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발레리의 절필絶筆  
병장 김동욱   2009-01-07 02:07:09, 조회: 277, 추천:2 

올해로 내 나이 스물하고도 넷.


“그래서 나는 나의 진짜 소유물로 돌아가려고 했다.”


# 초보적인 독자가 가진 선입견 중 하나는 책의 주인공과 저자를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 행위는 정답을 찾기 위해 교사의 눈치를 보는 학생처럼 저자의 권위에 짓눌린 나머지 책 속에 자신을 내던지지 못하게 한다, 고 소설가 김경욱 ― 아니, 엄밀히 말해 「위험한 독서」의 화자는 말했다. 그건 어쩌면 습관 같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책의 내용을 더 진실성 있게 받아들이고, 즐겁게 읽으면 그냥 좋은 것 아닌가란 생각이 들긴 하지만. 하여튼 내게도 그런 초보적인 선입견 또는 습관 같은 게 있다. (그래, 애초에 초보적인 독자니 ‘초보적인’이라는 말은 동어반복이다.) 그것은 앞의 경우의 수준을 넘어서서 끊임없이 저자의 일대기와 나 자신을 비교하는 것이다. 때문에 책의 첫 날개의 사진 한 장과 짤막한 소개 글은 본문이라는 풍부한 자료(?)를 발판삼아, 무슨 조각퍼즐 맞추듯 하나의 인물을 만들어낸다. 물론 내 맘대로. 그것이 본래의 인물과 합치되는지의 여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본문을 통해서든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든 그의 다른 책을 통해서든 한 인물을 만들어내는 일이 끝나면, 거기서부터 어설픈 자료와 주먹구구식 추측을 토대로 24살 때의 그를 상상하고 거기다가 지금의 나를 투영시켜본다. 내 나이 즈음에 그는 어떤 상황에 놓여있었으며, 어떤 고민을 하고 있었을지, 그리고 그 고민들에 대해 어떻게 대응했으며 그러한 대응은 이후에 그를 어떠한 길로 이끌게 되었는지. 그러한 습관이 어쩌면 김연수의『스무 살』같은 소설들에 더 애정을 갖게 만드는 건지도 모르겠다. 거기에는 아직 ‘이십대적 감수성’을 가진 작가가 똬리를 틀고 있으며, 또한 ‘객관적인 형상화’ 단계로 넘어서지 않은 채로 자신의 고민들에 고백적인 어조를 취하는 누군가가 있다. 비슷한 이유로 만약 그 사람이 이정우라면, 내가 더 즐겁게 읽는 책은 『사건의 철학』이기보다는 『탐독耽讀』이다. 그 책에는 이십대의 이정우가 고민한 문제들, 또 그것과 함께한 책들이 있다. 궁극적으로 내가 가닿아야 할 부분은 전자 종류의 책이겠지만, 아직은 후자 종류의 책이 좋다. 모든 책을 성장 소설의 틀 안에서 읽고 있는건 아닐까란 생각을 종종 한다. 언젠가 말한 것처럼, 그건 시험지의 답을 미리 보는 것 같은 짜릿함을 느끼게 해줌으로. 어쩌면 그것이 내 독서와 생각의 한계인지도 모르겠다. 

김경욱은 22살 때 그가 경험한 실연으로 인해 삶 속에 뭔가 구멍이 있음을 느끼고 대학노트와 모나미 펜을 들고 들어가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그 해 등단했으므로(이런!) 24살에도 여전히 소설을 쓰고 있었을 거다. 24살 때의 김연수는 아마 방위를 제대한 후 복학한 학교에서 친구들이 없었으므로, 홀로 자취방에 앉아 ‘AFKN FM을 틀어놓고 286컴퓨터의 낡은 자판’을 두드리며 ‘소설이나’ 쓰든가, 아니면 학교 도서관의 정기 간행물실에 하루 종일 틀어박혀서 1930년대의 자료들을 읽거나 계간지들을 읽으며 주석에 달린 모든 책들을 찾아 보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소설가가 되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의 삶을 들여다봄으로써 아직 부족하나마 나의 위치를 포지셔닝(?)해본다. 내게도 아직 부족하나마 뭔가를 쌓아갈 시간이 있구나, 라는 전혀 영양가 없는 위안을 얻거나 내가 이제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가에 대한 힌트를 얻기도 한다. 하지만 대다수는 그런 것조차 허용하지 않는 괴수들이다. 그런 인물들은 한숨짓게 만드는 데, 예를 들자면 경제학자 장하준은 이미 중학교를 다니며 이미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원서로 11회독했으며 그것도 모자라 번역판을 찾아 읽고 있었고,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는 25살에 이미 양자역학의 정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불확정성의 원리」를 발견했다. 이런 예를 찾자면 끝도 없을 것이다. 김시습인지 정확히 누군지 모르겠지만 조선시대 누군가는 이미 다섯 살 때 임금 앞에서 시를 지었다고 하지 않은가! 하여간 그 사람들은 이미 안드로메다에 계시는 분들이다, 라고 스스로를 위로해보지만 그로 인해 지금 책 앞에 앉아 있는 나 자신에게 매번 비슷한 질문들과 고민들을 던져주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내 가난한 독서와 빈곤한 지식이 더 부각되는 것 역시 피할 수 없고. (멀리서 찾을 것 없이 이미 명예의 전당이 내게 그런 역할을 한다)

굳이 이렇게 잡소리를 자꾸 하고 있는 건. 그래 발레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물론 그와 나 사이에는 (지식, 사유 등등에 있어서) 가늠할 수 없는 너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 역시 나와 같은 20대를 겪었고, 그 시기에 으레 당면하게 되는 문제들에 대해 나와 그리고 우리와 똑같이 고민했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뇌를 단련하다』를 읽으면서 스무 살의 발레리를 만났고 그의 고민이 잘 녹여난 글들을 접할 수 있었다. 우리가 20대에 하게 되는 고민들, 글을 쓰면서 공부를 해나가면서 겪게 되는 갈등과 방황들. 그에 대한 발레리의 고민이 단순히 과거형이 아니라 매우 현재적인 어떤 것이었기에 내 이목을 끈 것은 당연했다.



스물 넷의 발레리는 단편「테스트씨와의 하룻밤」을 썼다.



# 법학도였던 발레리는 약관의 나이에 몇 편의 습작시가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등단하게 된다. 그렇게 작가로서의 생활이 창창한 그가 왜 펜을 꺾어야만 했을까. 그 첫 번째 이유는 어떤 결정적인 만남 ― 당시 문단의 거인이었던 두 인물, 말라르메와 랭보의 시를 접한 것이다. 

“이들은 나를 절망에 빠뜨렸다. 한 사람은 그 완벽함으로, 또 한사람은 표현의 강렬함으로. 나는 그들에게서 문학 표현의 극한을 보았다.”

그들의 시는 이제야 첫 발을 내딛은 한 어린 문학도에게 넘을 수 없는 벽과 같이 다가왔을 것이다. 모차르트를 처음 대했을 때 이미 뭔가를 깨달아버린 살리에르의 그것처럼. 자신이 아무리 언어를 조탁하고 다듬는다 하더라도, 랭보의 강렬함과 말라르메의 완벽함을 넘어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그렇다하더라도 그것으로 굳이 절필絶筆을 한 것은 정도가 지나친 것 아닐까? 고전 역학을 정립한 뉴턴도 자신이 더 멀리 바라볼 수 있었다면 그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서 바라볼 수 있었을 뿐이라 말했으며, 자신의 업적은 마치 거대한 대양을 앞에 둔 채로 단순히 조개를 집어 드는 애들 장난 같은 것으로 그 앞에는 여전히 미지의 대양이 남겨져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겸손함일지도 모르겠다) 어느 분야에서든 첫 발을 내딛는 초심자는 그런 종류의 좌절을 느낄 것이다. 서양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주석에 불과하다는 말마따나 이미 넘어설 수 없는 기존의 굳견한 벽은 어디든 있다. 그건 원더걸스와 소녀시대가 장악한 여자 아이돌 시장에서 컴백을 준비하는 카라가 마주했을 종류의 것이다. (이 경우 카라는 발레리만큼이나 좌절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절필까지 몰아간 것은 단지 그들과의 만남 이전에 그가 가지고 있던 어떤 것. 말하자면 그의 '편집증적인 혹은 20대적인' 뭔가 때문이다.

“내 의식의 도취기에, 야릇한 자의식 과잉의 한복판에서 나는 정확성이라는 급성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나는 이해하겠다는 엉뚱한 욕망을 지향하여…”
“나는 엄밀한 사고로 일관하여 사물은 결코 믿지 않고 이를테면 완전함 엄밀화가 되지 않는 것은 다 공허한 것으로 간주하기로 한 것이다.”

자의식 과잉 속에서의 정확성이라는 열병. 완전한 엄밀화에 대한 추구 - 같은 것이 20대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냐는 것에 매우 만족스러운 답변이 있다. 위의 말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훌륭한 주석이기도 하다. 역시 발레리의 말이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위의 책에도 있고, 허원영씨의 명칼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 시절 나는 스무 살이었고, 사상이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걸 믿었다. 그리고 내가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느끼며 묘하게 아파하고 있었다. 어떤 때는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 자신감은 어떤 문제를 만나기 무섭게 사라져 버렸고, 실제 현실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무능은 나를 절망에 빠뜨렸던 것이다. 나는 음울하고 부박하며 외모는 단조롭고, 그러면서도 고집스럽고, 경멸을 할 때는 극단적으로 경멸하고 또 감동할 때는 무조건 감동하고, 밑도 끝도 없이 쉽게 인상을 받고, 더구나 어느 누구도 내 의견을 바꾸어 놓지 못했던 것이다.”

그건 20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 모두의 질병 아닌 질병, 성장통 아닌 성장통이다. 장하준과 우석훈을 읽으며 기존 학계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면서 지금 여기를 이야기하는 경제학자가 되기를 꿈꾸며, 김연수를 읽으며 ‘<아령칙하다>와 <뿌넝숴不能說)>사이의 세계’에서 타인의 진실에 가닿기 위해 노력하는 소설가가 되기를 꿈꾸며, 다치바나 다카시를 읽으면서는 수없이 많은 책들과 씨름하여 진정한 제너럴리스트이자, 전체적인 지知의 상에 가깝게 다가가는 저널리스트가 되기를 꿈꾸며, 김남희와 한비야를 읽으면서는 지금 내가 발딛고 서 있는 이 익숙한 곳을 벗어나 다른 언어와 풍습을 가진 이들과 몸으로 마주하는 여행자가 되기를 꿈꾸며, 윤동주와 기형도를 읽으면서는 그 여린 감수성으로 내적인 무엇을 시어로 싹틔워내는 시인이 되기를 꿈꾸며, 또 영화감독, 기타리스트 …….

그 가늠할 수 없는 꿈들이 커져만 갈수록 ‘음울하고 부박’한 현재의 나에 대한 한숨 소리는 역시 커져만 간다. 아니 그러한 꿈들만 아니라 지금 맺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 우정이나 사랑 따위의 감정, 불확실한 미래 등등. 그렇게 ‘나’ 속으로 파고들어 갈수록 무언가를 끌어내는 건 어려워진다. ‘자신의 철학을 만들고자 오늘도 고통으로 점철된 하루’를 보내지만 ‘설득력 있는 생각’앞에서 주저하게 된다. 불완전해보이고, 정확하지 않아 보이고, 때론 조잡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 대체할 수 없는 수많은 생각들이 초라하게 내뱉어지면 질수록 더욱 더 말을 아끼게 되고 하나라도 완벽하게 말하고 싶어지고. ‘쉽게 씌어지는’ 것에 대해 참을 수 없는 고민들. 그러한 것을 용납하는 자신에 대한 자괴自愧. 그 언저리에 있던 것이 아닐까, 발레리가 고민한 것은. 그리고 그를 절망케 한 것은.

또 하나. 절망 속에 빠져있는 그를 완전한 나락으로 몰아넣어 버린 건 이뤄질 수 없는 R 부인에 대한 (짝)사랑. 단순히 몇 번의 마주침을 통해 그녀를 마음에 품게 된 그는 이전과는 다른 절망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처음 마주하게 된 사랑의 감정 앞에서, 아니 정확하게는 실연의 감정 앞에서 ― 그것이 괴테에게는 세계사에 오래 남을 문학작품을 선사했고, 김경욱에게 소설을 쓰도록 이끈 것과는 정반대로 그는 시를 쓰는 일에 대해 더 큰 어려움을 느끼게 된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말을 들어보자.

“발레리에게 문학도 철학도 너무나 모호하고 불순한 것이었다. 정확성이라는 열병으로 인해 그는 문학의 소재인 감정의 동요를 버리기로 한 것이다. 이것이 발레리의 절필이유다.”



단편「테스트씨와의 하룻밤」은 이렇게 ‘모호하고 불순한’ 것을 억제하고 완전히 간소화된 삶을 사는 인물을 그려낸다. 그건 그 시기의 그가 꿈꿨던 것이기도 하다.



# 20년간의 침묵. 발레리가 절필을 접고 돌아오기까지는 20년이 걸렸다. 그 20년 동안 발레리가 침잠해 있던 것은 ‘모호하고 불순한’ 문학과 철학이 아닌 과학, 곧 추상적인 탐구였다. 20대 초반에 겪은 지적혁명으로 시작詩作을 포기한 그는 ‘지성知性의 우상’을 숭배하기로 ― “어리석음으로 연결되는 일체의 전념을 버리고 명석한 지적능력을 단련하는 데 전념”하기로 결심한다. 그 기간 동안 그는 자신이 탐구한 문제들을 노트에 하루하루 정리했고, 그것은 이후에 『까이에(일기장)』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된다. 그 책은 아직까지 과학자들에게 중요한 영향력을 주는 텍스트로 취급받는다고 한다.

시와 과학의 길을 지나 산문으로 돌아왔다는 점에서, 그가 겪은 20년이라는 침묵의 시간 때문에도 그는 데카르트와 자주 비교된다. 스스로도 「데카르트와의 일면一面」이라는 글을 썼다고 한다.

독일의 30년 전쟁 종군 당시 교외의 주둔지에 머물던 데카르트는 어떤 꿈을 꾸게 된다. 여러 가지 이미지가 뒤섞여있는. 꿈에서 깬 후 자신의 꿈을 되새기며 그는 자신이 ‘모든 학문을 통일한 것’이라는 이상한 계시를 받게 된 것이라고 결론을 낸다.

“1619년 11월 10일. 영감이 밀려와 놀라운 학문의 기초를 발견했다.” (데카르트의 메모)

그로부터 장장 20년. 그 꿈을 통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게 된 그는 20년이라는 동안 ‘오랜 내적인 투쟁’을 겪어가며 세상에 그 결과물을 내놓는다. 그것이 기존의 모든 것을 발칵 뒤집어버린, 저 유명한 『방법서설』. ‘모든 학문을 통일할 것’이라는 그가 받은 계시는 그렇게 이루어지게 된다. 어쩌면 허무맹랑하고 후에 그의 업적 때문에 덧씌워진 이야기로 보이기도 하지만, 발레리는 데카르트의 그 체험을 단순한 허구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20대의 자신을 변화시킨 것도 데카르트의 그것과 유사한 것이었기에.

“거기서 나는 날카로운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 사방이 가로막힌 듯한 절망감. 그리고 이상한 계시로 가득 찬 밤들”

'제노바의 밤'. R 부인을 우연히 마주치고 온 그 날, 이후 자신의 의식에 커다란 변화를 겪은 그날은 그렇게 불린다. 그가 시작을 포기하고 과학적 탐구에 몰두하게 된 계기가 된 날이 그날이었다. 발레리는 그러한 변화를 스스로 ‘지적 쿠데타’라고 부른다. (그런 점에서 혹자는 그 밤을 비유적으로 발레리의 ‘브뤼메르의 18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는 그 지적쿠데타를 이렇게 요약한다. (본래 데카르트에 대한 말인데 그건 발레리 자신에게 한 말로 무방해 보인다.)

“권위가 지닌 모든 특권의 돌연한 폐기, 모든 전통적 교육에 대한 무효선언, 명증明證, 회의, 양식, 사실의 관찰, 추리의 엄밀한 구성에 입각한 새로운 내적 권력의 제정, 정신의 실험실 책상 위에서의 이러한 가차 없는 청소”

발레리는 이러한 지적 쿠데타를 종교적인 컨버젼[回心]과 다른 것으로 구별하고 그것을 ‘지성의 어느 발전단계’에서, ‘산고와 흡사한 고뇌’ 끝에, ‘19-24세라는 특정 연령층’에서 일어나는 것이라 규정한다. (데카르트가 꿈을 경험한 때가 23살이다.) 19-24세라는 연령층에 대한 언급을 좀 유연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건 논외로 하고,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우리가 지적혁명에 적합한 연령층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더욱 방점이 찍혀야 할 부분은 ‘산고와 흡사한 고뇌’일 것이다. 그것은 쿠데타를 가져오는 요소이기도 하고, 쿠데타 이후에 갖춰야 할 필수적인 요소이기도 하다. 데카르트와 발레리의 20년. 그들은 그 그간 동안에 침묵하여 자신의 결정적인 무기를 다듬고 또 다듬었다. 뭔가의 ‘생성’을 위해. (또 빈약하기 그지없는 국사지식을 꺼내어본다면) 돈오점수頓悟漸修. 그리고 점수돈오漸修頓悟 같은 것으로 그 기간을 조금이나마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깨달음에는 계속된 수행이 선행하고, 그 깨달음에는 계속된 수행이 또한 후행해야한다. 이것이 진정한 부처가 되는 길만을 설명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한 분야에 있어 뭔가를 ‘성취’ 또는 ‘달성’한 이들 뒤에는 쉬이 잠들지 못하고, 고민과 고뇌에 지새었을 무수히 많은 밤들이 빼곡할 것이다. 가끔씩 TV에 운동선수들이 나와서 자기 몸을 드러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자글자글한 잔근육들과 군데군데 박힌 굳은살들과 상처들. 그건 그들이 자신의 ‘몸’을 단련시키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했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하물며 ‘글’과 ‘사상’의 경우라고 다르겠는가.


# 20대에게 객기가 필요한 건 분명하다. 이제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것들에 대한 반발과 권위에 대한 부정, 그리고 기존과는 다른 시선과 다른 생각. 그와 같은 것에 있어 20대는 무시하지 못할 이점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현실로 만듦에 있어서 ‘객기’는 필요하다. 언제까지 문제들 앞에서 망설이고 맴돌기만 할 것인가. 그러는 사이 마음 편하게 그 가치들에 동화되기 쉽고 칼날은 무뎌지기 십상이다. 그렇기에 비록 내가 틀렸을 지라도 호기롭게 문제점을 제기하고 자신의 논論을 주장하는 객기가 요구된다. 누구든지 완전히 설득할 수 있는, 빈틈없는 논을 만들어 내는 것은 평생을 갈고 다듬는다 해도 요원한 일일 수 있다. ‘지르기’는 분명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객기들이 젊음과 20대의 명목아래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객기가 단순하게 객기로만 그쳐서는 안 된다. 놀아주지 않는다고, 자기에게 관심을 보여 달라는 아이들의 칭얼댐과는 달라야 한다. 솔직히 말해, 지금의 우리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객기가 부족한 것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결여되어 있는 것은 ‘객기 뒤에 놓인 어떤 것’이 아닐까. 우석훈 역시 객기를 말하면서도 빼놓지 않았던 것은 그들이 오늘도 ‘고통으로 점철된 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고민은 발레리가 20대에 겪었던 고민과 다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당시 단순히 그가 랭보와 말라르메에게서 얻은 절망을 객기로만 돌파하려 했었더라면, 그는 지금과 같이 우리들 앞에서 회자되고 있었을까. 글쎄. 그를 지금의 자리에 올려놓은 것은 -물론 그의 재능이 전제되겠지만- 20년간의 ‘산고와 흡사한 고뇌’일 것이다. 아니, 범인凡人인 나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고 믿고 싶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처럼 20년 동안 각 잡고 조용히 공부만 하자는 건 물론 아니다. 적어도 자신의 논을 내놓고 자신의 글과 생각을 내놓는 데 있어서 그 전에 놓여야 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좋겠다는 것이다. 쉽게 쓰인 것은 쉽게 읽히고, 쉽게 읽힌 것은 쉽게 휘발된다. (물론 쉽게 읽히도록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건 이와는 다른 문제다.)


김영하의 『빛의 제국』을 읽으면서 발레리의 시구를 처음 접한 것 같다. 김영하가 그 소설 서두에 인용한 문장.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몇 년 전 그때 이 문장을 쉽게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그래봐야 if 절의 쉬운 문장이니까. 하지만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발화된 맥락 대한 이해가 필수적일 것이다. 그 당시의 나는 단지 그 문장의 바깥 꺼풀만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다. 지금에서야, 그러니까 발레리의 삶을 조금이나마 엿본 후에야 그 문장이 약간은 살갑게 다가온다. 그것은 자기계발 서적에 실린 설교조의 어투가 아니라 그의 삶을 압축하는 고뇌가 담긴 것이었음을, 그의 삶에서 끌어내온 것이었음을. 그렇게 나온 언어는 폐부를 찌르고, 누군가에게 깊이 각인되기 마련이다. 다시 한 번 발레리의 삶을 운율삼아 또박또박, 단어하나에 힘을 실어 읽어본다.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 얼개에 이어지는 글이기도 하고, 긁어온 우석훈 박사의 글에 대한 리플이기도 하고, 따라서 책마을에 대한 글(감히!)이기도 합니다. 짧게 핵심을 전달하는 글쓰기를 해야하는데 늘 이렇게 원치않게 길어져서 영 잡소리만 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막 읽고 싶고 리플달고 싶은 글들이 많은데, 이렇게 제 것만 내뱉고가서 영 속이 시원치 않아요. 조금만 기다리시길 후후.

& 위에서 인용한 대부분의 문장은 『뇌를 단련하다』에서 인용한 것이고, 발레리에 대한 대부분의 서술이 이 책에서부터 나온 것입니다. 고로 (다치바나 다카시가 본) 발레리라고 해야 정확할 것입니다. 따로 언급이 없으면 모두 발레리가 한 말입니다. 정작 발레리의 글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서 이런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거 아닐까란 생각에 글을 올리면서도 몇 차례 망설였어요. 애초에 이걸 칼럼에 써야하나 말아야하나부터 시작해서.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길.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6
13:37:03 

 

병장 정병훈 
  일단은, 졸린시간 당근을 상큼하게 보낼 수 있도록 도와준 동욱씨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감사의 댓글을 몇줄 적어 보겠습니다. 

일단은, 글의 길이가 5페이지 정도 되는 분량이더군요. 짧게 핵심을 전달하는 글이 좋은 글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저같은 무지몽매한 사람을 위해서 '발레리'라는 사람에 대해 좀 더 설명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사실은 좀 더 긴 글이 되서 자세한 설명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도 조금 남습니다. 대충 보니까 시를 쓰던 사람 같기도 한데, 자세히 모르겠네요. 도중에 글을 접고 20년 동안 수련을 통해 다시 펜을 든 사람? 그정도 밖에 기억에 남는 부분이 없어서, 어떤 점에서 이사람이 회고되는지 부연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추신에서 밝혔듯 글을 읽는 동안 이십대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신 느낌을 받았습니다. 

[발레리를 절필로 이끈 그것은 그들과의 만남 이전의 그 '어떤 것', 말하자면 '편집증적인', 혹은 '이십대 적인' 뭔가 때문이다.] 
[이십대는 객기가 필요하다. 언제까지 문제들 앞에서 맴돌 것인가. 그러나 객기 이전에 우리에게 결여 된 것은 객기 뒤에 놓인 '어떤 것'이 아닐까. 적어도 자신의 논을 내놓고 자신의 글과 생각을 내놓는 데 있어서 그 전에 놓여야 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봤으면 한다.] 

결국은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일전에 말하고 다녔듯 현재 제 키워드는 '이십대'입니다. 저를 제외하고도 몇몇 분들은 동기님이 올려주신 '이십대의 소고'덕에 방황 아닌 방황을 겪고 있다고 봅니다. 자주 이십대의 어떤것에 대한 글들을 볼 수 있는 것 또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하는 게 아닌가 생각도 해봅니다. 정답은 없지만 답은 있다고 생각하는데, 동욱님의 글에서도 표현하신 '어떤것'에대해 조금 더 구체적인 답을 들을 수 있을까 합니다. 그것은 '겁'으로도 표현되고 '자격지심'으로도 표현되기도 하고, '현실로의 도피'로도 표현 되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책마을에 대한 글이기도 하다 말씀 하셨는데, 어느 부분이 그러한 부분인지 집어 주실 수 있을까요. 혹 '생각좀 하고 글 쓰자.'뭐 이런 내용인지. 

개인적으론 많은 대답을 글 속에 넣어 놓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읽는 동안 제가 생각하던 이십대의 모습이 그대로 녹아 있는 느낌을 받아 감탄에 감탄을 더했습니다. 특히 인용 되어 쓰인 부분들은 정말, 이게 정답이 아닐까 하는 부분도 많더군요. 

정신이 해롱한 상태에서 댓글을 달자니 개소리 하는것 같아 이정도로 마치겠습니다. 내일 다시 봤을 때 부끄럽지만 않았으면 합니다. 푸하하 

정말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09-01-07
03:35:05
  

 

병장 이동석 
  으아. 발레리라니. 2009-01-07
05:50:24
 

 

병장 이동석 
  병훈씨에게 하는 말 아닙니다. (병훈씨는 아마 출력해서 봤을것이 분명하기에) 


1) 발레리가 뭐하는 인간인지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이 글에 나온 정도로만 이해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발레리가 궁금하다면, 찾아보면 되죠. 

2) 행간-이 없는글이 있겠습니까만은, 그렇다고 행간-이 중요한 글은 쉽게 나오지 않습니다. 마우스 휠을 드륵드륵 긁으면서 읽어내려가기엔 이 글은 너무 아깝습니다. 

3) 사실 저도 발레리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다치바나 다카시의 <뇌를 단련하다>에서 언급한 정도에 인터넷 검색 몇개뿐-입니다. 

4) 근데 이글 정말 쩝니다. 한 댓번 더 읽고 이야기 해볼까요. 2009-01-07
07:39:18
 

 

병장 김동민 
  일단은 가지로. 2009-01-07
08:08:21
  

 

상병 김예찬 
  시인 조지훈은 <승무>를 열 아홉에 썼다죠? 아아, 스물 넷 나의 번뇌는 별빛이어라. 

"그건 원더걸스와 소녀시대가 장악한 여자 아이돌 시장에서 컴백을 준비하는 카라가 마주했을 종류의 것이다."는 매우 적절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껄껄. 

젊음이 의미하는 것은 미래로 나아가는 무모한 용기 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무수히 남은 시간들에 대한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이기도 하죠. 많이 공감하는 글입니다. 

가지로. 2009-01-07
08:46:11
  

 

병장 문두환 
  부정의 부정-의 법칙이 성립되는 20대 

어제 영목님이 저에게 댓글로 해주었던 말처럼, 결국 어떤 상황에서 확신을 갖더라도 변화에 대한 가능성은 열어두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오히려 무엇을 해야 한다는 정확한 진로가 없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꿈꿀 수 있는 것이 20대이고 그것이 20대가 가진 행복일 것입니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건 객기에 관한 부분이었는데, 객기가 저돌적인 공격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나를 단련시키는 에너지가 될 수 있다면 참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흐. 

<가지로> 2009-01-07
09:25:30
  

 

병장 문두환 
  이 글은 동기님이 올려준 '청춘의 종언'과 함께 읽히면 시너지 효과가 있을 듯 하군요. 프린트 했습니다. 저도 몇 번 더 읽어보고, 더 이야기 해 보고 싶군요. 2009-01-07
10:14:29
  

 

병장 김민규 
  아마추어같이, 댓글 달다가 로그인 풀렸군요. 헉. 

객기에는 일탈적 무모함이 필수이지만, 지향성 없는 짧은 일탈은 비행으로 치닫는 것이겠지요. 내실있는 객기는 세상이 그냥 지나치지 못합니다. 미숙은 탓할 수 없지만 무성의는 청춘이 배격해야 할 가장 큰 과오라고 생각해요. 비록 완벽도 강렬함도 얻지 못한 억지 스물 넷이지만, 추구만큼은 끊이지 않으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가 이 글에 <가지로>를 외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가지로. 2009-01-07
10:16:28
  

 

병장 김민규 
  외치긴 외쳤지만, 이 글은 더 많은 사람들이 보고 더 많이 공감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최대한 삐대다 가지로 갔으면 하는 바램이군요. 2페이지로 가려면 한 두 달 걸리려나? (땀) 2009-01-07
11:14:25
  

 

병장 이동석 
  저 집에 가면 가지로 가겠군요. 흐흐. 2009-01-07
11:21:12
 

 

병장 이우중 
  "격정, 두려움, 저항으로, 보통은 거부로. 우리는 이별이 주는 상실감 앞에서 인간들이 보이는 반응을 일반적으로 슬픔이라 부른다. 인간은 이 슬픔을 통해서만 상실감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시작을 할 수가 있다. 스스로 끝내지 않는 사람은 누군가에게 끝냄을 당한다." 같은 발레리의 명문들을 보고 아, 했었는데 그 역시 같은 고민을 했었다니요. 좀 더 읽고, 생각하고, 써야겠습니다. 

역시 그의 말마따나 "모든 생각은 주사위를 던져보게 하"니까요. 허허허. 

그러니까, 가지로 2009-01-07
12:37:49
  

 

병장 정병훈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이부분 말한 사람이 동욱씨입니까? 아니면 누군지 알려주실수 있는지 부탁드립니다. 2009-01-08
10:12:30
  

 

병장 이우중 
  병훈님/ 그 말이 발레리가 한 말이고, 김영하가 '빛의 제국'에서 인용한 걸로 알고 있어요. 2009-01-08
10:44:16
  

 

병장 정병훈 
  [이우중] 아, 감사합니다. 저도 '가지로' 한표 던지죠. 2009-01-08
11:36:33
  

 

병장 이동석 
  그 말은 세익스피어도 했었습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것은 없다-라는 말처럼. 
물론 이 말은 저어기, 성경에 나오는 솔로몬 까지 거슬러 올라가더군요. 2009-01-08
21:28:45
 

 

병장 김동욱 
  /병훈 

병훈님, 너무 노골적으로 절 찌르고 들어오시는군요. 크크크. 당황스럽습니다. 우선 동석님이 대답해주신 게 저의 생각과 흡사하지만 그래도 제가 쓴 거니까 부족하나마 이어봅니다. 

1. 우선 발레리에 대해서는 저도 쥐뿔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이미 위에 자진납세(?)했듯이 뇌를 단련하다에서 뽑아낸 그의 정보들과 이제까지 읽었던 책들에서 가끔씩 뭔가 대단한 사람처럼 등장해서 무수한 명언들을 쏟아낸 기억밖에는. (우중님이 좋은 예를 들어주셨네요 크크) 

그럼에도 발레리를 끌여들인 것은 동석님 말마따나 그게 굳이 발레리란 사실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 누가 놓여도 상관없는데 단지 그 누구보다도 그 시절의 고민을 잘 녹여내 글을 지은 것 같아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인용한 것입니다. 

또 김연수의 말이 스쳐가는데 <이등박문을, 쏘지 못하다>에 대한 글에서, 김연수는 '안중근'이라는 인물이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이토가 하얼빈에서 안중근에게 죽을 때까지 약 7번의 구체적인 우연이 있었는데,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다른 역에서 기다리고 있던 '우덕순'(이름이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네요)이 그를 쏘았을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나온 말입니다. 결국에 이렇게 살짝 도용해본다면, 위의 글에서 발레리는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입니다. 


2. 저 역시 정답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정답이 만들어지기에는 우리 각자가 지닌 조건과 능력, 성격, 취향 등 너무나 다를 것입니다. 허원영님의 말마따나 정답은 없고 풀이과정만 있을 뿐이라고 저 역시 생각합니다. 물론 저 뒤로 넘겨서 부록으로 딸린 정답과 해설을 보면, 모범 답안과 풀이과정이 있긴 할겁니다. 하지만 알고 계시듯이 문제를 푸는 방식은 다양합니다. 미적분을 알고 수학10을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눈치채셨겠지 모르겠지만, 제가 이렇게 자꾸 에둘러 가는 건 저 역시 궁색한 대답뿐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 답이 제가 가진 문제의식과 개인적인 꿈 같은 것이라면 저도 대답할 수 있겠지만 그건 좀 핀트가 안 맞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위의 글을 읽어봐야 답은 없을 지 모릅니다. 단지 제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필수적이라고 생각되는 것, (이렇게 요약하기는 너무 싫은데) '산고와 같은 고뇌'같은 것입니다. 

또 쓰잘데기 없는 예를 들어보자면, 밑이 0과 1사이인 지수함수 그래프(f'<0,f''>0)의 함수값은 x를 무한대로 보낸다면 알다시피 0으로 수렴하는 모양을 띱니다. 그러니까 결국에 어떤 경우든 그 그래프가 0에 가닿을 수 없을지는 모르지만 x가 0에서 그치는 경우와(고로 함수값=1) x가 무한대로 가는 경우가 결코 같은 의미는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x를 무한대로 보내려고 노력하는 것. 무슨 새벽부터 수학이냐 싶으시겠지만, 그래봐야 저 역시 7차 문과일뿐입니다. (위에 잘못된 거 있으면 지적해주시길! 근 일년만에 수학을 끄집어 내는거라 적잖이 당황하고 있다는.) 물론 그렇다고 그게 단순히 노력만 하라는 말은 아닌 거 아실거라고 생각합니다. 결코 투정하고 불평만 한다고 현실이 바뀌지 않습니다. 뭔가 잘못 됐다는 걸 알았으면, 거기에 파고들어가 보자는 것입니다. 

그게 '생각 좀 하고 글쓰자'로 요약되면 너무 서글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 글을 읽는 것보다 이 글을 읽는 것을 추천합니다. 

허원영- [자기보론] 어떻게 할 것인가 1,2. 명예의 전당에 있습니다. 이 글이야말로 쩝니다. 2009-01-08
23:41:22
  

 

병장 김동욱 
  /예찬 

찬님, 솔직히 말해서 저는 그동안 선예와 태연에게 가지고 있던 마음이 니콜에게 조금씩 기울어가고 있는 느낌입니다. 물론 때맞춰 소시가 컴백했기에 또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 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그렇고, 정말 '소설가'는 모르겠지만 '시인'의 경우에는 신동같은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나이에 어떻게 그런 시를 쓸 수 있었을까요. 그 시기에 대체 조지훈은 어떤 고민을 하고 있었던 건지. 무엇을 바라보고 있었던 건지. 마치 인생을 다 살은 듯한 이의 싯구들이 열아홉 소년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참. (애늙은이?) 

/두환 

"무엇을 해야 한다는 정확한 진로가 없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꿈꿀 수 있"다는 것에 저 역시 동감합니다. 뭔가 정해진 길이 파파박 있으면, 예를 들어서 이 사회에서 그래도 성공하려면 ks를 달아야 한다느니 뭐 어떤 고시를 쳐서 직급으로 빠져야 한다느니 - 생각만해도 끔찍한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정해진 것이 없는 청춘(!)이기에 그 시기를 겪은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그 나이 이후에는 나올 수 없는 고민과 고뇌가 묻어나는 말들이 나온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선 재미없잖아요. 길이 하난거. 

/민규 

제가 세 단락에 늘어놓은 걸 단 네문장으로 더 깔끔하게 설명해버리다니, 스물 넷 오늘도 나의 문장은 삽질이어라. 

/동석 

그 말 그 이전에도 많이 언급되었던 모양이네요. 제가 또 식견이 짧다보니 흑흑. 그건 그렇고 지금 여러 분들의 칼럼을 써내는 속도라면, 제 글은 적어도 동석님이 가기전에는 다음페이지로 넘어갈 겁니다. 아직 동석님은 삼궁통합 최대짬은 아니기에 클클. 아직 한달이나 남으셨어요! 

뇌를 단련하다, 에서 가져온거 빠뜨렸으면 큰일 날뻔 했습니다. 이제 시작된 동석님과의 '경쟁'에서 큰 빈틈을 보였을지도. 

/우중 

우중님, 죄송합니다. 위의 댓글에서 밝혔듯 발레리는 쥐뿔도 모르는게 뻔데기 앞에서 주름잡은 격입니다. 좋은 인용 감사드립니다. 역시 독서머신? 2009-01-08
23:54:07
  

 

병장 김동욱 
  그리고 이건 쓸데없는 덧붙임이긴 하지만, 세대론-으로만 계속 이야기가 진행되고, 그것이 마치 중요한 화두로 군림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그 이야기 와중에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게 있는가를 잘 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이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된 데는 무시하지 못할 '사회경제적'인 구조의 문제가 있을 것이고 그것은 우리가 아무리 각자의 정답을 이끌어 내더라도 바뀌지 않을 수 있을 겁니다. 

소설가 방현석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름 경제학도인데 소설가 이야기만 하자니 영...) 386세대가 스스로를 386세대로 명명하는 순간부터 80년대 그들의 정신은 죽은 거라고. 그때 시위에 참가한 수많은 학생들은 물론, 그러한 것에 전혀 관심도 없이 자기만의 생활에 골몰했다거나 자신의 영달에만 힘쓰고 있었던 그 시기 일부 학생들도 386으로 불립니다. 그리고 386에는 80대년 말을 뜨겁게 달궜던 노동자들의 이름은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학번'이 없는 까닭입니다. 

우리 역시 그러한 구멍이 생기지 않도록 유념해야 할 것 같습니다. 2009-01-09
00:15:50
  

 

병장 김민규 
  맞아요. 오늘 화장실에서 쉬야-를 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20대 20대 하는데, 저기 V자 두개 달고 있는 아저씨도 20대로구나. 지나치게 관념적이고 두루뭉슬한, 실체없는 껍데기에 사로잡혀 있던 것은 아닐까. 

프리즘에 넣고 보니 스펙트럼이 너무 다양하더란 말이죠. 만약 광화문 옹박산성 앞의 이들을 20대의 전형이라고 한다면, 그건 그냥 '서울의 일부 젊은이 무리'에 불과한 것 아닌가요. 

지적하신것처럼 구조론적 문제에 대한 통찰과 함께 반발이 있어야 할 겁니다. 열만 받고 체념하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비로소 조금 들어요. 그나마 거친 바람 앞에서 얼마나 수그러질지는 장담을 못 하겠지만...... 

그건 그렇고, 동욱님, 이런 식으로 점잖은 겸손 빼실 거예요? 앙? (울음) 2009-01-09
00:21:59
  

 

병장 정병훈 
  일단은 제가 발레리라는 사람을 처음 접했기 때문에 발레리를 끌고 온 당신에게 좀 더 그사람에 대해서 듣고 싶었던 것이지 발레리가 이 글에서 중요해 보였기에 물어 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저런 생각을 갖고 있던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제가 찾아 볼 수도 있었겠지만, 글쓴이에게 대답을 듣고 싶었던 것이고 그게 더 재밌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에게 정답은 없지만 각자의 답이 있기 때문에 물어본겁니다. 각자 마음 속엔 답이 있고, 우린 사실 그 답을 잘 보여주지 않죠. 동욱님의 이런 글이 아니면 사실 제가 그 물음을 물어볼 이유조차 생기지 않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기회에 냉큼 물어 본것이구요. 

두 질문 모두 개인적인 질문이라, 조금 당황하게 한것 같군요. 마지막 질문은, 사실 제가 이 글에서 책마을에 어떤 발언을 했는지 찾지 못해서 물어본겁니다. 

허허허 감사합니다. 2009-01-09
00:33:45
  

 

병장 이동석 
  아, 이런 깔끔한 아프다서비스까지. 역시 친절한 동욱님. 2009-01-09
07:18:05
 

 

병장 이동석 
  그리고 그게 음, 전 정말로 쥐뿔 아는게 없는데 하필 얻어 걸렸네요. 제가 일년에 몇권쯤 열심히 읽는책중에 하필 걸린게 <뇌를 단련하다>라서 말이지요. 흐흐. 동욱님의 겸손에 제 손발이 오그라듭니다. 허허. 

그리고 역시 책마을 동-라인은 뭔가 죽여주는군요. 이동열-김동욱-이동슥 
우후훗. 2009-01-10
02:20:41
 

 

병장 김민규 
  하나가 좀 이상한데...? 2009-01-10
02:31:33
  

 

병장 김민규 
  아, 이건 명백한 오타로군요. 이동열-김동욱-고동기의 동-라인이라. 뭔가 죽여줘요. 
자진방아를 울려라- 2009-01-10
02:32:58
  

 

병장 이동석 
  낄낄낄낄- (앗, 예리하다-) 2009-01-10
03:57:12
 

 

병장 정병훈 
  안돼... 이 글이 이런 허접한 댓글질에 오염되는걸 보고 있을 수가 없어. 

이모티콘 2회 사용권 중 1회를 사용한다면... 2009-01-10
04:57:18
  

 

병장 김동욱 
  /병훈 

제가 발레리를 상큼하게 설명해줬다면 더 재미있었긴 할것 같다는 저 역시 살짝 생각이 들긴하지만 어떻게 하겠습니까, 모르는걸 크크크크. '개인적인 답'이라 말했지만 해봐야 저 역시 희미하게나마 모색하고만 있는 정도 입니다. 이렇게라면 이런 길, 저렇게라면 저런 길 그 사이에서 왔다갔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대놓고 적기도 뭐하고 해서 굳이 말씀을 안 드린 것이지. 단지 그것이 제 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가 아님을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거야 차근차근 알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지만, 병훈님은 너무 적게 남았나요? 크크크크 

/동석&민규 

크크크크크크크. 다른 어떤 조합보다 두분의 조합이 책마을에서 가장 산뜻한 것 같습니다. 거기다 무준님까지 끼여들면 약간의 씨니컬함이 첨가될 것이며, 병훈님까지 끼여들면 
...매우 아름다운 조합이 나오지 않을까. 흐흐흐 

그건 그렇고 동석님 저희 같은 동인가요? 저는 東인데 말이죠. 
아진짜, 뭐 이런 질문이나 하고 있나 흑흑. 2009-01-10
22:12:03
  

 

병장 정병훈 
  음... 그렇군요. 동욱님 소환(발레리)으로 인해 요새 자주 눈에 띄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아쉽긴 하지만 제겐 건장한 손과 발이 있는 관계로 궁금증은 사바넷을 통해 검색을 해보겠습니다. 

매크로 동 / 마이더스의 손 김막창 / 깽깽이 / 정막장 
음... 뭔가 포스가 느껴지긴 하나, 저는 슬그머니 흐흐흐 

어째껀 다시금 읽게 되는 좋은 글입니다. 적절한 인용과 깔금한 글이요. 나중에 꼭 뵙시다. 저는 이제 몇일 안남은 관계로. 흐흐흐 (한달이 얼마 안남은거냐!) 2009-01-10
22:21:50
  

 

병장 이동석 
  우후훗, 저 이東슥입니다. 2009-01-11
03:37:53
 

 

병장 김민규 
  떽! 2009-01-11
04:38:31
  

 

상병 이동열 
  뒤늦게 읽고, 뒤늦게 댓글달고, 뒤늦게 감탄하는군요. 햐- 2009-01-13
16:00:16
  

 

상병 정근영 
  아아, 너무나 멋진 글입니다. 이제서야 읽게되었군요. 
개인적으로 동욱씨는 제가 가장 부러워하는 스타일의 글을 쓰고 계시는 듯 해요.(아! 부러워라) 
이런 깔끔한 느낌과 부드러운 여운이라니! 2009-01-23
19:18:29
  

 

상병 이지훈 
  정말 쩌는군요. 잘봤습니다 2009-01-25
15: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