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글-독서후기] 순간을 믿어요.
상병 김예찬 2009-06-03 14:48:43, 조회: 173, 추천:1
늦은 밤까지 책을 읽다가 문득 허망함을 느낀다. 책을 덮고 담배를 꺼낸다. 터덜터덜 밖으로 걸어나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를 한 숨 들이 빨고 멍하니 밤하늘을 바라본다. 조금 전 읽었던 글귀를 떠올린다.
"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 있을까요?"
<로쟈의 인문학 서재> 124페이지. 저자(로쟈)는 레오 카락스의 <나쁜 피>의 대사를 인용하며 글을 시작한다. 순간에 완성되(면서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이란 어떤 사랑인가? 로쟈는 '순간이나 영원이란 것은 시간적인 계기지만 동시에 反시간적 계기'라고 이야기한다. 분명 '순간'과 '영원'은 시간적 개념이지만, 또 일반적인 시간의 범주로는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순간'은 얼마나 짧은 시간을 나타내는 단어일까? 1초? 0.1초? 0.0000…1초? 0과 1이라는 숫자로 표기되는 계량적 시간으로 '순간'을 직관적으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일 것이다. 순간의 무한팽창이랄 수 있는 '영원'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과연 영원의 개념을 상상할 수나 있을까? 우리는 분명히 순간과 영원이라는 개념에 대해 직관적으로 '알고' 있지만, ('신神'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는 이상) 논리적으로 그 것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따라서 순간, 영원은 시간의 개념이나 동시에 시간이랄 수 없는(계량적 차원에서) 개념이다. 그렇다면 '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은 형이상학의 영역에서 취급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들에게 사랑은 '설명할 수 없는 순간이자 영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사랑은 (그 내재적 모순과 불합리에도 불구하고 표면 상) 안정적인 역사 - 사회 - 일상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다른 무엇과도 비견할 수 없는 충격과 변화를 주는 '계시'이며 '구원'이다.
'많은 평범한 젊은이들이 팍팍한 현실 속에서 '연애' - 혹은 좀 더 진지하게 '사랑' - 를 일종의 계시적/구원적 사건으로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이는 책마을에 올라오는 상당 수의 글만 읽어봐도 쉽게 느낄 수 있는 것이기도 하구요. 그러나 아무리 완벽한 사람을 만나 사랑을 나누게 된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우리들에게 결여 되어 있는 '무언가'는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 한 켠을 공허하게 만듭니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이 결여를 계속해서 연애를 통해서 해결해보려고 하지만, 이러한 되풀이 되는 시도는 오히려 실패와 상처만을 남기게 되는 것 같구요.'
- 김민규님의 '[주민탐방] 마지막 편지, 안녕히' 中
그러나 '사랑'이 과연 구원이며 계시로만 존재하는가? 다시 로쟈로 돌아가 본다. '현실 속의 사랑'은 진화사적으로 보았을 때 만족할 만한 상태, 즉 행복을 위한 것이다. 정상적인 생물체의 경우, 행복이란 자기 보존의 본능과 종족 보존의 본능의 충족을 뜻한다. 보통의 경우 자기 보존의 본능(생존의 욕구)은 종족 보존의 본능(생식의 욕구)에 우선한다. 인간은 생식의 욕구에 따른 자신의 정서적 상태를 '사랑'이라고 정의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 역시 원칙적으로 생존의 욕구에 우선할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생존의 욕구에 연결되는) 사회경제적 요건 때문에 자신의 '사랑'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서의 사랑은 '구원과 계시'를 열망하지만, 결국에는 이에 도달하지 못하고 주저앉게 되는 '비루한' 사랑이다. 또한 이를 생존의 욕구에 지배되는 '육체적 사랑'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육체'는 사랑을 단지 생존에 수반하는 욕망의 차원으로 환원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랑의 문제를 다룬 '예술'은 바로 욕망과 사랑의 문제에 대해 가상을 설정함으로써, 이 해답을 찾으려는 적극적인 탐구와 다름 아니다.
'행복한(복)집에 갇혀 살아온 태주에게 갑자기 찾아온 상현은 처음에는 단지 욕망을 배출해낸 탈출구에 불과했다. 상현에게도 태주는 그저 욕망의 대상(그것이 성적 욕망이든, 아니면 휴머니즘적 만족이든)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이제는 욕망의 구속구들(라 여사, 강우)을 떨쳐버릴 수 있게 된 태주가 다른 남자(오달수)와 다섯번 섹스하고도 무언가 결여를 느끼며 터덜터덜 걸어올 때, 태주의 폭주를 견디지 못하고 상현이 태주를 목졸라 죽일 때(사랑은 자신이 자기라고 느낄 수 있게 만들었던 것들 - 이를테면, 상현이 끝까지 버리지 못했던 휴머니즘? - 에 대한 적극적 파괴다!), 그리고 결국에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함께 죽음을 택할 때 둘의 관계는 적극적인 로맨스로 전환된다.'
- <박쥐>에 대한 잡담 中
이 때 시도되는 '사랑'에 대한 모색은 그러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라는 관용어가 존재하듯이 오로지 현실이 아닌 가상(이미지) 속에서만 맴돌게 된다. 영화의 이미지는 우리로 하여금 현실의 무능력을 직시하게 만든다. 결국, '예술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모든 것은 우리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우리의 무능력을 절감하게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생존의 욕구(육체라는 구속)라는 현실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갈구하는 구애자들이 수없이 고민해온 문제인 '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제약 없는 초월적 사랑)'은 과연 가능한 것일까? 하긴, 이 문제에 대하여 단언할 수 있다면 형이상학의 문제에 대하여 탐구하는 철학이라는 학문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이성은 어떤 종류의 인식에 있어서는 특수한 운명을 지니고 있다. 즉 이성은 자신이 거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대답할 수도 없는 문제로 괴로워하는 운명이다. 거부할 수 없음은 이성 자체의 본성에 의해서 이성에 부과되어 있기 때문이요, 대답할 수 없음은 그 문제가 인간 이성의 모든 능력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中
거부할 수도 없고 대답할 수도 없는 사랑의 문제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구애를 한다는 것이며, 이 구애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어떤 노래 제목처럼, 단지 '순간을 믿'는 것이다. 외롭게 타들어가는 담뱃불을 털어 끈다.
I saw your something, 그 외의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다.
BGM : 언니네 이발관 4집 - 순간을 믿어요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6-08 13:59)
48.9.2.115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10
09:33:56
병장 차종기
16.1.182.171 가지로 -
더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2009-06-03
14:56:42
상병 진수유
40.6.1.143 멋집니다. 2009-06-03
15:36:20
상병 권홍목
16.48.8.33 마치 우리모두 언젠가 죽을거라는걸 알면서도 사는것처럼.
간만에 독서후기에 가지로- 2009-06-03
16:02:24
병장 이동열
22.36.32.21 가지로- 2009-06-04
09:40:22
상병 김태완
16.48.6.22 인간이기에, 우리는 무언가 결여된 듯한 삶을 살면서 그 부재함을 충족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우리 삶을 충족지켜줄거라 믿는 '순간에 완성되는 제약없는 초월적 사랑'을 갈구합니다. 사랑이 시작되고 끝난 후엔 더 큰 결여가 남을 수 있단 것을 알면서도 사랑으로써, 충족된 삶의 연장선을 그려나가려 합니다. 곧 진정한 영혼을 안식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은 사랑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가지기에 많은 제약이 따를 수 있고 진짜 그런 것이 존재하는 지도 명확하게 판단을 내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영화와 같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사랑을 꿈꾼다. 사랑밖엔 없으니까요.
가지로- 2009-06-04
10:29:16
상병 박원익
54.1.21.55 저도, 가지로~ 2009-06-04
17:57:17
상병 기명균
8.151.3.28 책마을 글을 읽으면서 자주 느낀 건데 적절한 인용은 직접 쓴 글을 반짝반짝 빛나게 하는 것 같아요. 사랑 앞에 무력하지만 사랑으로 힘을 얻는 사랑의 신비로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 언니네는 참 얘깃거리를 많이 만들어주는 사람들인 것 같아요.
아직 '가지로'를 던지기에는 책마을의 많은 글들을 너무 적게 읽어서 이젠 가지로를 던질 자격이 있다 싶으면 그때 아낌없이 던지겠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2009-06-05
18:11:47
병장 김형태
54.4.11.94 아, 늦었군요. 그래도 가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