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글-내글내생각] 당신의 근황
상병 김남우 2008-11-28 16:29:54, 조회: 174, 추천:1
1.
당신의 무엇이 그토록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무엇 때문에 이토록 당신에 대해서 특별한 감정을 가지게 된 것일까 나는.
당신과 나는 겨우 몇 번 스쳐지나가듯 만났을 뿐이다. 스쳐지나가던 도중 한두번 정도는 별 것 아닌 대화를 주고받았기도 했으나, 당신에게 있어서 나는 분명 가장 보통의 존재에 지나지 않겠지. 어디에나 흔하고, 당신의 기억 속에 남겨질 수 없는 가장 보통의 존재일 뿐이지.그런데도 나는 당신이 아주 마음에 든다, 라고 혼자 속삭여 보았고 제멋대로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혀 당신과의 관계를 상상한다. 상상하고 원한다. 그 관계가, 연애이든 우정이든 상관없다. 원한다. 연애감정도 뭣도 아닌 이것은, 말하자면,
맹목이다.
맹목적인 갈망은, 당신과 나 사이에 놓인 극복할 수 없는 거리를 통해 더욱 거세진다. 특별한 사정이 있는 나는, 앞으로 아주 긴 시간동안 당신을 직접 만나기조차 힘이 들 것이다. 얼굴 보며 말 한 마디 건네기 힘들 것이다. 도저히 그 거리를 극복할 수 없다. 그러니 한동안 당신과 나 사이를 이어줄 수 있는건 오로지 관찰과 상상력 뿐이다.
당신을 관찰한다. 당신은 어제 무엇을 했는가. 내일은 무엇을 할 것인가. 당신은 요즘 어떻게 지내는가.
당신에 대해 상상한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하루하루 전화를 걸어 확인해 볼 수도 없다. 당신과 나 사이에 그렇게 돈독하고 애틋한 감정은 없다. 편지는 기대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 해서 누군가를 고용해 당신 곁에 붙여놓고 수시로 당신의 일상을 보고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녀는 미니홈피를 운영중이고 그녀의 미니홈피는 내 미니홈피와 연결되어있다. 수시로 그녀의 미니홈피에 들어가 그녀의 행동을 하나하나 체크한다. 새 게시글이라도 올라와 있으면 아무리 사소한 글이라도 반갑기 그지없다. 반면 오랫동안 새 게시글이 올라오지 않으면 괜시리 초조하다. 무엇 하느라 그리도 바빠 미니홈피에 새 글 한 줄 올리지 못하는 것인지.
"새로운 일자리를 구한 건가. 그렇다면 새 직장에 적응하느라 눈코 뜰 새 없겠지. 큰맘 먹고 적금을 헐어 해외여행이라도 떠난 것인가. 설마 헤어졌다는 남자친구와 함께 떠나지는 않았겠지. 장맛비로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닌가. 무너진 축대에 골절상을 입고 병원 침상에 누워 있다면 사흘 전 입력한 '바쁘다'를 '아프다'로 바꿀 여력조차 없을 테지. 간호해줄 사람은 있는지. 손이 많이 가는 빵을 굽다 불에 데기라도 한 것인가. 키보드를 두드리기 힘들 정도로 심하게 다치기라도 한 건가. 당신 정말 바쁘기는 한 것인지. 당신의 미심쩍은 근황에 대한 공상에 잠겨 있는 사이 창문 틈으로 들이닥친 비의 급습으로 책상 위에 쌓여 있던 책들이 젖고 말았다."
- 김경욱, '위험한 독서' 10p
때때로 당신은 당신의 미니홈피에 당신이 읽은 책에 대해서 올리기도 한다. 어제 친구와 어떤 영화를 보았는지 써놓기도 하고, 어디에 가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사진으로 찍어 올리기도 한다. 당신이 그런 일상의 흔적을 버젓이 남겨놓고 가면, 나는 허겁지겁 그 흔적을 뒤쫓아 음미하며 당신에 대한 갈증을 조금이나마 채운다. 당신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게 된 것만 같다. 당신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진 것만 같다. 아니, 이걸로는 부족하지. 단지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지. 당신이 읽었다는 그 책을 사서 읽는다. 당신이 봤다는 영화에 대한 정보를 찾아 미니홈피에 스크랩 해 둔다.
"당신이 어떤 책을 읽어왔는지 말해주면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다. 당신의 독서목록은 그 자체로 당신의 자서전이고 영혼의 연대기이다."
- 같은 책, 16p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당신을 읽는다. 당신이 읽은 이 책은 내게 당신 자신이나 다름아니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나는 당신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될 뿐만 아니라, 당신과의 공통점을 가지게 된다. 이제서야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흡족하다. 나는 당신을 아주 잘 알고 있어요.
2.
당신의 미니홈피가 문을 닫았다. 느닷없이. 다이어리도 사진첩도 동영상폴더도 방명록도 다 사라지곤, 메인홈피와 프로필만 달랑 남았다. 어떤 해명의 말도 없다. 당신은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당신을 폐쇄해버렸다.
당신을 읽고 알아가는 즐거움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내겐 절망이 찾아왔다. 당신의 근황에 대한 단서를 찾을 길이 아예 없으니, 불안한 상상만 머리 속 가득 떠오른다. 이제야말로 당신에게 정말로 큰 일이 생겨버린 것은 아닌가. 크게 다쳤다거나, 어쩌면 연애사건인가. 누군가에게 고백했다가 차이기라도 한 것인가. 당신은 실패했나. 죽음을 겪었나. 배신을 당했나. 그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일일까.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당신을 아주 잘 알고 있어요, 라 말하던 자신감은 순식간에 바닥으로 추락한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폐쇄된 당신의 미니홈피를 들락거린다. 무슨 일 있어요, 쪽지라도 보내볼까 수십번 망설이다가는 관둔다. 당신이 내 존재에 대해 알기라도 한 것인지 알 수 없으므로. 당신의 미니홈피를 통해 가끔 가 본 적이 있는 당신 친구들의 미니홈피를 어렵게 찾아내, 당신의 흔적을 수집해본다. 그러나 그 흔적도 언제부터인가 뚝 끊겨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다시 문을 연 당신의 미니홈피에는 이제 책에 대한 이야기도 영화에 대한 이야기도 없다. 사진첩도 동영상폴더도 방명록도 여전히 닫아두고 유일하게 열어놓은 다이어리폴더에는 전혀 의미를 알 수 없는 경구 같은 말들만 가끔 새 게시글로 올라온다. 가령,
'나는 미로 속을 겁도 없이 혼자 걷고 있다' 라거나, '오월의 향기인줄말 알았는데 넌 시월의 그리움이였어' 같은 글들. 짐작할 수 없다 당신. 나는 당신을 전혀 모르겠어요.
"당신은 여러모로 읽어내기 쉽지 않은 책이었다. 서툴게 번역된 책처럼 문장은 아리송했고 문맥은 요령부득이었다. 당신은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 것처럼 보였다."
- 같은 책, 18p
3.
견딜 수 없다. 실연이라도 당한 기분이다. 당신은 단 한 번도 나를 위해 당신의 소식을 스스로 보내온 적 없으나, 아리송한 태도로 소통을 단절시켜버린 당신의 태도는 마치 당신이 나에게 일방적인 이별선고라도 해 버린 듯 아픔으로 다가온다.
"그날 이후 나는 당신을 볼 수 없었다. 묵은 숙제를 해치우고 놀러 나간 아이처럼 당신은 꽁무니도 내비치지 않았다. 한번쯤 다시 만나야겠다는 생각은 굴뚝같았지만 연락할 길이 없었다."
- 같은 책, 35p
그래, 당신은 나를 버렸다. 나를 떠났다. 내가 당신에게 다가가는 것을 거부한다. 나로부터 당신 스스로를 감추고 피한다. 그러나 나는 당신을 떠날 수 없다. 당신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어 들어갈수록 당신에 대한 나의 갈망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간다.
오랫동안 고민한다. 대책이 필요하다. 당신이 나의 관찰범위 안에 포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초조하다. 당신이 영영 나를 떠나버리기라도 한 듯 울적하다. 당신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리기라도 한 듯
불안하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용기를 내어 전화라도 걸어볼까. 편지라도 보내볼까.
내 전화를 받은 당신은 무어라 말할까. 당황하지는 않을지, 당신은 나를 모른다며 단호히 끊어버리지는 않을지, 또한 나는 당신에게 무어라 말해야 할 지, 아니다. 역시 전화는 안된다. 내 목소리를 당신에게 들려 줄 자신이 없다. 당신이 나를 기억하고 있을지라도, 그래서 친근하게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다 할지라도 당신은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내 말주변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내가 얼마나 따분한 사람인지 단숨에 알아차릴 것이다.
편지는 어떤가. 편지는 괜찮을까. 편지를 쓴다면, 내가 아주 오래 전부터 당신을 지켜봐왔으며 당신에 대해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는 감추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얼마 전에 닫힌 당신의 미니홈피때문에,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가 하여 걱정된다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섣부르게 그런 말을 했다간 나는 당신에게 어떤 오해를 사게 될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아주 우연히 편지를 쓰게 되었다는 듯이.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글쎄. 아니다. 안된다. 편지도 안된다. 편지로는 우연을 가장할 방법이 없다. 게다가 답장이 오지 않는다면 편지가 당신에게 제대로 갔는지 확인할 방법도 없다. 당신이 편지를 읽지도 않고는 버려버릴지도 모르지 않는가.
미니홈피로 쪽지를 보내보자. 쪽지라면, 완벽한 우연을 가장 할 수도 있으며 수신 여부를 확인 할 수도 있다. 편지처럼 무거울 필요도 없고 말주변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이런 식으로 보내면 된다.
'지나가다 우연히 들렀어요. 오랜만이네요. 저 기억하시나요? 미니홈피는 요즘 안하시나 보네요...^^'
쪽지를 전송한다. 당신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답장을 보내줄까.
4.
내가 당신에게 보낸 쪽지는 한동안 수신여부란에 No라 표시되어있었다. 날마다, 하루에도 몇번씩 확인하며 기다렸다. 수신여부 : Yes, 가 될 때 까지.
드디어 당신이 내 쪽지를 읽었다. 답장이 오지는 않았다. 대신 당신은 얼마 후 내 미니홈피에 방문해 방명록에 글을 남겼다. 당신은 잘 지냈으며 내 쪽지를 받아서 반갑다고 한다. 당신은 바빠서 미니홈피를 닫아뒀다고 한다. 오늘 미니홈피를 다시 열 것이라고 한다.
기쁘다. 당신이 나를 기억하고 있어 기쁘다. 게다가 당신이 직접 나에게 당신의 안부를 전해주기까지 했다. 무엇보다도 당신이 다시 미니홈피를 열었다.
그동안 당신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바빴는지는 알 수 없으나 중요치 않다. 그것은 차차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드디어 열린 다이어리와 사진첩과 동영상폴더와 방명록으로 인해 당신의 행동을 감지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제 다시 당신을 읽을 수 있다. 이제 다시 당신을 알 수 있다.
조금 더 용기를 내어 당신의 미니홈피 방명록에 글이라도 남겨볼까.
'당신이 읽은 책, 나도 읽었어요. 당신이 본 영화, 나도 얼마 전에 봤는데. 오늘 당신이 가 봤다는 그곳, 나도 가 본 적이 있어요.'
당신은 답글을 달아 줄까. 어떤 반응을 보일까.
"오늘날 독서에서 작가의 영향력은 눈에 띄게 감소한 반면 독자의 영향력은 날로 강력해지고 있다. 책의 의미는 작가의 창조적 재능이 아니라 독자의 취향에 따라 결정된다."
- 같은 책, 32p
문학과 사상 가을호에 실린 성기완 시인의 글과, 김경욱의 단편집 중 '위험한 독서'를 읽고는, 언니네 이발관 5집을 들으며 썼어요. 하지만 독서후기라 하기는 영 그렇군요. 흐흐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11-29 14:03)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8-12-08
20:42:34
일병 김예찬
가장 보통의 존재에 추천 한번, 성기완에 추천 한번, 김경욱에 추천 한번, 그리고 남우님에게 추천 한번, 이렇게 네 번 추천하면 혼날까요?
"당신이 어떤 책을 읽어왔는지 말해주면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다. 당신의 독서목록은 그 자체로 당신의 자서전이고 영혼의 연대기이다."
이 문장은 저에게도 소중한 문장입니다. 책 뿐 아니라 음악도, 영화도, (그리고 살짝 그 사람의 정치적 이념도) 저 문장에 대입한다면 딱 제가 할 이야기입니다. 2008-11-28
16:36:48
일병 송기화
우어어, 한마디 뿐입니다. <가지로!>
아, 갑자기 미니홈피 뒤적뒤적 거리던 슬픈 기억이(웃음) 2008-11-28
16:46:53
일병 권홍목
아, 글을 읽으면서 내내 음악의 냄새가 나고하더니 역시 언니네이발관이었군요(웃음)
저도 이 글 읽고 그 앨범이 떠올랐는데
제대로 읽은거 맞네요 (웃음) 2008-11-28
17:19:15
병장 이현성
뭔가 특별할줄알았던 내자신이 사실은 누구보다도 평범한, 가장 보통의 존재였다.
이글과 잘어울리는 앨범이로군요. 글 잘봤습니다. 2008-11-28
19:58:58
병장 이동석
아, 정말, 싸구려 담배 한대-를 피우고 왔어요. 예찬님의 추천 네번이 가지로-보다 낫지만, 저는 가지로-로 갈음 하겠습니다.
독서후기-라 해도 손색없겠네요.
죄송하지만, 아- 젠장-이라는 말을 할수 밖에 없어요. 아아- 2008-11-28
23:59:19
상병 이지훈
가지로 2008-11-29
00:14:35
병장 김민규
늦었지만- 가지로. 2008-11-29
15:01:50
상병 김남우
와. 예상치못한 찬사에 가지로의 영광까지! 감사해요. 히힛 2008-11-29
21:58: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