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글-내글내생각] 베토벤 바이러스 - 그의 잊혀진 꿈을 기리고 소망하며  
병장 김민규  [Homepage]  2008-11-14 23:04:24, 조회: 391, 추천:6 

“시어머니 똥오줌 10년동안 받았어. 너 그거 해 봤어?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애. 그러고 났더니 이번엔 남편 직장 짤릴 것 같다고 조금만 참으래. 참았어. 그랬는데 결국 이번에 잘렸어. 이제 어떡하니,“

당근을 먹으며 아침부터 새벽 3시까지 베토벤 바이러스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1화부터 15화까지, 짧은 시간동안 몰입해서 본 탓인지, 드라마라기보다는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느낌으로, 그 이야기를 거슬러 가다보니 어느 순간 가슴이 꽉 막히면서, 아팠다. 그저 많이 아팠다.

어렸을 적, 우리 집은 지지리도 가진 것이 없었다. 부산에서 몸 하나만 가지고 홀홀단신으로 올라온 아버지의 생활 기반은 해운회사의 짠 월급이 전부였고 유산도 집안으로부터의 지원도 그 무엇도 기대할 수 없었기에 그저 성실히 사는것이 인생의 진리이자 최선이었다. 당시 생활에 대해 어머니는 지금도 회고한다 - 월급 받으면, 이른 나이에 남편을 잃고 홀로 계신 어머니께 장남의 도리를 하기 위해 시댁에 반 떼서 보내고, 그 나머지로 집세에, 생활에,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다고. 고부갈등은 아직까지도 마음에 앙금으로 남아 우중충한 날이면 한 번씩 화제로 등장하곤 한다. 당시 과일가게를 했었던 할머니 댁에서 내가 나오기를 기다릴 때였는데, 배가 하나 먹고 싶어 이야기를 했더니 아버지가 큰 맘 먹고 좋은 걸로 몇 개 떼다 왔다고, 그런데 그걸 그대로 팔아 버렸단다. 그 때 그 배를 못 먹어 니가 턱이 비뚤어졌다며, 어머니는 시니컬하게 혀를 찬다.
어이없으면서 슬픈 이야기다. 그만큼 대화가 막히고 관계가 틀어진 상황속에서 그나마 적은 월급마저 뚝 떼어 매달 보냈던 심정이 즐거웠을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실히 사셨던 부모님은, 동생이 나올 즈음 해서, 그 작은 살림을 모으고 모아 홍은동의 산꼭대기 반지하 방에서 벗어나 인천의 13평짜리 아파트로 이사를 할 수 있었고, 내 방을 가졌다는 것 자체로 아버지는 행복했던 것 같다.
그런 식이었다. 자수성가의 전형으로 조금씩, 조금씩, 방 한칸을 늘려 가는 수 밖에는 없었다. 겨우 2000만원짜리 아파트를 팔고 그간 들어두었던 모든 통장에 계까지 깨서 부천신도시에 청약을 했을 때, 중간에 한양건설이 부도위기에 몰려 몇 번 공사가 중단되기는 했었지만 결국 입주를 했을 때, 그리고 중고 엘란트라였지만 ‘내 차’를 가졌을 때, 한 계단 한 계단 밟아나가는 기쁨으로 아버지는 살았다. 그 기억속에 어머니는 없다. 그저 학교 다녀오면 집에서 부업을 하고 있었고, 그러다 밥을 준비하고, 저녁이 되면 자고, 아침이 되면 나를 깨웠다. 그건 내가 생각하는 당연한 일상의 그림의 일부일 뿐 특별한 의의는 없었다.
그러다 IMF가 오고, 아버지가 다니던 회사가 산산조각이 나 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별단이니 보이스카웃이니 하는 그 당시 꼬마의 로망을 채워주지 못하는 어머니가 나는 원망스러웠다. 당시엔 몰랐다, 나 밖에는. 그 안에서 멈추고 미뤄지고 좌절된 꿈들에 대해서는.

“그 다음엔 우리 진수 입시, 끝나고 났더니 민지 고등학생이야. 그리고 진수 대학이래, 나 언제까지 참아야 되니?”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과감한 결정을 했다.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빚을 내서 목동으로 이사를 가기로 한 것이다. 당시 인천 계산동에 살고 있었던 나, 그 이사가 이미 다섯 번째 이사였지만 그 전에 없었던 엄청난 문화 충격을 겪어야 했다. 인천에서는, 학교 매점에 가서 한 이삼천원치 사면, 그래도 그런대로 괜찮은 친구들의 호응을 받을 수 있었고, 그게 고등학생의 소비수준인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처음 전학을 가서 맥도날드에서 조모임을 하는 광경은 그자체로도 생소하기도 했지만, 고등학생 모임치고는 내 예상과 너무 달라 놀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나름대로 환경에 적응하는 법이라 나도 어느새 그 틈에 끼여 한 패거리가 되었고, 그저 학교와 집, 독서실을 왔다갔다 하는 정도였지만, 수험생의 삶을 살았다. 이르면 열한시, 늦으면 두 시에 들어오는 나를, 어머니는 얕은 선잠을 뒤척이며 기다렸다. 들어오면 뭐라도 먹이고 나서 자는 것을 보고서야 들어가셨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아날로그적인 알람은 어김이 없었다.

“나 음대나온 정희연이야, 지금까지 몇십년을 참기만 하다가 이제 와서 오케스트라 한 번 하겠다는데, 그게 미친 짓이래. 주변에서 다 미쳤대. 미친 짓이니? 난 언제까지 참기만 해야 돼? 남편, 자식들, 자기들 하고싶은 것 마음대로 다 하면서, 왜 나만 참아야 되니? 음대나와서 오케스트라 딱 한 번 하겠다는데 그게 그렇게 미친 짓이야? 그래, 똥덩어리, 집안에서 살림이나 하고 굴러다니는 게, 내 잘못이야? 그렇게 만든건 너야, 니가 날 그렇게 만들었어. 똥덩어리!”

내가 대학에 들어가고 세상 맛을 알아가며 한창 재미를 보고 있을 때도, 일년에 육백만원에 육박하는 등록금과, 매달 들어가는 부금, 그리고 빚 투성이의 집을 가진 죄로 부과된 일년에 천만원의 종합부동산세는, 여전히 부모님이 쳇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더불어 네 살 터울의 동생이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아버지가 오십을 바라보며 직장에서 입지가 흔들리면서, 가정의 경제력마저 점점 저물어가고 있었다. 그 때도 나는 몰랐다. 어머니의 찬란했던 젊은 시절을, 그 꿈을.

“나 오디션 붙여준게 누군데, 당신이잖아. 그런데 왜 당신이 날 막아? 나 정희연이야, 왜 자꾸 아줌마라고 불러! 나 할 거야, 이번 일 끝나고 집에 들어가서 싹싹 빌거야. 그러니까 내버려 둬. 할 거라구.”

어느 날 집에 들어왔는데, 어머니가 인터넷을 하고 있었다. 흔치 않은 풍경이라 무얼 하나 들여다 봤더니, 다음 카페 마크가 눈에 들어왔고, 어머니의 설명이 이어졌다.
‘나 고등학교 때 합창단 했잖아, 그 땐 교회도 안 다녔는데, 왜 거길 갔나 몰라. 딸린 동생들 때문에 인문계는 못 가고, 상고 갔지만 그래도 부산에서 공부 잘 해야 갈 수 있는 학교였어. 합창단도 그랬고. 부산에서 알아주는 학교에서만 왔다고. 그동안 연락을 못 하고 지냈는데, 이번에 공연 한대. 나, 한다고 하면 니네 아버지, 성질 내겠지?’ 

“공연한답시고 회사 때려치면 그게 미X놈이지, 우리가 청소년이야? 요즘 봐라, 애들도 칼같이 성적맞춰서 대학 가. 그래도 나중에 보면 그 놈이 더 잘 살아. 적성이 어딨어, 꿈이 어딨어, 먹고살기도 바빠 죽겠는데.”

그러나 왠지 모를 힘에 이끌린 어머니는 모임에 참석했고 그런 날이면 매번 싱글생글한 얼굴로, 옛 향수와 추억과 감동에 젖어 돌아오곤 했다. 자연히 시간은 늦어졌고 그런 모습 자체를 아버지는 불편해했다. 몇 번 호통도 쳤던 것 같다. ‘여편네가 집에는 안 있고, 집안 꼴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신경도 안 쓰고, 그런 데나 돌아다니면서 잘 하는 짓’이라는 드라마의 그 대사가 구구절절하게 와 닿았던 것은 그런 까닭이다. 심지어는 나 마저도, 아니 뭐 그런 걸 한다고 그러나, 해도 그만이고 안 해도 그만인데 왜 목소리 올라갈 일을 찾아 나설까, 하며 마음속으로나마 타박을 했던 것이다. 집안의 분위기는 밝지 못했고 경제적인 어려움도 더욱더 깊어졌다. 그래서, 이번엔 빚을 다 정리하고, 집은 전세를 주고, 작은 집으로 이사를 했다.

“한 병 더 시켜요?”
“아냐, 됐어. 내일 출근해야돼. 많이 마시면 후달려서 일 못해. 아 씨, 알딸딸해야되는데, 오늘은 취하지도 않네.”

결국 어머니는 공연을 했다. 두어 번. 당시의 선후배들과 한 자리에 모여, 이제는 성공한 지휘자가 된 선배의 지휘에 맞추어, 기억을 더듬어가며 십수년동안 없었을 행복한 순간을 맞았을 것이다.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나 한 몸 떠돌아다니며 놀 생각밖에 없었으니 참담한 일이다. 그리고 내가 그 참담함을 미처 깨닫기도 전에, 어머니는 그 곳 모임을 그만두었다.

“행복해? 고장난 신호등 대신해 허우적거리고, 매연에 찌들어 가는게. ”
“배우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꿈으로 내버려 두렵니다.”
“그게 꿈이야? 별이지, 하늘에 떠 있는. 시도조차 할 수 없는 가질수도 없는 하늘에 떠 있는 별.”

오랜만에 집에 전화를 한다. 어머니는 집에 없다. 그렇구나, 생각을 해 보니, 요즘 텔레마케팅의 여왕으로 거듭났다고 했다. 처음엔 철도 회원카드 가입 권유 전화를 돌렸었는데, 한 번의 힘겨운 이직 - 이제는 어디를 가더라도 나이가 제일 많은 축에 든다고 한다 - 을 거쳐 모 은행에서 카드론을 판다고 했다. 그래도 생각보다 실적이 좋아 옮긴 첫 달에 1억 7천을 팔았다며 성과급의 기대감에 들떠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쓰리고 답답하고 속상한 속을 어찌 달래야 할 지 도무지 방법을 찾을 수가 없어 전화기를 내려놓자마자 노래방에 갔다. 몇 곡을 연달아 불러 재꼈지만 분노가 가시지를 않는다. 왜 지금까지 몰랐을까, 그 모임이 어머니에겐 마지막 남은 보석상자였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밟아버리고 지나간 내 자신이 원망스럽고 한탄스러워서 눈물도 나오지를 않았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단 한 번도 내색을 한 적이 없다. 아니, 있다. 있되 철저하게 현실의 계산 속에서의 아쉬움일 뿐이었지 그 이상으로 나아가는 법은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하프 말입니다.”
“아, 헤어졌지.
우리같이 예민하고 소심한 사람은 못 해, 그런 거.“

강마에는 우리같이 예민하고 소심한 사람은 사랑 같은거 못 한다고, 그래서 젊은 날 연인과 헤어졌다고 말했다. 팔자 좋고 태평한 소리다. 생활과 현실의 굴레에 묶여 한 발 나아가기가 살얼음판을 걷는것보다 두렵고 무서운 정희연씨에게 그가 과연 똥덩어리라는 독설을 퍼부을 자격이 있는가. 정말 그리워하고 소망하고 하고 싶은 일이지만 어머니는 짧게 되새기고, 거기서 멈추어 섰다. 이번 공연만 하고 집에 가서 싹싹 빌 거라던 정희연씨처럼 말이다. 툴툴거리던 남편이 결국 바람이 나 외도를 하는 모습을 목도하지 않은 것을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것일까.

안타깝다. 이제는 다시 되새기고자 해도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과거가 되어버린 어머니의 마지막 꿈, 할 수만 있다면 하늘에 가서라도 따 오고 싶다. 배움이라는 허울 속에 대학에서 부렸던 나의 지적 사치와 허영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희생시켰는지, 그리고 그 헌신의 당사자인 당신이 내게 그토록 기대하고 갈구했던 그것을 내가 얼마나 만족시켰는지, 생각하면 아찔하고 서글퍼져 감히 말을 꺼낼 수가 없다. 화두를 꺼내면 아마 그저 웃으며 그 때 좋았지, 하실 당신께, 드릴 것 하나 없는 나는 언제까지 불효자식인가. 언제까지 얼마나 더 참으시라고 기다리시라고 이야기할 것인가.

불필요한 자기학대는 하지 말자. 그저 지금부터 시작일 뿐이라고 이야기하자. 희망을 노래하고 내일을 긍정하자. 어머니, 이름만으로 눈물이 맺히는 그 이름, 이 저녁에 울긋불긋한 개구리옷을 입고 앉아 불러본다. 훌쩍대니 옆에 앉아있는 누군가가 무슨 일 있냐고 물어오는데, 그저 웃을 뿐이다.
소망한다. 당신의 꿈이 다시 불타오를 때가 오기를. 그리고 그 중심에 내가 앉아 박수쳐드릴 수 있기를. 어찌된 영문이지 내 머릿속에 어머니의 공연 모습은 없다. 그리고 그렇기에 나는 소망할 수 있는 것이다. 가장 아름다운 시간, 무대에서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그 모습을 가장 선명하게 기억속에 남길 수 있을 그 때를, 

사랑합니다. 이 말 한 마디가 그리도 어려워서 이렇게 돌아 왔나요. 엄마, 미안해요.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11-18 12:12)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8-12-08
20:34:05 

 

병장 김기태 
  ...................엄마보고싶네.........젠장 2008-11-14
23:14:41
  

 

상병 이지훈 
  ............. 2008-11-15
00:13:18
  

 

병장 최석태 
  ......... 2008-11-15
00:33:30
  

 

상병 이강석 
  우와... 정말 말이 안나오는 글이네요. 
잘 봤습니다. 날 밝으면 집에 전화나 한통 해야겠어요. 2008-11-15
06:08:29
  

 

병장 정병훈 
  흐흐흐 민규님. 
전 이런 글 참 좋아합니다. 아무나 쓸수 없는게, 경험에서 우러나오기 때문이죠. 2008-11-15
07:14:31
  

 

병장 김낙현 
  좋군요. 고맙습니다. 2008-11-15
08:15:17
  

 

일병 송기화 
  우오, 민규님. 멋집니다. 
저희 어머니의 보물상자는 초등학교 동창회에요. 
그래서 전 어머니가 동창회에 가시면 
아버지에게 하루 세 끼 식사와 
하루를 일용하실 무협지와 액션영화를 준비하죠. 

아뇨, <가지로>라구요. 2008-11-15
08:21:53
  

 

병장 신지훈 
  저도 <가지로>. 느끼는게 많네요~ 2008-11-15
08:30:38
  

 

상병 이우중 
  가지로. 
민규님, 고맙습니다. 
뭐가요? 이런 글 써 준게요. 2008-11-15
10:29:15
  

 

상병 정민우 
  완전 감동이네요 
저도 예전에 가끔씩 어머니랑 옛날 이야기할때 
아쉬워하시던 모습이 생각나네요 2008-11-15
13:28:37
  

 

병장 장상원 
  <가지로> 

오늘따라 이렇게 안구에 습기를 빼는 글들이 왜이렇게 많은지 모르겠습니다.(울음) 2008-11-15
22:30:35
  

 

상병 강수식 
  이런건 가지로 보내야죠 

<가지로> 2008-11-15
23:04:46
  

 

일병 송창근 
  베토벤 바이러스 보면서 "똥떵어리"만 알았지 이시대 어머니들의 대변인 정희연 씨는 잊고 있었네요.. 


엄마~ 


요약하면 <가지로> 2008-11-15
23:34:09
  

 

병장 정영목 
  저도 뒤늦게 <가지로> 2008-11-18
13:13:19
  

 

병장 이동석 
  사실 제가 가지로 보내면서도 열 댓개의 가지로 물결을 봤었는데, 뒤는 타임리프덕에 날아갔군요. 흐흐. 2008-11-18
17:56:24
 

 

병장 문두환 
  킁...내 빈 자리 채우는 시간에 쓴 글이라니. 그래서 난 이렇게 늦게 보는구나. 넌 자고 있고. 나는 가급적이면 남 앞에서 집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말을 하다보면 가슴이 턱-하니 막히는 것 같거든. 어쨌든 이제부터라도 더 치열하게 살려고 하는 것은, 결국은 부모님 때문이더라. 자세한 이야기는 담배나 한 대 피우면서. 푸흐흐. 잘 봤다. 정말 좋은 글이었어! 2008-11-21
22:53:06
  

 

상병 강도훈 
  잘 보고 갑니다. 2008-11-22
19:4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