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글-내글내생각] 누가 낼 것인가  
6급 하지연   2008-09-25 11:34:27, 조회: 518, 추천:2 

돌아오는 연휴에 하루정도 시간을 내서 부산에 다녀오기로 했다.
여행을 가자고 부추긴 건 다른 사람이고 또 다른 이는 별다른 심각한 숙고 없이 동의하고 애매하게 웃으며 머릿속에서 열심히 계획을 짜고 예산을 추정하는 건 나란 사람이다.
나는 이걸 총무 근성이라고 부르는데 어떤 일을 시작하면 본능적으로 계산을 하고 스케쥴을 짜고 고민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 누가 한턱낸다고 모처럼 모여 밥을 먹을 때도 사람들 앞에 놓은 접시를 보며 마음속으로 계산을 하고 있다. 저건 얼마 이건 얼마 하면서 
‘오.. 오늘 제법 나오겠네! 그럼 선물도 저 정도로 맞춰야겠는 걸’ 이란 생각이 자동으로 든다.

내가 돈을 내는 경우는 메뉴판을 스윽 훑어보면서 대충 얼마쯤 되겠군 하면서 현금으로 할까 카드로 할까. 이집이 할인이 되는 카드가 있던가. 아니면 포인트 카드를 쓸 수 있나. 이런 생각 들을 한다.
이런 계산이 익숙하지 않을 때는 밥을 먹는 내내 그 생각을 하느라고 밥맛을 제대로 느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지갑에 돈이 좀 모자라다는 생각이 들면 사람들이 선택한 메뉴마저 신경에 쓰이고 결국 나는 제일 가벼운 식사를 선택하고 만다. 이런 피곤한 성격 때문에 사람을 만나서 식사하는 게 너무 스트레스였다.
누가 돈을 지불할 것인지 정해놓지 않고 만나는 경우는 좀 더 심했다.
누가 커피를 시키고 누가 아이스크림을 시키고 누가 라떼를 시키고 합이 얼마쯤 될 거 같은데 오늘 모인 사람들 구성을 보면 나보다 어린 여자가 둘, 나, 나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 하나다. 이럴 경우 보통은 계산서를 내가 집어 들고 남자가 자신이 내겠다고 하면 사양하지 않고 건네주며 잘 마셨다고 하는 시나리오를 쓸 수 있고 정말 뜻밖에 여자후배가 제가 낼 께요 하면서 지갑을 꺼내면 내가 한번쯤 사양하다가 고맙다고 하고 다음에 밥을 사겠다고 덕담을 한다.
뭐..우리는 되로 받으면 말로 주는 사람이다. 그러는 것이 훨씬 속이 편하기도 하고 남에게 빚지는 걸 싫어하는 이기적인 이유도 있다. 정말 편한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밥을 얻어먹는 것도 불편하고 돌아서서 밥 값 굳었다고 좋아할 만한 강심장도 빈대 근성도 없다.

보통 내가 먼저 밥 먹자고 말을 꺼내면 그날 밥값은 내가 낸다.
그 다음 차라도 마시게 되면 후배가 내던지 하고 후배가 밥을 사겠다고 해서 식사를 하고 나면 나중에 기억해 뒀다가 그만한 선물을 하거나 다음에 내가 자리를 한 번 더 마련한다.
누가 사겠다는 얘기 없이 만나게 되면 보통 연장자가 낼 거라고 눈치를 보지만 그가 조금이라도 망설이는 기색이 보이면 내가 계산서를 집어 든다. 계산의 시간이 다가온 순간 머뭇거림이 싫어서 그런 이유도 있고 상대방이 정말 나에게 얻어먹자고 작정하지 않는 이상 결국 비율은 5:5 비슷하게 가거나 내가 한번쯤 더 사는 정도이다. 그래도 항상 계산서를 집어 드는 것은 나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내가 돈을 많이 쓴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경우는 상식이 있고 일반적인 건전한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 통하는 얘기다. 나도 어쩔 수 없는 경우는 내가 지갑을 꺼내는 걸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만나는 경우다. 주로 나이어린 후배들을 만났을 때가 그런 경우인데 그게 세 번 이상 넘어가면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나도 선배를 만나 밥을 얻어먹게 되면 적어도 두 번 에 한번은 내가 내겠다고 하거나 미리 계산을 한다. 

이제 남자를 만났을 때 경우가 남아있다.
친구를 만났을 때는 1차를 친구가 내면 2차를 내가 낸다. 3차까지 가면 그건 3차를 가자고 한 사람이 내거나 아니면 술이 덜 취한 사람이 내게 되는 것이다. 친구가 3차를 계산하면 나는 택시비를 낸다.
여기까지는 보통 관습대로 가는 일이니까 별로 문제가 없다.
처음만난 남자와 식사를 하게 될 경우가 나에게 제일 고민스럽다.
나보다 나이가 어린 남자일 경우는 내가 계산서를 집어 드는데 상대방이 당황해 하면 그럼 차를 사라고 한다. 그런데 나보다 나이가 있는 사람일 경우 내가 저 계산서를 집어 들면 혹시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아니면 여권신장 운동가이거나 극성스러운 페미니스트로 생각할지도 몰라. 그렇다고 모른 척 하고 있기에는 낯간지럽고 내가 너무 뻔뻔하게 느껴진다. 내가 이런 기분을 느끼지 않게 그냥 알아서 눈치껏 빨리 집어주면 얼마나 고마울까. 내가 먼저 집어 들었을 때 저 사람이 사양 한번도 없이 잘 먹었다고 하면 난 실망할지도 모르겠어. 혹 자기가 내겠다고 했지만 목소리에 전혀 열의가 없다는 게 느껴진다면 그 또한 마찬가지 일 것이다. 
내가 남자라면 적어도 첫 번째 만남에서 첫 계산만큼은 내가 해야겠다고 마음먹지만 이게 남녀평등에 반하는 일인가 잠시 고민도 해본다. 계산을 남자가 해야 하는 것이 관습이고 또 이 관습이 새삼스레 남녀평등에 여권신장이 가파르게 상승곡선을 타고 있는 마당에 꼭 지켜져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역시 어느 경우든 어색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문제가 공식적으로 논의돼서 첫 번째 데이트 비용에 대한 지불권을 누가 갖는 게 옳을지 규정화 되었으면 나 같은 사람이 살기가 좀 편하겠다.
연인관계에 있어 계산은 어떻게 할 것인가.
내 경우는 나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사람이었을때는 보통 그사람이 정해온 스케쥴에 따라 행동했던 것 같다. 너무 오래전이어서 여권신장도 별로 안되고 남녀평등을 부르짖으면 극성맞은 사람취급을 당했던 그런 시절이었으니까 변명같지만 보통 그런 관습이 지배되던 시절이었다.
그도 어떤 예산과 어떤 계획을 세우고 나왔는데 내가 끼어들 수는 없다는 순종적 입장을 고지했지만 생각해보면 그다지 순종적인 성격도 아니면서 그 문제에 있어서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그게 그사람의 권위를 세워준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지금이라면 오늘 뭐 할건지 물어보고 그가 밥을 먹고 영화를 본다고 한다면 '그럼 영화는 제가 보여드릴께요'라고 할 수 있을 것같다. 연하의 연인이라면 '야 오늘 내가 밥 값낼테니 영화비는 네가 내라' 라고 하고 나랑 용돈 타 쓰는 비슷한 처지라면 그날 가진 돈을 주면서 보태 쓰라고 할 것이다.
이런 문제는 예민하기 때문에 연애초기에 암묵적인 룰로 만들어 주는 것이 좋다.  
그 룰을 만들때는 여자를 부추겨 주면서 그녀도 경제의 주체라는 사실을 인식시켜준다면 크게 부작용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경제력이 권력과 비슷한 구조를 가지기 때문에  그 연애가 여자를 리더하는 구조라기 보다 아마도 평등하게 되기 때문에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욕구는 접어둬야 할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나는 점심때 동료 2명과 식사를 하는데 일단 계산은 내가 하고 1/3로 더치페이를 한다. 휴일 전날이나 좋은 일이 있으면 한번씩 밥을 사고 가끔 식후 커피나 아이스크림을 한번씩 산다.
귀여운 여자후배보다 남자후배가 밥을 사달라고 하면 정말 기쁜 마음으로 흔쾌히 지갑을 연다.
남자후배가 의리를 더 알아서 그런 건 아니다. 내가 밥을 사는 건 은근히 내가 윗사람이란 걸 나타내는 행위이고 뭐 여자후배가 나를 좋아하는 것보다 남자후배가 나를 좋아한다는 게 더 흐뭇한 건 내가 아니라 누구라도 마찬가지 아닐까. 여자는 늙어 죽을 때까지 여자이니까.

누가 계산 할 것인가.

일단 내가 계산한다고 생각하면 어떤 경우든 마음은 편하다.
늘 이런 식이라면 돈이 없거나 경제적 상황이 안 좋을 때 사람을 만나는 게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
자주 만나는 사람과는 계산 관계를 정립해 두는 것도 좋다.
저번에 저 사람이 샀으니까 이번에 내가 살 차례인데 돈이 없는 경우는 약속을 미루거나 돈을 마련해서 나간다. 편한 사람일 경우는 돈이 없다고 솔직히 말하고 네가 사라고 한다. 하지만 다음에 그에 상응하는 향응을 제공해야 한다. 이건 내 룰이다.
후배를 만나면 그가 생일이거나 한턱내야 할 일이 생기지 않은 이상 후배가 돈을 내게 해서는 안 된다. 고리타분한 생각이라고 할지 몰라도 선배가 이름만 선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그렇지만 후배에게 봉이 되어서도 안 된다. 그 시점이 어느 정도인지 는 잘 모르겠지만 아직까지 내가 봉으로 보이는 후배가 없는걸 보면 조절을 잘하고 있는 모양이다. 별로 감흥도 없는 후배가 밥을 사달라고 하면 처음 한 두 번은 사주지만 세 번째부터는 왜 내가 너에게 밥을 사야 되는지 이유를 세 개만 대보라고 한다. 그러면 머쓱해 하면서 사라지거나 아니면 쫀쫀한 선배라고 뒷담화를 할 수 있지만 그건 어쩔 수 가 없다. 나도 아까운 게 있는 사람이다.
친구를 만나면 일단 먼저 계산서를 집어 든다. 잘 먹었다고 고맙다고 인사하면 기분 좋게 받으면 되고 자기가 계산하겠다고 하면 웃으면서 계산서를 주면된다. 그래도 친구는 내가 먼저 계산서를 집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줄 것이다. 
접대를 위해 윗사람을 만났을 때는 아예 가계에 들어가면서 카운터에 카드를 맡겨둔다. 나오면 알아서 계산하고 나에게 카드를 돌려주기 때문에 계산을 위해 머뭇거리는 어색한 순간을 피할 수 있어서 좋다. 
상대방은 눈치껏 계산한 나의 센스를 높이 사거나 자신이 대접받은 사실을 티내지 않아서 흐뭇해 할 수도 있다.


계산을 망설여도 용서가 되는 경우가 있다.
딱 한번 오늘 처음 본 사람이고 그 사람이 나보다 비싼 걸 시켜 먹었다면 본능이 아니더라도 그가 화장실을 간 틈을 타서 계산서를 밀어놓거나 슬쩍 계산대를 비켜 화장실로 사라진다고 해도 상관없다.
다시는 안 볼 건데 뭐 어떠냐 말이다. 그런 사람에게 조차 통 큰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면 뭐 어쩔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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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8-12-08
20:23:09 

 

상병 강수식 
  일상에서 마주치는 일이네요. 저도 고민해봤던 일들인데, 이렇게 글로 재밌게 
또 유익하게 써주시니 읽는 맛이납니다. 계산의 미학을 알게 된 것 같은 기분이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지로!> 외칩니다. 

잘 읽었습니다. 하지연님. 

근데 매일 만나는 여자친구가 나보다 나이가 어린 여자라면 
계산은 누가 해야하는 걸까요? 
물론 남자가 하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게 저의 지론입니다만 
아무래도 재정적으로 힘들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한 두번 보는 것도 아니고 거의 붙어살다시피 하면서 
맨날 만나는 경우에는 
어떤게 좋은 방법일까요. 
예전에 한참 고민했었습니다. 
그렇다고 여자가 계산서를 집어드는것 보거나 
'나 돈 없는데, 어떡하지?' 라고 말을 하면 
왠지 능력이 없거나 쫀쫀하거나 돈도 쓸 줄 모르는 남자로 보일까봐 

무리라도 하게 되는 그런 미련한 놈이 되버립니다. 저는. 

계산의 미학. 파고들수록 어렵네요(웃음) 2008-09-25
11:45:28
  

 

병장 송재민 
  저는 종종 이랬습니다. 

영화비를 제가 내면 팝콘을 그녀가 사고 
밥값을 제가 내면 커피는 그녀가 사고 
술값을 제가 내면 노래방이나 DVD방은 그녀가 
MT비를 제가 내면 맥주와 안주는 그녀가 샀죠. 2008-09-25
14:19:38
  

 

일병 양승주 
  참으로 재미있는 글이네요. 
이 글에 의하면 여자 선배들로 인해 밥 값이..하하하. 

일단 내가 계산한다고 생각하면 어떤 경우든 마음이 편하다는 말.. 
참 공감이 가는군요. 그래서 내가 밥 값으로 쓰는 돈이 많은 건가.. 2008-09-25
16:09:01
  

 

일병 박영준 
  내가 계산한다고 생각하면 마음은 편하지만 

계산서를 든 손은 아주 무거워지죠... 

사실 그래서 입궁전에 후배들한테 잔인하게 쏴주고, 설탕때 뜯어먹는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생각해보니 설탕먹을 동안 만난 사람들은 다 저한테 뭘 사줄만한 사람들이었네요. 

'입궁전에 내가 잔혹하게 먹여놨으니, 이제 갚으시지!'라고 할 수 있을만한 사람들... 

그래서인지 제 연락을 다들 꺼리더군요(훗) 2008-09-25
16:30:01
  

 

병장 노요셉 
  아아아아아 공감가는 글이군요 2008-09-26
14:24:01
  

 

병장 박상욱 
  역시 재밌는데다가 바람직한 인생의 팁이군요! 
가지로 2008-09-29
14:42:20
  

 

병장 이동석 
  음, 베스트 글로 추천하려고 했는데 
<가지로> 가야겠군요. 아아. 

전 좀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인 페미니즘이 남성에게 얼마나 유용한지를 알고 있는 마초인지라 초반에 성숙한 인격들이며 동격인 경제주체라는걸 주지시키는 행위를 합니다만, 

어쨌거나, 요새는 제가 봉이라도 상관없으니 좀 여자친구와 누나와 여동생들을 만나고 싶군요. 어흑. 2008-10-02
12:51:30
 

 

상병 신대호 
  재밌어요. 계산에 대해 걱정할 때가 많은 데 조금 정리가 되는 듯 하네요. 

하루도 돈 문제로 걱정안될 때가 없는데 언제쯤 고민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돈 좀 많이 벌어야겠죠? 2008-11-15
22:3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