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글-독서후기] 여행, 교차점.  
상병 김요셉   2009-01-16 15:47:08, 조회: 181, 추천:2 

1.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작업에 전념하는 기간 동안엔 미디어와의 접촉을 일절 끊는다고 한다. 미디어에 노출됨으로써 자신만의 창조력이 왜곡되는 것을 지양하기 위함이다. 무엇의 영향도 받지 않은 자기 자신만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작품에 온전히 담아내기 위함이다.
조지훈은 열아홉에 ‘승무’를 썼고, 모차르트는 일곱 살 무렵에 첫 미뉴에트를 작곡했다지 아마. 지훈도 모차르트도, 비비안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세계가 가진 활동력보다도 더 큰 잠재력을 제 속에 미리 간직하고 있었나보다.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고 제 속에 있는 걸 끄집어내는 것만으로도 그만한 작품들을 줄줄 뽑아냈던 것일 게다.
그러나 보통 사람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조금 못한 지적 능력과 창의력을 가진 나는, 아직 읽지 않고 말하는 법은 습득하지 못했다. 겪지 않은 것에 대해선, 보지 않은 것 들어보지 못한 것 느껴보지 못한 것에 대해선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한다.
내가 글을 읽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한 마디라도 내뱉고 한 줄이라도 써 보기 위해 책을 읽는다. 책을 읽어 사상을 다니고 신념을 다진다. 심지어 생활양식까지도 책을 통해 고민한다. 내게는 책이, 독서가 세상의 생동하는 기운을 받아들이는 통로이며 주된 방식인 셈이다.
내게 독서가 그러한 의미였듯, 이병률에겐 여행이 세상을 받아들이는 주된 방식이였던 모양이다. 그는 10여년간 70여개국 300여도시를 돌아다니며 길 위에서 쓰고 찍어 기록했다. 그 기록들을 모아 질감 좋은 종이에다 이쁘장하게 편집해 책으로 찍어 냈으니 그 모양새가 제법 ‘트렌디’하고 ‘센치’해 보인다. 트렌디하고 센치한 모양새 속엔 말랑 - 말랑한 사진과 가벼운 글줄이나 조금 담겨있겠지, 빛 좋은 건 개살구다, 하고 지레 얕잡아 보았으나, 어라라.

인간은 틀림없이 두 부류로 나뉜다. 나와 너. 그러니 인간에 대해 글을 쓰는 작가라면 틀림없이 나에 대해 쓰거나 너에 대해 쓸 것이다. 뚜렷하게 나눌 수는 없으나 나에 대해 써 놓은 글 중엔 소설보다는 시가 많았다. 시는 대체로 너에게 다가가 나를 내보이고 너와 소통하기 위한 언어를 구사하기 보다는, 너를 끌어들여와 내 언어 속에 내재화한다. 시인은 세계를 자아로 끌어들여 저만의 언어로 제가 본 세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세계가 시인의 언어에 매혹되는 경우는 많아도 시인이 스스로 나서 세계의 문을 두드린 적은 많지 않았다. 아예 너와 완전히 단절된 나만의 세계를 구축하기도 한다. 반면 소설 중에는 너에 대해 쓴 글이 더 많았다. 자전적 일대기가 아닌 이상 소설의 대부분은 나 보다는 너를 해석하는데 주력한다. 소설가는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에 대해 고민하며 자아 바깥 세계와 교감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병률은 시인이다. 라디오 작가로서 더 많이 알려져 있긴 하나 그는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두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다. 안 그래도 본업이 시인인데다가, 여행하며 쓴 글이라면 더더욱 ‘나’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맞다. 이 글과 사진들은 온통 이병률 자신이 제 눈과 제 귀로 보고 들은 것들에 대한 기록이다. 독자의 입장에서라면 한 마디로 ‘남 일’인 것이다.
허나 이거, 왠지 익숙하다. 생판 모르는 남이 생전 가보지도 못한 남의 나라를 여행하며 보고 들은 것들인데도 낯설지가 않다. 어디선가 본듯한 시선이고 어디선가 본듯한 광경이며 어디선가 만난 적 있는 듯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익숙함의 정체가 무엇인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마침내 발견한다. 이병률이 여행하고 기록한 그 곳에 ‘나’, 지금 여기 앉아 글을 읽고 있는 내가 있다.

시인이 캄보디아에서 만난, 다시 오겠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친구는 다름 아닌 내 모습이다. 혼자가 좋다며 식물과 함께 여행을 다니던 베니스의 친구는 다름 아닌 내 모습이다. 거짓말을 쳐 시인에게 돈을 빌리곤 짐을 싸 튀어버렸던 인도의 젊은이도, 파리 여행을 직업으로 가진 파리 토박이도 기차역에서 옥수수를 팔던 안데스의 청년도 모두 다름 아닌 내 모습이다. 그들도 나와 같은 외로움과 같은 따뜻함, 같은 열정을 가지고 있어 다를 바 없으니, 뭐가 이리도 익숙한가 싶었던 게 시인은 세계 곳곳에서 나를 만나 내 이야기를 기록해 놓았던 것이다. 이 수많은 ‘나’들. 대체 어디에 숨어있었으며, 시인은 어떻게 숨어있던 그들을 만나고 돌아왔던가.


2.
황석영의 <삼포가는 길>이 가지는 미학은 소설이 길 위에서 시작돼 길 위에서 맺어지는 데 있다. 생을 찾아 삼포로 가는 길 위에서 만나 엇갈리던 세 남녀는 끝내 제 이름만을 서로에게 남기곤 헤어져 사라진다. 서로 잡으려 하지도 않았으되 그저 애초부터 만나고 헤어질 인연이였을 것이다. 누구나 언젠간 죽는다는 뻔한 명제 때문이 아니더라도 헤어지지 않을 인연이 세상에 어디 있겠나. 다만 이름을 주었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이짝으로 가고 저짝으로 가는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나 서로에게 작은 흔적이라도 남겼다면, 그것만으로도 살아가는 데는 충분하다. 길 위에 목적지란 없어 혼자 길을 걷다 보면 제 갈 곳을 찾지 못하고 헤매기 십상이다. 더군다나 삼포로 떠나는 사내는 삼포에 다 이르러서야 삼포가 더 이상 삶의 터전이자 생의 근거로써의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었음을 깨달아버렸으니 또다시 지향에 도달하지 못하고 길 위에 남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지나온 길이 단지 허허발판이며 지나감의 뒤에 남은 허공에 불과한 것이 아님에, 우연히 만난 누군가의 이름이 남고 흔적이 남아 있음에, 길 위로 헤매더라도 다시 돌아 봤을 때 지나왔던 길들을 잊어버리지 않아 영영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삼포는 변하고 시절은 스러져갈지라도 사람은 변하지 않을 터이니 더욱 그렇다. 길을 가는 동안 다른 길을 가는 ‘너’를 만나 헤어지면서, 내 길 위에도 너의 길 위에도 교차점이 남는다. 교차점은 아름답다. 아름다울 수 밖에 없다. 내 삶의 끝나지 않는 여정이 삭막하거나 허무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증명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름다우므로.


  # 61
한번 사람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여행은 끝이다. 그만큼 자유롭지도 못할뿐더러 기회도 적기 마련. 세상에 하나뿐이라고 생각한 친구를 믿은 적 있으나 그는 나를 믿어주지 않았고 한 사람을 믿은 적 있으나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 아닌듯하였다. 그 울림은 더 장황해져서 다른 사람에게 믿음을 옮겨가면 그뿐이었다. 그 울림은 더 장황해져서 다른 사람에게 믿음을 옮겨가면 그뿐이었다.
(......)
서성으로 물리는 중국의 왕희지가 서예를 연마하기 위해 연못물을 까매지도록 먹을 갈았는데 이를 두고 묵지라 했다는 일화처럼 나는 사람을 믿기 위해 끊임없이 다닐 것이고 그렇게 다님으로써 사람의 큰 숲에 당도하기를 희망한다.

  # 68
좋은 계절이라는 핑계로 당신은 그들과의 여행을 계속했고
한 아궁이에서 지은 여러 끼니를 나누어 먹으며
낯선 풍경에 놀라 단체 사진을 수없이 찍으며 각별한 감정들을 나눴죠.
심지어 돌아오기 싫었던 거예요.

그래요. 삶은 그런 거예요.
혼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그런 것.


여행은 나를 모르는 타인의 세계 속에 혼자 내팽겨쳐지는 것인데, 그래서 여행의 길 위에 내 속을 훤히 들어다 봐 내밀한 감정까지 공유하는 타인이란 만나기 힘든 것인데, 그런데도 시인은 삶은 혼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그런 것이라 한다. 오고가는 길 위에서 불가능한 삶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결국 타인과의 조우가 필요한데, 그 사이에 믿음 그 자체는 필요치 않다. 한 번 사람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여행이 끝나버리듯 무조건적인 믿음 또한 여행의 길 위에선 치명적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필요한 것은 ‘울림’, 언제든 여기에서 여기로 옮겨갈 수 있는 울림뿐이며 믿기 위한 노력과 언젠간 믿을 수 있겠지 하는 희망이다. 또한, 그렇게 믿음의 울림을 여기에서 저기로 옮겨가는 동안 수많은 교차점들이 발생한다. 시인이 세계를 여행하면서 만났던 것은 낯선 도시도 나와 상관없는 타인도 아닌 수많은 교차점들이다.
시인이 만났던 것이 교차점들 이라면야, 어디선가 흘러와 나와 만나고 다시 지나가는 바람과 같고 물결과 같은 것들 이라면야, 시인이 세계 각지에서 만난 푸른 눈 검은 눈의 타인들에게서 ‘나’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하다. 나 역시 살아가며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길에 교차점을 찍어주며, 그들은 내 길에 교차점을 찍어 줄 것이며, 그렇게 나와 너 당신들은 모두 흘러간 바람과 같은 존재로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그 점은, 이병률 그 자신도 똑같다.

시는 너에 대한 이야기이기 보다는 나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다. 시인의 언어는 시인 자신만의 것이라 했다. 너를 끌어당겨 시 속에 내재화한다 했다.
이병률의 언어도 그렇다. 여행집이기에 특히나 그렇다. 그러나 ‘나’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도 ‘나’는 ‘너’없이는 안됨을, 삶은 혼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라 ‘너’역시도 ‘나’없이는 안돼 우리는 수많은 교차점으로 얼룩진 길 위에 서 있어야만 함을 이야기하는 시인의 언어는,
과연 나에 대한 이야기인지. 너에 대한 이야기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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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6
13:18:29 

 

상병 김형태 
  어우, 
프린트해서 봐야지 !(룰루) 2009-01-16
16:35:49
  

 

병장 이동석 
  이런, 취중에 건들었다간 큰일날 글이군요. 내일 맑은 정신에서 다시- 2009-01-17
00:23:50
 

 

병장 정병훈 
  우왕 굳. 

이제야 읽어보다니, 허 참- 요새 좀 바쁜터라 주말을 이용해 글을 읽고 있는데, 이거 다들 너무 반응들이 없군요. 

이 후기에서 어느정도의 비중을 차지하는진 알 수 없지만, 시와 소설을 비교한 대목이 저는 압권이라 생각합니다만, 물론 그것을 바탕으로 엮인 너와 나의 관계까지. 흠... 
그래요- 요셉씨가 있어 내가 있고, 내가 있어 요셉씨가 있습니다. 고로 우린 
일촌을 해야겠군요. 

독서후기 같은 경우, 남겨 주는 사람은 그 책에 대하여 얘기를 하고 싶은 생각에 남길 터인데, 아쉽게도 베스트셀러가 아닌 이상 같은 책을 읽은 사람이 많지 않더군요. 그래서 죽는거 같아요. 이놈의 머릿말 말입니다. 저도 최대한 나누고 얘기하고 싶은데, 읽지 않은 제가 책에 대해 얘기하는 건 버릇없어 보입니다. 으허허- 

감사합니다. 2009-01-17
11:24:39
  

 

상병 이지훈 
  멋진 글이군요 고마워요 허허 

더 많은 분들이 보시면 좋을텐데 아직은...이군요 우선 그런 의미(?)에서 추천 꾹 2009-01-18
11:15:40
  

 

병장 정병훈 
  가지로. 
더 많은 사람들이 보길 원합니다만, 2009-01-18
16:37:22
  

 

상병 김예찬 
  저도 얼마전에 잠깐 읽은 책이군요. 근데 저는 "참 싸이 사진첩스럽다"하고 지나갔던 기억이 납니다. 

나는 아무런 느낌도 받지 못했던 책일지라도 나 아닌 누군가에게는 의미를 가지는 책일 수 있는 법이고, 또 나는 그 사람이 그 책을 통해 얻은 무언가를 음미해 볼 수 있기 때문에 독서 후기 읽기가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2009-01-18
17:39:03
  

 

상병 김요셉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병훈씨의 독해력은 경이로워요.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처럼 알아먹는단 말이죠. 흐흐흐. 고로 우린 일촌을 해야합니까? 시즌투에 흔적은 남겨두시면 언젠가 찾아가지요. 2009-01-19
07:24:28
  

 

병장 정병훈 
  제 독해력은 책마을 소사 마구로 옹 이동슥씨가 말하길 '오독, 곡해, 오해'의 삼박자가 맞는 개-같은 실력이라 읽컬어 집니다만, 경이롭다니요. 낄낄낄- 

그냥 느끼는 대로 느끼는겁니다. 그나저나, 요셉씨에게 일촌을 하려고 시즌2에서 이름을 찾아보니 없던데요. 흠- 다시 찾아봐야겠네요. 냠냠. 

저는 잘 읽었는데, 개떡같다고 말하면 저는- 낄낄낄. 2009-01-19
11:23:38
  

 

상병 이지훈 
  엥 글이 넘어갔군요. 근데 아직 조회수 82라뇨! 

가지로 입니다 2009-01-19
17:14:36
  

 

병장 이동석 
  지금 병훈씨의 댓글은 저의 쪽지질을 오독, 곡해하고 있는 겁니다만, 그런것과는 상관없이 

이 글은 가지로 가야합니다. 2009-01-21
10:43:04
 

 

병장 장태순 
  진중문고로 이 책 나왔습니다. 저는 이 책에서 사랑과 신발을 비교한 문장이 제일 가슴에 와 닿았었습니다. 2009-01-21
12:11:43
  

 

병장 정병훈 
  결국 '오독, 곡해'는 또 다른 결과를 남겼군요. 크흐흐- 가지로의 물결이 뿜어져 나왔습니다 그려- 2009-01-23
20:03: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