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그리스인 조르바』성화聖化의 변증법 
 
 
 
 
해성님의 부탁으로 올려봅니다. 아무래도 주말이라서 시간과 여유가 남는군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조르바와의 만남. 여러 문학의 정신과 소통하다.

조르바를 읽게 된 이유는 간단합니다. 저는 운이 좋게도 문학하는 많은 친구들을 고등학교에서부터 만나 문학동아리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제각기 독서 스타일이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당시 동아리 서클의 부장이었던 친구는 아이작 아시모프의 매니아였고, 다른 친구는 베르베르와, 닉 혼비, 척 팔라닉을 열렬히 좋아하던 대중문학의 기수도 있었으며, 서클 총회장 선배는 톨킨 신봉자이자 루이스, 르귄 광이었으며, 차장은 그의 아버지의 영향으로 러시아 리얼리즘 문화의 영렬한 팬이었고, 저와 절친했던 다른 후배는 이영도나 전민희같은 판타지 장르소설을 좋아하는 녀석도 있었습니다. 요시모토 바나나와 시오노 나나미, 무라카미 하루키와 소세키, 아쿠타가와를 좋아하는 일문학도도 둘이나 있었죠. 저는 거기서 유럽 중세민담, 18~19세기를 가로지르는 낭만주의 작가들을 특히 좋아해서 동아리 수업때도 그쪽의 파트를 맡아서 토론을 이끌어가곤 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모두 자기 나름의 문학론을 뚜렷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문학의 ‘환상’이라는 것을 긍정하는 사람들이었달까요. 어쨌든 이 동아리가 제 삶과 문학의 요람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이들은 모두 서로 자신만의 문학론을 강하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대화와 토론, 논쟁을 통하여 서로 다른 친구들의 문학론과 색깔을 흡수하여 자신만의 문학론으로 상승시키는 ‘유리알유희’같은 재주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0년전부터 시작된 이 모임은 졸업한지 6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유효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 자주는 못만나더라도 - 친구들과 만나 술을 마시며 하인라인과 뮌희하우젠의 엄청난 상상력들이 톨킨과 루이스의 연대기를 지나 시오노 나나미의 허구적 역사와 대화하며, 다른 쪽에서는 바나나와 하루키의 연애담이 하얀 로냐프강과 푸케의 운디네 이야기, 오스틴의 이성과 감성에 열띤 토론을 하며, 마르셀 파뇰의 소시민적 수필과 희곡들이 도스토에프스키와 고골리의 운명성의 리얼리티와 충돌하기도 하며 즐거운 유희를 즐긴답니다.)
하여튼, 이 동아리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친구가 하나 있는데, 일석 이희승 선생의 고종증손자였습니다. (사실 이러한 계보가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지만 - 헤일리의 ‘뿌리’에서 나타나듯이 - 분명 그러한 풍모는 여기저기서 보여지는 친구였지요) 이 친구는 러시아와 지중해문화권의 문학을 탐독했던 친구인데, 그 친구가 학창시절부터 자신의 삶을 가장 커다랗게 변화시킨 작품으로 영화 ‘일 포스티노’와 더불어 추천한 책이 파스테르나크의 ‘의사 지바고’와 바로 이 ‘그리스인 조르바’입니다. (사실 칼비노도 이 친구가 엄청나게 좋아하는 작가이긴 합니다만, 그것은 저의 영향에 의해서였죠. 웃음) 사실,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만한 책이었다면, 명작이고아니고를 떠나서 분명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장르문학이든 수필이든 뭐든 읽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인지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저번 나들이때 책을 가져와서 읽었습니다. 따라서 제가 고등학교를 불태웠던(?) 동아리에서의 경험이 있는 한, 저와 조르바의 만남은 어찌보면 필연적이었습니다. 


보헤미안적 정신, 철학을 만나다.

이 소설은 아시다시피 자전적 소설입니다. 카잔차키스가 만난 조르바라는 실제 인물에 대한 소설이며,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매우 환상적인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정신에 대한 소설이면서도 삶에 대한 이야기이며, 두가지 상반되는 소재를 훌륭하게 조화시키는 방법에 대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문학가인 주인공과 조르바는 어찌보면 전혀 반대에 있는 사람처럼 보여집니다. 사실 실제 사회에서도 학자와 노동자는 완벽한 조화를 이루기 어렵고 - 그에 대해서는 데리다나 가다머, 들뢰즈가 프랑스 6.8운동같은 사회적인 사건들에서 보여준 모습들이 생각납니다. - 그 두 위치 사이의 간극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도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닌것 처럼 보입니다. 물론, 카잔차키스는 철학가도 아니었고, 사상가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저 소설가일 뿐입니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한다’고 말했듯이, 카잔차키스는 그저 침묵할 뿐입니다. 그저 자신의 삶의 일부를 소설로서 ‘보여줄 뿐'이죠. 하지만, 이것을 읽으며 저는 문학이 삶의 정수를 담고 있다는 제 문학론을 더욱 확고히 해줄 수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이 소설은 어느 사상서를 불문하는 방법론을 ’뛰어넘는‘ 통찰력으로 삶에서 육체와 정신이 소통하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해주고 있고, 또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제 친구가 늘 생각해오던 문제, 정신과 육체의 간극 (이 친구가 마법이나 오컬트에 관심이 있었던 이유 역시 육체의 세계에서 영적인 문제들이 어떤 관련이 있었는가를 연구하는 방편 중 하나였던것 같습니다.)과 둘의 조화에 대한 문제가 이 소설만큼 훌륭하게 보여지는 소설도 없기에, 그 친구는 이 책을 자신의 삶의 한 가운데에 두었던 소설로 보여집니다. 그리고 그 친구의 사상과 신념등을 하나하나 곱씹어보면, “아, 이녀석이 이 소설에 엄청난 영향을 받았구나”라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그 친구가 천착하는 삶의 문제와 조르바의 이야기는 상당히 밀접한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가 바로 “육체와 정신의 소통방법”이었던것 같습니다.


육체와 정신, 그 우연적 만남

이 소설은 정신으로 대표되는 카잔차키스와 육체로 상정하는 조르바의 만남이 가져오는 변증적 상승의 결과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둘은 언뜻 보기에 극과 극이며 전혀 소통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소설의 시작부터 그런 육체와 정신을 아우르는 중요한 삶의 비밀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조르바와 카잔치키스가 처음 만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순간. 그것은 첫부분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 종교적이고 신비적이기까지한 새벽 바다의 포효를 서로 바라봄으로써입니다. 이미 여기서부터 이 작품의 특질이 보여집니다. 평생을 책만 탐독해오던 학자나, 평생 떠돌며 몸(육체)의 삶을 실천한 부랑자나, 인간인 한에는 모두가 공감할 수밖에 없는 초자연적인 자연의 포효와 감동. 그것을 서로 응시하는 순간, 서로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든, 어떠한 삶을 살든, 절대자와 삶의 중요한 비밀을 직관적으로 인식하게 되고,(이 부분 때문에 카잔차키스를 연구할 때 베르그송이 언급되기도 하는것입니다) 그러한 삶의 표정 속에서 인간이라는 존재의 닮은꼴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항구의 까페에서 왜, 조르바는 카잔차키스에게 접근하였을까요? 많은 독자들은 이것을 그저 ‘우연’이라든지, 조르바가 ‘얻어먹을것이 있어서‘ 접근한게 아닐까 라고 생각할겁니다. 물론 일차적으로 두 인물의 만남은 표면적으로 그러한 우연의 성격을 띄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학창작 기법에서 ’우연적 필연‘이라는, 윤대녕 아저씨가 잘 쓰는 이 기법은 정신을 꿰뚫어보는 심미안으로 연결되어있음을 조금 더 깊이 생각하면 알 수 있습니다. 예컨대 이런 겁니다. 둘은 모두 새벽의 항구에 나간 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뱃사람들처럼 바다를 응시합니다. 하지만, 그런 성난 바다와 잠잠한 평화를 서로 응시하는 순간, 조르바는(물론 조르바는 이런 모습들에 익숙해 있고 능숙합니다.) 자신과 비슷한 이런 경이의 광경을 바라보는 또 다른 사람을 목격합니다. 즉, 이런 자연의 위대한 순간 속에서 자신과 비슷하게 삶을 직관하게 되는 또 다른사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인물이 바로 카잔차키스입니다. 카잔차키스가 까페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잠기던 상념과 거기서 추출하는 과거의 기억들은 가히 베르그송이 말한 ’직관에 의한 지속‘의 개념과도 관련이 있는 삶의 편린들을 추출하는 과정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자신과 닮은 사람이라는것을 ’직관‘합니다. 이것은 조르바가 카잔치키스에게 접근할때부터 일종의 ’확신감‘이 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두 인물은 전혀 다른 곳에서 (한 명은 삶 그 자체에서, 다른 한 명은 베르그송에 기반한 내적 자아의 주체의 지속에 의해서) 출발한 인물이지만, 그들이 지향하는 한 점은 같다는것을 조르바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육체와 정신의 변증적 상승, 성화聖化에 대해서

저는 Mr.Know판 조르바를 읽었지만 (아무래도 이윤기씨의 부드러운 의역과 믿을만한 번역이 마음에 들기에) 역자후기와 작품해설을 읽으면,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성화하기’라고 설명하고 있고, 저 역시 이 부분에 동감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화하기라는 것이 무엇이며, 이 작품에서 왜 중요한지, 이 부분에 대해서 말해볼까 합니다. 이 성화하기야 말로 조르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가장 핵심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은 육체와 정신의 소통에 대한 소설입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중요한 문제는 카잔차키스와 조르바가 어떻게 소통하느냐에 대한 관건으로 이야기는 넘어갑니다. 하지만,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소설은 첫장면부터 그에 대한 해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테제(카잔차키스-정신)와 안티테제(조르바-육체)를 뛰어넘는 삶의 중요한 비밀을 동시에 깨닫는 것은 장엄한 자연을 바라보며 숙연해지는 그 광경 바로 그것과 흡사하다고, 작품 전체에서는 절절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성화하기의 변증적 관계는 헤겔적이라기보다는 니체적이며, 그 변증적 사유방식 또한 데카르트적이라기보다는 베르그송적입니다. 베르그송과 니체가 카잔치키스의 작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이유도 바로 여기서 나오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의 핵심 주제인 ‘성화하기’에 대한 방법의 보여주기는 니체적 변증법의 ‘삶속에 보여주기’에 다름 아니기때문입니다.)
작품속에서 카잔차키스가 친구를 회상하고, 삶을 희구하는 부분의 독백조의 회상은 모두 베르그송이 말한 ‘내적 자아의 지속’과 ‘직관’에 관련됩니다. 하나의 물질에 대한 본질은 그것 자체의 내적 질서에 의해서가 아닌, 자아의 내적 규범에 의한 공시성의 재구성에 의해 ‘기억’되는 것이라는 베르그송의 ‘내적 자아의 주체’개념은 카잔차키스가 삶의 무게를 인식하고 사유하는 가장 기본적인 틀이자, 이 작품 특유의 문체이기도 합니다. 그는 삶의 본질에 대해 수없이 고민을 하는 인물이고, 정신이 무엇을 해야하는지, 자아의 방향이 무엇인지 (이 부분은 카잔차키스와 친구가 주고받는 편지의 내용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고민을 하며,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조르바와 함께 광산에서 생활하고 그 이후의 여행을 꿈꿉니다. (이 카잔차키스의 조르바에서 보여지는 여행과 자유에 대한 호메로스적인, 그러니까 그리스 총체성적인 내용들은 루카치의 이론과 더불어 설명해 드릴수는 있겠지만, 이 내용이 작품 후반부를 수놓는 중요한 특징중 하나이기도 하지만, 이 글의 내용과는 조금 맞지않다고 생각하여 생략하겠습니다.) 
여기서 조금 재밌는 메타포를 집어넣는다면, 카잔차키스는 바로 ‘낙타’입니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를 읽어보신 분이라면, 이 낙타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단박에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니체의 짜라투스트라가 말한 ‘낙타’의 표상이 바로 이 작품의 주인공 카잔차키스입니다. 그는 삶의 모든 무게를, 철학적인 사유의 문제들을 무겁게 짊어지고 홀로 사막같은 삶을 헤쳐나가고 있습니다. 그는 그 무게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고, 헤쳐나가기 위해 백방을 노력하는 ‘지성인’의 표본을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삶의 중요한 비밀까지 도달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인공은 조르바를 만납니다. 그리고 삶이 변화합니다. 너무나도 자유분방하고 호방한, 카잔차키스의 말대로 영혼의 자유인인 조르바를 만나면서, 그는 그가 지금껏 짊어지고 오던 삶의 무게들에 대한 경박함을 느끼게 되고, 삶의 다른 단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조르바의 만남, 그리고 조르바와의 2년간의 생활. 거기서 얻게되는 정신의 다른 단계, 즉 ‘정신 자유’의 길을 열어주는 ‘사자’를 바라봅니다. 조르바는 즉 ‘사자’인 것입니다. 그가 던지는 삶에 대한 촌철살인의 대사 하나하나가 바로 자유에 대한 포효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컨대, “말썽을 일으키는게 골칫거리라구요? 삶이란 바로 말썽을 일으키는 것이라구요.”같은 대사들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습니다)
이 니체적 변증테제인 두 인물의 만남은 광산의 생활에서 비로소 ‘성화’됩니다. 이 성화된다는 표현은 바로 니체적인 변증법의 가장 중요한 본질로서, ‘초인’, 즉 ‘아이’, ‘건너가는 자’를 보여주는 중요한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카잔차키스가 안고 있는 중요한 삶의 문제들, 본지들에 대한 회의감은 조르바에 의해 그 자유를 얻게 되며, 서로 니체적 변증법으로 소통하므로써 (이 소통에 대한 내용들이 바로 이 작품의 최대의 진수입니다) 그들의 삶은 성화됩니다. 그 성화의 순간은 바로 디오니소스적인 것이자 동시에 아폴론적인 것. 유희적이면서도 그 안에 삶의 모든 비밀이 다 내포된 것처럼 보이는 조르바의 춤과 연주, 축제같은 술자리에서 표현됩니다. 조르바를 읽는 독자들이 가장 감동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이부분일 수 있는 이유는 이 성화된 술자리자체가 바로 니체가 말한 ‘건너가는 순간’이며, 조르바의 자유가 카잔차키스의 네르그송적인 ‘내적 자아’와 만나 진실로 삶의 비밀이 드러나는 성스러운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 것이 바로 삶의 '성화하기'입니다. 이 작품에서 조르바와 카잔차키스가 춤추고 노래하고 술마시며 유희하는 부분을 잘 읽어보시면, 이러한 니체적 변증법이 베르그송적인 주체개념의 인식의 흐름을 바탕으로 성화되는 과정을 아주 잘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카잔차키스의 뛰어난 작가적 역량이 발휘되는것이며, 개인적으로는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를 이미 ‘뛰어넘은’ 위대한 작가의 반열에 올라갈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19세기 리얼리즘 문학과 20세기 문학을 논한다는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만.)


- 조르바가 하고자 하는 말은 무엇인가. 삶의 중요한 문제들

이렇게 니체와 베르그송, 그리고 호메로스에 상정된 (이윤기씨의 작품후기와 작가설명이 이 점에서는 매우 탁월하다고 보여집니다) 조르바의 내용들은 따라서, 종교적 금서에 자주 오르게 됩니다. 왜냐면, 작품속에서도 보여지듯이 기독교의 성스러운 공간은, 천박하고 투박한 내용들로 ‘해체’되며 (이 의미는 데리다적인 의미로서의 해체입니다. 붕괴되어 사라지는 것이 아닌, 종교가 삶의 단계로 미끄러져 내려와 삶 속으로 편입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수도원으로 토지인수를 하기위해 조르바와 숲을 걸어가며 만나는 한 파계승의 행동.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삶의 단계에서 미끄러져 내려오는 종교의 ‘해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종교에 대한 ‘반종교적’이라고까지 거론되는 내용들은 이미 니체의 사상에서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한 이후에 얻게되는 사상의 자유, 그러니까 종교인들은 ‘낙타’요, 조르바와 카잔차키스는 ‘사자’였기 때문에, 신이 죽어야 ‘아이’가 될 수있다는 니체적 사상이 카잔차키스의 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 소설이 종교적으로 비판을 받아야할 이유가 있다면 아마도 니체가 비판을 받는 그것과 같을 것입니다. 

이 작품은 정신과 육체의 소통에 대한 소설이며, 그 소통의 목적과 주제는 ‘자유’라는 하나의 커다란 카테고리로 통합되고 있습니다. 조르바는 그 자체가 바로 ‘자유’였으며, 카잔차키스는 ‘낙타’였기 때문에, 자유를 희구하는 낙타의 모습이 조르바에서는 심심찮게 보여지고, 또 표현됩니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자유의 모습은 어떤 것일가? 약간은 엉뚱하게도, 그러한 자유의 표상은 그리스의 민족시인 ‘호메로스’의 작품에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물론 자유의 본질적 의미들은 니체적인 그것들을 따라가고 있지만, 조르바가 작품 전체를 관통하여 떠나고 모험하는 ‘부랑의 생활’들의 모습들은 루카치가 말했던 ‘그리스시대의 총체성의 회복’이며, 아이헨도르프가 지적했던 ‘총체성으로의 여행’에 다름 아닙니다. 이 부분에서 ‘그리스인 조르바’또다른 사상적 특징이 보여지는데, 이부분은 죄송하지만 생략하겠습니다.


- 맺는말. 조르바, 정신과 자유에 대한 복음서.

이 소설을 극구 추천했던 그 친구는 저의 10년이 넘는 친구이자, 가장 절친한 친구이자, 학문의 목적을 같은곳에 두고 있는 친구입니다. 따라서 같이 술마시며 즐겁게 놀면서도 자신의 학문과 정신의 목적에 대해 같은 토론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친구입니다. 그 친구나 저의 삶에 대한 공통된 테마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정신에 관하여’입니다. 다만 그친구는 조르바의 ‘성화하기’로 정신을 찾으려 했으며, 저는 ‘유리알 유희’로 정신과 소통하려고 했을 따름입니다. 두가지 방법은 서로 같은 질료로 되어있으면서도 다른 형상을 취합니다. (이것에 대해 궁금하시다면,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와 헤세의 ‘유리알 유희’를 읽고 서로를 비교하신다면, 그 친구와 저의 정신의 소통을 비교하는 것이 될것입니다. <- 이 방식은 다분히 유리알유희적입니다. 조르바적으로 이해하고 싶다면, 심오한 철학을 표현하는 무제오 로젠바흐의 ‘짜라투스트라‘와 크라잉넛의 ’말달리자‘를 비교하신다면, 약간은 비슷한 비유가 될지도. 둘다 삶의 무게를 똑같이 표현하는 방식들이니까요. 웃음)
이점에서 그 친구와 저 역시 카잔차키스와 조르바와의 마찬가지로 변증 테제가 작용합니다. 저는 ‘유리알유희’를 설파하는 낙타이고, 그 친구는 ‘성화하기’를 설파하는 사자입니다. 그 친구와 제가 서로 ‘성화하게’된다면, 혹은 ‘유리알 유희를 연주하게 된다면’, 삶이 어떠한 국면으로 들어서는지 궁금하신가요?
그렇다면, 나중에 저와 그 친구가 만나 술마시는 자리에 놀러오시길 바랍니다.
분명 그곳에 참석한 사람도 삶의 중요한 비밀을 엿볼 수 있을테니까요.

해서, 이 작품은 제 정신의 구도에 ‘안티테제’의 복음서로, 변증적 상승의 가장 중요한 발판중 하나가 되버렸습니다.
 

  
 
 
 
병장 김성훈 (2006/05/21 09:41:27)

"문학가인 주인공과 조르바는 어찌보면 전혀 반대에 있는 사람처럼 보여집니다. 사실 실제 사회에서도 학자와 노동자는 완벽한 조화를 이루기 어렵고 - 그에 대해서는 데리다나 가다머, 들뢰즈가 프랑스 6.8운동같은 사회적인 사건들에서 보여준 모습들이 생각납니다. - 그 두 위치 사이의 간극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도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닌것 처럼 보입니다. " 

일단, 이 말에 공감합니다. 제 친구는 '사회이론가'와 실제 '노동자' 사이엔 극복할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한다고 했는데, 사회이론가 입장에서 본다면 꽤나 절망적인 말이지요. 

그런데, 자연의 경관을 바라보는 경이감, 디오니소스적인 유희, 그것으로 소통을 이야기하시는 것을 보니, 다분히 베르그송적인 부분이 있으시네요. 버뜨, 제가 그 부분에서 베르그송과 화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항상 '소통가능성'과 '인정가능성'은 별개로 보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소통이 불가능하다고 인간관계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역으로 보면 소통 불가능은, 영원히 소통불가능이다라는 입장이기도 하구요. 

나는 어떤 사람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는 일종의 '정의'를 내리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저의 자기연민에 근거한 거지요. 내가 특정인의 어려움을 보고 가슴 아파하는 것은 비슷한 상항에 처했을 때 "내가" 느꼈을 그 감정을 그 특정인에게 대입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소통'이 아니라 '인정'이지요. '간주'라고도 표현될 수 있을까요. 

다시 풀어 이야기하자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 사람과의 관계 양상은, 그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나와의 관계 양상과는 다르다는 겁니다. 하지만, 내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나만의 관계 양상이기 때문에, 나는 그것이 '진리'다 라고 결론을 내리는 겁니다. 사실 모든 인간은 '소우주'이고, 그것은 무한하며, 우주 바깥은 상상할 수 없지요. 

그렇다고 '인정가능성'이 환상에 기인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민우님께 드린 '개별의 유토피아'라는 용어가 그것을 설명해줄 꺼에요. 내가 Boz Scaggs의 'We're All Alone'이란 노래를 좋아하는 것은, 그것이 비관성만큼이나 낙관성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소통 되지 않는 인간관계라는 것이, 더욱 서로서로간에 정직한 인간관계를 이끌어나가는 인력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병장 김성훈 (2006/05/21 09:53:04)

아, 추가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조르바'를 읽지 못했습니다. (헉)    
 
 
상병 송희석 (2006/05/21 09:59:20)

"문학가인 주인공과 조르바는 어찌보면 전혀 반대에 있는 사람처럼 보여집니다. 사실 실제 사회에서도 학자와 노동자는 완벽한 조화를 이루기 어렵고 - 그에 대해서는 데리다나 가다머, 들뢰즈가 프랑스 6.8운동같은 사회적인 사건들에서 보여준 모습들이 생각납니다. - 그 두 위치 사이의 간극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도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닌것 처럼 보입니다. " 

일단 전 이말에 부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물론 당시 6.8혁명에서 데리다와 들뢰즈의 모습은 지극히 극복할수 없는 간격이 존재했습니다. 허나 실존주의자라 불리웠던 사르트르 와 카뮈, 퐁티같은 인물들은 극복할수 있다는것을 보여줬습니다. 물론 이들을 학자라 부르기엔 어렵다면 러셀만 봐도 그는 행동하는 학자로 볼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충분히 이론과 실제는 충분히 소통가능할수 있다는것을 알수 있는 것입니다. 

또하나 윗글에 부정적으로 보는 내용이 있는데, 그리스인 조르바를 충분히 '정신'과 '육체'에 대한 소통으로 동의하지만, 그것을 '자유'로 통합하기 보다는 일종의 '양의성'을 갖고있다는것을 주지시키기 위한 소설이라 판단합니다. 왜냐하면 카찬차키스와 조르바를 통합하기는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통합으로 '자유'로 한정시키면 결국 민우님이 말씀하신 '종교'이야기는 또다시 분리시키는 되풀이되는 논의가 펼쳐지게 되는것 같습니다. 

차라리 저라면 이 소설이 정신과 육체에 대한 변증법을 갖고있는 작품으로써, 그것에 양의성을 고찰시키려는 작품으로 생각해보는것이 더 타당할것 같은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병장 김성훈 (2006/05/21 10:02:33)

희석/ 어쩌다, 우연찮은 계기로, 희석님이 페미니즘, 그리고 '바라지 않는 사랑'에 관해 논하신 것을 보게 되었는데, 그 글을 읽고 희석님께 지대한 관심이 생겼습니다. 핫.    
 
 
상병 황민우 (2006/05/21 10:13:21)

희석님// 자유로의 통합에 대해서는 루카치가 언급한 호메로스, 그리고 그리스문화의 총체성에 대해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그게 이 글에서 언급하기는 쉬운 문제가 아니니까.. 나중으로 넘긴겁니다.. (무책임하다.... 땀.. 그것까지 말하면, 이 글의 양이 상당히 길어질뿐더러, 제 내공의 한계가 드러납니다. 무엇보다도, 지금 제가 좀 지쳐있어서...) 
그리고 희석님께 분명히 말씀드릴것은, 이 글은 철학과 종교에 대한 글이 아니라, 카잔차키스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 등장하는 문학적 내용들이 어떻게 '비평적으로' 소통하고 있는가이며, 즉 문학 비평으로서의 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설의 내적 플롯에 의하면, 그런 두 테제의 통합은 '자유'로서 확립된다고 말하고 있기때문입니다. 
물론 조르바와 카잔차키스가 대화하는 내용적인 면에서는 니체와 베르그송의 사상이 보여지지만, 그것이 자유에로 통합되어 상승하는 과정은 루카치의 '총체성'개념에 상당히 기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내용을 말하는것은 카잔차키스가 말한, 사상적인 변증적 통합과는 '별개'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것은 사상서가 아니라 '소설'이라는 점이며, 저는 '소설'을 비평한것이고 분석한것이지, 카잔차키스의 니체와 베르그송의 대화로 통해 통합되는 자유의 사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저는 여기서 다른 논의를 꺼냈을겁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종교이야기는 잠깐 꺼냈다가, 시간이 촉박해서, 그냥 얼버무렸는데, 조금 오해의 소지가 있는듯 하네요. 이 부분도 쉽게 넘어갈 이야기는 아니라서, 그냥 제낀겁니다. 저는 제가 쓰는 글을 문학비평적으로 접근하는것이지, 어떤 사상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아니라는것을 희석님께 일단 밝혀드려야겠습니다. (웃음)    
 
 
상병 황민우 (2006/05/21 10:20:05)

성훈님// 그것은 제가 베르그송적이라는게 아니라 작가 카잔차키스가 베르그송적이라는 말이겠지요. (웃음) 물론 저도 상당히 베르그송적인 사람이기도 하지만, (곤돌씨는 저를 베르그송주의자이줄 알았다고들).. 저는 본질적으로 유리알유희 연주자입니다.    
 
 
상병 송희석 (2006/05/21 10:20:10)

성훈/ 별볼일 없는 졸작들을 보셨군요. 하핫! 전 성훈님 글을 예전부터 관심있게 지켜봤습니다. 

민우/ 전 절대 사상적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만약 철학적인 이야기를 한다면 니체와 베르그송에 대한 다분히 철학적인 이야기만 꺼냈을텐데 그것은 민우님 오해이구여, 솔직히 저는 그리스인조르바를 2번이나 읽었습니다. 그정도로 그리스인 조르바는 꽤 어려운작품이며, 감명깊게 읽은 작품이고, 쉽게 접근해서는 안될작품을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특히 민우님이 말하는 문학적내용에서의 니체와 베르그송 언급에 대해 개인적으로 조금 다른 견해를 갖고있다는 것이고, 특히 그리스인조르바가 갖고있는 내용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 종교이야기인데, 만약 비평하실것이라면 그부분을 중점적으로 비평하는것이 아마 제 개인적인 견해로 옳은것 같습니다. 

소설 중간중간 나오는 변증법적 사고는 민우님이 말씀하신것이 충분히 좋은 견해라 여기지만, 종교인을 '낙타'와 조르바와 카잔차키스를 '사자' 로 표현하여 니체적 사상으로 접근하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점에 대해서 조금더 민우님의 부가적인 설명이 필요할듯 합니다. 하하. 아무튼 민우님에 이런 엄청난 문학비평은 정말 저에게 새로운 자극을 줍니다. 계속 좋은글 부탁드립니다.(웃음)    
 
 
병장 박준응 (2006/05/21 10:43:22)

민우씨 요즘 갑자기 다작의 길로 접어드셨군요(웃음) 좋은 현상이에요. 아주아주 좋은 현상. 
일단 선리플 후감상입니다. 오늘 너무 힘들거든요. 
자주 자주 봅시다.(찡긋)    
 
 
 병장 노지훈 (2006/05/21 14:34:11)

흐흐 역시 조르바 한 번 더 읽어야 겠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일병 김지민 (2006/05/24 12:58:20)

최근에 조르바를 읽었는데. 인상적이군요 
저는 화자와 조르바를 양분시켜서 파악했는데, 변증법적인 성화가 이루어진다니. 
자연스레 합쳐진다는 느낌은 들지 않더라도, 어느정도 사실인 것 같긴 합니다. 
다만 소설 전체적인 시선으로 봤을 때 조르바가 너무 우위에 있는 것 같아서요    
 
 
상병 황민우 (2006/05/24 14:04:29)

지민님// 조르바가 우위에 있는것은 니체의 변증법을 이해하면 조금 당연한 귀결일테고.. 
당연히 둘은 자연스레 합쳐질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조르바도 카잔차키스도 그 단계에 완벽하게 다다를 수 없기때문이지요. (이 점은 이야기끝에서 조르바와 주인공의 계획이 '무산'된다는 점에서 드러납니다.) 물론 순간순간 비추어지긴 합니다. 그것이 둘이 공통으로 지향하는 그것이구요. 하지만, 그 총체적 자유에 대한 희구는 그저 삶속의 희구로 끝나면서 의문을 던집니다. 
바로 이 점때문에 이 작품은 낭만주의가 끝난 시점, 즉 리얼리즘 소설의 계보이며, 그러면서도 낭만적 자유성을 획득하려는 명작으로 추앙받는겁니다.    
 
 
병장 오해성 (2006/05/25 18:38:45)

[killroo] 
쿨럭 많다.    
 
 
병장 오해성 (2006/05/25 23:22:21)

[killroo] 
민우씨와 친구가 술마시는 곳에 끼어들었다가는 
숨막혀 죽을지도...배우게 되는 것도 많기는 하겠지만 
그전에 죽어버릴 것같은 예감이 강하게 듭니다.    
 
 
병장 권희용 (2006/05/26 08:50:49)

[히루] 
...응? 뭐가 있었어?(단기기억상실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