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의 매듭을 푸는 일
"이런,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딨겠니." 누군가, 언젠가, 내게, 그렇게 말했다. 옳다구나. 뚜렷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나는 그때 사연 없는 사람은 없지만, 사연이 있는 모두가 사연이 가지는 그 농담(濃淡)만큼 그저 묽거나 짙게만 사는 건 아니라고 말했던 것 같다. 어려운 일이 있으니 그럴수록 의지를 북돋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평소에는 그리 관심도 없었던 주변 사람들 하나하나 원망해가며 그저 자리에 주저앉아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고. 다른 사람이 보는 그 사연의 무게만큼 내가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그런데, 나는, 어쩌면 이건 취향의 문제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점이 꽤나 스스로 못마땅하다.
역경에 부딪히면 그것을 꿋꿋이 이겨내야 한다는 것은 세상에 뿌려진 무수한 위인전들이나 건전한 어린이 육성을 위한 동화들이 심어놓은 판타지다. 그 동화들이 맘에 들거나 혹은 맘에 들지 않거나와 같은 취향의 문제처럼 사람의 삶은 취향으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정말 몸을 쥐어뜯을 만큼 힘겨운 일이 나를 찾아온다면- 고통에 대한 반응을 온몸으로 절실하게 표현하면서 나는 고통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를 뼛속 깊이 스스로 새겨줄 수도 있을 것이며, 한편으로는 파랗게 서린 아이스링크 위에서의 구태의연한 넘어짐을 겪은 듯 툭툭 털고 자기 갈 길을 향해서 다시 얼음판을 지치게 될지도 모른다. 친구들을 부여잡고 하소연을 하다가 위로를 받거나, 결국 위로를 해줄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고, 성공에의 의지에 불타오를지도 모르고. 사람이 수십, 수백, 수천 명이면 역경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또한 수십, 수백, 수천 가지가 아니겠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사람의 삶의 척도는 너무나 상대적이다-라고. 내 눈에 비치는 그 눈금들은 제각각의 주제에 따라 제각각의 취향대로 죽죽 그어져있다. 그 어려운 역경이라는 것부터가 대체 어디부터 어려운 건가 알 수는 없는거지만, 내 친구가 입버릇처럼 했던 “어디서 뭘하든 자기가 가장 힘들다”라는 말에 비추어 보건대 꽤나 높은 확률로 이 ‘취향’이라는 이야기가 들어맞지는 않을까.
한때 휴대폰 액정에 끄적거려놓은 글자가 ‘인생지사 새옹지마’였다. 나는 그렇게 꽤나 시니컬하면서도 상대주의에 모든 것을 떠맡겨놓은 인생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과 내일 사이에 내게 무슨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내가 행복이라고 믿었던 것이 불행을 가져올지도 모르고 또 그 반대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운에 관련되는 요소가 아니라 세상과 사람에 더욱 관련되는 일이라고 나는 경험적으로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다르니까-라는 생각. 내가 너와 다른 만큼 너는 그와 다르고, 그는 또한 나와 다르고. 다름과 다름이 결코 조우하지 못하는 해와 달의 어처구니없이 슬픈 사랑이야기처럼 주변을 돌고 돈다. 그런 면에서 ‘다르다’는 말은 상대주의를 신봉하는 주술사가 끊임없이 읊조리는 마법이다. 그 마법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세상 모든 일을 다 받아들이게끔 해주니까. 그냥 너는 나와 달라-라는 말 한마디면 끝이다. 더 이상 무슨 말을 건넬 수가 있을까. 다르다는데. 생각도 자라온 환경도, 세계관도 관심도, 가치도, 취향도. 그 대화의 끝은 대개 ‘그래, 너 알아서 해.’로 맺어진다. 하지만, 그 마법이 풀리면 적어도 사람에 관해선 내가 세상에서 나를 제외하곤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나는 이를 극복하는 것이 언제나 나의 과제라고 믿는다. 취향의 문제를 돌파하는 하나의 방법을 찾는 것. 넓다란 하나의 통로를 지나 크게 쓰여진 일부터 대략 십이 정도까지의 해괴한 붉은 숫자 옆 반쯤 열린 각기 다른 문으로 들어가는 멀티플렉스 극장에서의 취향처럼, 자신의 당연한 권리이자 자유라고 믿는 그 허황된 신념을 내 안에서 내 스스로 깨부숴가는게 내가 가진 매듭을 푸는 일이다. 누구나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세상을 꿈꾼다. 각자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고, 그러면서 만나고 그러다가도 자기가 좋아하는 일 때문에 다투고 또 좋아하니까 다시 화해하고. 나 역시도 그런 취향을 갖고 모두가 살아가기를 꿈꾼다.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을 나의 용기없음이라 말하지 않고, 내가 애써 외면하려는 일을 그저 관심이 없어서라고 변명하지 않고, 내가 그에게 무언가 지적하지 않는 것을 그를 존중하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기 위해서. 앞서 들었던 질문에, 역경을 극복하는 것은 그 스스로가 대단함을 보이기 위한 것도 역경이 싫어서도 아니라 그저 그 시기를 지나고 나면 행복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라고, 누구에게나 그렇다고 자신있게 대답하기 위해 나는 매듭을 만지작 거린다.그리고 무엇보다 너와 내가 다르고 다르지만, 그 다름을 각각 자신의 방식대로 다르게 실현할 수 있는 것은 꼭 같기 위해서. 나는 내 안에서부터 꼬여있는 이 매듭을 풀어야 한다.
우연이 낳은 산물일 개개인의 환경, 성장과정, 집의 부유함이나 부모님의 지식이나 학식, 취미, 무수한 우연의 씨줄과 날줄이 교묘하게 엮여 지금의 우리가 존재한다. 그 무수한 경우의 수를 거치니 당연히 우리 각자는 수학적으로 일치하기 너무도 어려운 확률의 셈 아래 위태롭게 서 있다. 그러니 다른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밖에. 같은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취향이 같거나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반갑다고 그러지 않는가. 우리도 무수한 사람들 중에서 취향이 가까운 사람들이 모인 동호회에 있고.
대개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분명히 당신과 다르다. 하지만 그 다름은 각자가 놓여있는 상황과 조건과, 그리고 그 다양한 경우에 대응하는 태도들에 한정된다. 이것들은 이미 주어져있는 것들로, 앞으로 엮어나갈 것들과는 꽤나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앞으로 엮어나갈 것들이 진정 의미 있는 것이다. 너와 내가 다르지만, 같이 엮어갈 수 있는 그 무엇. 구체적인 이름도, 형태도 갖지 못하고, 언제, 어디서, 누구와, 따위의 세세한 항목들이 정해져있지 않지만 사회에서 그저 열심히 사는 것만으로도 같이 엮어갈 수 있는 그 무엇. 각자가 다르기에 그를 모두 존중하고, 그래서 느릴 수 밖에 없는, 때론 답답하기까지 한 민주주의의 낮은 허밍처럼. 처음에는 그저 달랐다가 나중에는 비슷한 점을 하나 둘 발견하게 되는. 너와 내가 다름을 알기에, 그 당연한 다름을 줄곧 지켜보다 보면 다른 것 자체가 오히려 닮아버리는 기묘한 역설의 즐거움을 만나지 않을까.
나는 여전히 이 선에 머무른다. 지극히 추상적이고, 그저 아주 가까운 주변을 둘러보는 시선에 입각해서. 내 벗들의 삶을 언제나 유심히 바라보다가 몇 마디 던지다가도, 그들의 눈망울에 담긴 치열함과 고뇌와 애정을 마주하며 또 할 말을 다 못 다하는. 이 선 앞에 여전히 매듭은 놓여있고, 이 매듭을 풀어야 비로소 나는 나아갈 수 있음을 안다. 알지만 쉽사리 손댈 수 없는건 매듭이 그저 두개의 줄이 되어 다시 나를 옭아죄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이라면 괜한 생각일까.
병장 강경태 (2006/04/03 19:29:04)
나아가야 할 길의 윤곽조차 모르지만서도, 나아가야 한다는것을 분명 알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삶은 가치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름에 관한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병장 김강록 (2006/04/03 19:44:21)
요새들어 상원군과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숙제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공동체를 상실한 시대에 공동체를 꿈꾸는 것이기에.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러한 상실 속에서 느끼는 환멸과 패배감이 우리의 공통 분모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요새 그 언저리에서 실마리를 찾고 있습니다.
병장 김대현 (2006/04/03 23:52:28)
상원..씨의 글은 책마을 필진 분들의 글 중에 저랑 가장 궁합이 잘 맞는 것 같네요. 그의 글이 어느정도 모호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도 그만큼 번민이 많았으리라 생각됩니다. 그 모호함을, 그 것의 무게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흔치 않더군요. 사실, 얼마나 겁이 나던가요, 그 모호함이라는 건. 저는 요즘 그 괴물 같은 것이 온몸을 휘감아서는 놓아주질 않는군요.
그리고 그 실마리, 저도 좀 매달려있을게요. [웃음]
병장 한상원 (2006/04/04 00:52:39)
대현/ 모호하다는게 가끔 내가 겪는 필연인지, 아니면 내가 원래 모호한건지 잘 모르겠어요. 요즘에는 후자라는 생각도 드는데. 이리저리 중심을 잡지 못하는데서 오는 고민의 흔적일까요. 음.
병장 김대현 (2006/04/04 01:55:20)
상원../ 원래 모호한 것과 그래서 아싸리 오바해 모호해버리는 것은 분명 다를 텐데, 그 구별이 쉽지 않을 때가 있어요. 모호하다는 말이 그래서 참 무서워요. 다른 곳에도 썼지만 참 빠져나가기 쉬운 핑계꺼리여서 - 너무 아무렇지 않은 그 얼굴을 대면하기가 힘들 때가 있어요. 내가 보고 있는 이 모호함은 과연 얼마나 내 경험으로, 내 진실로 감싸안을 수 있을까. 어디까지 허락해도 되고, 어디부터 허락하면 안되는 걸까. 이런 느낌이랄까요.
상병 배준환 (2006/04/04 09:19:10)
요즘 이걸 가지고 한창 머리아팠는데....
조금은 빛이 보이는군요.
감사합니다(와락~)
병장 조민성 (2006/04/05 14:06:50)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저에겐 모호하지만 알것같은 글이네요
상병 조주현 (2006/05/04 18:22:51)
요즘 글들을 읽으면서 취향이라는 것이 어디까지 포괄하고 있는지 정말 난감할때가 많습니다.
결국, 모든 문제는 취향의 문제일거라는 바람빠진 생각에 이렇게 다시 찾아와 읽고 갑니다.
그리고 또, 올거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