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글-얼개] 더 깊이 사랑하기 위하여
병장 김민규 [Homepage] 2008-11-29 20:38:36, 조회: 161, 추천:3
#1. 어느 활자중독자의 이야기
어릴 적 소년에게는 ‘말’이 있었다. 동네 아주머니들의 환호성을 자아낸 그 입으로, 풀어내는 한 마디 한 마디는 칭찬과 귀여움의 상징이었다. 첫 반장선거의 기억 속 7살짜리가 깊이 고민해서 이야기했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으나 그 짧은 임기응변이 같은 반 아이들에게 닿았는지 어땠는지 어쨌건 열 몇 표라는 혼전 속 우위로 꼬마는 명찰을 바꾸어 달았다.
그에게 있어 그것은 무기였고 기쁨이었으며 삶속 작은 기대감이었다. 모자란 생각의 깊이의 한계를 보충해 줄 수 있는 조미료, 든 것 없는 수레를 포장할 수 있는 방어막, 충분히 매혹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 포장은 오래갈 수 없었다. 그는 실체를 보강할 수 있는 방편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진작부터 부실했던 국민약골이었기에 주먹으로 해결할 수도 없었고, 공 좀 찬다 하는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운동장을 누비기에도 발재간은 한참 모자랐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그의 한계를 명확히 알았다. 자원도 없고 땅덩어리가 크지도 않은 한반도가 유일하게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머리뿐이라는 사회 선생의 이야기를 자신의 처지에 이입하며, 어느 순간부터인가 책벌레가 되어갔다.
한계의 인식은 대안에의 집착으로 변모하여 그는 활자중독증에 쉽사리 빠져들었고, 길가의 전단 한 장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기에 이른다. 그저 읽을 수 있는 것이면 충분했다. 텍스트의 값어치나 고전명작이니 하는 타이틀은 그에게 있어 무의미한 것이었다. 단지 그래야 속이 편했고 공허한 시간을 채울 수 있었으며 그것이 재미있었다. 글은 말을 대체해갔다. 나는 읽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2. 김경호와 똘레랑스를 숭배한 꼬마
끈질긴 노력의 결과로 과거 총부리를 겨누었던 켈트와 게르만과 바이킹과 그 주변 소시들은 하나가 되었다. 언어의 분화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으나 그마저도 공동의 유사점을 근거로 보다 서로의 것에 근접한 한두 개의 형태로 묶어버렸다. - 여기에 대해서는 돈 많은 집 자식이었던 아스텔릭스와 귀족집안 자제인 버킹엄 家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이견도 있으나, 반장선거가 끝나고 나면 누가 몇 표를 받았는지는 묻히고 반장과 부반장만 남듯 소시들의 언어는 자기들끼리만 쓰는 일종의 암호로 전락하고 말았다. 자존심과 위세가 등등한 버킹엄 家를 제외하고는, 그들의 화폐마저 하나가 되어 저 신대륙의 청교도들이 쓰는 달러와 1:1의 위상을 자랑하게 된다. 실용주의와 통합주의의 기치 아래 국경은 무너졌고 베를린 장벽은 추억이 되어 그 우측편의 주변인까지도 EU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슈퍼파워 청교도들은 이 행보를 못 미더워했지만, 그래 봐야 우리의 힘에 대항할 수는 없으리라고 위안을 삼았다.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자청한 홍세화는 그 거대한 물결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똘레랑스와 바칼로레아를 찬양했다. 극빈국極貧國 대한민국은 올림픽에 이어 월드컵을 유치하며 비록 냉전의 형국에 여전히 남아있을지언정 온 세계에 자신의 존재감을 알렸다. 청교도와 대륙의 漢족은 손을 잡았다. 꼬마는 어느새 청년이 되어 아덴 팔아 마련한 MD에 메탈리카니 Dream Theater니 긴 머리의 김경호니 하는 노래들을 꾸역꾸역 집어넣으며 시내 한복판을 돌아다니며 콜라를 마신다. 그리고 그는 사랑을 했다. 이 모든 것은 영원히 변치 않을 평화로 느껴졌다. 청교도의 슈퍼파워는, 신자유주의는, 통합주의는, 똘레랑스와 바칼로레아는, 시대의 경전으로 모두의 뇌리에 깊이 자리 잡았다.
많은 시간이 흐르지 않았으나 청년은 수능과 대학과 아르바이트를 지나 군인이 되었다. 영원히 하나에 머물러있을 줄 알았던 작대기는 네 개가 되었다. 스무 살에 남아있고자 했던 그의 마음과는 달리 잘려나가는 달력의 파열음과 함께 어느새 그는 이십 사세를 바라보며 세상일을 걱정하는 처지가 되었다. 활자중독은 흐려졌다. 세상엔 읽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고 그와 긴밀히 연관되는 것들을 받아내는 것만으로도 어디에 눈을 둬야 할 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슈퍼파워는 무너졌다. 1:1로 시작한 그들의 화폐는 1.7을 찍고 다시 내려와 1.5:1이 되었다. 사실 1.7의 기세가 꺾이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나마 떨어진 저 수치마저도, 한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인간들의 오만에 시원한 뒤통수를 날려준 결과일 뿐이었다.
청년이 그토록 동경했던 Wall街의 IB들은 일자리를 잃고 거리를 방황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들은 너무 교만했어, 라며 합리화를 시키는 그에게 시대의 경전들은 어느새 깨어진 파편이 되어 다가왔다. 바칼로레아는 돈 먹는 하마가 되어 비난의 여론에 직면했고 홍세화가 칭송한 똘레랑스는, 환영받지 못한 이민자들의 분노에 방화放火의 대상이 된 거리의 차들과 함께 불타올랐다.
김경호는 머리를 잘랐고 청년은 더 이상 메탈리카를 듣지 않는다. 소중했던 MD는 2만 원짜리 싸구려 MP3에 그 자리를 빼앗겼고 이어폰이 있던 그곳은 큼지막한 헤드폰이 대신한다. 영원할 것 같던 그의 마음속 감성마저 방향을 돌렸다. 첫사랑은 떠나가 새로운 사람을 사랑하고 그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아직도 정리하지 못한 채 소찬휘의 일엽락一葉落 을 부른다. ‘많은 날을 살아가는 동안에 무뎌지는 나의 마음까지 또 후회하겠지-’
마음을 한데모아 나아가자던 EU는, 오히려 분리주의의 망령을 불러일으켜 신음하고 있다. 로마와 밀라노가, 뮌헨과 베를린이,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가,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가, 벨파스트와 런던이 등을 돌렸다. 이쯤 되니 무엇을 믿고 무엇을 신용해야 할 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3. 홍차 한 잔이 준 깨달음
명예의 전당을 본다. 주옥같은 글들이 나의 시신경을 사로잡고 활자중독의 여파는 아직도 남아 그 어떤 것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 속에 클릭 수만 늘어갈 뿐이다. [가지로]의 희망을 안고 글을 쓴다. 읽고 쓰고 또 읽고 또 쓴다. 이 반복적 행위는 나의 두뇌마저 뱅뱅 돌려 줄 것인가. 굳어버린 머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다. 가라앉은 감성과 봉쇄된 이성 속 이곳은 나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그러나 동경했던 가치들이 무너지고 믿었던 너마저 등을 돌리는 이 상황에 내가 무슨 말을 하며 무엇을 쓸 수 있을 것인가. 필력의 허약함과 깊이의 부족을 배제하더라도 글쓰기의 허무는 곧 드러나고 말았다. 세상은 요동치는데 정지한 제 3의 세계 속에서 그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오만이다. 연습게임, 이라고? 그렇다면 그것은 자기소개서의 한 줄을 보다 눈에 들게 쓸 수 있도록 문체를 가다듬는 것과는 무엇이 다르지? 내 사이좋은 게시판에 비공개로 올려진, 시대를 이야기하고 대학사회의 가벼움을 논하고 주위 환경의 부조리를 비판하면서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말했던 열정의 옛 글들을 돌아보니 불과 이삼년이 지났을 뿐인데도 케케묵어 곰팡이내만 풍기고 있을 뿐이다. 그토록 갈구하고 찾았던 정답은 없다. 어려운 말과 이론과 수사를 동원한 시도는 후일에 그것을 읽는 나에게 쓴웃음만 남겨주었을 뿐이다. 그것을 다시금 반복한다는 것은 어리석다. 그런데 필진, 이라고? 가당치도 않다. 후일에 이곳을 발견한 탐험가들에게 엔도르핀을 분비시키며 시니컬한 헛웃음을 줄 수는 있겠지. 그것을 위해 책가지를 어지럽혀야 한다는 것인가?
티백을 두 개나 넣고 떫은 홍차 한 잔을 우린다. 너만은 변치 않았구나. 콜라를 사랑하던 꼬마가 청년이 되어 이제 너를 사랑하게 되었으나, 이 빛깔만은 그대로 남아 나를 위안해 주는구나. 담배 한 대를 꺼내든다. 너의 이 시큰한 향만은 그대로이구나. 과거 너를 들고 있는 이들을 싸잡아 양아치라고 비난했던 나의 태도만은 변하였으나, 그때나 지금이나 너만은 그대로 남아 있구나.
한 모금 들이킨 홍차에 이물감이 들어 놀란 입은 너를 뱉어낸다. 퉤, 그 안엔 티백에서 삐져나온 잔챙이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다. 너마저 변했니, 오래 두었다는 이유만으로 너의 순결했던 하얀 섬유의 색마저 바래 거무튀튀하구나. 그러고 보니 서랍 한편에 오래 넣어두었던 담배 한 대도 허리가 꺾여 그 연기가 오롯이 입가로 들어오지 못하고 중간에서 철철 새고 있다. 사양하자. 변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는 세상에서 나만은 꿋꿋하기를, 내 생각만은 절대적이기를 기대할 수 없다.
칼럼을 쓸 자신이 없다.
#4. 사랑이 가장 위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얼개를 올리는 까닭은 사람에 대한 희망과 사랑 때문이다. 모든 것이 변하였으나 내게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불완전한 생각과 변동하는 가치에 대한 글일지언정 그것에 대해 논하고 고민하는 우리들 자체는 몇 십 년이 지날지라도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인간사의 고민을 짧은 글에 담겠다고 마음먹는 것은 아직도 그것을 사랑하고 동경하며 꿈꾸기 때문이다.
모자랄지언정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내 젊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달라질 것임을 알기에 경시하고 멈추어 서서 팔짱이나 끼고 있는 것이 과연 우월한 일일까, 라는 물음에 나는 예, 라고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불완전한 세계에서 부분만을 붙잡고 살아가는 내게 깨달음을 준 것은 의외로 이천년 전에 쓰인 한 마디였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하더라도 내게 사랑이 없다면, 나는 울리는 종과 시끄러운 꽹과리와 다를 게 없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선물을 받고,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헤아리고, 또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갖고 있다 해도 내게 사랑이 없다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랑은 영원합니다. 예언은 있다가도 없고, 방언도 있다가 그치며, 지식도 있다가 사라질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거울(현대의 그것이 아닌, 이천년 전의 뿌연 청동거울)을 통해 보는 것같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듯이 보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처럼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 (Ch. 13, 1Corinthians, Paul)
믿음은 ‘바라는 것들에 대해서 확신하는 것이고 보이지는 않지만 그것이 사실임을 아는 것’(Ch. 11, Hebrew, Paul)이라고 했다. 즉 완전한 사실을 알지 못할 때에만 가질 수 있는 과도기적 단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예언도 마찬가지다. 일어나지 않은 미지의 사건에 대해서 미리 말하는 것이 예언이므로, 모든 것이 명확해질 때에 그것은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다. 소망 역시도 미래의 것을 희망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은 그렇지 않다. 영원한 것이 올 때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미숙할지언정 그 자체로 살아있는 고동치는 심장이다. 이것은 단지 이성간의 애정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향한 사랑, 인간에 대한 믿음, 그대들을 향한 신의의 증거로서 나는 글을 쓰고 그대들과 생각을 나눌 것이다.
더 깊이 사랑하겠다. 그대들을, 그리고 책마을을.
그래서 나는 글을 쓰고, 희망을 노래하리라. 이 암흑속 광야廣野를 曠野로 밝히 비춰줄 찬가를 높이 부르며.
2008. 11. 29
차가운 바람이 범접하지 못하는 내 일터 책상에 앉아서.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11-30 13:13)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8-12-08
20:42:53
병장 정병훈
한편의 작품이 나왔군요.
민규님도 저와 같은 고민속에서 허우적 거렸다는게 글을 통해 보이는것 같습니다.
따뜻해지는 글입니다. 정말로요. 2008-11-29
21:02:44
병장 정병훈
꽤나 다듬은 글인것 같은데 그 가치는 제가 인정 해드리겠습니다.
가끔, 말도 안되는 글을 들고 나오는 주민들을 보며 얼굴을 찌푸리기도 하지만, 역시 책마을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이거라고 하겠네요.
================================================================================그러나 사랑은 그렇지 않다. 영원한 것이 올 때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미숙할지언정 그 자체로 살아있는 고동치는 심장이다. 이것은 단지 이성간의 애정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향한 사랑, 인간에 대한 믿음, 그대들을 향한 신의의 증거로서 나는 글을 쓰고 그대들과 생각을 나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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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하겠습니다. 2008-11-29
21:14:19
일병 조민석
와... 잘읽었습니다.
더 깊이 사랑하기 위하여..
가지로! 2008-11-29
22:14:04
병장 이동석
민석님 얼개-를 잘 이해하고 계시는군요. 그래요. 가지로- 가야합니다. 2008-11-30
00:04:38
병장 이동석
제 댓글의 민석님-은 오기가 아닙니다. 조민석님은 사려깊은 독자-이신듯합니다. 그리고 민규-님은 엄살-임이 밝혀졌습니다. 흐흐. 2008-11-30
00:05:40
병장 김동욱
사랑해요 2008-11-30
00:53:27
상병 이지훈
가지로!!! 2008-11-30
02:59:22
병장 문두환
꼬마는 커서 궁에 왔군요. 그리고 이 곳을 나가게 되면, 그는 사회에서 그가 사랑해야 할 것들을 더 많이 보게 될 것입니다. 지금도 그것을 찾고 있는 것 같구요. 2008-11-30
10:00: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