어느새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왜였을까. 문득, 나는 그 골목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그것을 보지 못할 것만 같은 위기감이 벌컥 들었다. 그러나 지독히도 오만했던 스스로를 용서하고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누군가 손가락질을 하며 비난할 것만 같았다. 며칠을 고민하며 미루던 끝에, 나는 그 막혀있던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아직도 사람의 체온이 남아 있는 건물 몇몇은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모르는 듯 언제나처럼 평화로워 보였다. 시멘트가 덕지덕지 발라져 있는 계단 구석에는 억척스럽게도 민들레며 온갖 잡풀이 삐져나와 생명의 힘을 증명했다. 끝이 깨진 배수 파이프는 항상 그래왔듯 거꾸로 서서 위에서 아래로 빗물을 받아낼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 아래로 눈길을 따라 내려가니 하수 배관이 있음을 알리는 플라스틱 맨홀이 얼마나 오래 거기 있었는지도 모르게 잔뜩 먼지를 품으며 웅크려 있었다. 좌우로 담벼락이 나란히 서서 산을 오르는데, 그 불규칙한 장면들의 조화에 나는 감히 반해버렸다. 빨간 지붕과 파란 사립문, 그리고 회색빛의 삭막한 시멘트들 뿐이었지만, 그것이야말로 현대사회가 주장하는 개발의 진면목이자 순기능의 증거였을 것이다.
  비록 일상 속의 작은 유희일지언정, 내게는 너무도 먼 논두렁 수로의 민물조개일지언정, 잠시나마 동정과 연민 이상의 그 무엇을 느꼈던 것 같다. 그것이야말로 살아있는 생의 감각이었다. 한참을 말을 잃고 그 풍경 안에서 허우적거리다, 울면서 나는 걸어나왔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이, 길을 잃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운명적인 발걸음이 있고서 불과 삼일 후에, 그 모든 것은 자취를 감추었다. 해머와 포크레인은 우왁스럽게 지붕을 짓눌러 뭉겠고, 끝까지 자리를 고수하던 여관 하나는 ‘알박기’라는 비판 끝에 결국은 물러나고 말았다. 요즘은 법이 개정되어 전체 공사부지의 몇 퍼센트 이상을 매입하기만 하면, 그 나머지 여분에 대해서도 강제집행을 할 수 있는 어느정도의 권리가 생긴다고 했다. 사람들은 홀연히 사라졌다. 그 모든 삶의 흔적을 파묻고 들어선 래미안으로 입성했을 리는 없었고, 아마도 어딘가 새로운 터전을 찾아 긴 디아스포라를 떠났으리라.

  흙투성이의 공사판을 이제는 군인이 되어 휴가때나 겨우 지나다니면서, 나는 우리 집으로 들어서는 진입로가 4차선의 평탄한 길로 바뀌었음을 알아챘지만, 더 이상 그것을 환영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들어선 개발의 산물은 토착민들의 것이 아니었듯, 내 집일 수도 없었다. 머지않아 가정을 꾸리고 부동산을 전전해야 할 처지의 스스로에게 있어, 최첨단의 아파트는 멀기만 한 환상의 누각이었다. 마침 그 때는 크리스마스를 얼마 앞두지 않은 연말이었고, 나는 예수의 탄생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던 즈음이었다.

  수많은 여관방을 두고도 누울 자리가 없어 마굿간에서 태어난 예수의 모습은 현대사회에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나 주택이 널리 보급되고 온 천지에 건물로 도배가 되어 공터라곤 찾아볼 수가 없는데, 그 화려함 속 인간으로서 주장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이 없는 지금의 비극은, 곧 육신이 된 말씀에게 첫 번째로 찾아온 한파였으리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며 나를 괴롭게 했다. TV에 나온 해외토픽은 그런 격정을 더욱 심화시켰다. 도쿄의 한 구석에, 우리 나라로 치면 고시원보다도 작은 방이 한 층에 삼사십개씩 몰려 있는, 이른바 남대문식 쪽방이 경기침체에 따른 불황으로 각광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컴퓨터가 놓인 책상만큼의 공간까지 제하고 나니 발 뻗고 눕기에도 힘겨워 보이는 그 작은 공간에서, 누군가는 미래를 꿈꾸며 작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현실을 재인식할 필요성이 비로소 대두되었고, 그때까지의 강박적 개발론은, 이제는 감히 돌아볼수조차 없었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 집이 있는 것인데, 허상의 물신주의로 앞뒤가 바뀐 생각을 하며 바벨탑을 쌓고 있던 자신을 보고야 말았던 것이다. 새로운 차원에의 발전을 위해서는 기존의 것을 깨고 나가야만 하는 것이 진리이겠지만, 그 안에 녹아있던 삶을 부정해가면서까지 밀어붙여야 할 정도로 절박한 것인가. 그것이 발전이고 진보라면 나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대항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 시내 곳곳에서는 대규모 프로젝트가 의욕적으로 추진되었고, 나의 이런 잠시간의 소회도 바쁜 현실에 밀려 잊혀졌다. 아마도 그와는 무관한 삶을 살아갈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스물 여섯을 꿈꾸며, 화려한 미래의 가능성을 기대하며, 래미안의 문을 열고 들어갈 나 자신을 상상하며 허공에 떠 있었다. 치열한 현실감각은 무뎌져 관념적 경제논리가 다시 마음속에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깨어나도 다시 잠들고, 울어도 다시 잊으며 나와 무관한 세계에 대해서는 마음을 닫고 살아가는 나다.





  Epilogue.

  경제적인 이유로 촉발된 갈등은 지극히 경제적인 방법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내가 믿는 바다. 몇 억을 투자해 권리금을 깔아가며 시내 한복판에서의 사업을 하던 장사꾼들은, 세입자라는 이유로 달랑 이천 만원의 보상금을 손에 쥔 채 삶의 모든 기반을 잃을 처지에 내몰렸다. 자신들의 억울한 처지를 알리기에는, 그들은 지금까지 너무도 평범한 삶을 살아왔다. 아마도 진심은 통하리라고 믿으며 세상과의 대화를 시도했을 것이다.

  완전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내가 미아동 현장에서 보았던 그 ‘연합회’들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나타났을 것이다. 사실은 그 어떤 이해관계를 공유하지도 않는 외지인들은, 억울한 마음의 그들을 부추겨 무언가 숨은 의도를 관철하고자 했을 것이다.1) 언제 한 번 유리병을 들어봤던 적이 없었을 그들의 손놀림이 익숙해 보였던 것은 아마도 그런 연유일 것이다.

  삽시간에 삶의 터전은 시가전의 현장이 되었고 그들은 진압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누구도 의도하지 않은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다. 좀더 섬세하게, 좀더 대비책을 갖추고 접근했어야 할 권력은 그저 불썽사나운 이들을 쓸어내는 것에 급급했다. 이것은 ‘원주민’에 대한 분노보다는, 아마도 그러한 ‘작전세력’에 대한 오랜 감정이 폭발한 탓이 아니었을까. 대표성을 부여했다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로 접근은 서툴렀다. 그 어떤 핑계로도 그런 미숙에 대한 책임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안타깝다. 내몰고 내몰려야 하며, 빼앗기고 빼앗으며 그 자리에 들어서야 하는 우리의 잔혹성이 너무도 슬프다. 부가가치를 얻어내기 위해서 완고한 질량보존의 법칙을 같은 맥락으로 적용해야 하는, 이 물리력의 세계가 원망스러울 뿐이다. 달리 무엇을 탓할 수 있겠는가. 너도 나도, 다 똑같은 인간인 것을.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은 희생을 감내해야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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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월간 ‘말’은 가장 주도적이고 대표적인 연합회 한 곳이 이권을 위해 개입해 ‘원주민’을 배제하고 일방적인 밀실협상을 하는 것을 폭로한 적이 있다. 그리고 발간 직후, 사무실은 처절하게 테러를 당했다. 놀랍게도 모두가 모르고 지나간 이 소식은, 우리가 예상하는 그 기성언론들이 아닌, 오마이치킨을 사랑하는 한 진보소식지가, 그의 표현을 빌려  ‘참담한 심정으로’ 세상에 전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6
13:42:06 

 

병장 김민규 
  쓰지 않으면 정말로 미칠 것 같아 급하게 토해내듯이 적었습니다. 아마도 다시 읽으면 부끄러워 여기저기 손을 댈 것이 분명합니다. 미칠듯이 괴롭고, 마음 한켠이 무너질듯 무거우며, 눈에는 물기가 마르지를 않습니다. 아마도 꽤나 저돌적인 - 어쩌면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주제일 수 있겠지만, 안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까마득한 밤이 될 것 같습니다. 2009-01-21
22:35:16
  

 

상병 이석재 
  잘봤습니다. 허허 2009-01-21
22:42:43
  

 

일병 이신호 
  참 이런 글을 보면서 '도시화'라는게 항상 좋은 쪽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라고 

생각이 들게 합니다. 

물론 어떤 한 쪽이 이득을 보기위해 다른 쪽이 손해를 보는 것이 세상 사는데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 손해를 보는 쪽을 좀 더 포용했어야 하는 것이 권력자의 이상적인 

모습이 맞지 않은가 생각해 보지만 역시나 이 생각 또한 내 생각일 뿐인 것 같습니다.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웃음) 2009-01-21
22:45:06
  

 

상병 김형태 
  어릴적살던풍경이그리워서인지, 
대부분의 분들이 그렇듯이 높이높이 솟은 건물들보다는 
아직 띄엄띄엄있는 낡은 집들이 너무 좋습니다 

또 그곳에서 여유를 찾을 수 있는 것 같고요 
허허허 

상관없는 얘기였죠? 
암튼, 잘 읽고 생각합니다 뿅 2009-01-21
22:53:25
  

 

일병 송기화 
  울것같습니다. 
감사합니다. 2009-01-22
07:55:20
  

 

병장 고동기 
  『부동산 계급사회』-손낙구, 후마니타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집을 소유한 사람이 혼자서 1,000여 채 정도의 집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미 주택 보급률은 100%넘어 남아돌고 있는데, 아직도 집이 없는 사람들은 넘쳐납니다. 
소수의 땅부자들이 전 국토의 절반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그들이 소유한 땅들은 끊임없이 황금을 뱉어내니…땅은 땅을 낳고, 집은 집을 낳고. 
그러니 집 없고 땅 없는 사람들은 비닐하우스, 판자집, 옥탑방, 동굴에서 살 수 밖에 없지요. 저도 이 책을 읽고 나서 알게 된 일인데 정말로 동굴에서 사는 사람들이 아직도 존재합니다. 이들이 과연 동굴에서 살고 싶어서 살고 있는걸까요. 2009-01-22
09:16:17
  

 

상병 김예찬 
  잘 구획된 근대 도시에 대해 환상과 환멸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저에게는 매우 공감되는 글입니다. 들려오는 소식들에 너무 마음이 아프네요. (어제 종로에서 옛 전통 놀이가 부활했다는 소식이 들리더군요. 석전, 이라고.) 2009-01-22
09:20:45
  

 

병장 이동석 
  요새 복고가 유행이라더니, 가끔 뉴스를 보면 지금이 몇년인지도 헷갈립니다. 

가끔 우리가 점점 더 불행해진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게, 음. 
무슨 말을 하기에도 벅차군요. 짜릿짜릿하니 좋네요. 가지로- 2009-01-22
11:04:56
 

 

상병 이동열 
  동슥님 말씀이 쏙쏙 들어오는군요- 
도대체 저는 언제 어디에 서있는것인지 분간이 안 갈때가 많습니다... 가슴이 아픕니다... 
어떻게든 시사지 한권 구해야겠군요, 물론 제가 늘 보던걸로(울음) 2009-01-22
12:17:07
  

 

상병 김성호 
  minkiw병장님 잘 읽었습니다. 
저는 이사람들과 대화는 잘 통하지는 않을것 같지만. 
어찌하겠습니까. 다 똑같은 인간인것을. 
김청장曰"보고받았을 뿐이고"라는데 
옛날 뭔가 깨달을려면 항상 뭔가를 잃곤 했는데 
잃어도 깨닫는게 없는 요즘인것 같습니다. 

근데 우리동네는 아직도 집에 하늘소가 들어오는거지? 2009-01-22
12:39:39
  

 

병장 고은호 
  마음에 정말 맺히네요. 
하소연하자니 아무데도 이야기를 들어주는 곳이 없고, 
가만히 당하자니 정말 온 가족이 굶어 죽을 판이고... 

이들의 이야기가 곧 우리네 이야기라는 생각에 
그저 가슴이 아플 따름입니다. 

휴우- 2009-01-22
16:25:18
  

 

병장 이우중 
  'W의 기억'을 써 주신 김원택님은 집에 가셨겠죠? 
잘 읽었습니다. 뭔가 고민해야 될 것 같아요. 2009-01-22
18:59:54
  

 

병장 이동석 
  김원택님은 막판에 좀 안 좋게 집에 가신걸로 들었습니다. 뭐 건너건너- 그래서 저녁인사도 못남겼더라- 이런 이야길 들은것 같아요. 

그리고 보니 김원택님 한번 연락해봐야겠네요. 서울대 행정대학원으로 전화하면 되나? 흐흐. 2009-01-22
21:50:56
 

 

병장 김민규 
  후아, 우리에겐 정말 많은 해나가야 할 이야기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건 사회적 합의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솔직하게 우리의 사회 경제 시스템 전반에 대한 물음을 던져야 할 것이고, 시중의 유동자금이 갈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주택이 상품으로 취급되어 본질적 의의를 잃어버리고 있는 작금의 상황은, 분명 해결해야 할 모순입니다. 

그러나 참 어렵습니다. 무슨 말로 시작해 어떤 것들을 지적해 나가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아요. 뻔한 이야기는 할 수 있겠는데, '그래서 어쩌자고'라고 되물으면 무너질 것 같습니다. 동정과 연민 이상의, 현실적인 무언가가 필요한 시점인 것 같은데 말이죠. 

머리 좀 굴려 봐야겠습니다. 광폭한 휴머니스트가 된 건 좋았는데, 그 다음이 문제로군요. 2009-01-23
00:04:02
  

 

일병 박재선 
  그렇습니다. 
이건 사회적합의-무슨 북유럽식 노사정합의도 아니고-에 의한 문제가 아닙니다. 모순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신Z유주의와 부르Z아민주주의가 낳은 필연적인 한계에 부딪힌 인간 이성의 본능적 저항의지 표현입니다. 
미시적 논의-예를 들어 각주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여론의 역풍을 맞을 만한 전철연인지 방패연인지 하는 단체에서 밀실협상을 했던지하는 사실 여부 확인도 중요하겠지만, 소수자들의 인권과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연대의 문제, 인간의 양심을 지키기 위한 문제-와 더불어 체제비판적 거시적 논의도 당연히 수반되어야 할 '시점'이며, 이미 그 시점이 시작되었어야 옳았으나 지적양심을 가진 진보적 인간이라면 이미 시점이 지난지 너무 오래되어 늦어버린 것 아닌가 스스로 반성해야 옳을 듯 합니다. 
비슷한 주제로 칼럼을 생각했는데, 좋은 글이 이미 있으므로 저는 쓸 필요가 없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2009-01-23
13:52:00
  

 

병장 김민규 
  재선님, 리플이 정말로 명문입니다. 반쪽짜리 글을 값나가게 해주신 것 같습니다. 

진실로, "이미 그 시점이 시작되었어야 옳았으나 지적양심을 가진 진보적 인간이라면 이미 시점이 지난지 너무 오래되어 늦어버린 것 아닌가 스스로 반성해야 옳"습니다. 유감스러운 사태는 우리가 덮어두었던 고름을 다시금 돌아보게 할 겁니다. 파괴적 비판으로 그쳐서는 안될 겁니다. 이미 문제제기는 이루어졌으니까요. 

그래서 더 재선님의 글을 기다립니다. 이제는 무너진 기초를 다시 쌓을 때라는 생각이 듭니다. 흐트러진 현재에 대한 건설적이고 정중한 제언- 비록 듣는 이 없을지언정, 끓어오르는 우리의 가슴에 새겨져 현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할 겁니다. 

저부터가, 더 깊은 눈물로 반성해야 마땅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일어설 겁니다. 2009-01-23
14:12:50
  

 

병장 정병훈 
  이거, 눈아파서 프린트해서 보고 느낀점을 쓰러 왔더니, 다들 얘기가 어렵군요. 제가 끼어 들어야 할 자리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몇자 뿌직- 질러 놓고 가야겠습니다. 

민규형이 경제학과인가요. 제가 기억하기론 그런데, 경제를 배워 본 적이 없는 본인은 생각합니다. 대다수의 경제학도들의 마인드는 최대한의 이익을 내기 위해 최소한의 투자로 이익을 내는데 집중하죠. 가장 기본이겠죠. 아닌가요? 경제활동에서의 메인은 그것이라 생각합니다만, 경제학도의 의견은 뭐- 개인에 따라 다를 수도 있겠군요. 

어째껀, 그런 의미에서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이익을 내는 행위) 경제학도인 민규형의 이러한 고민은 가끔 슬픕니다. 너무나 인간적입니다. 조금은 냉철하고 조금의 이익을 낼 수 있는 방법이라면 이익을 창출하는것에 신경을 써야 하지만, 지금의 모습은 글쎄요. 제가 생각하는 그것과는 괴리가 좀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나쁜것은 아니지만 말이죠. 

무슨 소리냐. 그러니까. 제가 생각하는 경제인의 뇌 구조와 민규형의 뇌 구조는 조금 다른 듯 느껴진다는 얘기입니다. 그것이 좋은 얘기일 수도 있고, 기분 나쁜 얘기일 수도 있겠죠. 

이건 마치 모순적인 얘기입니다. 경제학을 모르지만, 경제학을 한다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대단히 이성적이고 계산적이라는 얘기를 많이 들은 터라, 당신의 이런 사유는(수많은 곡해와 오독의 결과로 얻은 개인적인 느낌에 따라)모순적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대단히 긍정적입니다. 이런 느낌은 마치 당대 최고의 과학자들은 과학으론 설명할 수 없는 기독교(기타 종교)를 믿음으로 또 다른 모순의 형태를 보여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이런 생각은 독보다는, 약이 되리라 예상합니다. 


[요약. 재밌게 잘 봤습니다만, 이거 너무 크나큰 곡해인가요? 푸하하. 분석하지 않고, 느끼는 그대로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것을 곡해했다 말하지 않으렵니다. 물론 당신이 의도했던 것과 벗어나는 댓글이라 할 지라도 이것이 내가 느낀 그것인걸 어찌합니까. 낄낄낄-] 2009-01-23
22:40:43
  

 

병장 정병훈 
  오랜만에 마치 배설적인 댓글이 되었군요. 낄낄낄- 막장 정병훈. 2009-01-23
22:41:51
  

 

병장 김민규 
  이토록 공을 들여 준 리플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두어 줄 적어야겠습니다. 허허. 

1. 사실은 경영학과입니다. 이건 치과와 치위생과 치기공의 차이만큼 미묘하면서 엄밀한 것이기는 한데, 중요하진 않아요. 경제학을 복수전공, 더 나아가 학위까지 해보고 싶은 생각이 꽤나 있었으니까. 지금은 그게 본인의 잔대가리에 대한 맹신이었음을 깨달아버려서 말았습니다. 

2. 배분의 문제를 공정하고 인간미있게 해결할 수 있다면, 최소한의 input으로 최대한의 output을 얻어내는 합리성 자체는 아주 설득력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다못해 눈을 쓸러 나가더라도, 어차피 치워야 할 눈의 양이 똑같다면, 두번 일 안하면서 최대한 능률있게 치우는게 낫겠죠. 경제학적 합리성은 경영학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가치이기도 합니다. 

3. 문제는 배분이죠. 그러니까 100의 노력을 들여서 창출한 100의 성과를 100명이 사이좋게 1씩 나누어 먹던 것을, 이제는 10의 노력을 들여서 1000을 낼 수 있게 되었더라도, 그걸 10명이 독식하게 된다면 정의롭지 못합니다. 900만큼의 부가적 가치는 90명에게도 충분히 돌아갈 수 있는데 이 세상의 모습은 그렇지 못해요. 

4. 항상 갈등하는 것은 노력의 가치를 어느 정도로 인정하여 보상하고, 그렇게 함으로서 동기유발을 이끌어낼 수 있겠느냐 하는 점입니다. 아무런 기여가 없던 90명에게 공헌한 10명과 같은 대우를 한다면, 10명은 공헌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황할겁니다. 적극적 사회복지를 강조한 북유럽이 만성적 재정누수와 고정실업으로 고민하고 있는 예들이 이를 입증하죠. 

5. 거기에 저의 고민과 긴장이 있습니다. 부동산이 상품으로 인정받는 현실은, '열심히 일해서 내 집 장만하자'는 아버지 세대의 목표의식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으며, 이것은 성실한 삶의 동기를 제공한 하나의 범국민적 토대로 굳어져왔어요. 덕분에 지금에 와서는 젊은이들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집한칸 마련하기 힘들어졌지만. 

6. 정말 불행히도, 현재의 사태에는 보다 복잡한 요인들과 상황들이 얽혀 있더군요. 그 지역은 주거지역으로서의 가치는 C급이었으나, 상업지역으로서의 가치는 A급이었어요. 주거민들은 합당한 보상금을 받고 떠났으나, 상인들은 당황할 수 밖에 없었어요. 적어도 철거 상인들은 영세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재벌도 아니예요. 단지 자신들이 지금까지 이루어 온 삶의 기반을 지속해갈 수 있도록 요구한 것이었지요.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시민들은 생각보다 탄탄한 상인들의 경제력에 놀라며 되묻습니다. '가진 놈들이 더하네?' 

7. 미치겠습니다. 사바넷을 떠돌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듣고 있는데, 갈수록 더 막막해집니다. 저는 노력의 가치를 최상에 두며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은 세상이 언젠가는 알아줄 거라고 믿어요. 그러나 들려오는 소식은 저를 불안하게 하고, 믿음을 배신당한 사람들은 극도의 피해의식을 안게 되었어요. 앞으로 더 시끄러워지고, 복잡해 질 것 같습니다. 

8. 얄짤없이 저는 경제적 인간이며, 냉철한 분석을 신뢰하지만, 두어 줄 적는다고 해놓고는 이토록 장문의 리플을 적고 있는 것을 보니 대단히 비경제적인 부류인 모양입니다. 2009-01-23
23:18:32
  

 

병장 김동욱 
  이번 일은 굳이 거창하게 신자유주의니 한국 자본주의의 특수성이니 하는 담론들을 끌어들일 필요도 없이, 지금 이 곳에서 얼마나 기본적인 상식마저 작동하고 있지 않는지를 보여주고 있지 않냐는 생각이 듭니다. 뭐, 언제부터 그런게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냐, 라고 말씀하신다면 저 역시 그리 긍정적인 대답을 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이지경까지는. 2009-01-24
01:49:35
  

 

병장 이동석 
  저는 이제와서 흘린 눈물이 부끄러웠습니다. 
그저 일상을 살아가던 그들이 화염병을 든건, 아무도 그들의 이야길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제와서, 엠병. 2009-01-24
02:10:18
 

 

병장 김민규 
  엠병. 동욱님과 동석님(아, 이래놓으니 東라인을 조장하는 것 같아 안되겠는데) 리플을 보고 뭔가 푸념이라도 지껄이고 싶은데, 엠병, 정말로 썼다 지웠다 나갔다 들어왔다 계속 하고 있군요. 젠장. 기본적인 상식, 최소한의 소통의 채널, 그 따위 것들마저 사치스럽게 여겨지는 판국이니, .... 알고보니 龍역이 동원되었다더라, 같은 무전망을 썼대, 이런건 놀랍지도 않습니다. 아, 

이제와서, 엠병. 그렇기에 지금이라도, 라고 말하고 싶은데, 너무도 무기력합니다. 2009-01-24
14:30:05
  

 

상병 김상윤 
  맨 윗부분을 읽고 있는데 왠지 제가 사는 부천이 생각나는군요. 
다 읽고 다시 댓글을 달도록 하겠습니다? 2009-01-26
13:2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