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당신은, 외롭습니까?                   병장 김형진

안녕하세요, 두시의 데이트입니다. 주절 주절 주절 주절 주절 주절 주절 주절

라디오가 쉴 새 없이 떠들어제낀다. 내일은, 춥겠구나, 교통사고가 21건 발생했구나, 따위의 소식들이
마치 누군가에게 전해들은 것처럼 자연스럽다. 확실히, 누가 그랬더라? 아, 그렇구나, 라디오에서 그랬지, 라고 말할법한.

심심하지는 않다. 그야, 이렇게 떠들어대니까, 귀를 기울이고, 배가 아플 정도로 웃다보면, 시간은 흘렀다. 하루가 지났다.
지금 몇시지? 이런, 역시 문명이란 좋은 거구나. 언젠가는, 오늘이 몇일이지, 하고 무한한 몰입감, 흘러간 시간에 대한 아쉬움,
뒤늦게 찾아온 허무함 따위가 짭쪼름하게 버무려진 자문 따위를 중얼거리게 될지도.


딸깍, 하고 라디오를 끈다. 가만 생각해보면 심심하지 않다고 해서, 외롭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글쎄, 그게, 그러니까,
확실히, 철없던 시절엔 그랬다. 분명, 심심함과 외로움이라는 단어가 동의어로 인식되었구나, 싶은, 그랬던 시절이 있었다.
내게는 그 시절이라는게 있었다면 분명, 인간 본성이라는 것에 적어도 한발짝 정도는 다가서 있지 않았을까. 지금보다는, 적어도.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심심하지 않기 위해, 어울렸다. 친구라는 녀석들과.

돌이켜보면, 친구라는게 참 그렇다. 그렇고, 그런 것이다. 한명, 한명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노라면,
치사한 자식부터 시작해서, 늘 빈대붙던 자식, x가지 없던 자식, 갑자기 혈압이 오르고, 이가 갈리고,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싶은데,
어쨌건 친구라는 것들이 없다면 나 자신에 대해서 혈압이 오르고, 이가 갈리고, 내가 정말 왜 이러고 있나 싶지 않을까 하는, 그렇고 그런 것이다.

심심하지 않기 위해 친구들과 어울리다보면, 외롭지 않았다. 그게 좋았다.
애초에 성선설 따위를 믿어서 착하게 살아온 인생은 아니지만, '함께' 수업을 제끼고, 체육관 뒤편에 누워, 담배 한대를 태우고 있으면,
흘러가는 구름을 멍하게 바라보며 구름을 만들어 흘러보내고 있으면, 아, 지구가, 돌고 있긴 있구나- 하고 놀라게 된다.
내가, 이 곳에, 살아있구나, 언제 끌려가서 벌을 받게 될지, 계속 제껴버릴지, 그런건 모르겠지만, 아무튼 좋은거구나, 삶이란 것은.
그래, 삶이란 건 그냥 좋은 거야, 나른하다, 하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게 된다.
거, 좋은 삶이면 비싼 담배 좀 피지, 시끄러워, 하고 눈을 감는다. 중얼중얼.


딸깍, 하고 다시 라디오를 켜본다. 대체 뭐가, 심심함과 외로움을 따로 나누어버린 것일까.
에이씨, 어릴 때는, 안 그랬는데, 세상 참, 복잡하네. 감당해야 할 감정이 하나 더 늘었으니, 어쩐지 손해보는 느낌이랄까.
시험봐야 할 과목이 하나 더 늘어난 것도 아닌데 뭘, 하고 고민하던 날 보다못한 친구는, 말했었다.


심심하지 않기 위해, 그건 절박한 이유다. 얼마나, 라고 묻는다면, 이것 하나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우리 인류는 심심했던 나머지, 인쇄술을 발명했고, 자동차를, 라디오를, TV를 발명했다고.
어쩌면, 충격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종교라는 것도 심심하니까 우리 함께 모여서 뭐라도 해보자, 하다가, 만들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음모론에 불과한 것이고, 예수님이 심심했는지, 부처님이 심심했는지, 그건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구인들끼리만 노는 것조차 몹시 심심했던지, 인간들은 우주항공국 따위를, 설립하고, 우주로 가는 방법을 연구하기에 이른다.
심심하지 않기 위해, 이루어낸 인류의 성과들은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탄생시키기에 이르렀으니,
잘은 모르겠지만 분명, 그것은 아이러니요, 어떤 공교로움이라고 부를 법 하다.


딸칵, 딸칵, 하고 라디오 스위치를 이리저리 돌려본다.
낯설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쳐서일까, 분명히, 새로운 느낌.
혀로 입맛을 다시다, 혀 끝이 교정쇠에 닿았을 때 느껴질 법한 강한 이물감 같은 것이 팽팽하다.

오호라, 그랬군, 문제는, '문명의 이기'였던게로군, 하고 생각하며, 애지중지 아끼는,
이 라디오를 사기위해 공사판에서 삽질한 날이 12일인지, 13일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다만 비싼 것이라는,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진심으로 애지중지 하는, 그 문제의 라디오를 다시 한번 천천히 살펴본다.
지금은 저 세상 어딘가에서도 라디오에 미쳐서 라디오를 만들고 있을 헨리 클로스가 개발한, 티볼리 오디오의 Model One, 소리가 참, 따스하다.
Model One으로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건, 어쨌거나, 내게는 큰 축복임에 틀림없다. 누구나, 부러워하니까.
친구놈들이 우리같은 쌈마이는 이런거 들으면 안 돼, 그러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형, 이 라디오로 듀크 엘링턴을 듣고 있으면요, 앞선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어쩐지 안타깝게 느껴지는 거에요.
왜, 그걸로, 음악을 들을 기회가 없어서? 바로, 그렇죠.
어쩐지 의기양양해진 나에게, 형은, 하지만, 그 사람들은 듀크 엘링턴의 연주를 눈 앞에서 들을 수 있었을테니까, 외롭지 않았을거야, 분명,
이런 느낌의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남겼다. 그런데, 그 말은 이상하게, 내 가슴을 사정없이 후벼파는 것이었다.
외롭지 않았을거야, 라니, 뭐야 그건. 어쩐지, 쓸쓸한 허무감 같은 것이 내 안에서 요동치는 느낌이었다.
외롭지 않았을거야, 라니.


야, 짜식들, 니네 MP3샀구나? 어, 같이가서. 근데, 둘이 똑같네?
한 녀석이 발끈, 하고 얼굴을 붉힌다, 대추같네. 아냐 임마, 내껀, 1기가 짜리고, 얘껀 512메가라구.
그래, 그렇구나, 그런 거로구나. 근데, 둘이 똑같네? 붉으락푸르락.
확실히, 그냥 봐선, 뭐가 뭔지.
기분 이상해, 뭐가? 난 분명 돈을 두 배 가까이 냈는데, 똑같잖아.
마치, 4000만원짜리 차를 샀는데, 2000만원짜리랑 똑같이 생겼다면 기분이 어떻겠어. 
뭐야 그게, 라는 표정으로 멀뚱멀뚱 바라보는 내게,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높였던 그 녀석은, 에리히 프롬이라는 사람이 말한 것처럼, 
소유의 실질적 가치라는 것에 심하게 집착하는 부류의 종족이었을까, 나에겐 2000만원도, 4000만원도, 다른 세상 이야기같은데.


오, 이거 좋다. 근데 용량이 다 차면 어떻게 해?
지워, 지워? 응, 지우고 다른 걸 저장하면 돼. 잠깐, 잠깐, 잠깐, 이상하다, 기분이.
그렇게 저장했다, 지웠다, 저장했다, 지웠다 하면, 그 음악은 어떻게 되는 거지? 흔적도 없이 사라질텐데,
그렇다면 내가 그 음악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좋아하는 무엇인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건,
참, 가슴 한켠이, 따끔따끔 쓰라린 일이구나. 무슨 소릴 하는거야, 더 큰 용량을 지원하는 최신 기종이 얼마나 많은데,
음악은, 마음 속에 있는거야, 라고 친구는 해맑게 웃었다.
아, 그렇구나, 음악은,
마음 속에 있는거구나.


정말, 그럴까, 수십기가짜리 최신기기에 좋아하는 음악을 한가득 집어넣고,
그 용량의 무게 때문에, 내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을 만큼 넘쳐나는 여유공간을 가지고 있다한들, 나는, 외롭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경찰에게 쫓기는 도선생마냥, 심각한 표정으로, 절박한 심정으로, 저장과 삭제를 무한 반복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남는 공간이기에 채워야만 하고, 다 채우면 공간이 부족하기에, 더 넓은 공간을 찾는 우리들은, 확실히, 너무 지쳐있는 것은 아닐까.
메모리 카드를 1기가짜리에서 2기가짜리로 바꿨어, 근데, 허무하다. 왜? 라고 묻는 내게,
앞에 적힌 숫자가 1에서 2로 바뀐 것 외엔, 아무것도, 라고 중얼거리던 친구의 얼굴에 드리워지던 그림자가 너무나도, 어두웠다. 너무, 너무.



문득, 형이, 보고 싶었다.
외롭지 않았을거야, 라니, 그건, 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새로 옮긴 형의 자취방은 딱, 그 정도였다. 넓다고 하기엔 조금 그렇고, 그렇다고해서 좁다고 하기에도 조금 그런, 딱, 그 정도.
너무 오래들어, 더는 듣고 싶어도 들어줄 수 없을 것 같은 오래된 테이프 따위를 불태우던 형은, 왔냐, 하는 웃음과 함께, 
계속해서, 불에 태웠다, 활활, 뜨겁게. 그 곳에서 어떤 숭고함 비슷한 것을 느껴버린 나는, 절로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영화 같은 거 보면, 나오잖아, 뭐가요? 그냥, 사람들이 헤어진 연인 사진같은 거, 불에 태우면서 질질짜고 그러잖아. 아, 네.
옛날엔 저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거든. 아, 네, 라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일까, 형은.
태워버릴 것이 남아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은 거야. 무언가가, 존재하는 거야.
무언가? 그래, 무언가. 그건, 내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야. 아, 네.
과연, 그도, 그럴 법 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어떤 암흑의 메커니즘 같은 것에 의해 기계가 제멋대로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형이, 태운다. 땔감을 모아오고, 불을 켠다. 형의 의지고, 형의 행동이며, 형의 실존이라고 부를 만한 그 어떤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테이프를 태우고 있으면 말야, 이제껏, 내가 듣던 음악들이 차례로 귓가에 들려온다. 정말요? 거짓말!
너, 이녀석. 넌, 이런 거 한번도 해 본적 없지? 한.번.도. 확실히, 난, 한번도 그렇게 해 본적이 없다. 그렇구나.
그래서, 난, 외로웠던 것일지도, 아마.
하지만, 형, 음악은,
마음 속에 있는 거라구요.

말은 잘해요.

형은, 웃고 있었다.
외롭지 않은 사람들이 외롭지 않은 순간에나 보여줄 법한 그런 웃음을 나는,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