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글-내글내생각] 소시민은 언제나 도전자를 비웃는다.
병장 조현식 2008-08-29 11:00:25, 조회: 443, 추천:6
그 강렬한 태양의 8월 앞에서, 그는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굽실거리며 연신 구걸을 하고 있었다. 그를 지나치는 많은 사람들은 그를 모른 척 하거나, 모르거나, 너무 배가 불러 땅을 쳐다보지 못하는 사람이거나, 그를 보지 못하거나, 그와 자지 못하는 부류에 속했다. 차라리 그는 땅바닥에 엎드리지 말고 구걸을 했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했다. 그런 생각이 들기도 전에, 그의 양은접시에 쨍그랑 돈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면 그의 목은 더욱 움츠러들었다. 거북이라면 자라라면 아예 껍데기 속으로 숨어버릴 수 있었을 텐데. 그의 목은 의지와 상관없이 쪼그라붙고, 패인 목주름과 주름 사이에서는 땀이 흘러내렸다. 이 일을 시작한 후에 그가 가장 빨리 알게 된 사실은 돈을 주는 사람을 절대 쳐다보지 않는다는 철칙이었다. 아무도, 그 어떤 거지도 돈을 준 사람을 쳐다보지 않았다. 한 번 납작 엎드렸으면 그 허리는 절대 펴서는 안 된다고. 껌을 씹으며 거시기에 구슬을 박고 사람 머리로 구슬치기를 하는 그가 처음 망했을 때 그의 앞에 나타났던 그 ‘아이’가 말했다.
더럽냐?
그는 쫙 찢어진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하겠습니다.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 ‘아이’의 침을 얼굴로 받아내던 그 첫 날, 그는 자신이 뭐든지 할 수 있겠다는 우울한 자신감을 얻었다. 둘째 날에 그가 한 꼬마의 두런거림과 웅성거림, 그리고 연이은 쨍그랑 소리와 나팔거리는 지폐의 떨어짐까지 온 공기로 느낀 순간에 그는 어째서 그 ‘아이’가 절대로 그들을 쳐다보지 말라고 했는지 깨달았다. 그 쪼끄만 녀석의 조그만 얼굴에 그려진 빌어먹을 정도로 순수한 호기심, 그 뒤. 그 뒤였다. 그 뒤의 화장을 떡칠해 얼굴과 목이 흰색과 살색으로 분리되어버린 아줌마의 썩은 표정. 내가 똥이냐? 죽도록 외치고 싶은 표정으로, 그는 다시 고개를 수그렸다. 거북이와 자라처럼. 그 보다 느린 달팽이마냥.
조금 더 시간이 지나, 거지 호봉이 오르면 그도 지하철에 탈 수 있게 될 것이다. 군대 호봉은 안쳐줍니까? 그보다 한 달인가 두 달 일찍 이 쪽 일에 몸담은 녀석이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온 몸으로 자신의 군 생활을 자랑스러워하는 놈이라는 게 느껴졌다. 매일 깔깔이를 입고 다니는 자신보다 한두 달 먼저 이쪽에 들어온 그 녀석을, 사람들은 깔깔이라고 부르기로 암묵적으로 정한 모양이었다. 신발은 Vent. 깔깔이에 하 전투복 하의. 그 때 저 녀석은 자신이 저렇게 될 줄 알고 있었을까? ‘아이’는 그 녀석의 자랑스러운 얼굴을 그대로 내 질러버렸다. 보기 좋게 나뒹구는 그 녀석을 보며 그는 미소 지었다. 평소에도 자기가 몇 달 일찍 들어온 걸로 더럽게 유세 떠는 놈이었다. 그가 보기에는, 호봉의 세상이 개월이 아니라 년으로 올라가는 세상이 있다는 걸 인식하지 못하는 이상 이 세계에서도 그에게 주어질 임무는 그냥 평생 땅바닥에 고개를 처박는 것 밖에 없을 듯 했다.
이런 말 하기는 뭣하지만, 그는 거지 중에서는 엄청나게 똑똑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입으로 그 말을 자연스럽게 할 정도로 똑똑했다. 아주 흔하게 글씨를 틀리거나 맞춤법을 틀리는 어의없는 세상을 사는 사람은 두 부류가 있었는데, 너무 외국에서만 살아서 모르거나 너무 밑바닥 인생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평범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무엇이 다르랴 하겠으나, 그는 자신이 다른 거지들과는 달리 외국물을 먹고 온 거지라는 데에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혀 꼬부라진 영어로 ‘하브 아 나이쓰 데이~’ 라고 말하는 순간, 그 순간의 그는 ‘아이’보다도 더 빛났다. 가끔 쓸데없이 중학교 영어까지 배우고 나온 머리 굵은 놈들이 저질 발음이라고 놀려대면, 그는 ‘영국 영어’ 라며 무식한 그들의 언어적 소양에 혀를 차댔다.
무식한 것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아니고 만체스타지. 그게 잉글랜드식 발음이지.
뭐여, 만체스타가 어디여?
박지성이가 뛰는 델걸? 박지성이 있잖아. 뽈 잘 차는 놈..
웅성거림이 심해지고, 그가 그 웅성거림을 의도적으로 조장했다는 생각에 입이 귀까지 걸리면, 그 때는 항상 ‘아이’ 가 폭력으로 그들의 유식함을 무장해제 했다.
박지성 같은 소리하고 안잖네. 그렇게 뽈차고 싶으냐? 내가 뽈로 한 번 만들어 주까?!
그러면서 의례히 꺼내는 맥가이버 칼이면 다들 수군대면서도 뿔뿔이 서로의 구역으로 흩어졌다. 아이의 맥가이버 칼은 어딘가 살벌한데가 있다고, 그는 중얼거렸다. 녹이 슨 건지 피로 물든 건지 알 수 없는 아이의 칼은 짧지만 항상 날카로웠다. 매일 밤마다 아이는 달빛에 찬 하니 칼을 비춰보고 조금이라도 날이 삐뚤거나 무뎌지면 칼을 간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몇 명이나 찔렀을까, 몇 명이나 죽였을까? 그것은 그들 세상에서 영원히 지켜져야 할 숙제 같은 것이었다. 100명을 찔렀다면 너무 많다. 그렇다고 대 여섯이라기에는 그 정도 찌른 인생들은 지천이다. 아이의 전적은 약 70명분 이라는 게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100명을 채우려면 30명이 남았다. 30명을 찌르고 나면, 아이도 곧 은퇴할 것이다. 나름대로, 백 명을 찌르면 은퇴한다는 그 생각이 낭만적이라고 중얼거리며 그는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회사원이나 거지나 근본적으로, 매일 매일이 똑같은 일상이라는 점에서는 별 차이가 없었다. 회사원은 상사에게 고개를 수그리고, 거지는 보통사람들에게 고개를 수그린다는 점을 뺀다면. 나는 그 점이 좋았거든.. 그는 어쭙잖게 말하며 웃었다. 그는 거지라기에는 너무 낭만을 따졌다. 천 원짜리 지폐가 떨어질 때의 그 팔랑거림이 이제는 좋다고 씨익 웃었다. 다 헤진 청바지에는 김칫국물이며 온갖 양념 같은 것들이 묻어있고, 사람들이 가까이 가지 않아 몰랐겠지만 그의 근처로 가면 항상 술 냄새가 났다. ‘아이’는 그런 그의 태도를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빌빌거리는 녀석들 보담 낫거등. 하지만 ‘아이’는 항상 한 마디씩 더 쏘아대서 그의 기분을 잡쳐놓고는 했다. 그것도 결국 떨어져서 밑바닥 인생사는 여자 하나 없는 놈들의 자위랑 똑같지 뭐. 자위라도 안하면 다 나가 뒈지는 수밖에 별거 있남?
한 달이 지난 후, 그의 일상에도 변화가 생겼다. 슈퍼마켓 새로 열적에 받아온 바구니가 그의 파트너 양은냄비자리를 대신했다. 한 번의 위기도 있었다. 다리 병신인척 하는 그를 어떤 빌어먹을 고등학생 녀석이 발로 걸었던 때였다. 그가 넘어졌다면, 그날은 대박 나는 날이었을 거라 아이는 비웃었지만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 발을 샥 피해버렸다. 그 고등학생은 비웃었고, 사람들은 놀랐고, 그는 그날 하루 종일 한 푼도 벌지 못했다. 소문의 소문이 꼬리를 물고 역 앞의 거지가 짜가라는 게 모두에게 퍼진다면 그의 거지인생도 여기서 쫑 날 것이 뻔했다. 그 일이 있은 후 그는 며칠이나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행인지 그가 우려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여전히 들어오는 수입은 변함이 없었다. 그것은 그의 사건보다 더 큰 사고가 자신들의 세상에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고물상을 전전하며 고물을 팔아 이 삼 천원 버는 대신 동냥을 선택한 할머니에게 벌어진 일이었다. ‘아이’는 웬일인지 그 할머니에게 처음부터 지하철을 태워주는 특혜를 베풀었다.
이 병신들, 일흔 살 먹은 할멈 땡볕에 널어놨다 시체 수거하고 싶냐? 아 이 자식들 심뽀하곤..
확실히, 아이는 거지들 보다는 한 수 위였다. 명분으로, 실리로도 그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참 대단한 놈이야.. 그는 옆의 거지에게 간질 듯 속삭였다. 그 후로 할멈은 지하철에서 눈 안 보이는 장님처럼 행세하며 돈을 벌었다. 시끄러운 음악도 다 아이의 선곡이었다.
너무 신파로 나가면 안 되지. 요새는 21세기거등.
할멈은 놀랍게도 아이가 담당하는 사람들 중 최고로 돈을 많이 벌어왔다. 호호백발 할머니가 돈을 벌어온다는 것이, 아직도 사람들 사이에서는 믿음과 신뢰의 상징으로 통하는 것 같았다. 아이구 딱한 할머니가 얼마나 힘드셨으면...
한의원 하는 놈들이 나이가 들수록 돈 더 버는 거랑 똑같아.
그 때의 아이의 말은 정말 이 놈만큼 치밀한 놈이 다 있을까... 하는 전율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적재적소에 사람을 배치하는 능력을 가졌다. 회사에서 이 녀석을 채용했더라면, 아마 인사 관련해서 그 회사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됐을 만큼, 전직 사회인의 눈으로 본 아이의 눈매는 그와 비교도 되지 않게 정확했다. 그러나 그도 신은 아니었고 혼자서 역 앞의 모든 노숙자나 거지를 관리하기에는 버거웠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야, 다 꺼져!!
그 날. 아이는 그가 본 아이의 모습 중 가장 흥분해 있었다. 그는 잽싸게 전철을 잡고는 전 역으로 향했다. 전철이 사고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하자, 그는 비상용 망치로 유리를 박살내고 밖으로 튀어 내렸다. 당황한 한 아저씨가 그에게 소리쳤다.
청년! 그걸 깨면 어떡하나!
아이는 흉터 있는 얼굴을 씰룩대며 아저씨에게 날카로운 미소를 들이대고는 밖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죽어라 바로 전 역을 향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 또한 머뭇거리다가, 비상용 손잡이를 잡아당겨 자신의 힘으로 문을 열고 전철에서 내렸다. 그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있기에는, 아이와 같이 있었던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너무나 따가웠다. 코를 찌르는 술 냄새 때문에 한 아가씨는 있는 대로 오만상을 찌푸리며 그를 외면하고 있었고, 저마다 수군수군 대며 뭐라 떠들어대는 통에 혼이 다 빠져나갈 지경이었다. 그는 잽싸게 전철에서 내렸다.
출입문 닫겠습니다.
왜 사람들이 그 녀석을 ‘아이’라고 부르는지 알고 있어? 그는 참이슬 진을 입에 가져다대며 술에, 술술 술병을 기울이며 말했다. 그 아이는 원체는 나쁜 ‘새끼’ 거든. 근데 강하단 말야. 머리도 있고... 대놓고 그런 말 했다가는 역에서 쫓겨나거나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디 파묻히기 십상이란 말이지. 사람들이 그래서 만들어 낸 거야. 아이라구. 파묻히긴 싫고 욕은 하고 싶으니까 만들어 낸 거지. 그 큰 덩치에 문신이 여기저기 새겨진 놈을 아이라고 부르다니... 참, 여긴 이상한 면이 많아.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낄낄대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할멈! 할멈! 정신 좀 차려봐! 야!
그는 새파랗게 질려서 아이를 쳐다보았다. 정신을 차리고 말 것도 없이 할멈은 완전 두 동강이 나서 죽어있었다. 비위 약한 사람들은 새하얗게 질려서 선로 쪽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사람들이 뭐라 하는 소리를 귀신같이 잡아냈다. 아이 쪽을 힐끔 쳐다봤지만 여전히 상반신만 남아 피투성이가 된 할멈을 마구 흔들며 아이는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었다.
어떤 아줌마가...
가짜였다며???
끔찍해라...
이런 xX! 토나와..
토나온다. 그는 쏠리는 오바이트를 필사적으로 참아냈다. 이런 제길 왜 아무도 안 도와주는 거냐. 할머니는 죽었다. 수군거리는 그 조막만한 말에 따르면, 뻔뻔하게 할머니는 눈이 안 보이는 척하며 돈을 뜯어내고는 유유히 지팡이를 접고 다시 반대 차량으로 건너갔다. 격분한 한 아주머니가 할머니의 뒤를 쫓아갔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뭐 저런 할머니가 다 있어. 저 아줌마는 또 왜 저래?
이번 역은...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전동차와 승강장 사이의 거리가 넓으므...
결과는, 할머니는 전동차과 승강장 사이로 빨려 들어갔고 아주머니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무연고 할머니는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른 채 그냥 그렇게 죽었다. 승강장 CCTV를 되짚고 또 되짚어 봐도 할머니를 미는 억센 아줌마의 손 이외에 나타나는 것은 아무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몰랐다. 범인이 없었고, 사람들은 할머니가 죽을만한 행동을 했다고 생각했다.
장애우를 사칭해서 돈을 뜯는 일은...
빠르다. 방송국에서 사람이 나왔고, 한 사람이 대본에 따라 글을 읽고 있었다. 평범한 대학생으로 보이는 사람은 인터뷰 내내 버벅거려서 결국 다른 여자애로 교체되었다. 어수선한 가운데 경찰이 좀 비켜요 좀비켜요 한다. 초록색 모자 쓴 공익이 투덜대며 폴리스 라인을 설치한다. 아이는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간 것일까? 할머니의 상반신만이 폴리스 라인 밖에서 보인다.
증거 인멸 방지를 위해 설치하는 거니까, 모두 이해해 주세요!
경찰이 크게 소리친다. 사람들이 웅성댄다.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바쁜 몸들이라구! 반짝이는 수트에 번쩍이는 구두를 신은 신사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소리친다.
당신이 내 계약 체결 못하면 책임 질 거야?!
아니다. 썩은 목소리의 썩은 아저씨가 빛나는 머리를 가지고 반짝반짝 소리친다. 어깨가 축 쳐져서, 그는 역을 빠져나왔다. 재수 없는 것들. 장애인이 우리의 친구냐? 달팽이도 우리의 친구지예. 깔깔이가 실없는 농담을 던졌지만 아무도 받아주지 않았다.
할머니의 장례는 소주 됫병과 편의점에서 훔쳐온 육포 하나 놓고 치러졌다. 저마다 담배 하나씩 물고 유골대신 담배를 태우며 할멈을 하늘나라로 올려 보냈다. 무섭게 굳은 얼굴로 아이는 소주도 일절 입에 대지 않은 채 땅바닥만 쏘아봤다. 사람들은 아이가 어째서 그렇게 그 할멈을 아꼈는지 궁금했지만, 지금분위기에서는 괜히 그 시뻘건 맥가이버칼에 배때기가 날아갈까봐 아무도 얘기하지 못했다.
옘병, 이거 분위기만 자꾸 안 좋아지구...
역 화장실에서, 깔깔이 녀석이 그의 엉덩이를 툭 치며 씨익 웃어보였다. 온통 이빨이 썩어서 봐줄 수가 없군. 그는 인상을 찌푸렸고, 깔깔이 녀석은 낄낄 웃으며 오줌줄기를 쏴 쏟아냈다.
이건 내 생각인데, 할멈이 아이의 뭐 엄마 그런 거 아니었을까?
XX.
얼라? 이건 내 생각만이 아니구,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실이야!
그래. 그렇겠지.
그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고 화장실 세면대에서 자연스레 세수를 했다. 그 순간, 그의 얼굴이 세면대 바닥으로 쳐박혔다. 피가 터지고 순간 그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야, 니 새끼가 뭐 그리 잘났다고 유세냐? 같은 거지끼리?
충혈된 눈으로 깔깔이가 그를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는 어찔어찔 하면서 입에 담은 피를 퉤 뱉었다.
졸라 잘났냐? 너는? 너만? 너도 똑같아 새끼야!
배로 날아오는 깔깔이 녀석의 발을 그는 제대로 막지 못했다. 신음도 나오지 않았다. 배에 강렬한 고통. 그리고 숨을 쉴 수 없는 몇 초간이 찾아왔다. 그는 고통에 겨워 꺽꺽 대며 바닥을 기었다.
너 임마. 영국 같은 소리하고 있네. 대학 나와서, 영국 나와서, 겨우 거지 짓거리에 아이 쓰레기통 받침이나 하는 주제에. 어?
어?
목소리가 이상했다. 그가 그새 순식간에 팅팅 부어오른 눈을 간신히 뜨니까, 깔깔이 녀석이 그의 옆으로 엎어졌다. 아이의 맥가이버 칼이 보였다. 순간 직감했다. 아이의 은퇴까지 29명이 남았고, 앞으로 아이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은퇴를 향해 달려갈 것임을.
야. 아저씨.
아이가 무릎을 꿇고 그의 부어오른 눈을 말끔 쳐다보았다. 맥가이버 칼을 들이대는 듯 하더니, 순식간에 부어오른 눈을 긋고 지나갔다.
좀 괜찮을걸. 이러면. 보통 영화에선 이러더라구.
아이가 씩 웃으며 맥가이버칼을 도로 집어넣었다. 이 놈은 틀려먹었어. 언젠간 버렸어야 하는데... 아이가 깔깔이 녀석을 발로 걷어찼다. 축 늘어진 게 반응이 없다. 그는 눈으로 흘러내리려는 피를 연신 닦아내며 아이를 쳐다보았다. 그는 무언가 말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말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아저씨. 아저씨 내일부터 지하철 해라.
역의 화장실에서. 깔깔이 녀석은 죽고, 아이는 돌았고 그는 지하철에서 물품 파는 놈으로 한 단계 진급했다. 한 명 죽으면 한 명이 거기 박히고, 쓸데없는 놈은 없애고, 거기에 새롭게 쓸데없는 놈을 집어넣고 쓸데 있나 보는 것이 아이의 주특기였다. 이번엔 그가 박히는 역할이 되었다.
지하철에서의 돈벌이는 꽤 짭짤했다. 삼일이면 망가질 중국제 다용도 칼을 파는 장사는 전직 세일즈맨인 그에게 아주 딱 맞는 역할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영어와 알 수 없는 기호를 섞어 쓰는 순간 그에게 빠져들었고, 필요도 없는 다용도 칼을 위해 기꺼이 만원을 지불했다. 그들은 그러고 나서도 잘 샀다고 만족하며 지하철을 빠져나갔고, 자루와 칼이 분리되기 전까지는 매우 행복한 며칠을 보낼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술 몇 병사서 아이와 함께 노나 마셨다. 그는 점점 지위가 올라가 역에서 노숙자와 거지 사이에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그가 아이와 술을 마시며 낄낄대는 그 몇 주간, 술 취한 취객은 넷이나 죽었다. 다 목과 얼굴의 색깔이 다른 아줌마 취객이었다. 이 바람난 아줌마들에게 사람들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실족사. 실족사. 실족사. 실족사.
몇 몇 시민단체에서 역에 무슨 문을 설치해야 한다며 몇 일간 시위를 벌였지만 시에서는 예산 문제를 이유로 난색을 표했다. 그리고 시민단체는, 시위를 하는 동안 시위대의 여자들을 끈적한 눈으로 쳐다보는 그들 집단 때문에 시위를 계속해나가는 것에 대하여 난색을 표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은 여자에게 온갖 더러운 욕을 퍼부은 후에는 역 앞에서 시위하는 사람들이 부쩍 줄었다. 아이는 술을 마시다가, 경찰이 우리에게 표창이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니냐며 농을 던졌다. 그와 그의 거지들은 모두 낄낄 웃어댔다.
점점 활빈당이 되어가는, 왕초 아이와 그의 주변인들과는 달리 역에는 사람들이 날로 줄어들었다. 그 극적인 할멈의 살인 이후. 거지들은 맘에 걸리는 것 없이 행동했다. 아이의 칼은 날이 갈수록 시뻘겋게 달아올랐는데 급속도로 녹이 슬어가는 것인지 뭔지 알기가 힘들었다.
그들의 성향이야 그런 식으로 계속되어 갔지만, 사람은 줄고 이제 땅바닥에 고개를 쳐 박고 열두 시간을 낑낑 기어 다녀도 돈 몇 푼 벌기가 힘들어졌다. 아이가 간과한 것은, 거지들이 그렇게 세지 않다는 것과 정상적인 사람들의 세계에는 아이 같은 사람들만 모아놓은 집단이 따로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아이는 역에서는 왕이었지만 버스타고 몇 정거장만 가면 있는 나이트클럽에서는 웨이터만도 못했다. 그 사실을 그는 진즉 알고 있는 눈치였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다시 소주를 아이의 잔에 가득 채웠다.
내가, 왜 그렇게 할멈이 죽었다고 했을 때 흥분했는지 궁금했지?
아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가 한숨쉬는 장면은 처음 보는 장면이어서, 그는 겁이 난 표정을 지었다. 평소답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에게 의례히 사람들은 불안함을 느끼게 된다. 아이는 할멈이 죽고 난 뒤, 새로운 거지를 받지도 않았고 그 때의 얘기를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었다.
할멈은, 어차피 죽을 거였어. 너무 대 놓고 할멈이 사람을 등친걸 그 자리에서 나타냈거든.
할멈은 항상 지하철에서 사람들한테 돈을 걷고 나면, 당당하게 지팡이를 접고 종착역 바로 전 역에서 내렸다고 한다. 그 역은 항상 사람들이 잘 내리지 않았고, 뒤에서 욕을 하는 사람들은 있었어도 따라 내리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위험하다고 했지. 망할 할멈은 전혀 안 들었어. 그게 할멈의 마지막 자존심이었겠지..
연신 아이는 소주를 들이켰다.
바닥부터 가르쳤어야 되는데.. 썅. 그 놈의 돈이 뭐라고... 대학생들한테 껌이나 팔게 시킬걸..
그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아이를 쳐다보았다. 그는 누가 봐도 불안정한 상태였다. 사실 그 큰 체구의 아이는 끽해야 스물 여덜 아홉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 일을 시작한 것인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그는 아이의 어깨를 말없이 두들겨주었다. 책에서 본 내용이라고 했다. 말없이 옆에 있어 주는 게 최고의 위로가 된다구... 그가 언젠가 말했었다.
어! 어이!!
김씨가 헐레벌떡 달려와서 숨도 고르지 않고 아이에게 입을 뻥끗거렸다. 아이가 인상을 찌푸리자, 그제야 조금 정신을 차린 김씨가 빠르게 상황을 알렸다.
크, 큰일이야. 저번에 시위했을 적 그 여자 있지? 우리한테 더러운 어쩌구 했던 년. 그 년이 역에 나타났어. 애들이 다 쫓아갔는데 상황 장난 아니야!
아이는 말없이 일어나 애들이 여자를 끌고 갔다는 공중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와 김씨도 헐레벌떡 뒤를 쫓아갔다. 그가 화장실에 도착했을 때, 이미 상황은 끝나있었다. 꾀죄죄한 복장의 노숙자와 거지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고, 아이가 가운데 서 있었다. 다들 땅을 쳐다본 상태에서. 그는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아이의 앞에는, 여자가 엎어져 있었다. 어찌나 맞았는지 얼굴을 분간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이미 누군가 맥박을 재 본 모양인지, 어디선가 뒤졌대...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숨겨야 하나?
아이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모두가 들었지만, 대답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왜?
아니.. 그냥.. 우리끼리 술 마시구 있는데 그 때 그 년이 지나가길래 놀릴까 하다가..
처음 쫓아갔던 녀석인가보다. 그 녀석은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그냥, 어쩌다보니 죽였다는 말에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좀 알아보고 때리지 그랬냐... 이 년 그 때 그 년도 아닌데.
뭐??
아이는 그대로 대꾸한 녀석을 발로 걷어찼다. 녀석은 땅바닥에 몇 바퀴 나뒹굴었다. 그 정도는 아니었을 테지만, 그들의 본성일 것이다. 이정도 굴러줘야, 아이가 화가 풀린다는 것을 그들은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옷만 똑같지 완전 다른 사람이야... 길 가던 사람 죽여 놓으니 기분이 시원하냐?
나.. 나는..
아무리 막장이라지만, 우리가 이렇게까지 해야겠냐?
니가 한 것처럼 또 전동차에 집어 던지면 그만 아녀. 사람 죽은 거 한 두 번 보냐?
어디선가 불만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아이는 웃었다. 이 새끼들이... 완전 쓰레기구만.
너도 쓰레기잖아. 우린 다 쓰레기야! 웅성거림이 커진다. 그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아이는 터질 듯한 눈빛으로 모두를 쏘아보았다. 움찔했지만, 놀랍게도 그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주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주인이 아닌걸 알았을 때의, 그 때 사냥개들의 표정도 이럴까?
너 혼자 잘난 척 하고 싶으면 죽어서 하란 말여.
그 놈의 잘난 척. 그 것 때문에 그도 죽을 뻔했다. 그것보다는 아이의 따까리인 그가 아이가 무너졌을 때 살아남을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아이는 맥가이버 칼을 휘릭 꺼내 들었지만, 그렇게 날카로워 보이지 않았다. 피로 물들었다 생각하며 두려워했던 그 칼은 이제 보니 그저 녹슨 칼에 지나지 않았다.
야, 꼬맹아. 아저씨. 튀어라.
아이가 나지막하게 나와 그에게 말했다. 순간, 그가 내 손을 잡고 죽을힘을 다해 도망가기 시작했다. 좀비. 좀비다. 이전까지 아이에게 갇혀있던 노숙자들은 모두 좀비처럼 그들을 따라오기 시작했다. 아이는, 순식간에 게임 주인공으로 변해 그들과 대치했다. 무기는 맥가이버 칼. 그가 너무 빨리 뛰어서 나는 그 광경을 끝까지 지켜볼 수 없었다.
어느 공원에 와서야, 그는 뜀뛰는 것을 멈췄다. 심장이 턱까지 올라온 기분이었다. 그는 이제는 노랗게 변한 이를 드러내며 나에게 씨익 웃었다.
아.. 아저씨.
벙어린 줄 알았는데, 다 말할 줄 아는구나...
그러더니 그는 실성한 사람마냥 웃었다. 깔깔이가 즐겨 쓰던 표현을 빌리자면, ‘쳐 웃었다’. 이 말은 깔깔이가 평소에 자주 쓰는 말이었다. 어째서 이 순간에 그가 생각나는 것일까?
아이는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내일 뉴스에 속보로 뜰지 안뜰지도 궁금했다. 궁금한 것투성이였지만, 땀에 온통 젖은 그의 런닝구를 보면 그에게 말을 걸기가 힘들었다. 그도, 나도 완전히 지쳐있었다.
인마, 너는... 그냥 평범하게 살아라.
나는 그에게 대꾸하려고 했지만, 너무 힘들어서 말할 기운도 나지 않았다. 목까지 올라온 심장을 토하면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실제로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벙어리 행세도 이제 고만하구. 아저씨처럼 살지 말구. 그.. 그 새끼처럼도 살지 말구.
어디서 나왔는지 반쯤 잘린 장초를 입에 문 그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치익 하고 담배가 타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담배 피우지 마라. 폐 썩는다...
그의 말은, 왠지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았다. 나를 보며 말하고 있지만, 목소리가 아련했다. 전직 세일즈맨이었다는 그는, 왜 이 곳까지 들어온 걸까. 나는 담배를 피우는 그의 호주머니를 뒤져 담배 하나를 찾아냈다. 그의 눈이 동그래지는 순간, 나도 담배에 불을 붙였다.
케엑, 우헥..
그는 나를 보고 씨익 웃었다. 그러더니 나를 말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담배.. 피우지 말라면서요.
피운 걸 어쩌겠냐.
지금 못 피운다고 비웃는 거죠?
그가 내 가까이 바싹 다가붙었다. 술 냄새가 난다. 술 냄새에 담배 냄새... 나는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내 머리를 마구 헝클어 놓았다.
목욕탕에 가자. 너 너무 드럽다.
아저씨두요.
이 자식, 벙어리인척 하더니 말 하고 싶어서 어떻게 참았냐.
나와 그는 계속 낄낄댔다. 찜질방은 24시간 영업이니까, 이 시간에도 열었을 거다. 오늘따라 달이 너무 낮게 깔렸다. 보름달을 누가 베어 먹은 것 같이 생겼다. 보이는 모든 것들이 웃기게만 보였다. 아이는 이겼을까? 졌을까? 100명을 눕히고 은퇴하러 고향으로 내려갈지도 모르겠다. 그래, 이제 곧 추석이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8-12-08
20:18:19
병장 이동석
두둥- 어제 쓴 분량과 오늘 쓴 분량의 접점이 보이는것도 같지만,
아니, 현식님이 낄자리가 아니라니,
그건 장동건, 잘생겼다고 생각해본적 없다 파문에 이은 거대한 파문? (웃음)
어쨌거나 강요할 생각은 없어요.
다만, 지금처럼 간간히 내뱉어 주세요. 2008-08-29
11:19:35
병장 조현식
계속 화자를 숨기다가 마지막에 공개하는 방식이 재밌을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써보니 그다지 재밌지 않군요..
이 글은 브레인스토밍 같은거라, 이동석 병장님이 아니었으면 아마 제 컴퓨터에 계속 쳐박혀 있었을텐데요.(웃음) 2008-08-29
11:26:24
병장 이동석
음, 재밌는 발상이네요.
핸드핼드의 카메라는 말없이 사건과 인물을 잡아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카메라는 크레인이나 트랙, 삼각대에 고정되어 있고 카메라 뒤에 숨어 있던 화자가 뛰쳐나온다.
(냉큼 써먹어야지)
그건 그렇고, 정말이지
강동원 자기 얼굴 잘생겼다고 생각해본적 없어 파문
수애 내 얼굴 촌스러워서 시대극만 나온다 파문
임수정 내얼굴 그렇게 예쁜 얼굴은 아니다 파문
현식님 필진 내가 낄자리 아니다 파문
(헤헤헤헤, 몰아가기) 2008-08-29
11:40:07
병장 신지훈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좋은글 읽고나니 여운이 남네요~ 가지로! 외칩니다. 2008-08-29
11:41:55
상병 유재영
동석씨 부촌장 내가 이기엔 너무 무거운 짐이다 파문 2008-08-29
11:46:50
병장 이동석
유재영, 난 한번도 퀴즈 제대로 풀어본적 없다 파문. 2008-08-29
11:49:04
병장 어영조
정말 재밌게 잘 읽고 갑니다. 2008-08-29
12:30:03
병장 이태형
무슨 말을 남겨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으음... 2008-08-29
12:30:32
병장 이재민
추천&가지로 2008-08-29
14:21:21
병장 배상혁
재밌게 읽었습니다.
추천!! 2008-08-29
14:57:21
병장 노요셉
잘읽엇씁니다! 2008-08-29
15:42:47
상병 문두환
오오. 놀랍습니다. 전 정말 어런걸 머리에 떠올리는 분들이 더 신기합니다.
하루가 또 지나가는 조용한 오후가 좀 더 꽉 채워지는 기분이군요(웃음).
추천! 합니다. 그리고 가지로! 2008-08-29
17:30:07
병장 이동석
이런 댄장.
아무래도 저에게 문제가 있는모양입니다.
가지로 옮기고 제목에 말머리를 달았는데 (고로 수정을 누른게지요.)
중간에 잘려버렸군요. 흑흑
표기법에 안맞는 글자가 나올경우 글이 잘리는건 게시판의 문제일까요?
아님 제 인터넷 환경의 문제?
현식님이 올리실때나, 다른분들 오타도 나고 하는거 보면 아무렇지도 않던데
이런, 제 인터넷 설정?이나 무슨 오류가 있는모양입니다. 흑. 죄송합니다. 현식님. 2008-08-31
10:4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