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글-내글내생각] 타자를 위한 윤리
상병 김요셉 2008-12-17 13:10:31, 조회: 263, 추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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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의 연애 경험 중, 남자와 사귀어 본 적은 없다. 연애 대상들은 전부 완벽한 인간이였고, 완벽한 여성이였으며, 연애 감정 또한 완벽하게 에로스적이였다.
나는 보편적 이성애자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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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 이성애자는 존재할 수 있어도 절대적 이성애자는 존재할 수 없다. 바위덩어리같은 근육으로 온몸을 무장하고 다니는 마초라 할지라도 최소한의 호모섹슈얼리티는 무의식 속에 잠재적으로 내재하고 있음은 당신이 인정하기 힘들더라도, 이미 어느정도 입증되고 널리 알려진 사실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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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처럼 단단하게 굳어 밥을 굶든 운동을 하든 몸에서 빠져나갈 낌새를 전혀 내비치지 않는 지방질들을 다량 보유한, 친구들이라곤 여자들밖에 없어 축구를 하는 대신 카페와 술집에 앉아 '언니들'과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내는, 남자 친구를 만들려 노력해 봐도 남자와 관계맺기가 영 어색하기만 하니 제대로 된 남자 친구들을 사귈 수도 없으며, 그에 따라 마초가 될래야 될 수가 없는, 날이 갈 수록 反마초에 수렴하는 나는 의식 속에 내재된 호모섹슈얼리티를 긍정하고 거리낌없이 표출하는 편이다. 가끔 동성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끼며, 그것을 숨기지 않는다. 상대 남성이 불쾌해 하지 않을 정도로 관심과 애정을 표출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나는 양성애자'라며 당당히 선언하기도 한다. 물론, 나와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주위 사람들의 대부분은 내가 양성애자이든 동성애자이든 별 관심 없다, 라는 입장이며 내 가볍고 장난스러운 애정을 받는 남성들 또한 그것을 너그럽게 받아들일 정도의 이해심을 갖춘 씨크한 남성들이기에, 성적정체성에 대한 위협이나 별다른 비판 없이 그것을 내 개성의 일부로 표출하며 살아 올 수 있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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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남정네들만으로 가득한 특정 집단에 들어간 뒤부터는 사정이 상당히 달라져버렸다.
이곳의 남정네들이 어떤 남정네들이냐 하니, 어제 밤 어떤 생물체를 '따먹었다'고 스스럼없이 그것도 자랑조로 말하곤 하는 이 남정네들의 정체는, 그 생물체가 먹을 수 있는 그것도 '따먹을'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는 발상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나로서는,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물론 모든 남정네들이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식성은 개인적 취향의 문제이니 문화적 상대성을 인정하자는 의미에서 관용을 베풀어 줄 수도 있지 않느냐 싶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취향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 집단의 틈에서 살아왔던 나로서는 도저히 인정하고 받아들여 줄 수 없는 취향이며, 그런 취향을 암묵적으로 긍정하는듯한 태도를 보이는 전체 집단 또한 용납해 줄 수 없다.
안그래도 친해지기 어려운 남정네들인데. 그런 이해 못할 취향까지 가진 바에야, 먼저 다가서서 소통하기가 쉽지 않다. 문제는 그것 뿐만이 아니다. 마음 줄 곳 없이 고립되어 외로움에 지친 나는 기꺼이 그들의 취향을 이해하고 먼저 다가갈 용의가 있으나, 이 독특한 취향을 가진 남정네들과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그 외 남정네들에게 내 성적정체성은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인가. 어제밤 무진장 섹시한 남자와 입을 맞추었다는 내 말에 그들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비단 섹슈얼리티의 문제일 뿐만이 아니다. 취향도, 사상도, 대화의 코드도, 전부 나와 다른 사람들 뿐이다. 이 사람들 앞에서 나를 있는 그대로 내보일 자신이 없다. 내보이기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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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외로워졌다. 말이 없어졌으며,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웠던 바깥에서와 달리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워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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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도 만만치않은 고집과 자존심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나는, 집단과 관계맺는데 있어 생긴 장애와 문제들을 내 탓으로 돌리기보단 오로지 집단의 잘못으로 치부한다. 집단을 따돌림으로써 스스로 따돌려진 성격장애의 왕따가 다짜고짜 집단에게 따돌림을 탓하는 격인데, 이건 내 탓이 아니다. 정체성이 다른 타자들을 용납하지 못하는 집단, 전부 당신들 때문이다. 감히 당신들에게, 당신들은 지나치게 폭력적이고 비윤리적이다 주장하며, 타자를 위한 윤리를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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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타니 고진과 김형중의 경우, 이렇게 주장한다.
- 인류학자나 문화기호론자는 공동체 바깥에 있는 타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 이방인은 공동체의 동일성, 자기 활성화를 위해 요구되는 존재이므로, 공동체 장치 내부에 있다. 공동체는 그 이방인을 희생양으로서 배제하거나 '성스러운'자로서 영입한다. 실상 공동체의 외부로 보이는 이방인은 공동체의 구조에 속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의미의 타자는 그 어떤 타자성도 지니지 않는다.
가리타니 고진, <교통 공간에 대한 노트>, [유머로서의 유물론]
- 윤리의 발생은 항상 타자의 '절대적 외부성'을 용인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즉 타자는 항상 동일자의 표상 체계 밖에 있어서 그를 표상할 언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의 용인이 윤리를 낳는 전제 조건이 된다. 그런데 타자를 동일자의 표상 체계에 따라 재고 자르지 않기 위해서는 동일자 스스로 자신이 속한 시스템을 회의하고 상대화할 줄 알아야 한다. (......) 요컨대 '관계의 절대성'이란 고진의 개념은 관계를 통해 나 또한 타자에게는 또 다른 타자일 수 있다는 상대성의 진실을 인식 가능하게 해준다. (......) 거기서 바로 '교통'이 발생한다.
김형중, <性을 사유하는 윤리적 방식>, [단 한 권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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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에 대해서, 그가 동일자의 언어 체계로는 포섭할 수 없는 '바깥'의 존재임을 먼저 인정하고 동일자의 폭력적인 관점에 의한 자의적 해석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타자에 대한 윤리는 가능할 수 있다. 그들에게 동정의 시선도 폭력적 시선도 내던지지 않으며, 그들이 공동체 바깥에서 그들 자신만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소수'라는 수사는 그것을 어떤 '다수'의 입장에서 평가할때 발생한다. '성적소수자'를 '소수자'가 아닌, 단지 '동성애자'로써만 받아 들일 수 있을 때 윤리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윤리의 발생을 위한 기본 여건 정도는 될 수 있으돼, 윤리적 '교통'까지 발생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을까. 특히나, 체제와 입장에 대한 선택과 동조 없이 블로그속 개인으로 수렴되어가는, 집단적 공론의 장에서의 소통을 거부하는 불안한 이십대들이 내 존재영역 밖에 있는 타자들에게 대화를 시도하려 할까.
윤리는 관계맺음, 소통을 위해 존재한다. 소통을 위한 적극적이고 치열한 노력 없이 윤리성에 대해서만 논의하는 것은 쓰잘데 없는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는다. 타자에 대한 윤리의 정립은, 결국 타자와의 소통을 위한 윤리의 정립이다.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언한 고진의 옹졸함에 대해 섭섭한 마음을 내비친 바 있는 정여울은, 타자들에 대해 단지 '윤리적 시선'을 주는 것에서 그치는 것 뿐만 거기서 더 나아가야 한다 말한다. 정여울은, 고진이 타자를 향한 윤리를 주장하면서 정작 타자의 일상, 타자의 욕망 자체를 타자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질문하면서, 타자의 욕망 자체와 정면으로 마주치지 않는 한 타자와의 소통은 불가능하다 말한다.
- 그는 자신의 저술에서 일관되게 타자와의 윤리적 관계 맺음을 이야기했지만, 정작 그가 NAM을 이끄는 이론가로서 '타자로서의 노동다'를 이야기할 때는 이 논리가 일관되게 관철되는 것 같지 않다. (......) 타자와의 관계 맺음은 타자의 '욕망', 그 욕망의 구체성을 담담히 들여다보는 일로 시작되는 것 아닐까. NAM을 통해 구체화되는 자본재 상품에 대한 불매운동은 소비자 = 노동자가 기존의 상품 사용에 대한 욕망을 억제해야만 가능해진다. 즉 일종의 집단적인 금욕의 실천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 그는 '소비자로서의 노동자'를 이야기하면서 정작 노동자들이 무엇을 욕망하는지, 무엇에 유혹되는지, 어떤 상품에 왜 길들여져 있는지는 철저하게 분석하고 있지 않다.
정여울, <평론의 멜랑콜리, 철학의 아포리아>, [내 서재에 꽂은 작은 안테나]
- 이들이 처절한 고통의 동굴을 빠져나갈 때마다, 그들을 아낌없이 위로해주는 공동체의 따스한 품이 있다. 부모 없는 아이 장금에게도 그녀를 기꺼이 품어안는 아름다운 타인, 즉 스승(한상궁)이 있다. 즉 이들의 모험은 외따로 떨어져 정글을 표류하는 고립의 고통이 아니라, 공동체의 엄격한 통제와 친밀한 배려가 공존하는, 세상을 향해 한껏 팔을 벌리는 '열린 고통'의 장이다. 그들에게는 있고 우리에겐 없는 것. 그것은 바로 현대인의 세속화된 일상 속에서는 결코 겪을 수 없는 '진정한 통과제의'의 경험이 아닐까.
정여울, <부엌, 지상에서 영원으로 향하는 문턱>, [내 서재에 꽂은 작은 안테나]
타자를 '절대적 타자'로서 인식한 후에는 그들이 절대적인 타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리하여 나 혹은 우리가 그들을 이해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통을 시도하고자 하는 노력 즉 행동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윤리가 완성된다. 물론, 소통의 시도가 만만할 리 없다. 상대적인 비교의 논리로 사물을 파악하는데 길들여진 우리에게, 절대적인 타자와 소통하는 일이 쉬울 리 없다.
정여울이 시도하고자 하는 (것으로 추측되는) 소통의 시도는 개별 주체의 내면에 대한 탐구에서부터 시작된다. 개별 주체의 내면 아주 깊은 곳에 존재하는 '내 안의, 내가 모르는 무수한 나'에 대한 탐구를 통해 내 속에도 무수한 타자가 있음을 깨달은 뒤에는, 그리고 그 수많은 분열적 자아들에 대해 하나하나 귀기울이고 받아들이는 노력의 과정이 있은 뒤에는 주체 밖, 공동체 밖의 삼인칭 타자에 대한 이해의 가능성도 훨씬 높아질 것이다.
또한, 타자들의 욕망과 고통에 주목할 때, 이 경우 타자가 가지고 있는 욕망과 고통은 일인칭 주체의 잠재의식 속 어딘가에도 내재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므로 - 누구에게나 동성애에 대한 욕구가 손톱만한 수준의 정도는 있는 것 처럼 - 타자의 고통은 내 고통과 동일시되고 공감하기가 수월한 것일 것이니, 이로써 절대적 타자는 개별자의 사고 체계 속에 끌어안겨 더이상 '절대적이지 않게'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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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도 아니고 정여울도 아닌, 여기 컴퓨터 앞에 앉아 중언부언 떠들어대고 있는 필자의 경우, 고집 세고 자존심 강한 만큼 단순하기도 하다.
글쎄. 절대적 타자이니 뭐니. 굳이 그런 이해하기 어려운 말까지 써대면서 열을 올릴 필요가 있을까.
타자를 위한 윤리. 타자 뿐만 아니라 이 세상 존재하는 그 모든 것들을 위한 윤리.
사랑과 평화, 이것보다 더 단순하고 명백한 진리가 또 있을까. 고진이 뭐라 하든 누가 뭐라하든 난 이 한 마디로 일축하련다. 러브 앤 피스. 굳이 당신들을 절대적 타자로 분리하는 번거로운 과정이 없더라도, 사랑과 평화가 있다면야 그게 뭐 문제될 게 있겠는가.
그리고 오래 전부터 멸종 위기에 처해있는 히피들의 후예가 언젠가 노래했던 것처럼. 마음의 장막을 걷으면 언젠가 행복에 나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믿는다.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12-18 09:29)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6
13:02:47
병장 양 현
그렇다면,
난 볼처럼 보이는 스트라이크를 던질랍니다.
아니면, 데드볼을 던져줄께요. 시속 180km면 되겠죠. 2008-12-17
13:15:44
병장 이동석
타자를 위한 윤리라면, 음 빈볼은 적당히 정도?
투수를 위한 윤리라면, 싸인은 훔쳐보지마?
그냥 말장난이 오랜만에 댕겨서요. 죄송.
그러나 내용은 놀랍습니다. 책마을에서는 유독 섹슈얼리티에 관한 담론은 뭐랄까, 금기-거나 유희-거나 였는데, 이렇게 자기고백-까지 곁들어지니, 여기서는 유희-도 금기도-불가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도 절대적인 이성애자나, 절대적인 동성애자-따위는 그냥 관념이거나 이념-이라고 생각합니다. 2008-12-17
13:18:42
상병 김요셉
기왕이면 정직한 스트라이크 정도로...어떻게 안될까요?
그나저나, 자기고백적이라고 까지야..흐흠. 뭔가 엄청난 비밀을 폭로한 것 같아 괜시리 낯부끄러운데요? 하핫.
저런 섹슈얼리티에 대한 담론을 금기시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지내다 들어왔는데, 동석님 말대로 책마을 같은 곳이 아니고서야 호모섹슈얼리티를 (거의 절대적으로) 금기시하는 집단속에서 살아가려니 죽겠다구요. 무한한 발랄함을 마음껏 뿜어댈 수가 없어요, 이런. 2008-12-17
13:40:43
상병 김무준
패션 업계에 종사하는 괜찮은 남자의 구십 퍼센트는 게이다- 라는 여성 종사자들의 농담이 있죠. 남성복 디자이너를 꿈꾸는 깽깽이는 패션에 빠지면 빠질수록, 아 내 성 정체성마저 흔들리고 있는게 아닌가라는 고민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깽깽이 어깨에 손이라도 얹거나, 머리를 쓰다듬는 행위를 하면 '울컥'하는 무언가와 함께 심각한 수준의 분노가 생성됩니다. 아아. 이건 종족 특성이려나.
아직까지 성 정체성에 대해 심각히 고민하는 친구나 사람과 사귀어 본 적이 없어, '나는 타자의 윤리를 존중한다.'는 식으로 말하기는 해도, 친구놈이 깽깽이에 '사랑해'라며 입술을 덮쳐 온다면 과감히 죽빵을 날려 원 펀치 쓰리 강냉이를 뱉게 해 줄 용의는 있습니다. 이런 걸 보면 아직 깽깽이는 좀 낡은 사고를 갖고 있나 봅니다.
근데. 요셉씨와 같은 친구가 있어도 재미있을 것 같기는 합니다. 깽깽이의 입술을 탐하려 하지만 않는다면 말이죠.
이래뵈도 제법 매력덩어리라서. 웃흥. 2008-12-17
14:19:21
상병 김무준
아 깜빡했습니다. 가지로. 2008-12-17
14:19:55
상병 김요셉
앤드뮐미스터의 살랑거리거나 온 몸에 휙 휘감겨 내려오는 여성스러운 실루엣을 사랑해요. 남자의 몸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여성적 아름다움이 나타나는 룩을 위해, 일단 몸부터 만들어 보자! 라며 극단적으로 체중을 줄이려 해 보기도 하고 예쁜 근육을 만들어보려 하기도 했으나.
음. 으흠. 안되는걸 어떡해요. 엉엉. 다 때려치우고
지방덩어리들을 몸에 주렁주렁 달고도 여성적 매력이 풀풀 풍겨져 나오는 룩을 열심히 모색해보고 있습니다만.
음. 으흠. 무준씨, 어떻게 안될까요? 저 대신 좀 찾아 만들어주시면. 아하하.
저 같은 경우 그리 심각한 고민이 없어 문제입니다만. 매력 넘치는 섹쉬한 남자라면 손부터 잡아보고, 입술도 한 번 노려보고, 일단 달려들거든요. 조심하세요 무준씨.
장난입니다. 에이, 설마요. 문란한 남자는 아니에요. 하핫 2008-12-17
14:37:32
상병 김무준
잘생긴 남정네라면 죽빵을 날려주고 어울리는 짝을 찾아줄지도 모르지만, 덜렁거리는 살을 들고 달려든다면 칼 꺼낼지도 모릅니다. 비만이나, 살찐 사람을 혐오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몸이 마음에 들지 않는데도 게을러서 살을 빼지 않는 인간이나,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인간은 혐오하거든요. 뭐 살찐 자신이라도 만족하고 사랑한다면야. 그건 지 마음이고.
저는 그래서 자기 관리를 착실히 하는 사람을 위해 옷을 만들 겁니다. 자기관리는 멋을 떠나서 옷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거든요. 특대 사이즈라도, 만들어드릴 용의는 없습니다. 2008-12-17
14:52:34
상병 김용준
와.우! 요셉님 후후. 이렇게 적나라하게 글을 쓰시다니 과단성과 정직성 존경스럽습니다.
솔직히 제가 요셉님 같으면 제 얘기는 못 했을거에요. 일단 저는 동성에게 매력이 안끌려서요. 후후. 근데 전 친근의 표시로 뽀뽀도하고 엉덩이도 치고 이정도?쯤은 하네요. 설마 동성애자는 아니겠죠? 히히. 2008-12-17
15:03:13
상병 김요셉
에이 설마 특대사이즈...아무리 지금 살이 많이 불었거니와, 특소까지는 무리더라도 그냥 표준 정도는 소화할 수 있다구요. 어느 정도는 간신히 유지하고 있으니까.
더불어, 옷에 대한 예의에 '옷빨 잘 받는 몸을 위한 착실하고 투철한 자기관리'라는 것이 반드시 포함되는 것이여야 한다면,
그닥 예의바른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는군요.
긴말없이 딱 자르자면, 아무리 옷을 사랑한다 한들. 패션을 사랑한다 한들. 패션은 수단에 불과합니다 저에겐. 패션 이전에 스타일이 있으며, 패션은 스타일의 시각적 구현을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할 뿐입니다. 옷을 입는 것이 사상을 입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평소 그리 잘난 옷들을 입고 다니는 것도 아니니
기껏 수단에 불과합니다. 예, 그러니, 기껏 수단정도에 저를 끼워맞추고 싶지는 않습니다.
예쁜 옷 하나 입자시고 저 자신을 칼같이 재단하는건,
전혀. 제 스타일이 아니로군요. 예의바르지 못한 사람이라서요. 2008-12-17
15:19:28
상병 김무준
그건 개개인의 차이니까 누구에게도 강요한 적 없습니다. 단, 주관은 그렇다는 이야기죠. 예의라고 생각한다고 했지, 이것이 예의다! 라고 말 한 적은 없습니다. 항상 도망갈 구멍은 만들어 놓는 깽깽이니까요.
누군가에게는 수단이, 누군가에게는 전부가 될 수 있죠. 양성애자가 있고, 이성애자가 있고, 동성애자가 있고, 무성애자가 있듯이. 만들어달라 말씀하시기에 못한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깔깔깔.
그렇다고 요셉씨가 예의없는 사람이라고 생각지는 않아요. 그건 옷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할 뿐이지, 사람에 대한 예의라고는 생각지 않는걸요? 2008-12-17
15:28:13
상병 김요셉
사실 예의없음을 꽤 그럴듯한 스타일로 생각하는 예의없는 사람이라서요.
그래서 옷도 꽤나 예의없게 입는걸 좋아하는 편이지요. 히힛
물론 '예의'를 어떻게 정의하느냐, 그 범주에 무엇까지를 포함시키고 무엇까지를 제외시키느냐를 말하자면 꽤나 까다로운 변명이 필요할 법 하니
그건 생략하기로 해요.
예의, 전형적인 전라도민의 이중모음 발음을 구사하는 저로서는 말하기가 상당히 까다롭네요. 힘들어요. 어느 정도 날이 서 있는 말이라면, 속에 담긴 의미를 떠나 생김새나 발음되어지는 소리만으로도 그 까탈스러움이 드러나는 법이니까요. 예의라는 단어, 소리까지도 역시나, 마음에 안드는데요. 우훗. 2008-12-17
15:39:36
상병 김무준
사실 깽깽이도 굉장히 예의없는 부류에 속하기는 합니다. 옷과 여인네에 대해서만 예의를 차리는거죠. 2008-12-17
15:42:56
상병 김요셉
제 경우, '글'에 대한 예의. 는 그나마 열심히 차리는 듯. 먼저 말했다시피 글이라는게 워낙 까탈스러워야 말이죠. 까딱하면 의도 했던 칼날에 의도하지 않았던 칼날까지 들어가버리니까요.
아 용준씨! 그러시면 부끄러워져요. '적나라'하다니, 자꾸 그쪽으로만 생각하지 말아주세요오. 그리고, 실제로 남자와 사귀어 본 적은 없으니 그래도 보편적으론 이성애자에 속한다니까요 저도. 예상치 못하게 변명만 자꾸 늘어놓게 되니, 에이, 이 글 괜히썼다. 윽. 2008-12-17
16:12:46
병장 이동석
이런, 잠깐 망이 나갔었답니다. 밖에서 제초하다가 선을 잘라먹었다는군요. (이건 뭐...)
어쨌거나, 역시 요셉님이 남우-였을때부터 뭔가 포오스가 솔솔 풍겼습니다. 그리고 지역주의는 아닙니다만, 집에가신 현승님, 기민님에 지금 두환님에 요셉님까지
역시 전라도의 힘(?)
그것보다 예전에 한겨레21의 인기 칼럼이었던, 김소희의 오마이섹스- 중에, 당신은 얼마만큼 동성애자-고 얼마만큼 이성애자-인지에 관한 이야기가 생각나는군요.
3%내외의 극단적인(?) 이성애자와 동성애자가 존재하고, 나머지의 범주는 양성애자-로 분류하더군요.
그리고 동성애자 중에는 의외로 조낸 마초-들도 많아요.
뭐 이런 이야기 하자는건 아니고, 의외로 편견이 너무 많아요. 뭐 전근대적인게 한 두가지도 아닌 사회이긴 하지만, 특히나 이런 쪽에서는 그렇죠.
전 처음엔 요셉님 글 얼핏보곤, 정치적 올바름을 표현하기 위한 일종의 위장 커밍아웃-용어가 기억은 안나지만-이 아닌가도 생각했었답니다.
으, 시간이 없네요. 좀 있다 이야기 풀어보죠. 허허. 이렇게 표현하면 죄송하지만, 신선한- 소재(?)라 너무 구미가 당겨요. 2008-12-17
17:09:42
상병 이지훈
으음 거의 고민해보지 않았던 문제네요..
조금 눈이 뜨이는 느낌이랄까요?
소통, 소통의 필요성을 어느정도(?) 알고 있고 입으로 말하고 글로 쓰면서도 정작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는 뭔가 저도 '금기'라는 느낌을 어렴풋이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고마워요 좋은 글...히히 추천꾹 2008-12-17
21:00:31
병장 김동욱
주기적으로 하는 설문조사에서 이런 문항이 있었어요.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동성과의 접촉으로 인해 성적자극이나 즐거움을 얻을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전 아무렇지 않게 당연히, 그렇다에 마킹을 했는데 이후에 제 답안지를 보던 주위 사람들이 이거 뭐냐면서 웃더라구요. 저도 그냥 웃어넘겼는데 곰곰 생각해보니까 그게 왜 웃긴 일이 되어야 하나 싶더라구요. 이성은 물론이거니와 동성, 동물, 곤충 등과의 (물론 농밀한 정도는 아니지만) 스킨쉽을 즐기며, 인간은 상대가 누구든지간에 하루에 적어도 여덟번은 포옹해야 정신적 안정을 얻는다는 이론을 가슴깊이 새기고 있는 저에겐 당연한 일이었는데.흑.
개인적 취향에 대한 이야기는 대충 수습하고 (땀), 고진의 말이 멋드러지게 와닿네요. 이어지는 정여울씨의 말도 그렇고. '사랑한다고 말할때는 자신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는 글귀가 이런 식으로 이해될 수 있구나 싶습니다. 그렇게 나의 내부에 무수한 다른 '나'를 대하는 일이 결국에는 '타자'를 향한 윤리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나 안에 있는 무수히 많은 나를 억압하고 부정하며 어떤 하나의 정체성만을 강요하는 일 자체가 어쩌면 다른 존재와의 소통을 힘들게하는 요소가 되지 않나라는 생각도 듭니다. 다양한 나를 끌어안을 수 있는 '긍정'. 여기서 또 니체가 등장할 여지가 있는 건지도 모르겠군요.
따지고 보면, 정말 간단한 일인 것 같은데 상황이 요런 상태인 걸보면.
요셉님의 글에서 늘 김연수적인 뭔가가 풍겨나온다고 느낀다면 완전히 오버하는건가요? 이해해주세요. 그게 저희 사이의 윤리이지 않습니까. 흐흐. 요셉님만큼은 아니지만 그를 좋아하는 1인으로서 이런 글 매우 상큼하군요.
가지로. 2008-12-17
22:49:21
병장 이동석
그리고 전 따-먹었다라는 표현을 경멸합니다.
그래서 가지로-가야합니다. 이 글에 대해선 좀 더 노가리가 필요해요.
노가리 노가리 원츄- 2008-12-18
09:28:33
상병 김요셉
동욱님, 제 글에서 김연수적인 뭔가가 풍겨나온다 하시면야, 저에게 그보다 더한 영광은 없지요. 흐흐흐
최초에는 정치적 올바름을 위한 위장 커밍아웃에서 가까웠지요. 지금에서는 이게 위장인지 변장인지 변신인지 헷갈릴 정도가 되어버렸지만.
3%내외의 극단적인 동성애적 정체성을 가진 친구가 두어명 있습니다. 그 친구들이 가지는 부당한 입지가 안타까웠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친구들이 내보이는 깜찍발랄한 용기에 찬사를 보내며 시작한 커밍아웃이지요.
'타인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무려 '윤리'라고 까지 표현하고, 그것이 필요하다 주장함 역시 정치적 올바름을 위함입니다.
정치 역시 관계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며 윤리적 관계관을 가진 개인들 혹은 공동체라면, 제 식탁에 오르는 고기반찬을 위해서라면 밤새 광장에서 촛불을 밝히면서도 남에 입에 들어가는 '고작' 라면 한 끼를 위해서라는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을 리 없지요. 2008-12-18
10:21:26
상병 김무준
깽깽이는 별로 윤리적이지 못한지라 고기반찬을 위해 촛불을 밝혀본 적도 없답니다. 먹고 죽으면? 재수 없는거지 뭐. 이정도랄까. 2008-12-18
12: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