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글-내글내생각] 발자크, 근대 도시 파리의 가장 탁월한 비평가  
일병 김예찬   2008-09-05 19:31:39, 조회: 387, 추천:4 





“파리는 그야말로 하나의 대양이다. 음파를 발사해보라. 절대로 그 바닥이 어디인지도 모를 것이다. 이 대양을 조사하고 취재해보라! 아무리 빈틈없이 조사하고 취재한들, 이 대양의 탐험가들의 수가 아무리 많고 끈질기다한들, 항상 손닿지 않는 곳이, 알려지지 않은 동굴이, 꽃, 진주, 괴물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문학의 잠수부가 놓친 뭔가 특별한 것이 언제나 있을 것 이다.”



                                                                                                           오노레 드 발자크




“발자크는 정확한 지형적 등고선을 그려 세계의 신화적 정체성을 확고히 세웠다. 파리는 그의 신화가 자라난 곳이다. 두 세명의 거대한 은행가가 사는 파리, 위대한 의사인 오레스 비앙숑을 거느린 파리, 흥행 사인 세자르 비로토를 지닌 파리, 너덧 명의 대단한 매춘부가 있는 파리, 고리대금업자인 고브섹이 있는 파리, 잡다한 변호사와 군인들이 있는 파리가 그런 곳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 또 우리도 거듭 보게 되겠지만 - 이 세계의 형태가 빛을 보게 된 것은 바로 그 거리와 길모퉁이, 그 비좁은 방과 음푹한 구석에서였다. 그런 지형이 이 신화적인 전통의 공간의 평면도라는 것 이외에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달리 무엇이겠는가? 그런 공간에서는 그런 일이 항상 일어나며 또 정말로 세계의 열쇠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






대학 1학년 때 우연히 - 사실은 사모하던 여학생과 같이 수업을 듣기 위한 속셈에 - 불문학과 관련된 수업을 하나 듣게 되었습니다. 한 학기 동안 수업을 들으면서 그 여학생과 관계도 많이 진전되어 결국 연인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학점도 잘 나와서 결국에는 매우 보람찬 수업이 되었습니다만, 아무튼 중요한 것은 그 수업을 통해서 이전까지 청소년용 축약본으로만 읽었던 발자크의 소설들을 본격적으로 접하게 되었던 것이 이후 저에게 커다란 지적 자극으로 다가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발자크의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혁명기 프랑스의 혼란과 격동, 그리고 자신의 야심과 생존을 위한 작중 인물들의 동물적 몸부림은 저에게 프랑스 근대사에 대한, 특히 파리라는 도시에 대한 커다란 관심으로 이어졌죠. 특히 [고리오 영감]의 마지막 장면, 혁명의 혼란 속에서 스스로를 보존하기 위해 미친 듯이 재산을 모았지만, 이 재산을 딸들의 영화를 위하여 허망하게 날려버린 채 파리라는 거대한 도시에 삼켜져 버린 고리오 영감의 죽음을 보면서 작중 주인공인 라스티냑이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에서 파리 시내를 내려다보며, “이제 너와 나 둘 사이의 대결이다!”라고 울부짖을 때 느꼈던 묘한 전율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발자크와의 만남을 통해 가지게 된 파리에 대한 관심은 제 전공인 서양사 중에서도 도시사에 대하여 꾸준히 공부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도시 공간에 대한 제 흥미는 또 다시 급진지리학자인 데이비드 하비의 책들을, 그리고 발터 벤야민의 아이디어를 만나게 되는 과정으로 이어지게 되었죠. 마침 이번에 나들이 다녀오면서 발자크의 책들도 읽었겠다, 그리고 마침 돌아오자마자 홍명교 님이 발자크의 작품들에 대한 후기도 적으셨겠다, 해서 발자크에 대한 제 사랑과 근대 도시 파리에 대한 동경을 묶어 벤야민과 하비의 아이디어를 빌린 잡글을 한번 늘어놓아 보려고 합니다.


19세기 프랑스의 박물지, <<인간 희극>>


먼저 발자크의 작품들에 대해 간략히 한번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명교님도 발자크의 <<인간희극>>에 대해 소개해놓으셨지만, 좀 더 부연하여 써 보겠습니다. 발자크의 <<인간희극>>은 한마디로 말해 발자크의 96편에 달하는 단편, 장편들을 하나로 묶어놓은 작품모음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1789년의 대혁명에서부터 1848년의 2월 혁명에 이르기까지의 프랑스 사회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는 작품들입니다. 발자크는 <<인간희극>>의 작품들에서 극빈자, 범죄자, 알콜 중독자, 창녀, 고아, 사기꾼 등 사회의 밑바닥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에서부터, 몰락 귀족, 소상인, 고리대금업자 등 중간 계층의 인물들, 그리고 정치가, 고위 관리, 저널리스트 등 상류 사회의 인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을 등장시키면서 혁명을 통해서 변해가는 프랑스 사회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발자크는 활발한 창작 활동을 통해 프랑스 사회에 대한 탁월한 비평가로 떠오르게 됩니다. 만년의 발자크는 그의 독립된 작품들을 큰 틀로 묶어, 서로 연관되는 작품들을 4부로 구성하여 <<인간희극>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됩니다. 결국 <<인간 희극>>은 미완의 프로젝트로 남기는 했지만, 단테의 중세의 마지막 황혼을 장식한 <<신곡>>에 대응하여 근대적 인간 군상의 출현을 외치는 야심찬 선언이라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고 말 할 수 있겠습니다. 


파리, 거대한 부르주아 사회


<<인간희극>>의 주요 작품들에서는 파리라는 도시 공간이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작품인 [고리오 영감]은 발자크가 파리라는 거대한 ‘대양’에 대해 끈질기게 조사하고 취재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1830년대의 7월 왕정기를 무대로 하는 이 작품은 파리의 “정념에 사로잡힌 인간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당시 프랑스의 정권을 잡고 있던 기조 내각은 부르주아 입헌 군주정 체제를 지속시키면서 유산 계급을 위한 정책들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사유 재산에 따른 참정권 제한입니다만, 기조 내각과 그를 지지하던 부르주아들은 선거권 확대를 요구하는 민중들에게 “억울하면 돈을 벌어서 선거권을 획득하라”고 자신 있게 외치곤 했습니다. 19세기의 부르주아들은 앙시앙 레짐을 무너뜨린 승리자들이었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주인공들이었습니다. 부르주아들은 이미 프랑스 혁명을 통해 ‘자기 자신의 형상을 따라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냈던 것입니다. 이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사회는 개인의 에너지를 자극하고 힘을 고무하면서 역사 속에서 무한한 변혁과 발전의 요인들을 발견하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경쟁하며 재창조되는 사회였습니다. “생산의 끊임없는 변혁, 모든 사회 상태들의 부단한 동요, 영원한 불안과 격동 등이 부르주아 시대를 다른 모든 시대와 구별해 준다”는 맑스의 분석은 이 시기, 프랑스 파리라는 도시에 가장 어울리는 것이었습니다. 19세기 파리는 새로운 부르주아 문화의 정점을 보여주는 곳이었는데, 최초의 근대적 백화점이라 할 수 있는 봉 마르셰 백화점이 등장했고,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던 미술품을 부르주아의 품으로 끌어낸 루브르 박물관이 등장했습니다. 파리의 부르주아들은 전람회를 통하여 예술가들과 상업적으로 관계 맺게 되고, 이는 파리가 미술의 중심지로 거듭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요.

하지만 파리는 화려한 부르주아 문화의 산실일 뿐 만 아니라, 노동자 계급의 비참한 삶의 무대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파리에는 도시의 성장과 지방 농촌 공동체의 붕괴 등의 이유로 굉장한 수의 임노동자들이 몰려들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노동력의 과잉 현상이 발생하게 되었고, 이는 노동자 계급 전반의 삶의 저하 현상을 낳게 되었습니다. 이후 나폴레옹 3세 시대에 접어들게 되면, 파리 시장 오스망 남작의 주도 하에 파리가 전면적으로 재정비되게 되는데, 이에 따라 노동자들과 부르주아의 거주 지역은 더욱 확실하게 구분되어, 노동계급의 삶은 파리 뒷골목 슬럼가에 은폐되고 맙니다.



‘차별화된 파리’의 신화



이와 같은 부르주아와 노동 계급의 삶이 공존하는 파리라는 도시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당시 파리 시민들이 파리에 대해서 어떠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는지 먼저 이야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리오 영감]에서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작중 화자인 외젠느 드 라스티냑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경쟁하는 파리 사회에 새롭게 도전하는 인물입니다. 시골의 가난한 귀족 집한 출신으로 법학을 공부하러 파리로 상경한 라스티냑은 귀족 부인인 친척과 연결되면서 파리 사교계에 데뷔하고, 사교계를 통한 신분 상승을 꿈꾸게 되면서 파리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살롱, 극장, 번화가와 파리의 주변부인 뇌브 생 쥬느비에브 거리의 하숙집을 오가며 파리 생활을 하게 됩니다. 작품 초반부에는 부모님과 귀여운 두 누이와 함께 했던 소박한 시골 생활을 추억하며 법학 공부를 통하여 성공을 다짐하는 라스티냑이지만, 화려한 사교계를 통해 세속적 욕망을 키워나가게 되면서 라스티냑은 혹시 파리에서 겪은 실패 때문에 결국 파멸하게 될 지라도 절대로 파리 상경을 후회하고 시골로 돌아가지는 않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고리오 영감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후, 파리와 대결을 선언하는 작품의 결말이 그의 이러한 생각을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시골 출신이라는 사실에 대한 격렬한 부정이 나타나는 것은 발자크의 다른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잃어버린 환상]에 등장하는 시인 뤼시엥 역시 시골 출신으로, 파리에 대한 낭만적인 열정에 심취해 파리로 상경하고, 진짜 파리지앵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허영에 물들게 됩니다. 이러한 파리 생활에 대한 과도한 환상은 결국 그를 파멸로 이끌게 됩니다. 그러나 뤼시엥은 파리에서 겪은 실패로 인해 귀향하게 된 후에도 자기 고향과 고향 사람들을 경멸하며 도시적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잃지 않으려 합니다.


이처럼 지방에 대한 파리 시민들의 격렬한 부정은 대부분의 파리 시민들이 사실 지방 출신이라는 사실에서 초래됩니다. 파리의 인구는 1831년, 78만여 명에서 1846년의 100만명으로 급증세를 보입니다. 산업은 놀랄만한 성장을 보였고, 국가 행정은 물론 교통과 금융, 상업과 문화까지도 수렴하는 전국적 허브로 재도약하게 됩니다. 프랑스 전역이 파리로 연결되고, 산업화의 영향으로 전통적인 농촌 공동체가 무너지면서 출세와 성공을 위해 파리로 수많은 인구가 유입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인구 유입으로 노동 계급, 중산층, 상류 부르주아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급에서 진짜배기 파리지앵보다 지방 출신의 파리 시민들이 더욱 많아지게 됩니다. 비단 인구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 등 파리가 가지는 상대적 우위는 지방의 광대한 토지, 농촌 공동체, 지방 귀족 사회에 그 원천을 두고, 이를 파괴하거나 도시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면서 형성된 것입니다. 파리 시민들, 그리고 그들의 기반이 사실은 지방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파리 시민들은 도시적 생활양식에 더욱 더 집착함으로 열렬하게 그 사실을 부정하려고 애쓰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부르주아 계급, 노동자 계급을 따지지 않고 마찬가지로 등장하는 현상입니다. 이처럼 근대 도시 파리는 파리 시민들 전체에게, 다른 궁색한 지역과는 다르다는 하나의 신화로 자리 잡게 됩니다. 이러한 파리 시민들의 지방에 대한 경멸과 부정은, 이후 시기의 정치적 격변에서 지방에 대한 파리의 정치적 주도권을 끊임없이 주장하는 양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2월 혁명이나 파리 코뮌 등에서 볼 수 있듯이, 파리는 보수와 정체의 정치성을 보이는 지방과는 다른, 파리 중심의 급진적 정치색을 보이게 됩니다.




파리의 공간에서 나타나는 계급 질서



파리의 모든 구역에는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 무슨 일을 하는지, 어디 출신인지, 무엇을 추구하는지를 드러내주는 생존 방식”이 있습니다. 이에 따라 나뉘어지는 계급을 갈라놓는 물리적 거리는 “그들을 갈라놓아야 하는 도덕적 거리를 물질로 축성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사회계급의 분리는 공간적 생태 뿐 만 아니라 수직적 격리라는 형식으로도 존재합니다. 파리는 “머리는 과학자와 천재들이 거주하는 다락방에 있고, 2층은 잘 채워진 위장들 - 부르주아들 -을 수용하며, 1층은 다리와 발을 이루는 상점들이 차지한다. 분주한 거래가 그 곳을 종종걸음으로 출입하기 때문이다.” 발자크는 이러한 서술을 통해 계급적 질서가 도시 공간 유형에도 반영되어 있음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공간 유형은 계급 간의 도덕적 질서를 지탱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사회학자인 로버트 파크는 도시를 공간 유형과 도덕적 질서의 배열로 보고, 사회관계는 공간 유형이 도덕적 질서의 반영이자 그것의 재생산 계기가 되는 방식으로 도시 공간 속에 새겨져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발상은 발자크의 소설 전반에서 그대로 구현되고 있습니다. “파리 역사의 모든 단계에서 상류 계급과 귀족은 자기들만의 중심을 갖고 있고, 그와 마찬가지로 평민들의 파리도 언제나 자기들만의 특별한 구역을 갖게 될 것이다.” 이처럼 계급에 따른 미세한 변형들이 도시의 사회 공간적 형태 속에 짜 넣어지게 됩니다.

“파리에서는 저 괴물 같은 도시의 어떤 부분이든 그 외모에 한몫을 하는 여러 다른 유형들이 총체적인 성격과 아주 근사하게 조화한다. 그러니 콩시에르쥐, 또는 수위, 또는 현관짐꾼  등 파리라는 괴물 내부의 본질적인 신경 시스템인 이들을 뭐라 부르든 그들은 자신이 활동하는 구역에 적응하며 때로는 그 구역의 성격을 요약해주기도 한다. 포부르 생토노레의 콩시에르쥐는 옷솔기마다 수술 장식을 단 여유 있는 사람으로서, 정부 주식에 투자한다. 쇼세당탱의 짐꾼은 육체적 쾌락, 특히 먹는 것을 즐긴다. 주식 교환소의 수위는 신문을 읽는다. 포부르 몽마르트르의 짐꾼은 장사를 한다. 창녀들이 점거한 구역에서는 여자 짐꾼 본인이 은퇴한 창녀이다. 마레 구역의 짐꾼은 지위가 있는 사람이며 꽤 까다롭고 변덕스럽다..”

이처럼 공간 유형은 그 공간을 점유하는 사람들을 반영하며, 또한 그들 계급의 도덕적 질서를 강요하게 됩니다. 발자크의 [13의 이야기]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이 이러한 공간 유형을 어기게 되며,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로 움직이고 결국 죽게 됩니다. 자신의 신분에 맞지 않는 구역을 침범하는 등장인물은 도시의 계급적 조화를 깨뜨리며 도덕적 질서를 혼탁하게 하므로 그 대가를 치르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있어야할 장소를 알지 못하고, 길을 잃고 밀어닥치는 흐름에 쓸려 다니게 된다면 도시는 위험한 장소로 변하게 됩니다. 이렇게 공간 유형에 따라 등장인물들에게 도덕적 질서가 강요된다는 것은 발자크의 작품 뿐만 아니라 다른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고리오 영감] 만큼이나 우리에게 친숙한 프랑스 소설인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을 떠올려 봅시다. [목로주점]이라는 제목 자체가 노동자들이 힘든 노동을 끝내고 싸구려 독주인 압생트에 취해 쓰러지는 파리 뒷골목이라는 공간 유형을 상징합니다. [목로주점]의 주인공인 제르베즈라는 여인네는 파리로 상경한 후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어떻게든 건실하게 살아보려고 애쓰지만, 파리의 뒷골목이라는 퇴락과 실패의 음침한 공간에서 그녀의 노력은 부질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목로주점]의 결말에서 실성한 제르베즈는 목로 주점에서 압생트에 취해 쓰러지고, 그녀의 어린 딸은 뒷골목 거리로 꽃을 팔러 나갑니다. 다들 꽃을 파는 여자라는 것은 매춘부를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비유죠. 이렇게 공간 유형이 사람들의 삶을 강제하게 되는 도시의 삶은 당시의 노동자들이 빈곤의 삶을 이어가게 되다가, 결국 집단적으로 거리에 나서면서 시위를 통해 혁명이라는 극단적 정치적 수단에 호소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파리의 거리와 그 구성원들



이와 같이 공간적 유형에 따라 강제되는 도덕 질서는 파리의 거리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파리의 중심부를 지나는 대로 가운데 귀족들의 거리인 포부르 생 제르맹, 경제적 중심지인 증권거래소, 정치적/문화적 중심지인 팔레 루아얄, 상업 구역인 생토노레가, 소르본 주변의 학생 구역, 파리의 노동계급이 사는 프티 폴로뉴와 포부르 생 앙투안... 각각의 거리의 구성원과 그 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격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발자크가 만들어낸 캐릭터들이 가지는 희망과 욕구와 공포는 이처럼 그들이 지나다니는 거리와 이웃들에게도 의미와 성격을 부여하게 됩니다. [고리오 영감]에서 라스티냑이 거주하게 되는 보케르 하숙집이 위치한 뇌브 생트 쥬느비에브 거리가 대표적입니다. 발자크는 “부스러지는 회반죽 조각과 진창으로 시커멓게 된 하수구가 들어찬 골짜기, 진짜 고통과 대개는 가짜 기쁨으로 가득 찬 골짜기”로 [고리오 영감]의 무대에 대해 설명을 시작합니다. 보케르 부인의 하숙집은 발드그라스와 팡테옹 사이의 거리에 서있습니다. 그 곳에서는,


"바퀴 달린 교통수단이 다니지 않기 때문에 이 거리의 정적은 깊어진다. 이 거리를 지배하는 그 정적은 발드그라스와 팡테옹의 돔 사이에 꽉 들어차 있는데, 이 두 건물은 둔중한 돔 지붕을 가진 답답한 집으로, 거리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대기를 어둡게 한다. ... 아무리 주위에 신경 쓰지 않는 통행인일지라도 여기서는 불쾌한 기분을 느끼고 바퀴 소리 조차 뭔가 비정상적이고 집들은 우중충하고 벽은 감옥처럼 보인다. 이곳에 사는 파리 시민은 주위에서 하숙집과 관공서, 비참함과 피로 외에 아무것도 보지 못할 것이고, 늙은이는 무덤으로 빠져들고 유쾌한 젊은이는 운명적으로 쳇바퀴에 얽매이게 된다. 이곳은 파리에서 가장 음울한 구역이며 제일 덜 알려진 구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발자크는 이러한 전체적인 분위기를 카타콤에 내려가는 것에 빗대면서 우선 이웃들에 대하여 묘사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낮에는 작은 쪽문이, 밤에는 튼튼한 철문이 담으로 둘러싸인 정원과 거리를 격리시킵니다. 벽에는 덩굴이 덮여있고 시렁으로 받쳐진 과수와 포도들도 있어서 보케르 부인은 혹여나 그 열매를 누군가 훔쳐 가지 않을지 항상 감시하고 있습니다. 3층짜리 하숙집 건물은 누르스름한 빛깔로 칠해져 누추해 보입니다. 가구의 “모든 것은 더럽고 얼룩져 있다. 넝마나 누더기는 없지만 모든 것이 삭아서 부서지고 있다.” 이러한 보케르 하숙집에 대한 암울한 묘사가 끝나면 드디어 하숙집의 주인 보케르 부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녀는


"베일 달린 모자를 쓰고 주름진 슬리퍼를 신고 발을 질질 끌고 등장한다. 그녀의 늙어가는 부스스한 얼굴을 지배하는 것은 앵무새 부리 같은 코이며, 살이 쪄서 울룩불룩해진 작은 손, 성당의 쥐처럼 통통한 몸뚱이, 퉁퉁하게 모양새 없는 옷은 벽에서 비참함이 스멀스멀 새어나오며 짓밟히고 질식당한 희망이 절망에 굴복한 이 방 과 제대로 잘 어울린다. ... 간단하게 말해 그녀의 전체 인격은 하숙집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또는 하숙집 자체가 그녀같은 사람의 존재를 함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생활 여건과 인물의 생김새, 그리고 그 인격은 일관성을 가지는 것으로 서술됩니다. 이 암울한 하숙집에 거주하는 하숙인들 또한 그들의 생태적 활동 구역과, 하숙집이라는 두 가지 공간에서 영향받은 성격을 가지게 됩니다. 주인공 라스티냑은 아침마다 가난하고 암울한 하숙집에서 벗어나면서 파리라는 공간을 새롭게 발견하고, 그 날 있을 사건들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파리 중심부로 향합니다. 그러나 하숙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길은 하루에 대한 후회와 반성의 시간이 됩니다. 사교계라는 파리의 중심부와 하숙집이라는 주변부를 오가던 라스티냑은 결국 고리오 영감의 둘째 딸인 델핀느와 따로 집을 얻기로 합니다. 이는 라스티냑이 파리의 삶에 완전 적응했음을 의미하면서, 그의 인격이 출세 지향적으로 완전히 돌아서게 된다는 뜻입니다. 반면, 장기간 하숙하면서 하숙집 밖으로 나서는 일이 없는 고리오 영감은 하숙집의 풍경처럼 스스로 낡아가고, 스러져 갑니다. 그가 유일하게 활력을 가지는 순간은, 라스티냑에 의해 중심부의 소식, 특히 그녀의 두 딸들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는 순간 뿐입니다. 이야기의 초반부터 카타콤에 비유되던 하숙집 - 파리 주변부 -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고리오 영감은, 결국 죽어서 공동묘지에 묻히는 결말을 맞게 됩니다. 이처럼 발자크는 작중 인물들과 그들의 생활공간 간의 연관을 통하여 파리의 거리들이 가지고 있는 성격을 탐색하고, 이를 대중들에게 보여주려고 한 것입니다.



공간과 시간의 말살 - 하나의 유기체로서의 파리 등장



19세기는 철도의 보급과 통신기술의 발달로, 이전보다 시공간이 상대적으로 확연하게 축소되는 경향을 보이게 됩니다. 맑스 역시 자본주의의 지리적 팽창과 자본 순환의 가속화 경향이 가지는 혁명적인 성질에 주목하여, 자본주의의 경향성은 주기적으로 ‘시공간 압축’을 벌이는 것에 있다고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모든 시공간적 장벽을 축소시키고 제거하려는 부르주아들의 끝없는 욕구는 이러한 혁명적 욕구를 세속적으로 해석하는 양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발자크는 부르주아적 사업 관행의 이 같은 세속적 면모를 소재로 작품들을 구성하였습니다. 그는 “법률가, 의사, 변리사, 사업가, 은행가, 대규모 상인들의 무리는 시간을 게걸스럽게 삼키고 시간을 쥐어짠다. 왜냐하면 시간이 그들의 독재자이기 대문이며,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시간은 그들에게서 빠져 달아나며 그것을 늘일 수도, 줄일 수도 없다.” 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시간을 쥐어짜는 부르주아’의 이미지는 근대의 중요한 특성이기도 합니다. 법률가, 의사, 변리사, 사업가... 등에게 의해서 시간은 곧 돈으로 환산되게 됩니다. 법률가의 상담 시간, 의사의 진료 시간에 따른 요금 지불 등을 생각하면 간단히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근대 이전에는 돈으로 환산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던 ‘시간’의 계량화, 화폐화, 상품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시간 뿐만 아니라 공간에 대해서도 부르주아들의 의지가 개입됩니다. 발자크는 “인간은 그 자신과의 관련 위에서만 존재하는 공간을 자기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말살할 엄청난 능력을 갖고 있다. 또 자기가 거주하는 여건 속에 스스로를 완전히 고립시킬 능력과, 거의 무한한 이동력에 힘입어 물리적 자연의 광대한 거리를 건너갈 능력도 있다”라고 선언하면서 공간의 말살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이처럼 시간과 공간의 말살이라는 관념은 도시 공간에서 극적으로 나타납니다. 도로와 도로, 골목과 골목으로 이어져있는 파리는 나폴레옹 3세 시기, 파리 시장인 오스망 남작의 주도로 재정비됩니다. 발터 벤야민이 그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생생히 보여주듯이, 이러한 파리의 ‘오스망 化’ 로 인하여 넓게 뻗은 대로가 나타나고, 상점들이 밀집된 넓게 뻗은 통로인 아케이드가 등장합니다. 파리라는 도시는 이러한 변화를 통하여 시공간적으로 연결된 독립된 유기체로 재탄생합니다. 발자크는 하나의 유기체로서의 파리를 일찍이 파악하고, 그의 작품을 통해 독자들에게 이를 선보입니다.

"그는 굽이치는 세느강의 양편 제방에 파리가 펼쳐져 있는 것을 보았다. 불빛들이 여기저기서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눈길은 방돔 광장의 원기둥과 앵발리드의 돔 사이에 있는 공간에 탐욕스럽게 못박혀있다. 그곳에 그가 정복하기를 원하는 찬란한 세계가 놓여 있다. 그는 약탈을 예고하는 표정으로, 마치 그의 입술에 벌써부터 벌꿀의 단맛을 느끼는 것처럼 그 웅웅거리는 벌집을 쏘아보면서 도전적으로 말했다. “이제 ‘너’와 나 둘 사이의 대결이다!”"





도시의 관찰자, 산보객



이처럼 하나의 유기체로 등장한 근대 도시는 근본적으로 물신적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시라는 공간이 근본적으로 상품의 유통을 목적으로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도시는 자본주의적 확산에 특화된 공간입니다. 발자크에 따르면 이 도시에 사는 모든 사람은 “돈의 필요라는 … 무자비한 여신의 채찍질 아래에서” 달리고 뛰고 펄쩍거리거나, “투기라 불리는 괴물”에게 잡아먹힙니다. 각자 다른 성격을 가지고 그 구성원들을 규정하는 파리의 길거리들은 돈의 흐름에 따라 확장되거나, 축소되거나, 재정비 됩니다. 걸거리의 형태가 재구성된다는 것은 앞서 보았던 것처럼 공간 유형에 따라 도덕적 질서가 규정됨으로 구역의 사회관계를 새롭게 재구성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도시에 영향을 끼칠 뿐 아니라, 도시가 하나의 감정을 가지는 존재로서 시민들을 재구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서 도시는 하나의 ‘신체정치’로서의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도시의 성격을 꿰뚫어 보기 위해서 발자크는 어떠한 방법을 택한 것일까요? 발자크는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산보객’들을 통해 자신이 도시를 관찰하고, 분석한 방법을 제시합니다. <<인간 희극>> 연작에 등장하는 산보객들은 단순히 도시의 이쪽에서 저쪽을 이동할 뿐 만 아니라, 이동의 과정에서 파리의 모습을 재발견하고 도시 지형의 지도를 그려냅니다. 산보객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서 우리는 더 친근한 예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 근대 경성을 활보한 두 명의 산보객들입니다. 바로, 박태원이 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주인공인 ‘구보씨’와 이상의 소설 [날개]의 주인공 ‘나’가 바로 그들입니다. 재미있게도 박태원과 이상은 같은 동인에 속해 있던 친구 사이로,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는 이상을 모델로 한 구보씨의 친구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구보씨’와 ‘나’는 그야말로 할 일 없이, 혹은 하릴없이 경성 바닥을 돌아다닙니다. 그들은 경쟁하고 르게 변화하는 근대 부르주아 사회에서 내 팽겨쳐진 룸펜입니다. 그들은 일본 기업이 세운 휘황찬란한 근대적 백화점과 은행 건물에 감탄하고,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도시를 바라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근대화 된 경성을 바라보는 시선의 한 구석에는 항상 이러한 근대화에 의해 내쳐지게 된, 자신과 같은 존재들에 대한 인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들의 하루하루는 니힐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근대적 도시 공간은 구성원으로 하여금 이러한 니힐에 빠지게 만듭니다. 발자크의 표현을 빌리자면, ‘구보씨’나 ‘나’와 같은 “수천 명의 뿌리 뽑힌 인생들”이 도시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구보씨가 경성을 거닐면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 모두에게는 그 각자의 인생이 있고, 스스로의 사적 세계가 존재합니다. 이와 같은 수많은 사적 세계들이 공존하는 세계가 바로 도시입니다. 각자의 구보씨들, 각자의 ‘나’들, 각자의 라스티냑 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도시를 걸으며 ‘근대 도시라는 신화’를 폭로합니다. 돈 계산에 근거한 가치의 허망함, 부와 외모에 기반한 근대적 연애 관계에 대한 비판, 유산자와 무산자를 격리하는 도시 구조의 기만성... 산보객들의 폭로는 부분적이지만, 이러한 부분적 폭로가 중층을 이루면서 결국 끝없는 자본축적과 투기적 금융의 부르주아 시대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으로 연결되게 됩니다. 근대 부르주아 사회를 이루는 돈이라는 가치가 얼마나 허무하게 사그러 들 수 있는 가는 고리오 영감의 비참한 죽음을 통해서 우리가 읽어 본 바입니다.

파리는 그 화려함으로 인하여 꽃의 도시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파리가 꽃의 도시라고 불리게 된 것은 바로 19세기에 들어서였습니다. 파리는 다른 모든 근대 도시의 대표이자 모델로, 부르주아적 근대 사회를 상징하는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꽃의 도시 파리는 근대 도시라는 화려한 면모 속에 부르주아 시대의 어두운 부분을 은폐하고 있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발자크가 그의 펜으로 날카롭게 살펴 본 바와 같이, 독주에 취해 파리 뒷골목에 쓰려져있는 노동자들, 딸들의 신분 상승에 대한 열망으로 스스로를 파괴시켜 간 고리오 영감, 순진한 시골 청년에서 파리의 환상에 짓눌려 파멸해버리는 뤼시앵 등의 인물들이 이 부르주아 사회의 이면을 힘겹게 지탱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르주아들 스스로도 치열한 변혁과 경쟁의 사회에서 뒤처지면 언제 고리오 영감처럼 파리의 중심부에서 퇴장 당해야 할지 모르는 일입니다. 설사 경쟁에서 승리한다 치더라도, 과연 돈이라는 가치가 그들에게 얼마만큼의 행복을 주었던 걸까요? 결국 그들에겐 니힐이 찾아올 뿐입니다.

발자크의 말을 빌려서 졸문을 마무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화려하게 꽃피었던 근대 도시, 그리고 부르주아들의 역사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세계를 자기들의 생각으로 감싸고, 모습을 만들고, 꾸몄고, 꿰뚫었고, 이해했고, 아니면 자신들이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갑자기 깨어 일어나보면 캄캄한 깊은 어둠 속에 혼자 있는 것이다.” 19세기의 파리는, 이처럼 부르주아들에 의하여 창조된 도시이자, 그들에게 주어진 깊은 어둠이었습니다.









이 글의 관련 글들

발자크의 작품들, 특히 [고리오 영감]
에밀 졸라, [목로주점]
데이비드 하비,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발터 벤야민, [파사젠베르크]
수잔 벅 모스, [아케이드 프로젝트]
칼 맑스, [공산당 선언]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이상, [날개]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10-03 15:07)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8-12-08
20:23:30 

 

병장 이동석 
  어쩜 이리 정리를 잘하시나요. 
또 잘먹겠다는 말을 올립니다. 
(축구 보고 올께요.) 2008-09-05
20:23:15
 

 

상병 김세현 
  부라보... 2008-09-05
21:17:27
  

 

일병 오창희 
  발자크 예찬 

.. 

죄송합니다 2008-09-06
08:04:47
  

 

상병 김동욱 
  ↑뭐가 죄송하다는거지, 맞는 말인데-라면서 하며 한참동안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발자크와 벤야민 등의 아저씨들에 대한 압박이 있기는 했지만, 이들에 대해 미천한 이해를 가진 저에게는 신선한 글이었습니다. 깔끔하게 읽혀서 더 좋았다는. 

자본주의 확산에 특화된, 상품의 유통을 위한 도시. 그를 위한 시공간의 압축을 곰곰히 생각하다보니 스타크가 떠올랐습니다. 처음할 때는 제 멋대로, 난삽하게 건물을 짓는 바람에 건물에 막혀 유닛이 제대로 생산되지 못하기도 하고, 뺑뺑 돌아서 입구까지 가야하는 번거로운 심시티를 하게 되죠. 하지만, 실력이 늘어감에 따라서 - 심시티 그 자체의 깔끔함은 물론이거니와 유닛들의 효과적인 충원과 효율적인 이동을 위해서 최소한의 동선확보를 가능하게 하죠. 스타에서도 그러면 '시공간의 압축'이 일어나는건가라는 쓸데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습니다. (땀)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바라보고 걷고 발딪고 서있는 '공간'들이 때때로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예전에 학교의 공간을 분석한 글을 읽었는데, 제가 아무렇지 않게 지나다니고 있던 곳-학교를 들어오면 가장 먼저 보이는 건물이 산학협동조합 건물이며, 가장 먼저 마주대하는 것은 주차권을 뽑는, 주차료를 징수받는 곳-이 어쩌면 사회의 여러가지 경향과 같은 것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란 생각으로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경험이 있었습니다. 마치 막장처럼 술마시고 같이 하숙집에서 퍼질러자고 했던 녀석이 알고보니 과수석으로 입학했다더라는 것을 접했을 때처럼의 당혹감이랄까. 

흑흑. 제가 또 무슨 잡소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아름다운 글에. 
가지로~ 2008-09-08
01:07:42
  

 

일병 김예찬 
  발자크 예찬.. 맞습니다. 맞구요 (땀땀) 

스타크에서 시공간의 압축을 가장 탁월하게 보여주는 종족은 프로토스가 아닌가 싶네요. 건물의 워프라는 개념은 어떻게 본다면 자본가들의 로망이 아닐까요.. 

저는 궁에서 공간에 반영된 계급적 위계 질서에 대해 흥미로운 관찰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희는 아직 침상형 내무실을 쓰고 있는데, '원코드'로 불리는 내무실 가장 안쪽 침상 -TV, 선풍기, 탁자 기타 등등의 비품과 가까운-과 '똥창'이라 불리는 내무실 가장 바깥쪽 침상 -총가틀, 샤워 타올, 각종 물품 창고의 역할을 하는 공함이 있는- 사이의 대비에서 궁의 계급 문화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원코드'와 '똥창'이라는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각자 계급의 도덕적 질서가 어떻게 반영되는지는 침상에 앉는 자세에서부터 나타나구요. 

곧 침대형 내무실로 이사갈 예정인데, 새로운 내무실에서는 계급 질서가 어떻게 반영될지 궁금해집니다. 공간의 변화에 따라 계급 질서 유지의 양상이 어떻게 전개될지도 기대되고.. 2008-09-08
09:31:48
  

 

상병 고동기 
  좋은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덕분에 읽고싶은 책들 몇 권 적어갑니다. 2008-09-08
11:26:28
  

 

상병 이동열 
  발자크를 통해서 당대 파리를 해부하시다니... 놀랍습니다(웃음)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 어떤글을 쓰실지 궁금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지로! 외칩니다.(웃음) 2008-09-08
12:26:48
  

 

병장 문두환 
  아껴두었다가 꼼꼼하게 읽어보았습니다. 
프린트 해서 나중에 여기 적힌 책들과 함께 다시 읽어 보고 싶군요(웃음).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2008-09-10
00:17:25
  

 

병장 임정훈 
  인간은 그 자신과의 관련 위에서만 존재하는 공간을 자기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말살할 엄청난 능력을 갖고 있다 
는 말이 잘 이해 안가네요. 해석 부탁드려요. 

그리고 니힐이 뭔가요. 

워낙 지식이 미천하니. 좀 부탁드릴께요 2008-09-10
15:04:23
  

 

이병 홍명교 
  와우!!!!!!!!!!! 예찬님의 정성어린 글에 존경을 표합니다. 
항상 독서후기를 쓰다가 정성과 시간이 부족해 대충대충 기억나는대로 쓰곤 했는데 뭔가 다시 생각하게 되었어요. 2008-09-15
04:12:05
  

 

병장 이동석 
  흔히 허무주의로 번역하는 니힐리즘이라는 말에서 유추하건데 허무, 혹은 무가 아닐까요. 

혹시나하고 검색하니 있군요. 

nihil [náihil] n. 
【L.】 무(無), 허무; 무가치한 것. 

nihilism [náiəlìz-əm, níːə-]n. 
U ① 〖철학․윤리〗 허무주의, 니힐리즘. 
② 〖정치〗 허무주의, 폭력혁명[무정부]주의. 
③ (N-) (러시아 혁명 전 약 60년 간의) 폭력 혁명 운동. 
㉺nihilist [-ist] ―n. 허무[무정부]주의자. 
㉺nihilistic [-ístik] ―a. 허무주의(자)의; 무정부주의(자) 2008-10-03
15:05:35
 

 

병장 이동석 
  아 그리고, 다 읽었는데 가지로 
라는 말을 할수밖에 없었어요. 무엇보다 이 정성과 세심함에는 정말 
두손을 들수밖에 없겠어요. 허허. 2008-10-03
15:07:21
 

 

병장 이동규 
  이거였구나.홍홍. 2008-10-31
16:30:15
 

 

병장 정용혁 
  요즘 발자크를 다시 읽고 있는데 이글이 많이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관점을 부여 받는다는건 저로써도 또 제가 보는 책에게서도 
감사하고 신선한일이죠~데헷~ 2008-11-21
07:19: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