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글-독서후기] 남쪽으로 튀어!  
6급 하지연   2008-10-24 10:35:47, 조회: 510, 추천:3 

1980년대 끝자락 학번 이였던 나는 드물게도 그 무렵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처럼 흔한 소위 운동권 출신은 아니었다. 386세대는 새벽종이 울렸네 를 아침 기상곡으로 쓰고 요즘은 들어 본 적도 없는 단어들인 4H클럽(사교클럽이 아니다) 신작로, 사사오입, 유신. 이런 말들을 자고 일어나면 들었고 카세트 테잎 마지막 곡은 계몽노래가 들어있던 그런 문화적 혜택을 받고 자란 세대였다.
나는 운동권이 아니었지만 내 앞 뒤 좌우 친한 친구들은 모두 어떻게든 운동권이었다. 
그런 환경에서도 내가 운동권이 될 수 없었던 건 생존권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무조건 장학금을 받아야만 학교를 다닐 수 있었고 용돈 오만원은 차비 빼고 나면 라면 한 그릇도 제대로 사먹을 수 없는 돈이었다. 언젠가 읽어보라고 해서 쑤셔 넣었는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던 마르XX 선언문이 가방에서 나온 날 정말로 머리 깍이고 다리몽둥이쯤 부러지는 건 아닌가 할 정도로 아버지에게 얻어맞고 엄마는 아무 말도 안하시고 내 손을 잡고 우셨다.
세상이 미쳐서 돌아가는 것처럼 붉은 사상이 난무하는가운데 쉽게 빠져들지 않았던 것은 벌써 다른 사상에 물들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얼굴도 모르는 할아버지는 사상범으로 감옥에서 돌아가셨다.

종갓집 삼남이었던 할아버지는 열일곱 먹는 아내를 집에 두고 일찌감치 집을 떠나 만주에서 사업을 했다. 무역업을 했다고 하는데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아버지는 그 시절 낙타털로 된 옷을 입고 다녔다고 했다. 해방이 되고 몇 년뒤 옛날 살던 집 주춧돌 밑에 황금단지를 묻어놓고 오셨다던 할아버지는 고리짝에 알 수 없는 책을 넣어서 왔다가 사상범으로 체포되었고 이듬해 감옥에서 돌아가셨다. 총명해서 집안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종갓집 삼남이 그렇게 죽고 가문은 점점 기울면서 상주 김씨 문중에서 손에 물 한번 안 묻히고 자라서 소 다섯 마리에 혼수를 싣고 시집을 왔던 할머니는 삯바느질로 생활을 해야 했다. 
그나마 6. 25가 나고 사남매를 두었던 할머니는 큰 딸과 막내 였던 지금 아버지를 빼고 두 자식을 잃었다. 할머니의 큰딸인 지금 나의 고모는 타고난 미인에 총명한 사람으로 지금도 8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나의 모교의 선배다.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 사상에 눈을 떴던 고모는 종전 무렵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가문은 몰락을 막기위해 일찍 남편을 여의고 삯바느질로 어린 아들을 키우는 할머니를 내쳤고 감옥에서 돌아가시게 생겼던 고모는 살기 위해 사진만 보고 6.25참전 용사였고 1급 상이군인이었던 고모부를 만나 결혼을 했고 서울로 이사를 갔다.

아버지가 수재라는 점은 아무도 이견이 없었다. 
문제는 우리 집안이었다. 겨우 먹고 살기 빠듯한 집안에서 돈 한 푼 없이 중 고등학교를 장학생으로 졸업했고 명문 대학 법대를 졸업했지만 사법고시를 볼 수없었다. 사법고시를 봐도 언제나 신원조사에서 걸렸다. 연좌제라는 것이다. 그래도 살아갈 수 있게 국가에서 허락한건 딱 하나 있었다. 선생이었다. 
뭐 아버지의 울분이나 절망감 같은 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만이 피해자 인양 같은 피해자인 우리에게 가하는 모욕과 폭력만큼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항상 술에 절어 있거나 그나마 멀쩡한 날은 저기압에다 소리를 질러대고 자신의 머리를 닮지 않고 바보 같은 엄마의 머리를 닮았다고 천덕꾸러기 취급받는 우리에게 2년마다 이사 짐을 꾸려야 하는 이유같은건 아무도 설명해 주지 않았다. 어릴 때 기억은 마치 연결되지 않는 조각의 무더기 같지만 잊어버리지만 않는다면 나이가 들어 제대로 끼워 맞출 수가 있게 된다. 마지막 조각을 끼워 넣은 건 고등학교 무렵이었다. 
그래서 패배자이자 폭군이었던 아버지를 격렬하게 미워하게 됐다. 
마치 홍역처럼 격렬하게 사상에 빠져들어서 나로드니끄의 오류를 범한 사회주의자에서 아나키스트를 넘어 결국 시니컬한 니힐리즘을 명예처럼 얻어냈다. 그런 내게 운동권은 관심 밖의 일이었다.

시간이 좋은 건 아무리 나쁜 기억이나 상처라도 희미하게 된다는 것이다.
최영미가 ‘서른 잔치는 끝났다.’ 란 시로 우리 시대의 종지부를 찍기 이전에 나는 스스로 회복되어 물질주의자에 쾌락 추구자로 세상과 제대로 타협하고 있었다.
아버지도 용납할 수는 없지만 언젠가 용서 할 수도 있다는 희망적인 시선으로 보게 되었다.
그러고 나니 그 분의 흉포함보다도 코믹한 부분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오쿠다 히데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꽤 있을 것이다.
이 작가의 공중그네가 내가 구입한 첫 번째 작품인데 누가 추천해 준 것이 아니라 그 책을 사면 파페포포란 책을 한권 더 준다고 해서 였다. 뭐 말하자면 충동구매인 셈이다.
공중그네는 재미있게 읽었다. 파페포포는 아직 읽지는 않았지만 집에서 읽었던 후배는 재미있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출간되어 있는 오쿠다 히데오의 작품을 모두 사들였다.
그래도 가을이고 하늘은 푸르고 명색이 독서의 계절이라는데 잡지책만 뒤적이는 만행을 접고 책꽂이에 누워있던 책을 꺼내 들었다. 제일 처음 꺼내 든 게 이충걸의 책이었고 지금은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를 읽고 있다. 


‘아버지는 옛날에 과격파 운동권이었다! 아니, 지금도 걸핏하면 날뛴다. 젊은 시절에 무시무시하게도 ’아시아 혁명 공산주의자 동맹‘(줄여서 혁공동) 에 가입하여 구라야마 회장의 오른팔이자 행동대장으로 미일 안전보장 조약 개정에 반대하는 이른바 ’안보 파기 투쟁‘ 이후의 학생운동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정부공안 및 내부의 대립 파벌인 오카다 파와의 대 혈전에서는 전설적인 투사로서 이름을 날렸단다. 이윽고 운동권의 권력다툼에 염증을 느끼고 어느날  분연히 자진 은퇴하였으나, 지금도 독립독행의 깃발을 내걸고 홀로 투쟁중이시다. 이즈음의 주요한 투쟁은 ’국민연금 납부 거부‘와 ’세금은 못 낸다면 못내!‘. 현관 신발장 앞에는 체 게바라의 큼직한 사진을 붙어놓고, 아들에게는 ‘토마토케첩과 미 제국주의는 우리의 적이야!’ 라고 일갈한다. 국가 권력에 써먹기 좋은 인간을 양성해내는 것이 목적인 제도권 학교 같은 건 안 다녀도 된다고 권하는 한편, 수학여행 비용에 부정이 있다는 낌새를 채고 아들의 학교에 찾아가 교장과 담판을 벌인다. 대낮부터 집 안에서 데굴데굴 뒹굴며 이따금 자신의 이상론을 듬뿍 풀어넣은 소설을 집필한다. 우익과는 부딪쳤다 하면 요란한 난투극을 펼치고 세력다툼에 골몰하는 좌익인사가 순수한 젊은이를 이용하는 꼴을 보면 가차 없이 전봇대에 메다꽂는다. 공안 당국에는 아직 충분히 위협적인 인물이어서 걸핏하면 집 앞에 형사들이 진을 친다.‘

스물일곱에 사법고시를 접고 선생이 된 아버지는 국가권력에 대항할 인물은 못 되었지만 교내에 만연한 교장의 권력 정도에는 충분히 대항할 인물이었다. 사립 학교였으면 당장 잘렸겠지만 그나마 공립이었기 때문에 수시로 교장실에 불려 들어가고 본인의 국어과목과 관련 없는 정치권 이야기로 조용한 시골 학교 교장실은 공안들로 들끓게 만들었다. 정년을 앞둔 교장은 머리가 빠질 지경이었다.
‘당신 이런 식이면 선생질도 못해’
‘흥... 당신이 교사야. 교사라면 똑바로 가르쳐야지’
밤이면 어머니가 조용히 불러서 심부름 가는 척 하고 골목을 나갔다 오면서 누가 서있는지 보라고 했다. 

‘어머니는 ‘오차노미즈 여자대학의 잔다르크’로 통했던, 운동권에서도 이름난 미모의 여전사였단다.
운동권에 뛰어들어 아버지와 결혼하는 과정에 부모와 의절했다. 자신의 순진하기 짝이 없는 감성적 사회주의에 회의를 느껴 운동권에서 은퇴한 후에는 작은 찻집을 운영하며, 천방지축 날뛰는 남편에게 은근슬쩍 브레이크를 걸고 있다.‘

어머니는 갓 대학을 졸업하고 불행히도 처음 부임 받은 학교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어머니 눈에 투쟁하는 아버지가 얼마나 눈이 부셨는지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유부남이었던 아버지와 결혼을 하겠다는 결심을 하도록 만든 점에서는 충분히 놀라운 일이었다. 당연히 어머니는 의절을 당했다.
덕분에 나는 외갓집이 있다는 사실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까지 몰랐다.

‘이 집안의 아들인 우에하라 지로, 상식에 벗어난 행동을 일삼는 과격파 아버지 밑에서 몸과 마음의 고생이 막심하다. 그이 소원은 ’보통 아버지, 회사에 다니는 아버지‘ 그래도 그에게는 매력적인 친구들과 열두살 생일을 앞둔 소년다운 모험과 성장통이 있다. 키는 작으나 담대한 세탁소집 아들 준, 척척박사에 애 어른인 도장집 아들 무카이, 의사 아들 린조, 이혼 가정의 불량아 구로키’

이집안의 딸인 나,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나머지 가족쯤은 나 몰라라 하는 아버지. 나의 소원은 ‘아버지와 같은 학교만 아니면 돼.’ 였지만 불행하게도 고등학교 3년을 그것도 국어 수업을 아버지에게 들어야 했다. 선생님들은 수업시간 마다 나의 이름을 불렀고 나는 점점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물론 그 우울한 학생에게도 친구는 있었다. 임시교사인 어머니가 교장 선생님과 연애로 태어난 그 당시 파격적으로 엄마가 싱글 마더였던 희진, 6.25 때 남편을 잃고 홀몸으로 내려왔다가 작은댁이 되었다 버림받은 어머니를 둔 애현. 소도시 최상층 부르조아 집안이었지만 가출을 단행했다가 사흘만에 잡혀 와서 머리를 삭발한 은진, 우리랑 왜 어울리는지 모르겠지만 모든 게 평범했던 집안의 평범한 은주.


나는 심금을 울린다는 표현을 좋아한다.
아무리 악평을 받은 작품이라도 나의 마음을 파고들어 심금을 울린다면 명작인 것이다.
무라카미 류의 69이 그랬고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가 그렇다.
전 편 만큼은 마치 나의 어린시절을 보는 것 같다.
2편은 마음을 헤 풀어지게 만드는 동화 같은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지만 아마도 내가 원했던 아버지가 우에하라 이치로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아버지도 상상을 초월하는 코믹함이 많은 분이시지만 쿨 한 부분만큼은 우에하라 이치로를 따라 올수가 없다. 물론 현실이 소설처럼 기승전결에 의한 결말을 보이는 건 아니란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다. 언젠가 나도 제법 괜찮은 결말을 맞이할 수도 있지만 이치로의 이 말 만큼은 상처받았던 내 마음을 씻어주는 말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너는 아버지를 따라할 거 없다. 그냥 제 생각대로 살아가면 돼. 아버지 뱃속에는 스스로도 어떨 수 없는 벌레가 있어서 그게 날뛰기 시작하면 비위짱이 틀어져서 내가 나가 아니게 돼. 한마디로 바보야. 바보.

정말 So cool 이다.
오키나와의 이리오모테에 가 보고 싶다.
바다가 푸르고 산호가 보이고 열대우림의 정글이 있고 나폴레옹 피쉬가 잡히는 곳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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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8-12-08
20:29:34 

 

상병 양순호 
  이리오모테에는, 동명의 이리오모테라는 야생고양이가 있기도 하더라요. 
그리고 그 야생고양이는 아즈망가대왕에서도 나왔데요. (아니면 말구요) 
밖에서 양순호 대신 또 쓰는 이름이 남쪽인데, 남쪽으로 가라! 라는 책이라니. 
오쿠다 히데오의 책은 슥슥 보기에는 딱 좋은 이야기인 것 같아요. 2008-10-24
10:46:32
  

 

병장 고동기 
  지연님이 왜 그렇게 강아지와 사이가 좋은지 이제야 알 것 같아요. 글 잘 읽었습니다. 2008-10-24
11:14:47
  

 

병장 이동석 
  아, 이 책 쓴 사람이 그 유명한 공중그네 쓴 그 사람이었군요. 저도 이 책은 읽었었는데, 너무 유명하고 호평 일색인 책은 안 읽는 변태인지라 공중그네는 굳이 안 읽었거든요. 

유난히도 자신에게는 각별한 책이나 영화를 만나게 될 때 이런 좋은 감상이 나오는군요. 어찌보면 괴로운 기억일텐데도 쿨하게 혹은 절절하게 써내려간 지연님의 강함? 성숙함? 어른스러움? 암튼, 그런게 "심금을 울립니다." 

언젠가 아버지와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이야기를 정리해보고 싶군요.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가 내게는 어떻게 맺혔을지, 연원을 알고나면, 조금은 이해도 되겠죠? 2008-10-24
11:15:52
 

 

병장 고은호 
  이런 글을 읽으면 꼭 뭐라고 멋진 감사를 전하고 싶은데요. 
아아.. 표현이 안되네요.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이런 것 밖에 없네요. 

'진지한 마음으로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정말 감사해요.' 2008-10-24
11:36:04
  

 

병장 정병훈 
  잘 읽었네요. 
그나저나 오쿠다 히데오는... 

좀 거리감이 있습니다. 이유는 모르겠네요. 2008-10-24
11:38:03
  

 

병장 이동석 
  글이 너무 좋아 깜빡했는데, 

<가지로>는 왜 안 외치시나요. 

에부리바디 세이 <가지로> 2008-10-24
11:49:26
 

 

병장 고은호 
  아차! 그렇군요. 정말 깜빡 했네요. <가지로>!! 2008-10-24
12:06:03
  

 

병장 어영조 
  병훈//저도 그래요. 오쿠다히데오의 공중그네나 인더풀, 남쪽으로 튀어까지는 재밌게 읽었는데 말이죠. 그 뒤로는 히데오 작품에 손 대기가 싫네요. 

어쨌든, <가지로>! 2008-10-24
12:16:42
  

 

상병 이우중 
  이 글 역시 So cool!이군요. 
왜 이 책을 읽기 전에 오쿠다 히데오에 질려버렸는지 모르겠군요. 
'남쪽으로 튀어!'도 한 번 읽어봐야겠어요. 
(독서후기만 보면 다 읽어봐야겠다는군요. 그래놓고 제대로 읽은 것도 없으면서.) 

아 맞다. 가지로. 2008-10-24
12:23:13
  

 

병장 김선익 
  우리는 뜨거운 피를 가진 인간이라 쿨해질 수 없는건가요. 
여기 댓글을 달고 있고 가지로를 외치는 우리 모두, 
이 글 앞에서 쿨해지질 못하겠네요. 

명예의전당에서 인터뷰를 봤어요. 추천해주신 그림읽어주는여자 잘 보고있어요. 2008-10-24
12:57:24
  

 

상병 박정현 
  글 정말 잘 읽고 있습니다... 
특히 예전에 어느글에서 읽었는데... 
소소한 것의 즐거움... 참 공감이 되더군요... 
선 댓글 후 감상 할게요(웃음) 2008-10-24
13:17:38
  

 

병장 정건 
  전 오쿠다 히데오의 '걸' 먼저 시작했는데 지금은 거의다 읽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건 공중그네 이군요. 
공중그네 면장선거 걸 마돈나 점점 읽다 보니 질리더군요. 

오쿠다 히데오의 작품 중 그래도 젤 기억에 남는건 

'내 인생 니가알아? -라라피포' 
(므흣) 2008-10-25
14:04:47
  

 

상병 양순호 
  앗. 나도 그 책 봤어요. 독서후기를 썼는지 안썼는지는 기억 안나네요. 
찾아보고 없으면.. 아니 쓴 기억이 있는데. 음음. 라라피포의 의미는 참 
깊고도 넓었죠. 저 멀리 흑해와도 같았어요. 2008-10-26
17:5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