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글-내글내생각] 이중성의 긴장  
병장 최도현   2008-09-29 06:52:51, 조회: 499, 추천:2 

이름은 많은 내용을 포함한다. 무엇보다도 이름은 그 사물의 특징을 묘사할 수 있도록 상징적 의미를 내포한다. 내 이름의 한자 의미는 “한 도읍 또는 나라에서 꼭 필요한 존재, 나라를 통치하는 사람” 등으로 해석된다. 이름이 가지는 또 다른 고유한 속성 중 하나는 그 사람(또는 사물)의 정체성과 본질을 최대한 드러내는 일을 목표로 한다. 정체성은 그 사람 안에 내주indwelling하고 있는 이중성을 통해 적절히 묘사될 수 있다. 

최근 우연찮은 기회로 알게 된 소중한 사람이 한 분 있다.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versatile>이란 아이디(이름)를 사용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이 단어는 “재주가 많은, 다예한, 다능의, 융통성 있는, 다방면의”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실제로 그의 글들은 다방면으로 관심범위가 확장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나 공감을 얻을 수 있도록 겸손하고 절제된 표현으로 구성되어있다. 하지만 이 단어는 “(감정, 기질 등이) 변하기 쉬운, 변덕스러운”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물론 그는 첫 번째 뜻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이름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한 단어에 이렇게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경우는 무수히 많다.

이중적인 속성은 때론 모순적인 인상을 부여하기도 한다. 그러나 조금만 더 사물을 객관적으로 보게 된다면 이중성은 우리 삶속 도처에서 쉽게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는 이런 이중성으로부터 오는 긴장이 현실을 좀 더 사실적으로 묘사해주며, 관찰하는 사물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탄 비행기가 이륙하여 저 높은 하늘 위에 도달했을 때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우리 자신을 크게 느끼게 하는 동시에 작게도 느끼게 한다. 광활한 지평선이 펼쳐져 보일 때 지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눈앞의 풍경에 비해 스스로가 얼마나 작은지,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도 인식하게 된다. 이런 경험은 상쾌하면서도 두려운 것이다. 이중성으로부터 오는 긴장은 우리가 직접 경험할 수 없는 것을 대신 경험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일상으로부터 우리를 들어 올리는 묘사의 행위인 것이다. 그것은 바로 더 넓은 시야이다. (J.개디스, ≪역사의 풍경≫)

        사실(리얼리티)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전달해야 한다. 그러나 그 사실을 발견했을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그때와 거의 같은 생생함과 감정을 지닌 채 전할 때 가장 잘 전달되는 법이다. (E.윌슨, ≪통섭≫)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사물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선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 우리 주변의 사물을 지배하려들 때 비로소 우리는 무한한 우주에서 유한한 존재임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가 묘사하고자하는 사물은 실제 존재하는 것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제공해준다. 우리가 탄 비행기가 지면으로부터 떨어졌을 때 광활한 지평선으로부터 전해져오는 겸손과 지배감을 동시에 갖는다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상태에서 벗어난다는 뜻과 같다. 우리는 주변의 여러 인상들을 흡수하면서 우주의 중심이라는 원래 위치에서 스스로를 끌어내리게 된다.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더 큰 세계에서 자신이 상대적으로 하찮음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 눈앞의 장애물을 어렵게 넘으면 곧바로 다른 장애물이 앞에 놓여진다. 이 분야에서 만큼은 권위자가 됐다고 느끼는 바로 그 순간 당신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일들이 일어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찮음을 깨달음으로써 자아에 비로소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담아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특정시기조차 일어난 모든 것을 담을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은 실상을 ‘불분명하게’ 묘사represent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묘사의 방식은 관찰하고 있는 그 사물 자체와 놀랍게도 거의 같은 생생함과 감정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점이 역사와 예술 그리고 (비선형)과학이 갖는 공통된 특성이다. 이들은 은유나 패턴의 인식, 그리고 어떤 것이 다른 것과 ‘같다’는 인식에 의존한다. 이들은 일반적인 것과 특별한 것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역사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의 특수성과 일반화의 적절한 균형을 찾아야 하고,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묘사와 추상적인 묘사 사이를 관통해야 한다. 과학적 감각이나 예술적 상상력에서도 일반화와 특정화의 대립 또는 추상적 묘사와 있는 그대로의 묘사간의 간극이 나타난다. 현대 예술에서 추상화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으로부터 탈피하려는 시도에서 시작됐다. 인상주의, 큐비즘의 목적 중 하나는 정태적인 페인트, 캔버스, 그리고 프레임이라는 수단으로부터 움직임(모션)을 표출할 방법을 찾으려는 것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세밀한 묘사와 추상적인 묘사 사이의 긴장은 실험과학experimental science의 예에서도 드러난다.

        과학의 이상은 라플라스(Laplace) 시대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모든 지식을 운동 중에 있는 원자에 대한 완전한 지식으로 대치하는 데 있다.(p.44) (M.폴라니, “개인적 지식”, ≪지적자유와 의미≫)

        만일 우리가 어떤 한 순간에 우주 안에 있는 물체의 소립자들 간에 작용하는 힘과 동시에 모든 소립자들의 정확한 속도와 위치를 안다면 과거와 미래의 어느 날이든 같은 소립자들의 속도와 위치를 계산할 수 있다고 라플라스는 주장했다. 따라서 마음만 먹으면 앞으로 나타날 모든 것과 과거의 모든 것은 똑같이 밝혀질 것이다.(p.49) (같은 책)

우주에 대한 라플라스의 묘사는 우리의 모든 일상 경험을 무시하며 이에 관한 어떤 질문에도 대답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라플라스적인 구도의 단점은 실험 과학의 본질을 잘못 이해한 데서 기인한다. 이론과 관찰 사이의 불일치 현상이 관찰 상의 오류로 무시되어야 할지, 아니면 반대로 이론으로부터의 실제적인 편차로 인식되어야 할지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우리가 의존할 수 있는 규칙은 없다. 그리고 그러한 규칙이 있을 수도 없다. 각각의 경우에 있어서 평가는 개인적인 판단에 맡겨진다. 가장 현대적인 실험 도구들조차도 이러한 불확실성의 영향을 받는다. 이것은 한 변수의 측정이 다른 변수의 측정을 부정확하게 만드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와 같다.

이중성으로부터 오는 긴장은 문학에서도 긴밀하고 광범위하게 사용되곤 한다. 영화 <밀양>은 전도연 주연의 이창동 감독 작품이다. 영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애(전도연 분)가 홀몸으로 키운 아들이 유괴되어 살해당한다. 그는 방황하던 중 하나님을 믿게 된다. 슬픔이 행복으로 변할 때 신애는 “원수를 사랑하겠다.”고 결심하고 아들 살해범을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를 찾아간다. 그리고 범인에게 하나님을 믿어 용서했다고 말한다. 범인은 편안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나도 이미 교도소 안에서 하나님을 믿고 용서받았소. 당신이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은 내 기도에 대한 응답인 것 같소.” 신애는 충격을 받고 정신병원 신세까지 지게 된다.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또 다른 한 사람이 있다. 그와는 예전부터 이미 알고 지낸 사이인데, 영화 <밀양>의 긴장점이 그에게도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그는 군복무 중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일방적으로 헤어지자는 연락을 받았다. 그는 서운함과 아쉬움으로 그녀를 저주하며 방황하던 중 하나님이 고통을 잊게 하셨다는 것을 믿고 비로소 “그녀를 용서하겠다.”고 결심한 후, 그녀의 미래를 진심으로 축복해주기 위해 그녀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녀에게 하나님이 자신의 고통을 잊게 하셔서 당신을 용서했다고 말한다. 그녀는 편안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나도 이미 하나님을 믿고 용서를 받았어요. 그리고 지금은 사랑하는 다른 사람을 만나서 행복해요. 이렇게 된 것도 당신이 바라던 것이겠죠. 당신이 나를 용서하게 된 것은 아마 내 기도에 대한 응답인 것 같아요.” 그는 완전히 용서하였다고 확신하였으나, 그녀가 용서를 구하고 다시 그에게로 돌아오길 바랐던 마음이 너무나도 컸기에 그녀의 반응에 충격을 받는다. 

에스겔서 16장 에서는 ‘자율적’이고 ‘자급자족적’이며 ‘절대적’이 되고자 하는 인간 보편의 죄성(罪性)을 담아내기 위해 인간을 간음한 여인으로 묘사한다. 스스로가 어떤 기준으로도 평가될 수 없고 저마다 자기 나름대로의 가치체계를 따르게 되었으며, 이런 ‘자유분방한 생활'을 가지게 된 인간을 간음한 여인으로 표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전에 세운 언약을 기억하여 여자가 행한 모든 일을 용서한다.

우리가 쉽게 오해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님은 언제나 관대하고 무한한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시며 인간의 속성과는 전혀 동떨어진 존재여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아주 손쉽게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의 하나님은 아쉽게도 ‘나 이외에는 다른 어떠한 것도 섬기지 말라’고 하시는 질투의 하나님이다. 어떻게든 자율적이고자 하는 인간 행위에 대해 간음한 여인으로까지 표현하는 것을 보면 안타까움과 아쉬움의 크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예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아들을 살해한 원수를 사랑하는 것, 배신한 옛 애인을 용서하는 것, 간음한 여자를 용서atonement한다는 것은 도대체 우리에게 어떠한 예측을 가능하게 하는 것인가. 우리의 삶은 어떠한 것도 확정된 것은 없는 것이다. 기쁨이나 슬픔도 마찬가지 이다. 어느 것도 분명한 것은 없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모든 사람의 얼굴을 잘 봐두고 싶은 거야. 많은 고난을 겪은 욥도 새로 낳은 자식들(덕분에 예전의 자식들)을 잊었을까? 또 잊을 수 있었을까? 글쎄, 그것은 잊을 수 없는 일이야! 다만 해를 거듭함에 따라 어느새 슬픔이 차차 기쁨과 뒤섞이게 되어 점점 유쾌한 설움으로 바뀌어 가는 거지. 이 세상의 모든 일이 다 그렇지. 어떤 영혼이든지 때로 시험도 받고, 또 위로도 받는 거야.(p.712) (F.도스토예프스키, ≪미성년≫)

(예전의 자식들을 잃은) 슬픔은 (새로 낳은 자식들을 얻은) 기쁨으로 보상받아 “말끔히” 잊을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불분명함” 속에서 슬픔과 기쁨이 뒤범벅이 되어 어느새 유쾌한 설움으로 바뀌어 가는 것이다. 완벽하고 말끔한 것을 추구한다는 것은 더 이상 현실적인 것을 바라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불분명한 삶의 한복판을 헤쳐 나가는 우리에게 ‘용서’라는 특별한 ‘계시’는 외부로부터 일방적으로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예전에 누군가에게 호기심을 가질 것을 주문한 적이 있었다.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갖는다.”는 것은 모든 사물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라는 것이 아니라 이중성으로부터 오는 팽팽한 긴장의 끈을 놓지 말라는 뜻이었다. 어느 한 쪽으로 쏠렸다는 것은, 그리고 그것을 고체화 시켰다는 것은 이미 마음 문을 닫아버린 것과 같다. 그것은 볼 수는 있지만 ‘의도적으로’ 보지 않는 눈먼 사람인 것이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어요. 응, 알고 싶어.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주제 사라마구, ≪눈 먼 자들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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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8-12-08
20:28:49 

 

상병 양순호 
  이 글은 독서후기일까요, 아니면 최도현 병장님의 생각일까요? 
읽을때마다 많은 작품에서의 이야기가 담겨 있어서 독서후기인줄 알았답니다. 히히. 
이런 글을 볼때마다 게임 시나리오를 머릿속에 떠올리는 저는 뼈속까지 개발자인 듯 싶습니다. 좋은 글 잘 봤어요. 2008-09-30
08:14:25
  

 

상병 박경민 
  전반적인 생각을 여러 책들에게서 잘 발췌해낸거 같네요, 
핵심은 명쾌하나 풀어가는 과정이 약간은 난해한것처럼 느껴지는건 왜일까요 
저도 눈 먼 사람들 중 한명이라 그런걸까요? 
잘 읽었습니다. 2008-09-30
08:28:24
  

 

병장 이태형 
  조금 어렵지만, 잘 읽었습니다. 2008-09-30
13:18:20
  

 

상병 이우중 
  <versatile>를 '웨스트라이프'라고 읽은 순간부터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처음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런, 전 바보였군요. 

어쨌든, 우리의 삶은 어떠한 것도 확정된 것이 없다는 데에 공감이 갑니다. 
세상이란 어차피 무한한 우연의 연속이라고나 할까요. 근데 이게 무슨 말인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전 그렇게 생각해요. 요즘 부쩍 '어쨌든'이라든가 '아무튼' 같은 단어의 사용 빈도가 높아지는 것 같아요. 글에 자신이 없으니 계속 이어가기 힘들고 그렇게 되다 보니 '지금까지 말한 건 그냥 잊어 주시고 어쨌든' 하는 식이 되는 거로군요. 앞으로는 주의해야겠어요. 

어쨌든,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2008-10-01
17:28:59
  

 

병장 이동석 
  제가 뭘한거죠. 이 글 빼놓고 읽어놓고는 요새 책마을엔 좋은글이 안올라온다고 푸념이나 하고 있었군요. 2008-10-07
17:01:34
 

 

병장 이동석 
  제가 이글을 빼놓고 베스트글을 선정하다니 아쉽습니다. 

<가지로> 2008-10-07
17:19:51
 

 

병장 문두환 
  어떻게 하면 이런 글을 쓸 수 있는지 정말. 궁금하네요. 뒤늦게 몇 번이나 읽어봤지만 보면 볼 수록 감탄하게 되는군요. 저도 가지로, 외칩니다. 2008-10-17
09:24:14
  

 

상병 김민규 
  이런 좋은 글이 묻히기는 좀 아깝지요 
가지로 가자구요 2008-10-17
10:28:02
  

 

병장 이현승 
  조금 어렵게 설명되있는 글인것 같아 시간날때 읽으려 했는데 

이런 글일 줄이야. 정말 잘 읽었습니다. 2008-10-27
13:16:40
  

 

일병 조민석 
  어렵게 느껴지던 글이 영화<밀양>을 예로 드는 부분에서 와닿았어요 
용서하기 위해 찾아갔지만 이미 용서받았다며 평화로운 표정을 짓는 관장을 보며 
신을 저주하며 교회장로를 꼬시던가요?(하하). 
그러보고면 교회장로 역시 이중성의 긴장속에 갈등. 
말씀하신대로 우리 삶 도처에도 정말 발견하지 못한 수 많은 이중성의 긴장이 존재하네요 
잘 읽었습니다. 2008-11-08
11:2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