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글-독서후기] 어떤 욕망(慾望)  
병장 고동기   2008-11-11 14:26:29, 조회: 339, 추천:1 

1. 「소년 J의 말끔한 허벅지」, 천운영

그는 아내의 꾸며진 듯한 아름다움이 싫다. 정기적인 피부관리와 체계적인 몸관리로 젊음을 유지하는 아내의 몸은 오히려 현실감이 없다. 아내는 끊임없이 꿈꾸고 욕망하고 추구한다. 아내는 관광 가이드에서 통역사로 여행사 경영자로 변모했고, 여전히 무언가를 새로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다. 지칠 줄 모르고 달려드는 그 지긋지긋한 욕망덩어리. 그는 아내의 그 끊임없는 열정과 욕망에 넌덜머리가 난다. 이제 더 이상 아내에게 아무런 감동도 감정도 없다.

사진가인 그는 어떤 커플의 누드 사진을 찍게 된다. 예비부부라고는 하지만 결혼을 하기엔 아직 어려 보이는 커플이다. 성인 남녀라기보단 개울에서 옷을 홀딱 벗고 물장난 치는 어린애들 같다. 근육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곱고 메마른 남자의 몸. 도발적이지도 육감적이지도 수줍지도 않은 여자의 몸. 소년과 소녀, 소녀와 소년. 검은 숲처럼 무성한 음모와 성기가 아니라면 그들에게 성적인 구분은 전혀 없어 보인다. 그들의 몸이 자아내는 가벼움과 거침없음과 모호함이 그를 당혹하게 한다. 그는 이 불충분해보이지만,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지는 두 육체에 완전히 압도당해 버린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한 소년이 나타난다. 아내의 꾸며진 아름다움에 넌덜머리가 난 그는 소년에게서 순수한 아름다움을 본다. 그 옛날 아내에게도 있었을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아름다움 말이다. 그는 소년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본다. 수염도 없고 적당히 각이진 턱선, 살짝 붉어진 뺨과, 가볍게 피어오르는 안개 같은 미소. 그는 녀석에게서 이상한 감정을 느낀다. 무언가 거부하면서도 슬그머니 잡아당기는 이상한 힘. 그런 감정.

그는 소년에게 사진을 가르쳐주기로 한다. 사물을 바라보고, 사진을 찍고, 그것을 감상하는 방법들을. 소년이 뿜어내는 사진에 대한 열정에서 그는 사라져버린 자신의 모습을 본다. 녀석의 열정과 충직함, 그 나이 또래가 가질 수밖에 없는 미숙함까지도 그는 부러워한다. 그렇게 그는 점점 소년에게 빠져든다. 녀석과 함께라면 영원히 청년일 수 있을 것 같다. 이전에 누드사진을 찍어준 커플이 생각난다. 이 소년과 함께라면 그들처럼, 성적인 구분이 없어 보여 더욱 순수해보였던 그들처럼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녀석이 계속해서 그의 옆에 머물기를, 그를 쫓아다니며 끊임없이 묻고 배우고 흥분하기를 바란다. 그렇게 해서라도 녀석의 젊음을 느끼고 싶다. 녀석의 젊음을 훔치고 시기하고 훼손하고 싶다. 그는 녀석을 시샘한다. 그리고 동시에 욕망한다.


2. 「솔숲 사이로」, 권여선

‘솔향기’라는 이름을 가진 단식원이 있다. 사회에서 격리되어 있는, 아니 스스로 사회와 멀리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단식원이다. 그곳에서는 몇몇 사람들이 모여 그들만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단식원의 주인인 늙은 원장, 그리고 늙은 사내, 총무부장, 운전기사, 영양사, 막내. 조용하고 차분한 그 단식원으로 새로운 식구가 들어온다. 건장한 체격을 가진 무뚝뚝한 젊은 청년이다. 원장은 그 젊은 청년을 ‘솔향기’의 늙은 사내와 한 방을 쓰도록 하게 한다.

늘 혼자 방을 써왔던 늙은 사내는 청년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사내는 요즘 젊은이들을 대체로 좋아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싫은 점은 스스로에 대한 그들의 무지였다. 세상이 발전하고 다른 지식은 늘어났는지 몰라도 자기에 대한 지식만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게 사내의 생각이었다. 사내는 젊은 사람들만 보면 눈살이 찌푸려졌고 그들이 나이가 들면 세상이 어찌될까 근심스러웠다. 그랬던 사내가 느닷없이 나타난 웬 젊은놈 하나와 방을 같이 쓰게 된 것이다.

사내는 일단 청년에게 솔향기의 이곳저곳을 가르쳐주고 같이 살게 될 식구들을 소개해 주려고 한다. 젊고 든든한 조수를 뒤에 거느리고 걷는 듯 어느새 구부정한 사내의 어깨가 반듯하게 펴진다. 무뚝뚝하지만 우직해 보이는 청년의 모습은 그저 그런 요즘 젊은애들 같지가 않다. 사내는 청년을 끌고 다니며 이사람 저사람에게 알은척을 한다. 마치 장성한 자식을 데리고 이리저리 다니는듯한 기분이 든다. 한번도 자식이나 손주를 키워본 적이 없는 늙은 사내의 가슴이 가벼운 흥분으로 달아오른다.

젊은 청년은 일을 잘했다. 묵묵하고 말이 없는게 단점이라면 단점이었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그의 매력이었다. 우직하게 일을 하고 음식도 곧잘 만들곤 해 금세 솔향기 식구들의 마음을 샀다. 늙은 사내도 그런 청년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늙은 사내는 그의 방에서 잠들어 있는 청년을 보게 된다. 청년은 이불을 차낸 채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에게 이불을 덮어주기 위해 다가간 사내는 이불에 손을 가져가려다 말고 멈칫했다. 창 쪽에서 희미하게 뿜어져 들어오는 박명이 청년의 몸을 비추고 있었다. 청년은 반듯하게 누워 한쪽다리를 곧추세운 채 잠들어 있었다. 허벅지와 장딴지의 굴곡은 쇠처럼 딴딴했고 헐렁한 팬티 사이로 고환이 무방비상태로 늘어져 있었다. 늙은 사내는 능선과도 같은 그의 허벅지 근육과 그 근육의 실루엣이 겹쳐져 갈라지는 틈새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내는 청년이 뿜어내는 그 젊음 앞에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억제하지 않으면 안 될 불같은 욕망이 그의 몸 안에서 꿈틀거렸다. 꽉 쥐었다 편 손이 파르르 떨렸다. 사내는 맥없이 툭 떨어진 자신의 손등을 쳐다보았다. 늙었다는 자각이 그렇게 뼈아팠던 적이 없었다. 그 새벽 사내는 청년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전수하기로 결심했다. 사내는 그에게 가졌던 모든 것을, 푸르른 시절에 자신이 겪은 고통과 파멸, 꺾인 믿음과 슬픔을 가르치고 싶었다. 그를 자신과 동화시키려 했다. 꿈틀거리는 그 젊음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3. 無題

아들, 하고 불러본다. 판에 박힌 익숙한 대답이 들려온다. 경직된 자세, 긴장된 낯빛, 동그래진 눈. 그런 모습이 예전의 나를 바라보는 듯하다. 너도 내가 걸어왔던 길을 걸어갈 것이다. 이런 시기에는 힘들고, 이런 경우엔 힘들 거다. 힘든 일이 있으면 내게 와서 도움을 청해라. 나는 자식을 가져본 적이 없지만 다정한 부자관계의 아버지인 양 한다. 일도 잘하고 예의도 바른 그를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하기도 한다. 구하기 힘든 좋은 음식이 생기면 따로 챙겨뒀다 주고 싶고, 열심히 하는 사람이 누구 있냐는 윗분의 질문에는 그의 이름을 부르기도 한다. 나는 그에게 있어 유일한 존재이고 싶다. 떠나갔어도 추억될 존재이고 싶다. 다른 사람들이 유리한 위치에서 너를 괴롭히면 참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 괴롭힘이 도리어 친밀함으로 이어질 때면 질투심과 괴로움에 견딜 수가 없다. 유리한 위치에서 누군가를 괴롭히고 가지고 노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나 그로인해 너와 내가 더욱 친밀해질 수 있다면 나는 그럴 수도 있다. 이런 감정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다시 너의 이름을 부른다. 인정할 수 없는 감정들이 스멀스멀 기어올라 나의 심장을 움켜쥔다.


4. 후기

천운영이 틀에 맞는 잘 그린 그림을 그렸다면, 권여선은 보는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는 매혹적인 그림을 그려냈다. 권여선의「솔숲 사이로」는 「소년 J…」보다 제목은 평범했지만, 독특한 구조와 매력적인 등장인물로 천운영의 것보다 더욱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권여선의 소설을 읽으면서 나 자신도 ‘솔향기’의 식구가 된 기분이었고, 소설 속 그들처럼 젊은 청년이 뿜어내는 매력에 이내 취해버렸다. 갑자기 그가 ‘솔향기’에서 사라져 버렸을 땐, 남아버린 자들의 상실감이 밀려와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지기도 했다. 

처음에는 「소년 J의 말끔한 허벅지」에 대한 글만 쓰려고 했다. 그런데 글을 쓰던 중 지난번에 읽은 권여선의 소설이 생각났다. 관물대 제일 안쪽 구석에 쌓아뒀던 그녀의 소설집을 다시 꺼내들었다. 그리고 다시 읽었다. 이제 권여선의 다른 작품을 읽을 이유가 생겼다. 본명 권희선. 실제로 만나보면 굉장한 독설가라고 한다. 스무살 이후로는 멋 부리는 걸 그만뒀다고 한다. 올해로 마흔이 조금 넘은 나이인데 내 눈에 보기에는 아직도 청초하다. 평생 남들 피해 안주면서 살고 싶다고 하고, 결혼할 생각은 없단다. 아주 마음에 든다.



Postscript. 본문에 쓰인 작품의 출처.
1. 『2007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천운영「소년 J의 말끔한 허벅지」, 도서출판 해토
2. 권여선 소설집『분홍 리본의 시절』, 「솔숲 사이로」, 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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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6
13:11:42 

 

일병 송기화 
  동기님의 독서후기는 늘, 좋습니다. 
사실 지난 며칠동안 독서후기 써보려고 끙끙거리다가 
때려치운 저로써는, 와우, 읽는것만으로도 황송하군요. 
감사합니다. 2008-11-11
15:36:18
  

 

상병 이우중 
  그럴때는 시원하게 가지로-를 외치는 것도 좋을 것 같군요. 

권여선 씨 글은 많이 읽어보지 못했는데 '분홍 리본의 시절' 한번 봐야겠어요. 
'소년 J...'는 같은 해 이상문학상 수상소설집에도 실려 있다죠. 흐흐. 

동기님 독서 후기, 기다렸드랬어요. 
가지로- 2008-11-11
15:47:19
  

 

병장 고동기 
  저도 그래서 올해 이상문학상 수상집을 사려고 합니다. 
권여선의 '사랑을 믿다'가 올해 수상작이었잖아요. 
작가 자선작이랑 수상소감을 보기 위해서라도 꼭 사야겠습니다. 2008-11-11
16:06:37
  

 

병장 정병훈 
  독서후기를 쓰는걸 취미로 하는 저에게 동기님의 독서후기는 참... 좋습니다. 
마치 한편의 책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는 독서후기가 진정한 독서후기겠지요. 
요새 저는 04년도 이상문학상을 읽고 있는데, 독서후기 쓰기 조차 벅차네요. 
잘 읽었습니다. 2008-11-11
16:09:55
  

 

병장 고동기 
  병훈님. 
1, 2번은 책의 내용을 많이 인용해 써서 그런 걸지도 모릅니다. 
일일이 인용부호를 붙이자니 너무 지저분해 보이는 바람에 
일부러 밑에다 책의 출처를 밝혀 놓았습니다. 

그래서 결론은, 
직접 원본을 읽어보시길 추천하는 바입니다. 흑 2008-11-11
16:18:07
  

 

병장 문두환 
  허허, 동기님 독서후기는 재구성이 뛰어나 작품에 대해 고민해 보게 하는 매력이 있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시간이 없어 미뤄두다가 이제야 읽어보네요. 흑. 2008-11-12
21:14:37
  

 

병장 이동석 
  헛, 이걸 왜 못봤죠? 

가지로- 2008-12-11
10:46:10
 

 

병장 이동석 
  비슷한 뉘앙스의 작품을 선정해서 묶는 센스와 적절한 편집과 전체적인 구성력은 십점만점에 십점입니다. 동기님은 이미 훈련-이 되신것 같아요. 2008-12-11
10:57:49
 

 

병장 김민규 
  이건 가지로 가야죠. 2009-01-09
17:0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