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내부인으로 살아가기  
병장 김민규  [Homepage]  2009-01-20 05:58:37, 조회: 202, 추천:1 

  내부인內部人으로 살아가기
  2009. 1. 20, Minkiw



  내게 있어서, 어떤 집단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외집단을 내집단으로 변환시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새로운 집단의 일부로 나를 편입시키겠다고 하는 것은, 그 집단 안에서 공유되는 가치를 전폭적으로 수용하고 그러한 가치규범에 맞추어 행동하겠다는 수동적 굴종의 의미와 함께, 해당 집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내부인으로서의 책임과 역할을 다하겠다는 보다 적극적 의미에서의 충성이 함께 동반되는 일이다. 말하자면 손님 내지는 구경꾼의 지위에 머물러 있지 않겠다는 의지적 결단이 내포되어, 문가에서 서성이며 뻘쭘한 팔짱을 끼고 있기보다는, 방 안으로 들어와 의자를 나르고 식탁보를 깔겠다는 적극적 행위로서 표현될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집단의 틀 안으로 자신을 편입시키는 것은 반드시 의욕한 결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가치의 준거를 두고 있거나 같은 관심사를 공유하는 사람들과만 어울려 살아가는 세상이라면 우리의 정신은 얼마나 자유로울 것인가. 때로는 실용적 필요에 의해서, 때로는 전문화된 지경의 확보를 위해서, 그리고 때로는 불가피한 엔트로피의 통제와 해소를 위해서 우리는 조직을 구성하고 그 안에 우리 자신을 끼워 넣는다. 원하든 원치 않던 우리는 끝없이 조직되고 분류되는, 체 위의 입자들로 살아가는 대상화對象化의 숙명을 안고 있다. 자유인들이 계약으로 맺은 사회는 개인을 규정하며 나누고 억압해 줄을 세운다. 그러한 관념과 실존간의 모순적 권력관계를 벗어나지 못한 결과로 지금 이 순간, 나는 이 곳, 군 안에 있다.

  실재하는 것은 오로지 나 자신뿐일진대, 그간 참 많은 조직을 거쳐 왔다. 그리고 매번 강물 안에 내 작은 물기를 담글 때에, 나는 거시에 간섭하는 오만한 미시가 되고자 했었다. 초등학교 때에는 꼼짝 없이 앉아 있어야 하는 수업시간동안, 그러한 위치적 제한과 통제를 벗어나 교무실에 가서 이런저런 문서들을 가지고 오는 반장을 그토록 동경했었다. 중학생 시절엔 선생들의 인간적인 뒷모습과 학교의 속사정을 엿볼 수 있는 학생회 안에 있고 싶었고, 또래가 모인 교회에서는 행사 때마다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마이크 선을 까는 등의 잔일에서부터 본격적인 리드에 이르기까지, 실질적인 주도력을 가진 창조적 소수가 되고 싶었다. 심지어는 대학에 가서도, 학교에서 비밀리에 추진하는 해외탐방프로그램에 어느 날 선정되어 그 비싼 등록금 본전 한 번 제대로 뽑으며 프리메이슨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그냥 불러서 갔는데 그 자리에는 학생처장이 와 있고, 교내 언론사에서부터 ROTC까지, 그리고 각 과 한두 명씩의 ‘대표자’들이 어색해하며 앉아 있던 것이었다.

  그것은 궁에 온 지금도 여전하다. 어쩌다 보니 여기저기 출장을 다니며 내가 속한 그룹의 전산체계를 꾸려가는 위치에 도달했고, 예하부대의 일개 병사일 뿐인 내게 직접 전화를 걸어 이런저런 일들을 주문하는 저 위의 분들이 생겨났다. 새벽 네 시가 넘어간 방금도, 도대체 뭘 믿고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키 하나 들고 졸랑졸랑 나가 저 산 위의 후문을 열어주고 들어온 것을 보면, 현재의 생활 역시도 그러한 내부에의 갈망의 연장선상에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정형화된 행동양식을 가진 조직 안에 구겨 넣어져 있는 스스로의 처지를 부정하고 싶었던 것이다. 조금이라도 스스로가 덜 간섭받을 수 있는 처지에 있고자 차라리 조직을 장악하는 편을 택했다. 이야말로 비관한 이성을 의지로 돌려 세운 것과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 세세한 방법들을 어떻게 발견해야 할 것인지는 아직도 갈피가 잡히지 않아, 매번 새로운 환경을 접할 때마다 두렵고 조심스럽다. 적응의 시간과 과정은 여전히 지난하고, 어느 정도 주위의 사물이 익숙해진 이후에도, 간섭 아래의 단조로움에 머무를 것인지, 혹은 그것을 뛰어넘어 나름의 노선을 정립할 것인가의 문제는, 마음속에서 선택의 갈등을 일으킨다.

  어쩌면 그것을 선택이라 말하는 것부터가 모순이다. 그러니까 애초에 내가 선택해서 잠입한 조직이 아닌 이상에는, 개인에게 있어서 환경은 그저 주어진 것이지 변혁하고 개척하도록 던져진 과제가 아니다. 조용히 순응하며 하나의 톱니바퀴로 존재할 것을 전체는 요구하고 기대한다. 튀어나온 못은 두들겨 맞아 박힐 것이다. 도로위에 솟은 돌멩이는 깎여나갈 위태한 최후를 기다릴 뿐이다. 어떤 기적적인 요인이 작용하여 상황을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거대한 물결 안에서 개인이 휩쓸리지 않고 제 자리에 있을 것을 기대하는 것은 과도한 요구다.
  설령 원해서 들어간 조직이라 할지라도, 쟁쟁한 타인들과 견주어 특별한 경쟁력을 확보한다는 것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떠한 초월적 우위를 지니거나 다른 차원에서의 경쟁의 조건을 충족해 블루오션으로 가야만 중우衆愚에서 벗어날 수 있다. 편협한 대중의 몰상식에 스스로를 동화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발버둥치고 투쟁할 필요는 충분하다.




  그러나 태어나 단 하루도 나는 슈퍼맨이었던 적이 없었다. 내실만으로 경쟁우위를 확보하기에는 어떤 기준과 잣대를 적용해도 마땅치가 않았다. 계몽하는 자로 살아가기에는 스스로의 한계가 명확했기에, 전략의 수정은 필연적이었다. 주위의 타인들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사소한 일 하나를 하더라도 그것을 이끌어 역할의 배분과 통합을 시도하던 리더쉽들을 면밀하게 살폈다. 때로는 애초부터 우수한 환경적 지원을 받아 역량을 극대화한 이들도 있었지만, 그 모두의 공통점은 ‘시간과 노력의 추가적인 투자’로 수렴되었다. Fellowship을 이끌어내는 흡인력은 결국 얼마나 헌신적으로 공동목표를 위해 자신의 것을 투자했느냐에 그 원천을 두고 있었다.

  권한은 감당하는 책임의 양에 따라 비례적으로 증가했다. 어차피 들어야 할 짐을, 침묵하는 대중은 누군가 대신 져 주기를 바라고 원했다. 도드라져 보이는 대표자는, 사실은 그 스스로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전체가 필요로 했기 때문에 암묵적 동의로서 세워진 것이라는 순환참조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사람은 그가 가장 무능할 수 있을 때까지 승진한다’는 능력자의 역설은, 무관심한 대중이 자신 대신 세워 놓을 허수아비를 요구한다는 현실을 극단적으로 반영한 당연한 결과일 뿐이었다. 실상은 그럴싸한 미끼로 소수를 유인해 얼굴마담으로 앉혀 놓았던 것이면서도, 그에게 거는 허울의 기대심리는 적당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때에 대표자를 타도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참여하는 시민들’ 역시도 자신의 입장과 의견을 변호하는 데는 적극적이나, 그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는 것에는 극도로 소극적이다. 비판은 절대권력의 견제세력으로 작용할 수는 있지만 사실상 건설적 대안을 생산하기까지에는 못 미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너희들은 무엇을 했느냐’는 자격론의 시비 앞에서 허물어져 갈 뿐이다. 현대사회의 여러 저항적 담론들이 토론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냉소로 격하되고 마는 것은 그러한 까닭이다.

  피곤한 과정을 정면으로 돌파하며 모순을 회피하지 않는 적극성이 각광받지 않을 수 없다. 그 정도의 활동성만 갖춘다면, 한 자리쯤 만들어줄 수 있는 여지는 이 복잡한 세계 속에 충분히 존재한다. 표면적으로 대중들은 그의 탁월성에 주목했을지도 모르지만, 결국 그것이 발생한 배경이 내적 치열성에 있다는 것을 안다면, 결국 대표자의 성립 요건은 다른 것에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신비한 프리메이슨도, 위엄 있는 절대군주도, 압도적 괴수의 모습도 아니다. 보다 헌신적인, 보다 활동적인, 그리고 보다 가까이서 접할 수 있는 참여적 매크로인 것이다.




  이것이 내가 현재의 소사 세 사람에게 기대하는 모습이다. 물론 그들이 처해 있는 현실적 제약과 과제들을 부정하며 몰아세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노벨문학상 감의 얼개를 다듬으며 지나치게 긴 시간을 끄는 것은 적당하지 못하다. 그저 그것은, ‘기대를 걸어 준다니 배신하지는 않을게요’ 하는 수락의 의사면 충분한 것이 아닐까. 이미 그대들의 글쓰기의 멋은 익숙히 접해온 바다. 또다른 언어적 기교로 그것을 부연해 증명해야 할 필요는 사실은 없는 것 같다. 말하자면, 격려이자 독촉이다.

  그러나 동시에 애초부터 자발적인 후보자 수락을 받지 못한 것이 안타까워지는 것이 바로 이 대목이다. 굳이 피곤함을 감내하고자 하지 않는 이가 떠밀려 득표를 했다고 하더라도 대중의 기대감이 충족되지 못할 것은 분명하기에, 그 시초에 개인의 의사를 타진해볼 필요는 있었다. 그런 절차적 섬세함이 다소 아쉽기는 하지만, 어차피 여기까지 온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그간 보아왔던 그들의 모습으로 미루어 짐작하며, 이 공간에 대한 무한한 애정으로 확고한 의지를 보여줄 것을 기대하는 것이 보다 조화로운 일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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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이 글은 현재의 소사 선거를 염두에 두고서 쓴 것은 아니었다. 보다 근원적인 동기로 돌아가, 요 며칠 전 밤늦은 시간에 보스와 일을 하면서,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져버린 손놀림으로 후다닥 타자를 치고 있을 때였다. 조용히 일어나 탕비실에 들어가신 그 분은 커피 두 잔을 타 오시더니, 친히 한 잔을 권하시며 나를 긴장하게 하셨다. 받아 들지도 못하고 내려놓지도 못하며 어색하게 쭈삣거리고 있을 때 꺼내신 한 마디는 이랬다.

  ‘너 장기복무 신청해라’

  오만가지 생각이 지나가며 머릿속이 어지러워 잠시 메스꺼웠다. 아니, 그것은 다른 요인이 개입되지 않은, 그저 습관성 편두통에 불과했을 뿐이다. 대답을 준비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말씀이 끝나고 미처 정적이 흐르기도 전에, 나는 어색한 접대용 미소를 지으며 오해의 여지가 없도록 가급적 정중하고 진중하게 말씀드렸다. 
  ‘나가서 제 삶을 꾸려보고 싶습니다.’

  왜였을까. 그 대답에 일말의 흔들림이나 재고의 필요가 없었던 것은. 아마도 주어진 705일 이상의 어떠한 부가적인 적극성도 가지고 싶지 않은 나의 중우적 냉소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가 봐야 먹고살 길도 막막한 주제에, 직접 건네신 친절한 제의를 그렇게도 매정하게 뿌리치는 나는 미련한 고집쟁이임이 분명하다. 철없고 미련한 녀석은, 별 쓸데없는 조모임에서는 공력을 낭비스럽게 뿌리고 다녔으면서 막상 이런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 침묵하는 편을 택하고 말았던 것이다.

  아, 아둔한 군중의 소극적 회피는 어디까지인가.

  오늘은 바람이 참 차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6
13:41:34 

 

병장 이동석 
  전 또 내 부인으로 살아가기인줄, 
라는건 개소리고 후루룩쩝쩝, 2009-01-20
06:07:13
 

 

병장 이동석 
  막상 읽고 나니 손발이 오그라드는군요. (너무 밀어부쳐서 죄송해요. 헛) 2009-01-20
06:47:22
 

 

병장 김민규 
  음 자신 있으시면, 제 부인으로 살아가시는 것도 괜찮습니다. 단 처는 안되고요. 첩은 가능하겠군요. 흐흐? 

막상 쓰고 나니 손발이 오그라듭니다. 명예의 전당은 역시 누르는 게 아니었는데, 못 볼 것을 보고 말았... 근데 동슥님이 왜 '죄송'하다고 적으신건지 아직도 감 못 잡고 있습니다. 허허. 2009-01-20
09:35:44
  

 

병장 김민호 
  근데 민규님은 전공이 무슨과죠? 말을 너무 잘하시는거 같네요(웃음) 
그냥 궁금해서요. 책마을에서 글쓰시는 분들은 다 달필인것 같네요 2009-01-20
09:44:26
  

 

병장 정병훈 
  소풍갔다 와서나 읽겠군요. 낄낄낄- 지금은 쉬는중이랍니다. 
이제 오후부터... 덜덜덜- 2009-01-20
09:45:48
  

 

상병 이동열 
  저는 이런 내부인이라면 살고 싶지않아요(울음) 
원래 저란 녀석 자체가 어디 갇혀있는걸 좋아하지는 않는것도 있겠지만... 
전 민규님의 침묵이 소극적 회피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회피가 아닌 진일보라고 생각하고 싶군요(웃음) 2009-01-20
09:50:53
  

 

병장 김민규 
  민호/ 흐릿한 기억을 더듬어보면 경영대생이었던 것 같은데, 사실은 하고 다니는 짓은 공대에 더 가까웠던 것 같기도 하군요. 밤만 되면 돌변해서 헤- 입벌리고 모니터를 응시하며 뭔가를 뚝딱뚝딱.... 이런(웃음) 

병훈/ 잘 다녀오셔요. 몸조심 하시고요. 허허 저는 세시부터 꼬박 눈뜨고 있었더니 슬슬 제정신이 아니군요. 2009-01-20
09:52:56
  

 

병장 김민규 
  동열/ 그러게요. 낄낄. 근데 가끔은 그런 생각도 했답니다. 어차피 2년이나 2년 4개월이나 거기서 거긴데, 마이너로 왔다면 좀더 많은 자율이 부여되었을까? 그만큼 더 큰 짐을 져야 했겠지? 음? 

지금에 와서는, 그냥 웃지요. 낄낄낄 아 생각만해도 끔찍해라. 

아참, 잊고 있었는데, 그 '네번째 문단'은 동열님 글에서 힌트를 얻은 게 맞답니다. 고맙다는 말을 빼먹었네요- 2009-01-20
09:55:24
  

 

병장 이우중 
  내부인으로 살아가기가 싫어서 저지른 일탈들 덕분에 조마조마한 일상이 계속되고 있답니다. 
사실 며칠 전에도 한 건 크게 터뜨려서 정모 못나갈뻔 했어요. 허허허. 2009-01-20
12:20:06
  

 

상병 이동열 
  민규/ 흐흐, 민규님께 무엇인가 힌트를 드릴수 있었다는게 뿌듯합니다. 
콩 한쪽이라도 나눠먹듯 생각도 나눠먹으니 보람차군요(웃음) 2009-01-20
12:30:37
  

 

병장 김민규 
  우중/ 그러게요. 애초부터 외래인이었는데, 이거 왜 자꾸 내부인 하라고 하는지? 하루빨리 외부인으로 재분류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엉엉 
그래도 못 나오실 정도로 터트리시면 안되어요. 그야말로 가장 슬픈 일이니- 

동열/ 크크, 다음 생각도 곧 나눠주시길 기다리고 있을게요. 오호 2009-01-20
15:34:25
  

 

상병 김용준 
  저도 동슥씨처럼 솔직히 배우자로 살아가기인줄 알았다는...킁...민규씨의 침묵은 때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무슨 일이든지 '그 때'가 있거든요. 인간관계가 그렇고 사회생활이 그렇고 사는게 그렇자나요? 때를 기다리는 잠룡(潛龍)이라 봅니다. 낄낄낄. 

Ps. 민규씨가 '그 때'를 꼭! 놓치지 않고 잡았으면 합니다.(지극히 개인적 의견? 낄낄낄.) 2009-01-20
16:38:46
  

 

병장 김민규 
  용준/ 근데 제목을 자꾸 보다보니까 저도 헷갈려요. 내 부인? 음.... 나를 부인한다는건가. 
어서 빨리 '그 때'가 와야겠군요. 허허. 도대체 어떻게 생각을 해도 단 하루도 더 기여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니, 아무래도 저랑은 영 아닌가 보죠. 
미련해도 괜찮아. 흐흐 2009-01-21
03:59:34
  

 

병장 고은호 
  휴우- 정말 좋네요. 

예전 학창시절에는 앞에 나서며 이런저런 일에 앞장서고, 
목소리도 높이고, 그러다가 깨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고쳐야할 점과 
나아가야 할 점에 대해서 당당히 이야기 할 수 있었는데...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앞에 나서는 일이 귀찮아지고, 
그 때문에 서로 부딪치고 상처받는 일을 두려워하며 피하게 되면서, 
그렇게 점점 중우衆愚가 되어 가고 있었네요. 

지금의 나 자신은 어떠한 내부인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한 번 돌아봐야 겠습니다. 2009-01-21
10:07:49
  

 

병장 김민규 
  은호님 오셨네요. 으히히 

리플 보고, 한 가지 변수를 더 고민하게 됐어요. 대중 사이에도 연령, 재산, 교육등의 요인으로 계층화가 체계적으로 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졸업 이후 다분화되어버린 계층사슬(hierarchy)의 가장 하층부에 자신을 끼워 넣어야 할 우리가 어떤 주도력을 지니길 원하는 것은, 그저 요원한 일이겠지요. 귀차니즘과 자기방어의 본능 위에 실질적인 권력관계에서 오는 위축감이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봅니다. 최선은, 젊은이다운 패기있는 활동력으로 싹싹하다는 인상을 주는 정도겠지요. 사회적으로 중우가 강요되는 현실을 빼놓고 가서는 안 될 겁니다. 

그걸 뚫고 나가기로 결정할 것이냐, 우리 20대에게 주어진 물음이 아닌가 싶네요. 2009-01-21
12:03: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