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글-내글내생각] ‘청춘의 종언’ —2008년, 불안한 이십대를 위한 소고(小考) (1)  
병장 고동기   2008-12-12 17:14:27, 조회: 233, 추천:1 

‘청춘의 종언’ —2008년, 불안한 이십대를 위한 소고(小考)의 전문을 올립니다. 출처는 문학동네 2008 겨울호입니다. 한글워드프로세서로 18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입니다. 9개의 소제목이 있어, 3개씩 나눠 3편으로 올립니다. 

(예전에 김원택 병장이 올려준 ‘역사상 가장 경이로운 박쥐, 배트맨 연대기’에 대한 보답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하는 좋은 글, 같이 읽었으면 합니다.) 




│작가의 눈 — 기획좌담│

‘청춘의 종언’
—2008년, 불안한 이십대를 위한 소고(小考)

우석훈・백가흠・김현진・김홍중(사회)


김홍중 네, 좌담을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이렇게 여러 선생님들을 만나 뵙게 되어 반갑고, 바쁘신 와중에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사실 글을 통해 익숙해진 분들이어서 그런지, 첫 만남임에도 불구하고 낯설지 않아서 좋습니다. 『문학동네』이번 호의 특집 역시 ‘이십대 문학’이 그 주제입니다. 이에 맞추어, 우리 좌담의 주제는 이십대 문학의 사회적 실체라 할 수 있는 현재 한국사회의 이십대에 대한 진단과 성찰로 설정해보았습니다. 오늘 모신 분들의 세대적 배치가 그런 의미에서 보면 상당히 적절한 것 같습니다. 이십대, 삼십대, 사십대가 모두 모였습니다. 다양한 세대적 시점에서 거리를 두고 우리 이십대의 삶을 이야기할 수 있는 좋은 구도가 예상됩니다.

1. 근황과 관심

김홍중 구체적인 논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저를 포함한 독자들이 최근에 여러분이 하고 계시는 작업을 궁금해 하실 것 같은데, 각자 근황을 우선 소개하는 것이 어떨까 싶네요. 저부터 할까요? 최근에 제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거대서사의 조락 이후에 소위 인간이라는 것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가, 이런 문제입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나타는 인간의 해체, 혹은 인간성의 변형이라 할 수 있겠죠. 저는 이 과정을 삶의 속물화와 동물화 경향이라고 보고 주목하고 있습니다. 근대적 인간, 가치, 지향의 이런 해체과정을 비판적으로 저지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더 심화시키고 확장시켜서 그끝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해야 하는지 그런 문제들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제 전공이 사회학인데, 아시다시피, 사회학은 그 동안 행복보다는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더 강조했거든요. 좀 섣부른 말이긴 하지만, 이제 행복이라는 가치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떻게 행복하게 살 것인가? 어떻게 행복이란 단어를 그 세속적 오염에서 구제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행복이 죄책감이나 수치와 결부되지 않는 건강한 지향으로 가능할 것인가? 이런 문제로 사회학적 탐구를 해보고 싶다고나 할까요. 행복을 찾아보자 뭐 이런거죠. (웃음) 제 근황은 간략하게 이 정도로 하지요.
백가흠 저도 비슷해요. 요즘 하고 있는 작업도 비슷한 테마고요. 삼 년째 붙잡고 있는 히피에 관한 장편이 있는데 가을, 겨울엔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이게 오래 잡고 있다 보니 너무 자주자주 생각도 바뀌고 작품 안 인물들의 사회적인 포지션에 너무 많은 변화들이 있어서 계속 마무리를 못 짓고 있었거든요. 주인공은 IMF 이후, 자의든 타의든, 이 사회에서 밀려나간 사람들이고요. 결국 반도를 떠나 노마드, 유토피아 같은 지대를 찾아 이국을 떠도는 사람들의 이야기예요. 결국 히피죠. 그런데 저도 결말을 행복함으로 끝을 맺어야 되나……(웃음) 아니면 이 사람들을 살려야 되나, 어떻게 더 우주 밖으로 내몰아야 되나 하는 고민들을 하고 있어요.
우석훈 저는 쓰던 거 계속 쓰는 중인데요. 한국경제 시리즈는 『괴물의 탄생』으로 끝이 났고요. 원래 세 개의 시리즈를 생각했었는데, 두 번째가 생태 경제학 시리즈예요. 그 첫 번째 책이 끝나가고, 세 번째 시리즈는, 저는 ‘국가의 기본’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이걸 시사IN에 일 년간 연재를 하게 되면서 당분간 두 번째 시리즈와 세 번째 시리즈가 동시에 진행되는 바람에 상당히 심란합니다. 큰 질문 몇 개를 동시에 던지고 있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정신분열증이 오기 직전입니다. 시리즈가 재밌기는 해요. 그러나 두 개를 같이 한 적은 없는데 같이 진행을 하니까…… 잠깐 만화시장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또 잠깐 농업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그런 식입니다.
김현진 저는 회사 때려치우고 놀려고 마음먹었는데 어쩌다 비정규 사업장에 끼어들어서 단식에 스크럼 짰다가 난리치고, 그런 걸 하면서 여기저기 글 팔아먹고 살았는데, 약간의 상도덕 같은 게 올해 생겼어요. 인터넷 보고 끼적거리는 거 하지 말고 직접 가서 보자, 하고 갔다가 호된 꼴도 당해보고 그러고 있고요. (웃음) 그래서 지금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사창작과에서 석사공부 하고 있는데 공부는 하는 건지 뭔지…… 그리고 이십대 여자들의 연애에 대한 책과 ‘십대를 위한 88만원 세대’라는 단해온을 준비하고 있어요. 근데 비정규직 사업장 때문에 정규직 노동자를 힘들게 하고 있다고…… 편집자는 사람도 아니냐고 엄청 욕을 먹고 있죠. (웃음)

2. 이십대, 그들은 누구인가?

김홍중 각자의 근황을 듣는 가운데 벌써 뭔가 오늘의 논의 주제가 생성되어 움직이기 시작하는 듯합니다. 우선 제기하고 싶은 첫 번째 주제는 한국의 이십대가 왜 담론의 주제가 되는가, 왜 우리는 지금 이십대에 대해 논의하고자 하는가, 돌려 말해서 한국의 이십대가 왜 성찰되어야 하는 대상인가라는 문제입니다. 사실 요사이 많은 사람들이 이십대에 대해서 말을 합니다. 이 말들이 모여서 하나의 담론구성체를 만들고 있을 정도인데요, 여기 계신 우석훈 선생님의 『88만원 세대』가 그처럼 대단한 사회적 파장을 만들어낼 수 있기 위해서는, 한국사회가 이미 이십대의 삶에 대한 나름의 문제의식을 형성하고 있었어야 할 것입니다. 그 문제의식이라는 것이 아마도 지금의 이십대가 예전의 이십대들과는 좀 다르다는 느낌이 아닐까 싶습니다. 발터 벤야민의 에세이 중에 ‘청춘의 형이상학’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어요. 흥미로운 명명인 것이, 청춘이란 모름지기 4․19세대의 젊음이건 386세대의 젊음이건, 역사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질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는 거지요. 그것은 대게 반항, 도발, 상상력, 순수, 열정 등의 낭만주의적 특질들이 아닙니까? 사실 그런 생각이 형성된 것이 낭만주의 이후라면, 적어도 근대적 의미의 청춘에는 이처럼 형이상학화할 수 있는 공통분모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십대가 이것을 상실했다는 사회적 직감이 공유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요새 젊은이들은, 노회하기도 하고, 영악하기도 하고, 젊은 고유의 패기나 무모함이 부족해 보이기도 한다는 거지요. 말하지만, 이십대와 청춘이 최초로 분리되는 현상이 목격된다고 할까요? 가령 웰빙 시대가 되면서, 이십대로부터 분리되어 부유하는 청춘을 이제 부유한 칠십대가 전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젊게 사는 노인들은 새로운 청춘을 소비하고, 구가합니다. 청춘이 이처럼 떠다니는 빈 기표가 되어 다른 세대와 결합하는 시대가 오니 이십대는 정작 더 이상 젊지 않더라는 거죠. 그리고 더 이상 젊지 않은 이십대를 사회는 불안하게 혹은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의 이십대, 그들은 누구인가요? 그들의 어떤 특성들이 그들에 대한 사회적 담론을 생산하게 하는 걸까요? 이런 질문들을 좀더 성찰적으로 던지지 않을 수 없는 시점이 온 것 같습니다.
우석훈 제가 먼저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은데요. 제가 여러 사람들을 만나 보기도 하고 그러는데, 그냥 통계학적인 특징을 놓고 보자면 특징이 없다는 게 특징입니다. 변이로 치면 그 폭이 굉장히 넓어서 고전적인 좌우로 하자면 극좌부터 극우까지 다 있거든요. 아나키즘도 있고 냉소도 있고…… 여하간 제가 비교 대상으로 삼았던 외국의 여러 세대나 우리나라 세대를 보자면, 그 특징들이 어떤 사건을 통해 드러날 수도 있고 감성으로 표현될 수도 있는데요. 이를테면 68세대 같으면 한때는 잘했지만 변했다든가 하는,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쉽게 동의할 수 있는 몇 가지가 추출되는데, 이를 컨버전스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한국의 이십대는 수렴점을 찾기가 어렵거든요. 그러니까 이를테면 ‘너네들이 늙은 거냐’ 물어보면 ‘아냐, 안 늙은 아이들도 이렇게 많아’ 대답하고, ‘너네들이 영악한 거냐’ 물어보면 전혀 영악하지 않고 귀농하겠다는 집단도 있고. 그러면 얘네들이 아주 부자냐 하면 한쪽에는 진짜 가난한 아이들도 있고. 이렇게 놓고 보니까 통계학적으로는 수렴점이 안 나오거든요. 뭐라고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데 윗세대들, 삽십대, 사십대, 오십대가 이십대를 어떻게 보는가를 보니까 다 적대적으로 보는 거예요. 자기네들은 그렇게 생각을 안했는데 윗세대들은 다 그렇게 생각하고. 주로 386에 해당하는 사십대 초반이나 이런 사람들은 흔히 얘기하는 것처럼 용기도 없고 나약하다는 걸 많이 지적을 하고요. 오십대에서 육십대, 유신세대라고 불렸던 사람들은 따옴표를 치고 얘기하면 ‘싸,가지’가 없다고 하거든요. 예절교육도 안 받은 것 같고, 자기밖에 모르는 것 같고. 그러니까 뭔가 덩어리가 하나가 있는데, 덩어리라는 말 자체가 일본의 단카이 세대에서 나오는 말이거든요. 그런데 단카이는 사실은 68을 거쳤던 건데, 그중에 엘리트들을 일본은 잘라버린 거잖아요. 근데 사실 여기는 거세당한 것도 아니에요. 왠하면 일본 같은 경우 정치적 타압을 받거나 해서 북한게 가거나 시골로 낙향하고 그랬잖아요. 그런 게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하나로 덩어리 져 있는데, 그게 제가 첫 번째로 봤던 현상이거든요. 그러니까 뭐라고 이름을 붙이거나 규정을 하려고 해도 그 규정이 십 퍼센트도 설명을 못하는 거예요.
김현진 다들 적대적으로 보려고 한다는 점에 공감이 가는데요. 그 특징 없음에 모든 세대가 자기 욕망을 다 투사해서 보는 것 같아요. 이를테면 저도 삼 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면서 보니까 이십대 여자가 직장생활을 하면, 이 여자아이가 아주 발랄해서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어주었으면 좋겠고, 그렇지만 기존에 있었던 걸 흔들 만큼은 아니었으면 좋겠고, 섹시했으면 좋겠고, 하지만 정숙했으면 좋겠고, 그러면서도 또 진취적이었으면 좋겠고, 온갖 욕망을 다 투사해서 보는 거야. 내 맘에 들 만큼만 반항적이었으면 좋겠고, 앞으로 잘나가줬으면 좋겠지만 내 비위는 안 상하게 했으면 좋겠고. 거기에서 조금만 마음 상하게 하면 발랑 까졌다고 그러고, 그렇다고 또 조용히 있으면 나약한 새끼라고 하고. 그래서 정작 이십대는 조용히 입 다물고 있고 다른 세대가 얘는 이런 것 같아, 저런 것 같아 하는데, 그게 특징 없음에 다들 투사해서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우석훈 다르지 않은데요. 저 또래의 세대와 비교해서 보면 욕망 자체가 훨씬 비대해진 것 같아요. 욕망이 비대해지면 개인주의도 훨씬 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있어왔던 집단화, 거기에 끼고 싶은 욕망도 한 갈래이고요. 근데 그게 사회적이거나 정치적, 역사적인 어떤 것들에서는 굉장히 자유로워진 것 같아요. 그것보다는 이슈화되고 인터넷을 통해서 이벤트화된 것에 많이 몰려다니고.
김현진 대한민국의 일 퍼센트를 뺀 나머지 구십구 퍼센트의 이십대들은 가방 끈이나 계급에 상관없이, 좌파 우파에 상관없이 겁에 질려 있어요. 이것이 아이들을 관통하는 딱 하나의 코드인 것 같아요. 이를테면 비정규직 사업장 같은데 가보면 진보신당이나 민노당 애들 같은 경우에는 이러다가 영원히 나가떨어지겠지 하는 식의 공포감에 질려있고, 그렇다고 토익점수가 구백점이 넘고 확실하게 대기업에 갈 수 있는 애들은 겁에 안 질려있느냐면, 나보다 잘난 놈이 있겠지, 나보다 시집 잘 가는 애가 있을 거야, 나보다 더 예쁜 여자를 차지할 수 있는 잘난 놈이 있겠지. 이런 식의 겁에 질려 있는 것 같은데, 그게 사실은 부모 세대에게 계속 주입을 받은 욕망이거든요. 실제로 자기 욕망이 없고 아이들을 계속 초조하게 만드니까……
우석훈 그 얘기를 조금 보충하면, 최근에 김연아 박태환 같은 스타들이 나오면서 이십대들이 열광을 했거든요. 거기에는 쇼비니즘도 일정 부분 있는데, 사실 인간으로 치면 거의 완벽한 인간들이잖아요. 거대한 스폰서를 받은 것도 아니고 국가가 잘 밀어준 것도 아니고. 이를테면 아름답고 지적이고 젠틀하고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걸 다 갖고 있는 상징 같은 게 된 건데, 거기에 박수치다 보니까 저런 애들만 살아남는 게 아니냐 하는 걸 최근데 느끼는 것 같아요. 이십대 내에서는 상당히 위에 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자기는 그만 못하고. 그리고 아까 김현진씨가 말한 상위 일 퍼센트도 불안하다고 하는 게, 저 정도 돼야 사실 절대경쟁력인데 하고 자기를 돌아다보면…… 그러니까 일종의 뫼비우스의 띠처럼 아무도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되는 거죠.
김현진 그러니까 엄청나게 힘이 센 아빠가 있지 않은 한…… 이를테면 한화 김승연 회장이나 MB의 자식이다 하면 걱정이 없겠죠. 근데 웃긴게 삼성딸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돈과 미모와 성공을 가진 최진실도 자살을 했고,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는 강퍅한 시대인 거죠,
백가흠 그대로 어쨌든 계급적인 욕망이라는 건 절대적인 게 아니니까 아픙로 더 심화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상대가 있어야지만 욕망할 수 있는 거니까.

3. 97년 체제와 이십대의 형성

김홍중 지금 말씀들을 들어보니 그 특징 없음, 혹은 다면성, 혹은 해면체같은 이십대의 특징들이 어떤 사회적인 조건에서 생산됐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세대사회학에서 많이 인용되는 아랍 속담에 ‘사람은 자기 부모를 닮지 않고 자기가 살아간 시대를 닮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시대와 세대의 이런 필연적 연관을 고려해보면, 우리의 이십대가 다른 세대들의 욕망이나 환상에 투사되는 스크린으로 기능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극도의 불안이나 공포에 짓눌린 상태로 존재하는 묘한 상황이 시작된 것은 아마도 97년 외환위기 이후가 아닐까요? 어쩌면 너무 쉬운 연대기적 절단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의해 견인된 97년 체제와 이십대의 관계는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요?
우석훈 제가 쉽게는 경쟁이 내면화했다고 표현했는데요. 사람이 원래 진 것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 속성이 있기는 한 것 같습니다만. ‘졌다’가 아니라 ‘안 됐다’라고 생각을 하거나…… 경제적으로 빼앗겼어도 그걸 인정을 잘 안하게 되는 게 인간의 본성이잖아요. 분명히 게임에서 자기가 졌어도…… 그런데 지금 이십대가 내면화하는 것은 진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심리적 기저 같은 거 아닐까 싶네요. 어떻게 보면 사람들이 ‘쿨’하다고 얘기하는 것의 이면적 속성인데, 그러다보니까 자기가 잘못된 걸 운명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자기가 노력을 덜 해서라고 보는 거죠. 그게 완벽하게 내면화된 건데, 만약에 게임의 룰이 정말 공정해서 누구에게나 똑같은 출발점이 주어졌다 해도 ‘사실은 아냐. 쟤는 부자였어, 쟤는 빽이 있었어’라고 생각하게 되고, 또 사실 세상은 그런 거거든요. 97년 이후에도 게임은 정당하지 않았어요. 특히 노동과정에서는 리크루먼트라는 게 더 정당하지 않죠. 그걸 일종의 승자독식 게임으로 내면화시켰는데, 이 속에서 세상은 전혀 형평성이 보장되지 않지요. 그러면 게임의 룰 자체에 대해서 물어봐야 하는 것인데, 지금의 이십대는 게임 자체에는 문제가 없고,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김홍중 절차적인 합리성이라고 해야 되나? 이런 것에 대한 훈련이 지금 이십대는 어느 정도 되어 있다는 거죠?
우석훈 너무 잘되어 있어요. 혁명이라는 것도 사실은 그렇게 안 하기로 다 약속해놓고서 어느 날 열받는다고…… (일동 웃음) 그러니까 굉장히 불합리한 거거든요. 프랑스혁명 때 마리 앙투아네트는 만장일치로 사형이 결정됐고, 루이16세는 한 표 차이로 사형이 결정됐어요. 그래서 다 죽였는데, 지금 제가 보기에는 혁명 때 죽이려고 끌어다 놓고서 자기들끼리 손드는 게 무슨 말장난인가 싶어요. 근데 이십대들과 그 얘기를 해보면 그건 재판한 거 아니냐, 혁명재판이 뭐 그런 게 있냐, 그런 식이예요. 그렇게 말하자면 큰 혁명이나 작은 혁명이나 난 같은 것들은 그 자체가 상당히 불합리한 거거든요. 동학란도 그렇지만 왜 군수한테 가서 따지냐는 거지. 그 사람은 주는 대로 받아서 집행한 건데. 사실 왕한테 가서 해야지. 그런데 그게 너무 내면화가 잘 되어 있으니까 숨어 있는 부당함 같은 걸 거부할 수 없는 약점이 생긴 것 같아요.
김현진 사실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데요. 이건 이십대 문제가 절대 아니에요. “부자 되세요”가 97년 이후 한국사회를 사로잡았잖아요? 이것의 반작용이 십 년 후인 이제야 나타나기 시작하는구나. 그러니까 부자가 될 수 없는 사람들, 그중에서 제일 최전선에 서 있는 게 80년대생 이십대들이구나, 그런 문제인 것 같아요. 사실 저희 세대는 IMF를 직접적으로 겪지는 않았거든요. 그 이후에 대학을 갔고 그때는 중고등학생이었으니까. 그 대신에 한 발짝 떨어져서 본거죠. 그때는 실제적으로 돈을 벌 아무런 경제력도 없었으니까. 그러면서 선생님이 말씀하신대로 사람위에 사람 있고, 사람 밑에 사람 있구나 하는 걸 완전히 내면화하기 시작한 첫 세대인 것 같아요. 그러면서 새로운 계급주의가 생겨서 ‘쟤는 저렇게 생겨먹었구나’ ‘이 거대한 게임의 질서를 절대 깨뜨릴 수 없구나’ 하는 걸 철저하게 내면화하기 시작한, 아까 선생님이 치사하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자기 탓 하는 게 너무 습관이 되어서 ‘내가 게을러서 그렇지 뭐, 내가 열심히 안 한 때문이야’ 그런 식으로 기능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백가흠 저는 그게 운명이나 자기 내면화라기보다는 일종의 사회적인 계급의식이 생긴 것 같이 생각돼요. 오랜 시간 우리가 믿어왔던 계급의식과는 좀 다른 것 같아요. 분명히 봉건적인 사회는 끝이 났고, 자본가와 상대적인 부류의 계급층이 아니라, 굉장히 세분화되고 상대적인 계급의 형성 말이에요. 저는 어떻게 보면 지금의 젊은 세대는 포기나 절망 위에 선 세대라고 생각하거든요. 십여 년 전 저의 이십대 얘기를 해보면, IMF 시절 저희 집에 대학생이 세 명이었어요. 저부터 시작해서 동생 둘이 있었는데, 저를 포함해서 둘은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고 한 명은 집에서 다녔는데요. 저희 아버지가 안정된 월급을 받는 선생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 거의 가정경제가 무너지다시피 했어요. 잘살려고 한 것도 아니고 남들보다 경쟁에서 이기려고 했던 것도 아니었는데…… 그냥 살려고만 한 것뿐인데 완전히 무너졌어요. 그런 절망 위에서 쳐다보니까 어떤 계급, 옛날에 우리가 책에서 봤던 것보다도 더 현실적으로 계급을 인정하게 되더라고요. 어쨌든 절대로 나는 저쪽으로 갈 수 없겠구나, 뭐 그런 거. 그러다보니 나중에는 미래에 대한 직업의식도 그 상대적인 계급에 따라서 생긴 것 같고요. 지금도 다르지 않다고 봐요. 어떻게 보면 그때보다 더욱 절망적이지요. 그때만 해도 비정규직 같은 말은 없었거든요. 살려고만 해도 무너지는 게 아니라 사는 것 자체가 무너짐이니까.
김홍중 어떻게 보면 이십대는 그 시기를 가족 속에서, 가족이라는 헤드기어를 쓴 채로 견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회경제적 데미지보다는 심리적 데미지를 이십대가 크게 입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아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IMF 위기 이후 언젠가 한참 동안 TV버라이어티쇼에서는 이십대 연예인들이 롤러코스터나 자이로드롭을 타고 공포에 질려 고속으로 낙하하는 얼굴들을 카메라로 자주 비추어주곤 했어요. 기압에 일그러지고 높이와 속데애 대한 공포에 질린 얼굴들을 말이죠. 심지어는 그런 상황에서 자장면을 먹게 하는 그로테스크한 과업을 주기도 했고요. 그냥 사는 것조차 매우 어려운 과입이 된 총체적 서바이벌게임 속에서 87년 체제의 한국사회가 일종의 재난공동체였다면, TV화면에 등장하는 저런 장면들이 어쩌면 이십대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표상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석훈 좌파, 우파를 막론하고 일종의 배신감인 것 같은데요. 사실은 조선일보를 포함한…… 조선일보가 특히 그랬죠. 아주 세밀하게, 그때 십대들을 겨냥해 경제교육이나 여러 가지 면에서 386과 달리 자기네 편으로 가져가려고 했었거든요. 그러면 취직도 다 할 수 있게 해줘야 할 것 아니에요. (일동 웃음) 그런 것 아니에요? 그렇게 해서 그 이데올로기에 충실하게 왔으면 밥은 먹어야 하는데, 여기에 왔더니 우파들은 스펙을 내놓으라고 하는 거예요. 언제 십대 때 스펙이 중요하다고 말을 해줬냐? 하는 거거든요. 그러면 그 동안에 좌파들은 무엇을 했느냐 하면, 좌파도 파가 여러 개 있는데, 이들 대부분이 이십대를 그냥 머릿수로만 생각한 것 같아요. 다 묶어서 자기네 추앙세력으로 만들려고만 하지 독립된 주체로 탄생할 수 있다고 한 번도 안했거든요. 정당에게도 마찬가지로 대학의 학생위원회라는 건 행동대고 그야말로 값싸게 부려먹을 수 있는 노동력 이상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구석에서 이십대를 어렵게 했는데, 결국 남은 게 딱 지금 대기업과 공무원이에요. 공무원은 그래도 평생직장을 주고 대기업은 월급을 주거든요. 그러니까 우파적 탐미주의도 꽝이고 좌파의 꿈과 이상과 이념도 다 배신했는데, 역설적으로 대기업과 공무원만 우리를 배신하지 않았다는 게 되는 거죠. 그런데 이제 대기업도 슬슬 배신하기……
김현진 벌써 배신하고 있죠. 『88만원 세대』를 읽을 때 저도 회사를 다니고 있었거든요. 그때 선생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건 아니었지만 책을 읽고서 술을 마시면서 통곡을 하고 그랬는데, 속에 좌절감 같은 게 부풀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콕콕 짚어주는 게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제가 어느 지면에 쓴 적도 있지만, ‘명문대를 나온 잘 배운 386 남성이 우리를 까지 않은 건 태어나서 처음이야’ 하는 감격 같은 게 있었죠. 만날 너희는 발랑 까지고 일도 못하고 그런 얘기만 듣다가 ‘얘들아, 너네 때문이 아냐’ 이런 얘기를 처음 들은 건데요. 지금까지는 그런 좋은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는 거잖아요. 그런 건 이미 헛소리라는 걸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88만원 세대』가 파장이 컸던 것 같아요.
우석훈 이 상황을 알면 분노해야 하는데, 분노는 사실 몇 명이 같이 ‘야, 화나지?’ 그러면 ‘난다’고 해야 분노할 수 있는 거지, 길거리에서 혼자 분노하면 좀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결국 한 명씩 고립되어서 분노도 표출을 못 하니까 우울증이 생기거나 그렇거든요.
김현진 선생님이 짱돌을 들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들 힘이 없는 거예요. 돌이 어디있나? 이게 돌인지?
백가흠 돌을 찾아다고 해도 실은 그 돌을 집에서 어디에다 던져야 할지도……
우석훈 농담으로 많이 듣는 얘기인데 저한테…… (일동 웃음)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12-14 14:56)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6
12:59:42 

 

병장 이동석 
  오오- 이것은, 감사합니다. 동기님. 2008-12-12
17:18:11
 

 

병장 정병훈 
  헉- 엄청난 작업을 하셨군요. 고생했어요. 잘볼께요- 2008-12-12
18:08:52
  

 

병장 양 현 
  너무해요. 동기님 너무해요. 고동기님 너무해요. 이런걸 올려두면 도대체 어떻게 보란거죠? 하루 날새서 꼬박 보란거죠. 아녜요! 난 출력해서 볼래요! 난 출력할 수 있으니까요! 

일단, 차후 감상은 출력하고 다 보고 나서 해야죠. 음음. 2008-12-12
20:10:39
  

 

병장 이동석 
  일단 다 보긴 했는데, 역시 이건 출력해서 두고 두고 읽어볼만 한듯 합니다. 밤이 깊은 이때야말로 출력하기 적기-인데, 정말 많군요. 허허. 2008-12-13
00:45:43
 

 

병장 이동석 
  소주를 마시며 다시 보고 있습니다. 전 솔직히 <88만원 세대>를 한번도 제대로 읽어본적이 없습니다. 제가 게을러서 그렇기도 하고, 워낙에 말이 많은 책이나 매체나 뭐 그런거엔 정이 안가는 게 체질이거든요. 그러나 각종 지면들을 통해서 오히려 그 책을 읽은 사람보다 그 책에 대해 더 아는척을 할수 있게 됐다고 할까요. 

어쨌거나, 이번에 나가면 꼭 사서 봐야겠습니다. 그리고 김현진씨가 출판물에선 어떻게 말하는지도 궁금하네요. 담배 한대 피고 오겠습니다. 2008-12-13
02:28:02
 

 

병장 김태형 
  동기님 감사합니다. 

아, 문학동네 08 겨울호.. (...있으려나, 쏠랑 다 나갔겠죠?) 
20대로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네요. 
지난 설탕때 88만원 세대를 읽다가 와서 감질났는데 이렇게 묘하게 이어주실수가.. 

다시한번 감사드려요! 2008-12-13
09:07:27
  

 

상병 김무준 
  역사상 가장 경이로운 박쥐, 배트맨 연대기에 대한 보답을 깽깽이는 부족한 연재로 채워나가고 있었는데, 동기씨가 도와주시는군요. 김원택님이 볼 수 없을 것 같아 슬프지만. 

잘 읽겠습니다. 2008-12-13
09:44:15
  

 

상병 김무준 
  눈물이 흐를 것 같은 심정으로, 메마른 눈물을 탓하며, 죽어버린 심장을 살려보려 애쓰지만, 입밖으로 튀어나오는 건 격한 감정 뿐. 

슬프네요. 화가 나네요. 이 불타는 화를 어디로 돌려야할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아아. 정말. 2008-12-13
16:07:48
  

 

병장 김민규 
  "자기가 잘못된 걸 운명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자기가 노력을 덜 해서라고 보는 거죠. 그게 완벽하게 내면화된 건데 

...이를테면 비정규직 사업장 같은데 가보면 진보신당이나 민노당 애들 같은 경우에는 이러다가 영원히 나가떨어지겠지 하는 식의 공포감에 질려있고, 그렇다고 토익점수가 구백점이 넘고 확실하게 대기업에 갈 수 있는 애들은 겁에 안 질려있느냐면, 나보다 잘난 놈이 있겠지, 나보다 시집 잘 가는 애가 있을 거야, 나보다 더 예쁜 여자를 차지할 수 있는 잘난 놈이 있겠지. 이런 식의 겁에 질려 있는 것 같은데, 그게 사실은 부모 세대에게 계속 주입을 받은 욕망이거든요. 실제로 자기 욕망이 없고 아이들을 계속 초조하게 만드니까…… 

...이십대 내에서는 상당히 위에 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자기는 그만 못하고. 그리고 아까 김현진씨가 말한 상위 일 퍼센트도 불안하다고 하는 게, 저 정도 돼야 사실 절대경쟁력인데 하고 자기를 돌아다보면…… 그러니까 일종의 뫼비우스의 띠처럼 아무도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되는 거죠." 

그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는 이 시대, 룰에 대한 의문없이 노력이 절대기준이 된 지금, 어쩌면 자수성가의 부모들을 둔 세대이기에 더욱 그러하리라는 생각도 듭니다. '토익 900이 넘고 확실하게 대기업에 갈 수 있는 애들'도, '설마 취업은 되겠지' 하다가, 어-어- 하는 소리들을 주변에서 들으며 불안해할 수 밖에 없는게 현실 아니던가요. 

내년도 구인규모가 올해 28만명에서 4만명으로 줄어들리라는 한국은행의 발표를 보며 내년에 취업 안해서 다행이다. 얼마나 스펙을 만들어야 되는거지. 라며 내면화된 가치관을 번뜩이는 저를 보며 놀라고 있습니다. 세상의 룰에 대한 고민은 애초부터 잊혀있었어요. <그래도 되는 놈은 되겠지> 가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군요. 2008-12-13
17:03:12
  

 

병장 김동욱 
  가끔씩 포털싸이트의 뉴스들을 보다보면, 소위 엄친아들을 소개하는 기사들이 뜹니다. 예를 들자면, 일반고 출신으로 누가 하버드에 갔다느니 민사고의 누가 미국의 아이비리그 몇개 대학에 합격했다느니 등등. 얼마전에도 그런 뉴스를 읽다가 스크롤을 내려 슬쩍 추천댓글을 봤습니다. 

'어렸을 때 유학갔다 왔다, 에서 스크롤 내렸다'라는 답변과 '안 읽다가 (옆의 댓글을 읽고) 그 부분 찾으려고 스크롤 올렸다'라는 답변이 묘하게도 한쌍을 이루며 있더라구요. 

게임의 룰 그 자체에 대한 생각과 고민이 없다기보다는 어느정도 그것을 인지하고 있지만그것을 변화시킬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고 간주하고 만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그것이 너무 '거대한 게임의 법칙'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그것이 너무 거대하기에 '자기 탓'으로 귀결되는 패배주의 같은 것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자기 탓'으로 해버리는 게 어쩌면 '효율적'인 합리화일테니까. 이런게 위에서 나온 일종의 '새로운 계급주의' 같은거 일수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2008-12-15
23:3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