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글-내글내생각] 아네스에게  
일병 김태경   2008-12-01 05:21:23, 조회: 242, 추천:5 

1997년 8월.
우리가족은 여름휴가를 떠나고 있었다. 한참을 가던 중 아무 생각없이 튼 라디오에선 음악대신 아나운서의 속보가 이어졌다. 괌에서 KAL기가 추락한 것이었다. 엄마는 다급하게 외갓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사이판을 가신다던 외삼촌 생각이 나신 것이다.

‘사이판을 간다던 사람이 왜 괌가는 비행기를 타냐고!’ 

여행사의 오버부킹으로 외삼촌은 사이판 대신 여행사에서 제공해 준 괌行 비행기를 타시게 되었던 것이다. 용평에서 서울로 황급히 돌아오는 내내 엄마는 울었다.

천만다행으로 온전한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고 장례도 치룰 수 있었다. 장지 날, 외삼촌의 묘소 옆에는 외삼촌보다 10년 먼저가신 외숙모의 묘소가 있었고, 묘비 뒤에 10년 전 외삼촌께서 손수 새기신 편지를 그날 처음을 보게 되었다.


아네스
당신을 불러봅니다.
가난하게 살다 작은 꿈 다 이루지 못하고 사랑하는 이들 뒤로한 채 찢어지는 가슴 안고 황량히 주님께 응답해간 당신. 
뜨겁게 사랑하고 착하게 살았던 우리의 그리운 날들을 뒤로하고 너무도 급히 달려갔습니다. 
이렇듯 데려가시는 주님의 깊은 뜻 아직 헤아리지 못하고 우리는 슬퍼 울고 있습니다. 
다만 만날 일 하나만을 가슴에 안고 살렵니다.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없으나 어딘가에 꼭 살아있을 당신을 기다리며 소중했던 지난날을 간직한 채 
서로 꼭 손잡고 슬픔 달래가며 살렵니다. 
주여, 아네스의 서러운 영혼을 달래주시고 당신의 나라에서 영원한 평화와 휴식을 허락하소서.
1987. 9. 23 남편 요셉


외삼촌은 대학에 갓 들어가던 해 외숙모를 만나셨다. 당시 고학생이셨던 외삼촌은 과외학생을 가르치며 그 집에 하숙을 하는 기숙과외를 하셨고, 외삼촌이 가르치던 동갑내기 재수생이 바로 외숙모셨다고 한다. 두 분은 결국 결혼하셨고 세 자녀들 두셨지만 외숙모는 87년 병으로 먼저 돌아가시게 되었다. 두 분이 언제 결혼하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략 20년쯤 함께하신 셈이다. 고작 일이년 사랑을 하고, 가슴이 꽤나 아프다고 생각했던 나로써는 이해조차 하지 못할 사랑이었을 것이다. 

긴 글이 되면 또 이상한 주저리나 나오겠지. 그냥 요새 러브스토리가 대세(?)인 것 같아 내가 아는 가장 슬픈 편지를 옮겨 적어 보았다. 아무리 내 아내가 결혼을 한다거나하는 다양한 장르의 사랑이 나온다고 해도 결국은 클래식이다. 클래시컬 러브.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1-11 03:31)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6
13:13:01 

 

병장 김민규 
  거의 말을 잃게 만드는 글. 어떻게 무플일 수가 있었을지. 아마도 모두가 말을 잃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2009-01-04
01:00:50
  

 

병장 이우중 
  전 정말로 말을 잃었었습니다. 이 글을 보고. 
늦게나마 가지로. 2009-01-09
17:27:04
  

 

일병 황호상 
  이해하기 힘든 온갖 일회성 만남얘기만 들려오는 때에 
가슴 깊은 곳을 울리네요. 


좋은글 올려주신 태경님께 한번, 
그리고 좋은글 찾아주신 민규님께 한번 감사드립니다. 2009-01-09
17:40:29
  

 

병장 정병훈 
  사실 전 잘 모르겠어요. 죄송해지네요. 2009-01-09
17:42:01
  

 

일병 김태경 
  그때 책마을 일주일 폭파되기 직전에 올렸던 글 같네요. 
저 때 필기구가 없어서 황급히 핸드폰으로 옯겨적었었죠. 
댓글을 떠나서 많은 분들이 한번 읽어보셨으면 했는데 민규님 감사합니다. 2009-01-09
18:45:34
  

 

병장 김민규 
  감사는요. 당연히 제가 감사드려야지요. 
그런 의미로다가 외칩니다. 가지로- 2009-01-09
18:49:06
  

 

병장 이동석 
  가지로-는 어딘지, 이성적으로 새로운 지평을 열거나 
감성적으로 그냥 전율이 쩔거나 할때 나오는 경우가 많아요. 

일단, 어떤 쪽이라도 대중적인 글쓰기를 하면서도 깊이와 울림을 가지고 있다는게 공통점이겠지만요. 길이가 중요한건 아니겠죠. 짧지만 강렬합니다. (소름 돋았어요) 

자, 이 글의 결정권은 당신이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 글이 무플이었던건, 일주일간의 공백-기 라는 그놈의 타이밍때문이었지, 이 글이 나빠서는 절대 아닙니다. 2009-01-09
19:25:52
 

 

병장 문두환 
  먹먹해지는군요. 아네스님에게 보내는 요셉님의 편지가 언젠가는 하얗게 세어버려 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꼭 하고 싶은 그런 말일 것입니다. 마지막 타자는 저인가요? 가지로! 2009-01-10
14:36: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