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글-독서후기] 검은꽃
병장 고동기 2008-11-28 08:52:03, 조회: 245, 추천:2
검은꽃
김영하
1. 가자, 멕시코로
일포드 호를 타면 노예로 팔려간다는 소문에 출항은 자꾸만 지연되고 있었다. 그러나 일포드 호에 타고 있던 조선인들에게는 그런 풍문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들에게 조선은 더 이상 희망이 없는 나라였다. 대한제국 역시 자국의 국민들이 노예로 팔려 가는지 아닌지 확인할만한 정신이 없었다. 그 당시 고종황제는 러시아의 차르에게 일본을 견제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었다. 열강의 세력 균형 속에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포드 호 속의 조선인들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렇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시간이 흐르고, 1905년 4월 4일. 1,033명의 조선인을 태운 일포드 호가 드디어 멕시코로 향해 출발했다.
2. 영국령 일포드 호, 더 이상 조선은 없다
일포드 호는 주한 영국 공사의 고든 경의 허락을 받아야만 출항이 가능한 배였다. 순전히 영국 영토였던 그곳엔 더 이상 조선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영국출신의 선원과 일본인 요리사를 비롯하여 배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몰락한 양반가문, 도시의 부랑자, 파계한 신부, 박수무당, 내시, 농민, 상인, 군인 등…. 그곳에는 더 이상 계급도, 예의와 범절도, 삼강과 오륜도 없었다. 일포드 호의 승객들은 짐짝처럼 취급되었다. 그나마도 적정인원을 세배나 초과하는 바람에 그들은 생존을 위해 스스로를 지켜야만 했다. 그런 일포드 호 안에서 단연 눈에 띄는 건 바로 몰락한 양반 가문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배 안에서도 틈틈이 서책을 꺼내 읽으며 무료함을 달랬다. 그들의 손은 희고 부드러웠으며 대체로 상투를 틀고 망건을 쓰고 있었다. 이들은 선실 속의 다른 계급과 융화할 의사가 전혀 없는 듯 보였으며 따라서 아무 말 없이 그저 상황을 감내하고 있었다. 말라비틀어진 배추에 소금을 친 김치와 멀건 일본식 된장국, 거친 밥이 전부인 식사시간이 되면 이 계급은 가장 심각한 고뇌에 빠졌다. 당연히 순서를 양보 받으리라 생각하고 점잖게 기다려도 보았으나 돌아오는 건 비웃음뿐이었다. 그렇다고 식사 때마다 돼지들처럼 우당탕탕 아귀다툼을 벌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참다못한 청주 출신의 한 양반이 순번제를 제안했다. 순번을 주어 한번은 앞에서부터 그 다음은 뒤에서부터 밥을 타먹도록 하면 공평할 것이라는 안을 내놓았지만 아무 메아리가 없었다. 제안 자체는 합리적이었지만 양반들의 말을 들어주기 시작하면 끝내는 그들이 주도권을 쥐게 되리라는 것을 평민들은 잘 알고 있었다. 다소 불편하더라도 끼니마다 줄을 서는 것이 그 꼴사나운 양반들을 골탕 먹이는 길이었다. 하는 수 없이 양반들도 줄을 서기 시작했다. 거들먹거리는 팔자걸음은 저절로 고쳐졌으며 그 속도는 빨라졌다.” (39p)
이런 몰락한 양반 가운데에는 고종의 육촌이었던 이종도의 가족들도 있었다. 일포드 호 안에서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는 건 가장 흥미로운 일이었다. 이종도는 저 멀리 멕시코에 가면 자신과 같은 양반가문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또한 그들이 자신의 말을 이해해주고 왕족의 가문이었던 자신들을 대우해 줄거라 믿고 있었다. 일포드 호가 제물포를 떠난 순간부터 그런 그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를 대한 제국의 대표이자, 1,033명의 무지한 조선인들의 지도자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생각은 유카탄 반도에 도착할 때까지 지속됐다. 그의 가족이 쫄쫄 굶어가는 상황에서도 그런 그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양반의 고집은 쉽게 꺾이지 않았다.
3. 에네켄, 비극의 시작
한반도에서 출발한지 한 달. 유카탄 반도의 모래바람이 1,033명의 조선인들을 맞았다. 산도 없고 강도 없는 황량한 벌판위에는 식지 않는 태양이 불을 뿜고 있었다. 습기하나 없는 메마른 더위에 힘잃은 조선인들이 하나 둘 쓰러졌다. 하늘과 땅 사이에는 강산(江山)이 있다고 믿어왔던 그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유카탄 반도는 그야말로 저승이었다. 구천이 떠돈다는 바로 그 저승말이다. 그리고 그 저승의 한가운데는 악마의 발톱이 자라나고 있었다. 메마른 땅위로 우뚝 솟은 그것은 한 마리 짐승과도 같았다. 수천 개의 가시로 뒤덮인 그 짐승은 식물이라 하기엔 너무도 잔인했다. 유카탄 반도에 떠밀려온 조선인들은 하루 종일 그 짐승과 싸워야만했다. 4년이라는 계약기간이 그들의 발목을 잡고 있었고, 말도 통하지 않는 이곳에서 도망갈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외교관이 주재하지 않은 이 땅에는 그들을 지켜줄 사람조차 없었다. 에네켄과 씨름하는 그들의 머리위로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다.
“선박용 로프의 원료로 쓰이는 에네켄은 제국주의 열강들의 식민지 쟁탈전과 서구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말미암은 화물 운송량의 증가로 품귀현상을 빚고 있었다. 에네켄으로 만든 로프는 질기고 튼튼했다. 에네켄 섬유는 필리핀의 마닐라삼과 더불어 세계로프 시장을 양분하고 있었다. 귀신이라도 데려와 일을 시켜라. 유카탄 농장주들은 입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98p)
선박이 대양을 오가면 오갈수록 농장의 노예들은 점점 더 바빠졌다. 매일 새벽 4시부터 해가 질 때까지 에네켄을 수확해야 했다. 에네켄을 다듬는 손길이 늦어진다 싶으면 가차 없는 채찍이 등 뒤를 후려쳤다. 그들의 등 뒤에는 채찍을 든 감독들이 말을 타고 서있었다. 차라리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이 나았을까. 광활한 멕시코의 벌판위엔 태양을 가려줄 그늘 한 점 없었다.
“농장은 쿠바나 하와이 플랜테이션과는 달랐다. 자본주의적 대량 생산의 정신에 따라 설계된 흑인 노예 중심의 플랜테이션과는 달리 스페인 정복자들의 대농장(아시엔다)는 다분히 봉건적이었다. 스페인 본토에서 이주한 정복자들은 본토의 귀족들처럼 행세하길 원했다. 멋진 저택을 짓고 높은 담에 둘러싸여 하인과 노예들을 부리며 왕처럼 군림하는 것. 그것이 이들의 목표였다. 자식들은 유럽으로 유학을 보내고 주인들은 메리다나 멕시코시티의 쾌적한 부촌에서 생활하다가 가끔 들러 왕 노릇을 즐겼다.” (101p)
유카탄 반도의 주인이었던 마야인들 조차 노예로 만들어버린 이들이었다. 농장의 지주들에게 있어 에네켄은 사막의 다이아몬드와 다름없었다. 더 많은 노동자들을 데려와 더 많은 에네켄을 수확해야했다. 힘없는 나라의 국민들이야 말로 노예로 만들기에는 제격이었다. 말도 통하지 않아 도망갈 일도 없고, 외교관이 없어 간섭받을 일도 없는 조선인들을 노예시장에서 값이 제일 비쌌다. 하지만 데려오기만 한다면 그들은 제 값을 톡톡히 치러냈다.
처음에 조선인들은 마야인들 보다 작업속도가 늦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선인들의 에네켄 수확량은 점점 늘어났다. 그들은 다양한 작업도구와 보조도구를 만들어내어 가시에 찔리지 않으면서 에네켄 줄기를 수확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조선인들의 작업량은 마야인들의 그것을 훌쩍 뛰어넘었다. 조선인들은 참 열심히 일했다. 반도의 사람들은 항상 그랬다. 대륙에서도, 열도에서도, 이름 모를 섬에서도 그들은 열심히 일했다. 참으로 지혜롭고 영리한 사람들이었다. 다만 그들의 지도자라 칭했던 사람들만이 그렇지 못할 뿐이었다.
4. 스러져간 개인의 역사,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평론가 남진우는 이 소설을 두고 ‘소문자로 씌여진 역사’라 했다. 역사를 다룬 기존의 소설이 과거 시대의 충실한 재현이나 역사적 인물을 낭만적으로 승화시키는데 있었다면, 소설 『검은꽃』은 역사소설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깨트리는 소설이라는 것이다. 대다수의 우리 역사소설이 민족국가를 절대시 하고 국가의 충실한 인물이나 그러한 신민(臣民)을 강화하는 방식의 이야기로 전개되었다면, 이 소설은 국가와 민족의 우상이 균열이 나고 무력화되는 지점까지 밀고 나간다. 그리하여 소설은 대문자로 씌여진 거대한 역사이야기가 아닌 소문자로 씌여진 작은 역사 이야기에 주목하도록 만든다. 실제로 이 소설은 거리의 부랑자인 ‘김이정’과 몰락한 양반 가문의 딸인 ‘이연수’의 연정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 시대의 중심인물이었던 고종황제나 외부(外部) 사람들의 이야기는 중심의 바깥에 존재한다. 외려 파계한 신부, 퇴역한 군인, 거리의 부랑자였던 사람들이 이야기의 중심에 선다. 소설은 시대의 그늘에 가려 소리 없이 스러져갔던 개인의 역사를 말한다.
그러나 이 비극적인 개인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은 듯하다. 그 형태를 달리할 뿐, 대양의 어딘가에선 또 다른 일포드 호가 사람을 실어 나르고 있다. 멕시코의 에네켄 아시엔다는 사라졌지만, 국가를 초월한 아시엔다는 이제 세계를 하나로 묶고 있다. 그리고 그 머리의 꼭대기에는 사방을 벽으로 막아놓고 왕노릇을 하는 사람이 있다. 소설가 김영하는 마야의 커피농장과 스타벅스를 연관 지어 자본주의의 비극을 이야기 했지만 이것은 더 이상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도 어딘가에선 힘없는 노예들이 이 나라 저 나라로 떠나고 있고, 농장의 지주들은 노예들을 부리며 왕처럼 생활하고 있다. 단지 노예라는 이름이 사라지고, 세계화라는 표현이 생겨날 뿐이다. 『1984』의 신어(新語)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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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6
12:59:15
일병 김예찬
저도 참 인상깊게 읽은 책입니다. 요즘의 김영하는 문제의식의 제기가 스타일에 파묻힌 듯한 느낌을 줘서 안타깝기는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자본주의가 세계의 표층부터 심층까지 포섭해나가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 책의 무대가 되는 1910~20년대에서 불과 반세기만 시간의 태엽을 돌려봐도 상황은 많이 달랐을 겁니다. 전통적인 농촌 공동체가 파괴 되기 전의 조선이나 멕시코에서 과연 화폐가 그렇게 생존을 좌우하는 문제였을까요.. 슬프더군요. 2008-11-28
09:06:56
병장 정병훈
일단은 동기님의 독서후기에 감탄사를 날리겠습니다.
!!!!!!!!!!!!!!!!!!!!!!!!!!!!!!!!!!!!!!!!!!!!!!!!!!!!!
이건 아주 개인적인 제 생각이지만, '독서후기는 이래야 한다'면 바로 이것이다는게 느껴집니다. 깔끔하면서 약간의 무게가 느껴지는 독서후기는 책에 대한 또 하나의 찬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독서후기에는 형식이 없겠지만, 실생활에서 느끼는걸 이야기형식으로 풀어내며 독서후기쓰길 좋아하는 저는 이런 평론적인 독서후기를 보면 부러울 따름입니다. 크흐흐
좋네요. 좋아요. 좋습니다. 2008-11-28
09:10:16
일병 송기화
야호, 동기님의 독서후기군요!
이 시기를 적어낸 글은 참 슬픈 것 같습니다.
변화를 이끌어 간 것이 우리가 아니기 때문일까요?
어쩔 수 없이 변해야만 했던 시기이기 때문일까요? 2008-11-28
09:15:14
상병 김남우
예찬 // 요즘의 김영하는 스타일 역시 그닥인것 같아요.
'검은꽃'이나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같은 초기작들의 스타일이 훨씬 더 마음에 드는 것 같은데 말이죠. 2008-11-28
10:28:59
상병 강수식
동기님 독서후기 잘 읽었습니다.
저는 언제쯤 이런 독서후기를 쓸 수 있을까요?(울음)
검은꽃의 경우는 저도 아주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나서
(불과 며칠전에 말이죠)
이렇게 댓글을 남깁니다.
저는 검은꽃을 읽기 바로 전에 신경숙씨의 리진이라는 소설을
읽었는데 비슷한 시대상이잖아요.
조금씩 비교해가면서 읽는것도 색다르더군요. 2008-11-28
10:47:32
병장 고동기
책은 좋았습니다.
작가의 말에서 보면 1부의 내용(멕시코에 도착할 때까지의)을 대략적으로 완성하고
멕시코로 가서 나머지 분량을 집필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썼다던 그 1부의 내용은
좋았습니다. 1,033명의 조선인들이 일포드 호를 타고 멕시코로 도착할 때까지는 정말
흥미진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부터는 작가가 현지에서 취재했던 내용들을 너무
많이 담으려 했는지, 억지로 끌고갔던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초반까지의
전개가 너무 좋아 끝까지 읽게되는 그런 책이었습니다.
아무튼, 아내와 함께 멕시코에서 글을 쓸 수 있었다는 그가 그저 부러울 따름입니다 2008-11-28
12:31:44
상병 강수식
고동기님 위의 댓글에 맨 마지막줄에
심히 동감하는 바입니다.(웃음) 2008-11-28
12:38:47
병장 이동석
그 시대는 정말이지 소재의 보물창고-같습니다-라고 말하니 갑자기 낯이 뜨거워집니다.
검은 꽃은 애초에 멀티 유즈-를 염두에 두고 투자를 받아 현장답사를 하며 쓴거라고 하던데, (동아리 방에서 라면받침으로 쓰던 낡디 낡은 옛 스크린-에서 본 내용입니다.) 영화화가 됐는지는 궁금하군요. 아마 그 즈음에 최민수가 주연했던,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을 배경으로 한 영화가 나와서 유사한 소재라 영화화가 늦춰졌을 가능성도 있겠습니다만, 아마 IMF와 시기가 맞물리지 않나- 그런 추측을 해봅니다.
IMF이전의 90년대 한국은- 지금 생각하면 이상한 동네였던것 같아요. 이국 혁명가의 평전이 날개 돋친듯 팔리고 소설가에게 거금을 주며 답사하면서 책을 써달라고 하고, 왕가위의 영화가 연속 매진을 기록하고, 전태일을 다룬 영화가 흥행을 하며, 서편제가 장기상영을 하는-
그래서 지금 90년대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그리 많나? 그 시대를 살아냈든 살아내지 않았든 간에, 왠지 모를 향수가 있는건 사실인것 같아요. 유독-
무엇보다, 전 이글과 김예찬님의 글까지 모두 가지로 갔으면 합니다.
베스트 선정때 가겠지만, 그래도
일단, 가지로- 2008-11-28
17:37:52
병장 정병훈
가지로 가야죠. 2008-11-28
19:24:48
상병 이동열
오랜만의 좋은 독서후기 잘 읽었습니다.
무릇 좋은 독서후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책을 읽고 싶게 만들지요.
저는 늘 김영하의 책을 읽어야지 하면서도 아직 손에 잡지 못하고 있지만요.(땀)
이런 미시사(微示史)가 주목되는 시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언젠가- 한겨레에서도 한번 언급되었던것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해서(땀)
검은꽃과 유사한 소재로 다룬 책 중 개인적으로 한수산의 까마귀를 추천해 봅니다.
장편인데도 재미있게 잘 읽었던 책이라(웃음)
마지막으로 외칩니다. 가지로- 2008-12-12
10:27:35
병장 김민규
까마득하게 묻혀 있다가 이제야 건져나온 보석이군요. 한창 정신없던 때라 이제야 읽습니다.
몰락양반은 그곳에 가서 어떻게 되었을지요. 고고한 양반의 자태를 끝까지 고수했을지요. 한없이 궁금해지는 오리무중의 상태로군요. 그리고 고립무원에 있던 이 글을 꺼내다준 동열님의 노고와 섬세한 동기님의 후기에 감사하는 의미에서, 마지막으로 외칩니다.
가지로 2008-12-14
03:48: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