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먹는 자를 쫓아 마라톤에 뛰어든 100m 육상선수를 위해서
병장 김민규 [Homepage] 2008-12-20 22:31:59, 조회: 308, 추천:0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이미, 세계는 먹는 자와 잡아먹히는 자의 양대 구도로 이루어져 왔다. 더 빠르고, 더 날렵하고, 강력한 힘을 지닌, 그래서 먹이사슬선상 자기 아래에 있는 이들을 유린할 수 있는 몇몇 종種 만이 드넓은 벌판에서, 밀림에서, 산과 바다, 또는 극지에서 주도권을 잡았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논리는 너무도 서늘하고 빈틈없는 것이어서, 세계의 원리는 엄밀하고 철저하게 형성되었다.
그러나 생존자 중에는 반드시 포식자만 포함된 것이 아니어서 자신 내부의 질서를 지키기에 충분한 양의 먹잇감만 확보할 수 있다면, 각 종이라는 거시적 차원에서 본다면, 그 모두가 어느 정도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은 구축되었고, 지구가 생성된 이래로 지금까지 까마득한 시간동안 그 모두는 나름대로 살아왔다. 오히려 포식자 중에서도,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 발생시키는 엔트로피만큼의 무언가를 충족하지 못한다면, 영영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 경우도 있었다. 공룡이 그러했고, 맘모스가, 그리고 이제는 동물원에서나 가끔 볼 수 있는 호랑이가 그러하다. 우리가 이해한 것 보다 생존의 논리는 더욱 명료하다. 살아라. 그러기 위해서는 그 만큼의 것을 확보해라. 오히려 이런 명제 하에서 개미나 파리, 바퀴벌레 같은, 보잘것없어 보이는 이들은 세계 전체로 활동 영역을 확보하며, 자신들의 제국을 확장해가고 있다. 이제는 방어와 번식의 수완 역시도 생존의 기술로 평가받고 있다. 죽어라. 그러나 죽는 만큼 더 퍼트려라. 그것이 너희 모두가 사는 길이니...
개별적 인격과 사고의 이기성利己性을 가지고 있는 인간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거시적 차원에서의 접근은 쉽사리 전체주의적 폭력이라는 비판을 불러일으킨다. 자신의 이해와 관련이 없기에 ‘이 녀석들은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어’ 라며 파리 목숨 알기를 우스이 여긴 까닭일 수도 있겠으나, 인간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은 워낙 유별나고 특수한 것이어서, 우리는 도덕과 당위라는 이름으로 상호에 대한 배려와 최소한의 권리를 인정해왔다. 노예는 비로소 해방되었고 흑인의 아들인 오바마는 최강 제국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엥겔 지수가 100%에 수렴하는 동물과는 달리, 인간의 발전은 삶에서 생존을 위한 기초비용의 비중을 감소시켜 가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왔다. 이는 실로 놀라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본능의 기초 욕구는 일차적인 것이어서 충족되지 않을 경우 다른 어떤 부가적인 것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을 조성하나, 일단 확보된 후에는 지극히 당연하고 서민적인, 그래서 심지어 통속적인 것으로 이해되기도 하는 것이다. 선비와 예술가의 고고함은 먹을 것에 흔들리지 않았다. 예수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인간은, 끊임없이 찾을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그것이 성취욕이든, 예술혼이든, 사랑이든 간에, 더 높은 무언가를 향해서, 규정되지 않는 그 이상理想을 향해 끊임없이 쫓기며 발버둥치고 있다.
『 이 세계의 바탕을 이루는 펀더멘털 베이직(fundamental Basic)이 만약 있다면, 나는 악과 폭력이 그 바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그 바탕에 자유나 평등에 대한 그 단념할 수 없는 열망, 인간의 이성 그리고 자명한 것들을 스스로 알 수 있는 인식의 힘도 있겠지요. 이성의 힘이 그 바탕에 있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안쪽에는 악과 폭력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운명, 이것이 내가 현실을 들여다보는 시선입니다. 인간의 합리성, 인간의 이성은 악과 폭력 그 위에 자리잡게 되는 것이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약육강식이야말로 인간의 영원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가 영원히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로, 구식기 신석기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거듭되는 이 약육강식의 전통은 연면하고 강고합니다. 우리의 기록 역사가 이천 년인데 십만 년동안 인류는 돌도끼를 들고 문명이 전혀 없는 광야에서 수렵과 살육과 약탈을 하면서 살아왔다니 끔찍한 일이죠. 그런데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의 운명이 약육강식이라면 우리는 인간이 아닙니다. 내가 약자로서 살기 위해 나보다 센 놈한테 내 살점을 먹이로 내주어야만 한다면 또 그걸 뜯어먹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면 우리는 인간이 아니고 개돼지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거기에 승복할 수가 없어요. 거기에 승복할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인간이기 때문에 거기에 끝없이 또 짓밟힐 수밖에 없습니다. 짓밟혀가면서 또 끝없이 저항하는 것이죠. 』P139-140, <회상>, 바다의 기별 中, 김훈
인간의 역량은 그가 세상에 미친 영향력만큼으로 평가되고 훗날에 기억되었다. 예술가는 감동으로, 학자는 사상으로, 제국주의자는 권력으로, 그리고 제비는 울린 여자들로 제각기 다른 노선을 따라 역사에 남았다. 그것이 당시에 어떻게 평가되었는지는 후대의 역사가에게 있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인권, 그 아름다운 이름의 기치 아래 우리는 종종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 징키스칸은 정복과정에서 수많은 양민을 잘라 내질렀을 수 있겠으나 지금에 와서는 위대한 원의 황제로 기록된다. 그가 기존 토착민들을 인정한 몇 가지 정책을 시도했다는 일말의 근거라도 나타난다면, 그 칭송은 더욱 높아져 합리적인 지도자라는 이름까지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순신은 냉철한 판단으로 수군을 승리로 이끌었고 위기속 정세에서 나라를 지킨 구국의 장수로 남았다. 그러나 난중일기에 적기를 ‘오늘 어떤 녀석이 군율을 어겼기로 베었다’ 라고 했다. 이야말로 거시적이고 전체주의적 폭력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상황논리를 믿지 않는다. 현실의 위기에 대한 맹신속에서 인간은 판단력을 잃고 표류하기 쉽다. 위기는 끊임없이 조장되고 가공되며 과장된다. 군율을 어겨 전체의 질서를 놓쳤을지언정 베지 않고 해결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었을 리 만무하다. 이야 말로, ‘눈앞의 장수를 더욱 두려워하게끔 만들어 적에게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위협 전략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훌륭한 장수로 역사 속에 남을 것이고 나 역시도 그러한 평가에 이의가 없다. 그는, 조선을 구했다.
그래서 인간의 행위에 대한 평가는 실로 어렵다. 전체와 개인, 거시와 미시, 폭력과 이성 사이에서 우리는 끊임없는 갈등을 느끼는 숙명을 안고 있다. 다원화된 통합사회인 현대의 모습은 더욱 복잡하다. 좋은 말로 다안성(diverstability)이라고는 하나 3세계의 다양함은 덜떨어지고 미숙한 것으로 평가받기 일쑤다. 세계는 문명 진화론에 사로잡혀 한 발전의 방향을 궁극적으로는 추구하고 있다. 앞서가는 자들은 뒤따라오는 자들의 추격에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할지 난감한 처지다. 뒤따라가는 자들은, 100미터 달리기인 줄 알고 뛰어들었는데 상대방은 이미 42.195Km의 마라톤 저 막바지를 달리고 있는 것을 깨닫고는, 박탈감과 허무감에 빠져들고 만다. 이미 먹이사슬은 뒤집을 수 없는 공고한 체계가 되었고 아프리카의 번식전략 - 힘 없는 약자 동물이 활발한 재생산을 통해 전체의 생존을 확보하는 - 은 되레 발생하는 엔트로피의 총량을 증가시켜 모두가 살아남지 못하게 하는 수렁으로 작용했다. 인권에의 접근으로 일어난 각종 구호 활동은, 물고기 잡는 법은 가르쳐주지 않으면서 물고기만 몇 마리 던져주는, 강자의 자기 합리화 내지는 기만 정도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그조차도 절박하고 절실한 이들 앞에서, ‘물고기 잡는 법이나 배울 생각을 할 것이지’ 라는 핀잔은, 그야말로 폭력적이다. 어디에 무게를 두고 입장을 정해야 할 것인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다. 플렌테이션 농장은 자본과 노동의 훌륭한 합작품으로 평가받았으나 지금에 와서는 토양 황폐화와 자립 방해의 원흉으로 지탄받고 있고, 바이오매스 에너지 생산을 위한 사탕수수 농장은, 평생 사탕수수 껍데기나 까는 처지로 그들의 미래를 못 박아버리는 일로 생각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대안마저 없던 시절, 굶을 방도 외에 다른 도리가 없었던 이들은, 오늘 하루의 생존을 위해 농장으로 달려간다.
『 나는 요즘 신문이나 저널을 읽기가 너무 어려워요. 왜냐하면 그 언어가, 이 사회적 담론이 의견과 사실을 구별하는 능력을 상실한 지 이미 오래됐기 때문에,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죠. 이 사회의 지배적 언론과 담론들이 의견을 사실처럼 말하고 사실을 의견처럼 말해버리는 거예요. 그걸 뒤죽박죽으로 말을 하니까 이런 언어는 인간의 소통에 기여할 수가 없는 것이고 이런 언어가 횡행할수록 인간 사이에는 소통이 아니라 단절이 심화되는 것이고 이 단절이 지금 거의 다 완성되어 있는 것 같아요. 이것이 우리 언어의 현실에 대한 나의 인식입니다.』P.135, 上同
자유무역은 거시적 측면에서의 후생을 증진시키는 탁월한 대안으로 인식되었다. 경제학자에게 있어서 부대비용과 비효율은 세계의 적이요 악이다. 괜한 관세로 인해 누구도 제 가격에 제 후생을 누리지 못하고, 전문화에 의해 더 절감될 수 있는 원가는 불필요하게 높아진다는 것이다. 대원군의 척화비가 뽑히고 수출 천억불 시대가 열리면서 이러한 생각은 ‘의견’을 넘어 ‘사실’로 굳어져 가는 듯 했다. 그러나 단편적 결과로 이론의 현실 적용여부를 귀납할 수 있는가? 단지 운이 좋았던, 그나마도 IMF라는 현실적 난관 앞에서 깨어질 수 밖에 없었던, 허상의 호황 덕택은 아니었던가? 미시적 존재들에게 있어 배분의 문제는 피할 수 없는 밥그릇 싸움을 불러일으킨다. 100원 어치 생산과 무역을 하던 세계가 자유무역을 통해 천 원 어치로 뻥튀기에 성공을 했다 하더라도, 그 결과로 기술적 우월지위에 있던 한 국가가 990원 어치를 독점하게 된다면, 그것을 성공이라고 이야기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게임 이론의 지배를 받는 각국은 누구도 선뜻 그 문호를 완전개방하지 못했다. 그래서 시작된 운동이 경제권역 설정과 FTA다.
FTA는 생산의 측면에서 서로 다른 유불리를 가지는 두개의 국가가, 서로의 장점을 특화시켜 상호 이익을 증진시켜 나가기로 합의하고, 대부분의 분야(통상적으로 95~100%)에서 관세를 점진적으로 낮추어 가다, 최종적으로는 제로택스에 도달하기로 하는 하나의 약속이다. 경제권역(Economic Zone, 이하 EZ)은 보다 많은 국가적 주체들이 모여 맺는 비슷한 약속을 말하는데, EU와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예이다. 이 두 가지 협정은 공통적으로 시장의 확대라는 측면에서 실질적인 이득을 끌어낸다. 한계비용은 어느 정도 선까지는 체감하기 마련이라, 100개의 생산물을 만드는 공장에서의 원가가 개당 100원이었다고 한다면, 1000개를 생산할 수 있도록 설비를 확장할 경우, 고정비용이 일부 공유되면서 개당 원가는 80원 내지는 90원으로 떨어질 수 있고, 그래서 시장이 확대되어 수요가 증가할 때에, 소비자와 생산자는 그 가격의 절감폭을 현실에서의 편익으로 고스란히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학자들 간에나 정치인들 사이에서 별다른 이견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실무적 분야에 대한 실용적 지식은 그와는 무관한 삶을 사는 3자들에게는 그리 절박해 보이지 않는 법이고, 그래서 치열하게 주장되지 않으며, 실제로 검증되지도 않는다. 가끔 계량적 분석으로 증명이 시도되기도 하나, 한개 국가도 아닌 복수 내지는 다수의 국가에 대해서 관련없는 변수들을 모조리 통제하고 수치적 입증을 한다는 것은 한낱 꿈일 뿐이다.
경제학자들이 제시하는 두 번째 논리는 수입전환효과다. 다양한 원산지로부터 최선의 경쟁력을 가진 물품을 100원 언저리에서 수입하고 있던 A국이, B국과 FTA를 맺었을 경우 절감된 20%의 관세로 인해, 타국가의 수입원가는 여전히 100원이지만, B국으로부터의 수입원가는 80원 선으로 내려가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모든 수입량은 생산여력이 있는 한 B국으로 전환될 것이고, 그래서 A국과 B국의 수출입은 절대적으로 활성화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래서 서로 다른 비교우위의 경쟁력을 가진 국가들이 FTA나 EZ를 형성할 경우, 그러한 카르텔 속에 포함되지 않은 국가로부터의 수입을 배제하게 되면서 상호 이익을 증진시켜 나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이러한 장점은 자연스레 상쇄될 수 밖에 없다. 우리 나라가 FTA를 맺은 국가는 이십여 개로, 생각보다 많다. EZ가 지금은 혁명적인 일로 받아들여지나 후에 EU, 아세안, 아프리칸, 그리고 NAFTA가 당연한 것이 된 이후에는, EZ간의 FTA가 대세가 될 지도 모르고, 그 때에는 전세계가 하나의 경제 권역으로 묶이게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FTA든 EZ든, 이 모든 것은 서로를 믿지 못해 벌어지는 게임 이론의 비극이기 때문에, 협정이라는 과도기적 단계를 통해서 서로에 대한 믿음을 키워 나가는 과정일 뿐이다.
우리가 선뜻 미국과의 FTA에 동의하지 못한 이유는 스스로에 대한 자격지심에 의한 것이 크다. 땅도 넓고, 기름도 나고, 사람도 많은 미국과 붙어서, 과연 우리가 무슨 비교우위를 가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칠레와의 FTA에 반대가 없었던 것은 양국의 산업구조 자체가 워낙 달랐기 때문이다. 수입전환효과는 실제로 발생해서 프랑스 와인이 주를 이루던 국내 와인 시장에는, 지구 정 반대편, 그것도 남반구의 칠레산 와인이 가득하게 되었다. 과거 비싼 가격으로 먹기 힘들던 큼지막한 켐벨 포도는 ‘그래도 먹을만 한 가격’으로 이마트 한 켠에 진열되었다. 한국산 전자기기와 자동차는 산티아고 거리를 메우고 있다고 한다. 칠레를 거점으로 하여 남아메리카 각국으로 뻗어나가는 한국산 물품들은, 새로운 무역의 길을 열고 있다. 산업구조와 기반이 비교적 취약하다는 칠레마저 만족시킨 한-칠레 FTA는, 마법의 손을 보는 듯하다. 그러나 과연 미국과는?
놀라운 것은 EU와의 FTA가 막바지에 이른 지금에도 그에 대한 불안감이 그다지 높지 않다는 점이다. EU야말로, 동유럽으로 그 영역을 확장해 나가면서 값싼 노동력까지 확보해 괴물이 되어 가고 있는데 말이다. 게다가 넓은 땅덩어리, 많은 경제인구, 폭스바겐과 BMW 등의 괴수 기업들, UBS같은 금융기반, 그리고 스위스의 다국적 제약회사까지. 주류 시장은 어떤가? 와인도, 맥주도, 보드카도, 위스키도 모두 어마어마하게 수입되어 올 것이다. 소주에 대한 한국인의 선호가 얼마나 타 주류로 전환될지 알 수는 없으나, 적어도 국산 맥주만큼은 망해 나가지 않을까 싶다. 미국과 EU와 동시에 FTA를 맺게 될 경우 수입전환으로 인한 편익은, 우리의 경우 미미하고 그들의 경우 클 것이다. (EU와 미국이 FTA를 맺지 않는 이상 말이다) 그로 인한 원가의 절감은 고스란히 우리의 몫이다. 말하자면, 미국과 EU라는 거대한 경제 주체들 사이에 끼여서, ‘지혜로운 중간자’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과거 한반도가 중계무역의 르네상스를 이루었듯이 말이다.
문제는 역시나 이득의 배분이다. 협정이 체결될 경우 우리는 우리의 내수시장을 전면적으로 내 주어야 한다. 그 댓가로 5억명 규모의 신시장을 얻게 되는 것이다. 2인 1차를 소유했다고 가정하고 국내 자동차 시장의 점유율을 50% 내준다고 하더라도 천만 남짓인데, 우리가 그쪽의 점유율을 10%만 높여도 2500만이다. 산업기반의 황폐화에 대한 우려는, 결국은 우리가 그쪽 시장에서의 입지를 얼마나 얻느냐에 달려 있다. 망가질 농축산업에 대한 우려는 당연한 것인데, 사실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서 심히 고민스럽다. 과거처럼 ‘처음에는 싸게 팔다가 나중에 우리 농가가 다 망하고 나면, 엄청나게 비싸게 팔아 쳐 먹을거야’ 라는 음모론이야 진부하다고 하더라도, 중국에서 100g이 아닌 1Kg당 3200원(13元/1斤, 당시 환율 1元=125\) 선에서 소, 양, 닭, 돼지고기를 모조리 사먹을 수 있었던 기억에 비추어 봐서, 그리고 최고 품질의 쌀을 10Kg에 7,000원 대로 사다 먹었던 기억을 보아서는, 한국에서 소고기라고는 국거리밖에 못 먹고 살았던 설움이 가득한 억화지심이 있기는 하지만, 개방 후의 모습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국산 쌀에서 미국산 켈로스로 옮겨갈지는 모르겠으나, 얼마나 적은 사람이 켈로스에서 한국산 쌀로 옮겨갈지는 대강 짐작이 된다. 한국산 쌀이, 탄수화물 다이어트에 심취한 비버리 힐즈의 그녀들에게 최고급으로 어필되지 않는 이상에야 말이다.
그래서 문제는 단선적이지 않고 비선형적이다. 결과에 대한 예측은, 국회 비준을 위해 장밋빛으로 가공했으리라는 짐작을 배제하더라도, 애매하다. 금액으로 딱 떨어지게 환산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우습게도 변동하는 환율과도 닿아 있다. 1달러당 천 원으로 계산해 3000억으로 잡아 놓았는데, 원달러 환율이 변동해 1$=1500\이 되면, 액수는 4500억이 된다. 이러니 무엇을 기준삼아 어떻게 측정을 해야 할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고, 임팩트 그 자체에 대한 고민은 더욱 어렵기만 하다. 전체와 개인, 거시와 미시, 폭력과 이성 사이에서 우리는 발만 동동 구를 뿐이다. 차라리 철저한 개인주의자가 되어 그저 내 장바구니가 값싸진다면 그로서 만족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내가 사는 세상이 과연 그러한가. 자본에 국경은 없고 기업에도 국경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래서 러시아에 진출한 LG가 현지인들을 고용해 휘센을 팔아먹고는 있으나, 남에 대해서는 그럴 수 있다고 정당화하고 나에 대해서는 철저한 이기심이 편히 생각할 길을 가로막는다. 국부유출과 같은 해묵은 논쟁도 여전히 뜨겁다. 그나마 이런 고민을 할 수 있는 우리는, 제 3세계의 플랜테이션보다는 사정이 나은 편이라고 위안해야 할 판이다. 어느 정도 기술적 축적이 되어 다이다이로 붙어볼 만 하니까 언급조차 할 수 있는 것일테니까.
논쟁이 해답을 얻지 못하는 까닭은, 모든 언론과 입들이 의견을 사실처럼, 사실을 의견처럼 호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FTA가 되면 수도세가 한 달에 백 만원씩 나올 것이라고 선정적으로 떠들어대는데 대중은 그것을 사실의 영역으로 받아들인다. 국회 비준만 되면 이밥에 고깃국을 마음껏 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밥에 고깃국은 철저히 개인의 선호와 희망에 의한 선택의 일부일 뿐이다. 안타까운 것은 많은 이들이 이런 지엽적인 의견에 묻혀 본질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보다 현실적으로, 사실에 기반을 두고 이야기를 풀어 나가야 한다. EU와 미국과의 FTA는, 위에서 언급했듯 시대의 지혜일 수도 있다. 이는 현재 부상하고 있는 중국과, 당파적 논쟁으로 아직은 그것을 시도하지 못하는 일본을 잠시라도 따돌릴 수 있는 숨통일 수가 있다. 그리고 훗날 한반도가 하나가 되고 대륙과 철로가 이어진 후에,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했을 때도 필수적이다. 그 때 다급한 것은 그네들이겠기에, 우리가 비교적 우월한 입장에서 협상을 끌어갈 수 있는 하나의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멀리 보고 차근히 준비해 가야 한다. 이런 입장에서 입안자들의 조급함과 여의도에서의 오함마질과 소화기 물호스의 동원은 지극히 실망스럽지만, 서로가 ‘나만이 양심세력’이라고 떠들며 정당성 확보에 혈안이 되어 있는 작금의 상황은 때려 치워야 한다. 외통위에 안건을 상정한 열 명의 H당 의원들이나,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잠긴 문을 때려 부순 반대쪽 사람들이나, 모두가 본질적으로는 미래를 생각해 주기를 당부한다. 그들이 내 글을 읽을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더불어서, 이 글을 읽는 그대들에게, 그들이 ‘일부 계층의 이익만을 대변하기 위해서 술수를 쓴다’는 식의 접근은, 한번 돌이켜 보기를 권한다. 냉철한 가슴으로 보다 넓은 것을 봐야 할 때가 아닌가.
먹는 자를 쫓아 마라톤에 뛰어든, 100m 육상선수를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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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6
13:34:50
상병 이지훈
가지로 라고 쓰고 있었는데 게시물이 어느새 이동되었군요. 역시 칼럼이었군요
한창 FTA 문제가 시끌시끌할 때 이곳에 왔고 소고기 문제가 폭발(?)했을 때도 여기에 있었죠. 관련 소식들을 이곳저곳에서 접할 때면 항상 본질적인 문제와는 많이 떨어진 문제들이 논의에 오르곤 하더라고요. 신문이나 TV나...말이죠
소고기 문제가 폭발한지 2~3주 정도 흘렀을 때 전 설탕단물 빼먹는 중이었는데, 사바넷, TV, 신문을 참고해도 도저히 어떤 게 사실이고 어떤 게 지금 중점적으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하며, 어떤 게 당장 시급한 문제인지 혼란스럽더군요. 물론 제가 FTA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경제에 잼병인지라 혼란이 가중되었을 수도 있었겠습니다만...
소화기 물호스, 과잉 진압 등 문제로부터 파생된...이런 것들도 중요하지만, 핵심을 흐리는 것은 안되지 않나...생각했더랬죠. 결국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텐데 하고 말이죠.
당시 친구 녀석 중 한 명은 '이성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도 있다'라고 저에게 말하기도 했지만 전 제 신분을 내세워 숨고 말았죠 허허 하긴 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그 친구에 비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뒤에서 조잘조잘대고 있었던 셈이니까요
결론은..(?) 좋은 글 고맙습니다. FTA에 대한 제 시각이 더 넓어진 느낌이네요 2008-12-20
23:02:44
병장 이동석
아슬아슬합니다. 내용이 아슬아슬하다는게 아니라, 논지에 균형을 잡으려는 강박-같은게 엿보이네요. 조금 기울었다 싶으면 다른쪽으로 후다다닥하는 느낌이 들어요. 뭐 어떻다는건 아니고, 전체적인 감상입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간만의 정적-끝에 터진 몇개의 글들이 반가워 죽겠습니다. (이런 눈물이...)
그리고 정치인들이 자신의 지지기반이 되는 계층이나 지역의 이권을 대변하는건 의견-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지나치게 상투-적이고 게으른 현실인식이긴 하지만요. 말꼬리 잡는건 아니고, 지나치게 식상하다는 이유만으로 그건 접근은 옳지 않다-와 이어지는 냉철한 가슴으로 보다 넓은것을 보라는 표현이 좀 익숙해서 그렇죠.
이런 균형잡힌 글은 오히려 논쟁하기가 어려워요. 뭔가 석연찮은 건 세세한 내용이라기 보단, 기조에 관한 것일텐데, 원체 균형잡힌 시각-이라고 읽고 정론이라고 읽는-을 좋아하는게 요새 트렌드라 제 말은 그냥 중언부언이 될듯하니, 좀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2008-12-21
00:42:06
병장 김민규
아마도 제 <입장>을 제외하고 써재껴서 그런 것이겠죠? 문제제기는 하고 싶고, 까이기는 싫고, 그러니까 애매하게 이렇기는 한데, 사실은 이래, 그렇지만 이런걸? 하는. 허허
뭐 근데, 제가 어느 쪽을 지지한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을 설득한다거나 그쪽 의견의 탁월성을 입증할 수는 없는 주제 아니던가요. 이야기하다 먹먹해지는 것이 단지 이기겠다는 생각으로 뻔히 예상되는 문제점이나 반론들마저 반박하고 들어가려고 하니까, 답이 안 나와요. 그런것들까지 부정하고 들어가고 싶진 않거든요. 그러니 이 모양이지만. 2008-12-21
07:19:50
병장 손정우
사실 조금은 답답한 것이, 사람들이 '비교우위' 라는 것이 정확히 어떤 개념인지를 잘 모르는 것 같은 점입니다.
어찌되었건 거시와 미시 사이에서 발을 동동 구른다는 점은 심히 공감합니다. 2008-12-21
17:35:17
병장 정영목
이 재미있는 논의를 이제야 따라왔네요. 제 감상을 한 두가지 말하자면,
일단 손정우 님의 의견에 일리가 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정말로 일리가 있어요. 물론 전 명백히 자유무역 반대파입니다. 허나 제가 지지하는 공정무역주의 또한 아직 갖춰야 할 것들이 많기 때문에 상대방에 대해 뭐라 확실히 주장할 수는 없네요.
그리고 몇몇 분들도 지적하셨지만, 타인을 뜨거운 가슴이라 규정하고 자신을 차가운 머리로 소개하는 건 조금 논란의 여지가 있는 비유라 생각합니다. 현 사회가 은연중에 차가운 머리를 숭상한다는 건 차치하고라도, 상대방을 마음대로 정의하는 것 자체가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가 될 수 있기 때문이죠. 이는 조금이라도 좌퐈 기색이 보이면 빨간색으로 색칠해 버리는 페인트공들의 행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제가 생뚱맞게 '뜨거운 가슴'을 가진 이가 되버려서 딴지 한번 걸어봤구요. 멕시코의 현 상황에 대한 다른 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아시다시피 그곳은 NAFTA로 인해 직격탄을 맞은 곳입니다. 전 자유무역 신봉자들이 멕시코 예를 드는 경우를 거의 본 적이 없는데,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가능하시면 짧은 A/S라도 부탁드립니다. 2008-12-23
09:36:05
병장 이동석
으, 적확한 예시들을 소개하고 싶은데, 관물함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네요, 그 프린트가 있었는데, 암튼 제 머리속에는 이거 하나 남았습니다.
멕시코가 미국에 팔아 이익을 얻은건 결국 코로나 밖에 없다-였나.
일단 찾아볼께요. 2008-12-23
12:45:07
병장 김민규
A/S까지는 내공이 후달리는 관계로 못 하겠고, 그냥 제 생각만 적어 보겠습니다. 멕시코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은 것은 어떠한 '전략적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깊이있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어요.
얼핏 보면 한국과 비슷한 경제규모에, 수출입 의존형 구조같은데, 사실 그곳 경제는 우리보다는 훨씬더 척박하고 열악하다고 생각합니다. FTA가 실질적인 효과를 지니려면 두 가지 중 적어도 한 가지 조건은 만족해야 합니다. 1) 체급이 비슷한 선수들이어서 빠데루가 걸려도 풀고 반격할 수 있는 정도의 경쟁력 2) 아예 종목이 달라서 서로 다른 기술을 사용, 이종격투기로 붙는 경우
1)의 경우는, 우리는 철강, 조선, 섬유, 전자(특정분야에 한정해서지만), 자동차(포드/GM에 대해서만큼은) 등 여러 분야에서 그래도 해볼만한 건덕지를 가지고 있는데, 멕시코의 경우 세계 500대 기업에 들어갈만한 이렇다할 브랜드를 갖추지 못했죠.
2)의 경우로 미국과의 경제구조를 대 보면, 우리는 고도화된 2차산업에 집중된듯한 인상을 주고, 미국은 1차와 3차에서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고 봅니다. 반면 그나마 3차같은 경우에도, 금융과 같이 압도적 포스의 차이가 있는 몇몇분야를 제외하고서는, 우리 나름대로 일정수준 이상의 것들을 누리고 있구요(의료, 통신, 유통, 물류...) 멕시코 같은 경우는, 노동이 생산을 좌우하는 기초적 단계에 보다 가깝지 않나 싶네요. 세계3위 산유국이다보니 거기서 오는 안정감도 있었을거구요. 게다가 우리처럼 3차산업이 어느 정도의 기틀을 잡아서 진입장벽을 형성한 상태도 아니었다는 점이 있죠. 지리적으로 가까워서 제도적 장치만 풀리면 미국 기업이 언제라도 쉽게 진입할 수가 있었는데, 기존 시장의 경쟁력이 약했으니. 지금 AT&T가 한국시장에 들어온다고 해도 그리 겁나지 않는 형편과는 대조적이라 할 수 있어요.
우리가 IMF를 겪은 시기와 엇비슷하게 그쪽도 공황이 왔는데, 그때부터 이미 문제는 커지고 있지 않았나 생각해요. 게다가 FTA이후에 일어난 노동력 유출의 가속화로 문제는 더더욱 커집니다. 뭔가를 팔아먹으려면 기름장사로 재미를 보든가, 노동력으로 승부를 보는 수밖에는 없겠는데, 아예 다 빠져 나가버리니까. 오히려 산업은 공동화되었다고 할까요.
아마도, 일본과 우리가 당장 FTA를 체결할 수 없는 것이,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추측해보는데, 저는 자유무역옹호론자이지만서도 그 대상의 선택에 있어서는 전략적 판단이 있어야 한다고 보기때문에, 미국-멕시코의 실패사례가 그리 찝찝하지만도 않아요. 다만 구체적 팩트들을 깊이 알고있지 못하기 때문에, 섣불리 뭐라 말을 할 수가 없네요. 더 공부해야죠. 2008-12-24
15:13:09
병장 정영목
멕시코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건, 자유무역주의 학파의 세계적인 석학들도 그런다는 의미였습니다. (실제로 언급을 잘 안합니다. 맨날 두바이나 아이슬란드 찬양만 하지. 그런데 아이슬란드도 이번에 타격이 컸죠.)
일단 민규 님께서 제시한 '두 조건'에는 저도 동의하구요. 그 두 조건이 만족한다면 FTA든 뭐든 해서 나쁠게 있겠습니까. 교환 행위에는 분명 이득이 존재하니까요.
헌데... 이런 표현들 있잖아요? 전쟁은 평화, 죽음은 삶. 'Doublespeak'라고 하죠. 이중화법. 그들이 말하는 자유 무역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과연 그 자유 무역이란 것이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무역'일까요, '빼앗을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하는 무역'일까요? 만약 답이 후자라면 그건 분명 싸워야 할 대상일테고, 전자라면 차라리 '공정 무역'이라 부르는 게 온당할 겁니다.
멕시코도 억울하겠죠. 비슷한 체급끼리 놀고 싶은데, 바로 옆에 떡대가 버티고 있으니까. 자신의 이익에 따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무역이었으면 좋겠는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아요. 여튼 자유무역에는 이러한 기만이 숨어있다고 봅니다. 2008-12-26
13:54:18
병장 이동석
음, 저러고 그냥 가버렸네요. 그게 저거 쓰고 책 뒤져보고 있는데, 냉큼 내일 나가라는 소릴 들었기 때문일꺼에요.
자유무역주의를 말하면서 멕시코를 언급하지 않는건 그야말로 세계적인 추세-인듯합니다. 설혹 언급하더라도 이러저러한 여건때문에 일반론에는 적합하지 않으니 논외-로 하자정도지요. 영목님이 지적하신대로 이중화법-이야말로 그들의 전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이 그 용어의 모호성을 오히려 잘알고 이용하려는것이야 말로 싸우려는 자들의 전략에 혼선을 주기 좋으니까요. 2009-01-03
16:0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