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글-내글내생각] 꼬맹이를 위한 건배  
상병 강수식   2008-09-08 16:25:19, 조회: 713, 추천:3 

눈싸움을 시작한지도 꽤 많은 시간이 지난 것 같다. 삼십분쯤 전에 엄마는 “이거 쇠로 건드리면 그냥 죽는다. 한 번에 죽어. 그러니까 절대로 쇠같은걸로 건드리면 안돼.” 라는 요상하고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희꾸무리한 액체 비슷한 물체가 담긴 플라스틱 통을 나에게 맡겨놓고는 아줌마들과 수다를 떨러 집을 나가버렸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쨌든 ‘죽는다’라는 말에 다리가 후들거리며 ‘정말 죽는거야?’라고 다시 한 번 되묻고 싶었지만, 집안에는 이미 현관문을 닫은채 계단을 내려가는 엄마의 발소리만 가파르게 이어질 뿐이었다. 

어쩌자는 것일까 정말. 십년이라는 세월을 살아온 동안 꼬박꼬박 축척해 놓은 모든 지식을 총 동원해봐도 도무지 이 플라스틱 통에 담긴 녀석이 어떤 녀석인지, 무엇을 위한 녀석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저 ‘죽는다’ 라는 말만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죽는다니, 열 살에 죽기에는 내 인생이 너무나 고귀했다. 이대로 삶을 마감할 수는 없어. 하지만 녀석과 계속 이렇게 눈싸움을 하고 있자니 도무지 호기심이 일어서 그냥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쇠로 건드리면 죽는다고? 쇠젓가락으로도? 어떤 기분일까. 온 몸이 찌르르 하면서 전기가 통하는 것 같은 기분일까? 아니면 숨이 막히고 온 몸이 베베꼬이는 고통스러운 기분일까. 본능적으로 죽음이라는 것이 두렵기는 했지만 내 안의 누군가가 속삭였다. 궁금해, 궁금해, 궁금해, 궁금해, 궁금해, 궁금해, 궁금해, 궁금해, 궁금해, 궁금해, 궁금해, 궁금해! 건드려! 건드려! 건드려! 건드려보라구! 아아, 하지만 아직 죽기에는 나의 인생은 너무 많이 남아있었다.

정말 도대체, 무엇 때문에, 어쩌자고 엄마는 이런 위험한 물건을 한낮 열 살 밖에 먹지 않은 나에게 맡겨놓고 놀러 가버렸단 말인가. 이 아주머니는 도무지 조심성이 없다. 아들이 혹여나, 혹시나, 행여나 하는 마음에 쇠젓가락으로 푹, 이 놈을 찔러버리기라도 한다면 어떡한단 말인가? 호기심에 못 이겨 죽음을 탐험해 보겠다는 용감무쌍하고도 대담하고도 허무맹랑한 마음을 먹어본다면 그 이후에 일어날 일들을 어떻게 감당할 것이란 말인가? 그러자 내가 숨을 거둔 이후에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가기 시작했다. 

먼저 엄마는 아줌마들과 실컷 수다를 떨다가 집으로 돌아온 후에 쇠젓가락을 플라스틱통에 꽂은채로 온 몸이 고통스럽게 뒤틀린 나의 시체를 보겠지. 그러면서 자신의 잘못을 가슴 치면서 후회할꺼야. 아, 얼마나 슬플 것인가. 울지마, 엄마. 물론 엄마의 잘못이 조금 있기도 하지만, 이건 다 못나고 어리석은 나의 잘못이야. 그러니까 제발, 울지말란 말이야. 그리고 아버지는, 급하게 나의 죽음을 연락받고 집으로 달려와 어머니와 부둥켜안고 울겠지. 엄마한테 도대체 무얼 한 거냐고 소리를 지를지도 몰라. 하지만 아빠, 그러지마. 엄마는 잘못이 없어. 난 그저 엄마랑 아빠랑 행복하게 살길 바랄뿐이야. 그게 십년 동안 살고 안타깝게 하늘로 오게 된 내가 소망하는 유일한 한가지 바람이라구. 그러니까 제발, 집어던지려던 그 텔레비전을 내려놔. 기억안나? 그거 외할아버지가 결혼기념일 선물이라고 주신거라구. 최신형! 또 KBS나 SBS같은 메이저급 방송사에서 나를 취재하러 올 것이다. 머리를 기름으로 멋지게 넘긴 똑똑해 보이는 아저씨가 마이크를 손에 쥔 채로 모자이크가 된 우리 집을 배경으로 슬픈 소식을 전할 꺼야. “오늘 한 초등학생이 위험물질에 쇠젓가락을 꽂고 숨지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하얀색으로 아무런 위험도 있어 보이지 않는 이 액체. 그러나 쇠가 닿으면 사람을 죽이는 아주 강한 맹독성의 위험한 물질입니다. 이러한 위험한 물질이 아무런 표시도 되지 않은채 일반 가정에까지 유통되는 안타까운 현실이 한 초등학생을 죽음으로 몰고갔습니다. 앞으로는 이러한 맹독성 물질에 더 이상 사고 일어나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와 관계 법률의 재정이 시급한 실정입니다.” 뉴스를 본 반친구들은 내 책상위에 놓여진 하얀국화를 보면서 눈물을 쏟고. 하지만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 번 받기도 힘들다는 메이져급 방송사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일인가. 비록 그땐 이미 난 이 세상에 없겠지만 말이다. 모두들의 관심에 감사해요. 여러분들의 관심에 전 기쁘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저 같은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해주세요. 이런 일로 죽는 불쌍한 초등학생은 제가 마지막이였으면 합니다. 그리고 친구들아! 울지말고 나중에 커서 꼭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 몫까지 열심히 살아줘. 난 언제나 너희들을 응원할거라구. 그러니까 평생 날 잊으면 안돼. 

이렇게 죽음에 관한 나의 상상이 4번타자의 홈런맞은 공처럼 우리집 담벼락을 넘어서 뒷산으로 멀리멀리 날아가는 동안 나는 이미 쇠젓가락을 손에 쥐고 있는 나의 모습에 기겁을 하며 손등을 꼬집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저 플라스틱 통에 쇠젓가락을 꽂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에 식은땀을 흘리면서. 그 때 현관문이 열리며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인 엄마가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쇠젓가락을 손에 쥔채로(손등을 꼬집었건만 나의 오른손은 쇠젓가락 놓기를 거부했다) 엄마에게 달려갔다.

“어머니. 소자 드릴 말이 있사옵니다. 아니, 어쩌자고 도대체 이러한  맹독성 물질을 아들한테 맡겨놓은신채로 달랑 그렇게 나가버릴 수가 있단 말이옵니까. 소자가 아무리 불효막심한 놈일지라도 아들에게 죽음을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무슨 해괴망측한 일이란 말이옵니까. 어머니가 안계시는 동안에 소자의 오른손이 말을 듣지 않고 저 플라스틱안에 쇠젓가락을 꽂아버지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열심히 손등을 꼬집어가며 또 다른 저와 싸우고 있었사옵니다. 어머니, 제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제발 말씀으로 저에게 하사해주십시오. 앞으로 말 잘듣고 공부 잘하는 착한 아들이 되겠사옵니다.”

사뭇 진지한 어조와 비장한 각오를 내비치며 말하는 나에게 엄마는 한마디로 별 미친X 다보겠네. 내 뱃속에서 나왔지만 너는 누구란 말이냐, 하는 표정을 지어보이고는 콩, 내 머리를 쥐어박았다.

“쓸데없는 소리 하고 있어. 너 쇠젓가락 꽂았어? 이게 얼마나 구하기 힘든건데. 죽기는 누가 죽는다는거니. 설마 니가 죽는다고 생각한건 아니겠지? 너 이 유산균 죽었기만 해봐.”

맙소사. 유산균이었다니. 매일 아침마다 화장실에서 30분동안 근엄한 기침을 해가면서 나의 지각에 일조를 한 아버지의 변비와 변비로 인해 생겨날지도 모를 치루를 예방하기 위한 극단의 처방전인 살아있는 유산균이었다니. 거기다가 맙소사! 이 멍청한 나는 ‘쇠젓가락을 꽂으면 유산균이 죽는다’ 라는 말중에서 정작 중요한 말들은 다 지워버리고 ‘죽는다’ 라는 말만 기억한채 ‘내가 죽을지도 몰라’ 라고 오해한 것이다. 크흑, 이런 말도 안되는. 어찌되었던 오해는 나의 멍청함에서 시작한 것이었다. 허허허, 공허한 헛웃음이 나왔다. 나는 머리로 전해지는 찌르르한 알밤의 고통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며 조용히 내 방문을 열고 들어가 수학익힘책을 펴기시작했다. 사람은 똑똑하고 볼 일이야. 사람은 많이 알아야지. 아는 것이 힘이다. 암, 그렇고말고. 누가 듣거나 말거나 혼자 중얼거리면서.


13년 후, 그녀와 카페에서 마주 앉은 지금 뜻 하지 않게 그 날의 오해가 불쑥 떠올랐다. 그녀와 헤어지고, 다시 마주하게 되기까지 지났던 2년이란 시간, 그녀와 헤어지는걸 결심하기 위해 나 혼자 술로 달래야했던 날들과 함께. 어쩌면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던 그 날처럼 아마도 그녀와 나 사이에도 수 많은 오해들이 있었던 것은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 때는 그녀가 너무나 멀리있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가기 위한 한 시간 반이라는 물리적인 거리를 제외하고라도 무언가 손으로 만질 수 없는 벽이 가로막혀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미주알 고주알 나의 속내를 다 이야기해버리는 나와는 달리 도무지 자신의 속내를 비추지 않고 그저 내 앞에서 웃어주기만 하는 그녀를 보면서, 나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는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버린 것이다. 좋아한다면 자신의 속내를 들어내야 하는게 당연한게 아닌가, 하는 내 방식대로. 사람은 진심으로 통하는게 우선이지 않는가. 보여주기 싫은 모습이든, 보여주고 싶은 모습이건간에 우선은 이야기하고 보자는게 나의 방식이었다. 어쨌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그녀에게 나의 방식을 들이밀고 강요하고 있었다. ‘봐, 난 이렇게 다 털어놨으니까. 너도 이제 털어놔봐. 난 다 이야기 했는데, 넌 이야기 안하면 반칙이라구, 그건.’ 그러나 세상에는 내 방식으로만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 아니었다. 나처럼 자신의 속내를,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에 능숙하며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일들에 맞닥뜨렸을 때 이야기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이 있는 반면 어떠한 일이든지 자신의 속으로 감추고,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폐 속의 공기로 성대를 진동시켜 입을 통해 나오는 언어가 아니라 언어 뒤의 언어들로 말하는 것에 더 능숙한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그녀는 후자 쪽에 속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녀는 내가 그녀의 슬픔까지 짊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행여나 그녀의 짐을 짊어지고 나까지 슬프게 될까봐 오히려 내 앞에서는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웃는 방법을 택했는지도. 나는 그저 그녀가 모든 일들을 잘 이겨낼 수 있도록 가만히 옆에 있어주기만 했었던 것이다. 그녀도 나도 더 이상 열 살먹은 아이가 아니기에, 자신의 일들을 자신이 헤쳐나가고, 어려움을 밑거름으로 삼아 성장할 수 있었기에. 그러나 멍청한 나는 그녀가 자신의 일들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돌아볼 수 있는 몇 일간의 시간조차 허락하지 못했다. 정말 지지리도 속이 좁고 소심한 녀석이었다, 나는. 그러다 그녀가 대학 합격 발표를 얼마 남겨두지 않고 연락을 끊었을 때 나는 그녀와 나 사이에 흐르던 벽을 손으로 만질 수 있었고, 더 이상은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나와는 다른 저 반대편에 있는 것이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 닿을 수도 만질 수도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나는 그녀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헤어지자. 그녀는 진짜로 우리 헤어지는 거에요? 라고 물었을 뿐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아마 그녀는 그때도 언어 뒤의 것들로 말하고 있었을 것이다. 가지마, 바보야. 네가 필요해. 내가 이겨낼 수 있도록 내 옆에 있어줘. 니가 있어준다면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만 다 이겨내고 언제나처럼 웃으면서 너한테 돌아갈꺼야. 그러니까 가지말란 말이야. 하지만 나는 듣지 못했다. 그렇게 그녀와 나는 이별했다. 이런 멍청이.

어느새 그녀와 마주 앉은지도 꽤 많은 시간이 지나있었다. 2층에 자리한 카페의 창문 밖으로 반대편 건물의 창들과 간판들이 하나, 둘씩 꺼져갔다. 불빛을 잃은 간판들 아래로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어진 휑한 길을 바라보면서 나는 말하고 싶었다. 미안해. 그 때, 나는 너무 속이 좁고, 내 생각만 하고, 내 방식대로만 이해하려 했고, 니가 내 방식대로 맞춰주기만을 바랐어. 하지만 내가 잘못이었어. 너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 했어야 했는데. 이해하지 못했고, 바보같이 오해했고, 그러한 오해들 사이에서 점점 더 니가 멀게만 느껴졌어. 

“저, 오빠, 나 지금 가봐야 돼. 너무 늦었어.”

“그래? 그럼 나갈까?”

집에 들어가야 한다는 그녀 앞에서 나는 결국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주섬주섬 코트를 집어들었다. 그 때는 몰랐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바보같이 오해했다는 말도 이어지지 못하고 겨울 공기 속을 쓸쓸하게 떠도는 가운데 나는 커피 값을 계산하고 카페 문을 열고 거리로 나섰다. 이미 크리스마스와 발렌타인데이가 한참지난 늦겨울의 거리였다. 그 거리위로 그녀와 나는 서로 떨어져 있었던 딱 2년이라는 시간만큼 사이를 두고 걷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그녀와 나를 헤어지게 만들었던 오해가 딱딱하게 흐르고 있었다. 섣불리 손을 뻗어 볼 수도, 말을 내뱉어 볼 수도 없도록 많드는 차갑고 딱딱한 느낌이었다. 나는 오해가 주는 그 이질적이고 차가운 느낌에 부르르 몸을 떨며 그녀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도 우리 사이에 흐르는 침묵과 침묵 이면에 자리잡은 오해의 물결 때문에 추워보이는 듯 했다. 나는 망설이다가 편의점에 들러 뜨거운 캔커피를 샀다. 그리고 다시 아무말 없이 걷다가 매표소에 도착해 차표를 끊고는 역 앞의 벤치에 앉았을 때 주머니에서 캔커피를 꺼내 내 목 뒤로 가져가 보이며 말했다.

“이렇게 하면 따뜻해.”

“와! 정말 따뜻하네? 진작 알려주지, 바보! 앞으로 추울 때 마다 따뜻한거 있으면 목 뒤로 대면 되겠다.”

“응. 따뜻하지? 사람들은 손난로가 있으면 주머니에 넣거나 하지만 나는 꼭 목 뒤에 대.” 

내가 건내준 캔커피를 뒷 목으로 가져가는 그녀를 보자 조금 있으면 헤어져야한다는 사실이 떠올라 못내 아쉬웠다. 이렇게 다시 그녀 앞에 오기까지 2년이라는 시간을 돌아왔건만, 정작 중요한 말은 한마디도 못한채 돌아서야 할 참이었다. 나는 가슴 속 저 밑바닥부터 올라오는 한숨 내쉬며 찬찬히 그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긴 머리와 속눈썹과 커다란 눈과 쌍커풀은 그대로였지만 운동화였던 그녀의 신발이 어느새 구두로 변해있었다. 교복치마는 성숙미가 물씬 품기는 주름치마로 바뀌어 있었고, 그녀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는 내 첫 아르바이트 월급으로 사주었던 반지 대신에 고양이 모양의 세련된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참 많이 예뻐져있었다. 정말로, 많이, 엄청나게, 예뻐져 있었다. 그런 그녀를 뒤로 하고 나는 곧 떠나야 할 것이다. 그녀가 탄 택시가 작아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우두커니 사거리에 서 있다가 한 시간 반동안 기차를 타고 다시 내가 살던 곳으로 가야하는 것이다. 누추한 나의 삶으로, 무엇인가 허전한 일상으로, 나른한 휴일 실컷 잠을 자다가 어둑해진 방안에서 혼자 깨어나 가슴 속으로 치밀어오르는 딱딱한 어떤 것과 마주해야 하는 그런 삶으로. 그리고 그러한 삶 속에서 그녀와 다시 만나게 된 오늘 하루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기 까지 앞으로 한 동안 힙겹게 싸워야할 것이다. 어느 순간 일상 속에서 툭 튀어나와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 오늘의 기억들과 함께 또 얼마나 많은 날들을 보내야 할까. 그렇게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는 동안 이 아쉬운 만남과 헤어짐과 헤어짐 이후의 찾아올 일상이 해일처럼 밀려와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 때 그녀가 말했다.

“나 이제 진짜 가야 돼요. 몸 건강하구, 잘 지내구요.”

“응. 그래. 택시타는거 보구 갈게.”

이제는 진짜 그녀를 보내야 할 시간이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택시 정류장이 있는 역 앞 사거리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가 택시를 타기 전 악수를 청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나의 손을 잡아주었다. 말랑말랑하고 따뜻하고 작고 귀여운 그녀의 손을 잡고 있자 하고 싶은 말들이 뒤죽박죽으로 엉켜 머릿속에서 소용돌이를 쳤다. 하지만 나는 입을 꼭 다문채 그녀의 눈을 바라보기만 했다. 혹시라도 다시 만나게 될 날이 온다면 그때까지 또 얼마나 많은 밤들이 지나야 할 것인가. 오늘 하지 못했던 말들과 풀지 못 했던 오해들은 또 그녀와 나를 얼마나 멀어지게 할 것인가. 

결국 나는 그녀에게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탄 택시 그녀와 마주했던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간 것과 같이 빠르게 멀어져갔다. 나는 그녀와 악수를 하던 그 자리에 그녀가 탄 택시가 점점 작아져 보이지 않을 때 까지 서 있었다. 손에는 아직 그녀의 체온이 남아 있었다. 왠지 가슴 속까지 따뜻해지는 그 온기를 느끼며 꼭 오늘이 아니여도 괜찮다는 생각이 불현 듯 들었다. 오늘이 아니더라도, 오늘 오해를 꼭 풀지 못하더라도 어쩌면 괜찮을 거란 생각이. 사실 오해에 대해서, 오해를 푸는 방법에 대해서 내가 잘 알고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불확실하고 불가사의한 것들로만 가득찬 세상 속에서, 나로부터 시작해 얽혀있는 수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와 그 관계로부터 시작된 오해 때문에 마치 자신이 쳐 놓은 거미줄에 걸려 바둥바둥 거리는 거미처럼 허우적거리는 주제에 어떻게 이제는 그녀를 오해하지 않을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뿐만아니라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천천히 나를 바라볼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플라스틱통을 마주하고 앉아 쇠젓가락을 든 오른손을 왼손으로 꼬집어대던 멍청한 꼬마로부터 조금도 자라지 않았으므로. 나는 오해를 풀 수 있는 방법들을 수학익힘책을 열심히 풀고, 자연과 과학을 읽으며 열심히 알코올램프에 불을 붙이고, 탐구생활을 보면서 우유에 막대기를 꽂아 아이스크름이나 만들면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오해를 풀 수 있는 방법은 나와있지 않았다. 대신 세상은 나에게 더 많은 것들을 읽고, 쓰고, 풀고, 해석하도록 가르쳤다. Hi. Fred. How are you? I'm Fine! And you?, 이 전체집합에서 집합 A와 집합 B의 교집합을 고르시오. 산성물질을 리트머스에 묻히면 어떤 색으로 변합니까? 다음 시에서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세상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안부를 묻는 방법, 사람들과 나 사이에 교집합을 발견하는 방법, 교집합을 발견한 이후에 대화를 이끌어가는 방법, 사람들과 내가 섞일 때 어떠한 색을 낼 수 있는 지를, 그리고 무엇보다도 언어뒤의 언어들로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그들과 나 사이에 오해는 없는지, 그러한 오해들은 어떻게 풀어야하는지와 같은 것들을 나는 배웠어야 했다. 정작 중요한 그런 것들은 배울 기회도 주지 않은 채 나에게 성인이라는 도장을 찍어주었다. 꽝.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대학교에 입학했고, 군입대도 남겨두었으니까 조금 어리긴 해도 당신은 성인입니다. 사지선다형에 간혹 주관식을 섞어서 문제를 내던 책들이 그 순간 내게서 사라져버렸다. 대신에 사람들이 나타났다. 동기, 선배,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아는 여자, 모르는 여자, 친구, 나쁜놈, 상종 못할 놈, 술 먹으면 개가 되는 놈, 술 먹으면 착해지는 사람, 공부를 잘 하는 놈, 알아두면 이득이 될만한 사람, 등등등. 그러한 사람들과 나와의 관계는 맙소사, 사지선다형이 아니였다. 수 많은 말들과, 수 많은 행동들과, 보이지 않는 수 많은 것들이 얽혀가는 그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나는 숨이 막혔다. 무성한 소문이 생기고, 오해가 생기고, 앞과 뒤가 다르다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믿었다가 배신당하고, 계산하는 사이에 나는 천천히 사람들에게 질려갔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에는 그녀를 대할 자신이 없어져버렸는 지도 모른다. 그녀를 오해하지 않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이.

그러나 앞으로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 라면, 수학익힘책이 아니라 오해로 가득찬 세상 속 한가운데서 사람들과 얽히고, 오해에 얽히고 울고 웃고 화내고 싸우면서 조금 더 많이 배운 뒤라면 그 때는 그녀에게 자신있게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면서 생채기가 날 수도 있고 억울함에 가슴을 치는 일도 있을 수 있겠지만 원래 꼬맹이들은 그러면서 자라는 법이니까.  그 때 까지는 그녀의 손을 잡지 못 한다 하더라도 괜찮다. 어차피 다시 만나게 될 때 까지 그녀의 온기는 계속 내 안에 스며있을 테니까. 그저 다시 만날 때 까지 그녀에게 내가 기억되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추운 겨울이면 목 뒤로 따뜻한 캔커피를 가져다 대고, 반지가 끼어져 있지 않은 왼손을 바라보면서 허전해 하며, 길을 걸을 때에는 차도에서 되도록 멀리 떨어져 걷고, 책을 읽다가 좋은 글귀를 발견하면 수첩에 꼭꼭 접어놓는 일상 속에서 떠오르는 사람으로.


새벽 한 시를 넘어가는 시간의 기차 안은 보따리를 든 아주머니들과 커다란 옷 가방을 든 정체모를 아저씨와 피곤에 찌들어 보이는 양복 차림의 샐러리맨 몇몇이 보일 뿐이었다. 차창으로는 마을도, 산도, 논과 밭도 집어삼킨 길고 깊은 어둠의 장막 속에서 띄엄띄엄 가로등만이 공연이 끝난 연극장을 비추는 헤드라이트처럼 동그랗게 번져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영화가 끝난 후 서둘러 핸드폰을 켜고 자리에서 일어나 상영관 밖으로 향하는 관객들 사이에서 혼자 우두커니 앉아 엔딩크레딧을 바라보는 기분으로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맥주, 신문, 과자 있습니다” 

한참을 차창 밖을 바라고 있는데 먹거리가 가득한 카트를 밀며 아저씨가 말했다. 굵직한 아저씨의 목소리를 듣자 모든 사람들이 상영관으로 빠져나가는 가운데 멍하니 앉아 엔딩크레딧을 보고 있는데 퉁명스럽게  ‘영화 끝났어요’ 라고 말하는 사람과 마주한 기분이었다. 내 생각이야 어떻든 아저씨는 계속해서 맥주나 오징어, 커피 따위를 열거하며 카트를 밀었다. 그렇게 천천히 굴러가던 카트다 내 옆으로 지날 때 쯤 시계를 보니 아직 집에 도착하려면 시간이 좀 남아 있었다. 나는 아저씨를 불러 맥주 한 캔을 샀다. 기차는 계속 어둠 속을 미끄러지듯 달려가고 있었다. 사랑의 기억이 가득한 도시를 떠나, 이별의 아쉬움과 하지 못한 말과, 풀지 못했던 오해들과 한 손에 쇠젓가락을 든 채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벌벌 떨고 있는 꼬맹이를 뒤로 한 채로. 나는 덜컹 거리는 그 기차의 진동을 느끼며 맥주캔을 든 손을 높이 들어 건배를 제의했다. 

도착할 때 쯤 조금은 더 어른이 되어있을 꼬맹이를 위해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09-10 11:31)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8-12-08
20:22:15 

 

병장 주해성 
  화려한 복귀 이네요. 가지로~~ 2008-09-08
16:45:48
  

 

병장 이동석 
  이런, 진짜 읽고 싶은데, 
어흑. 2008-09-08
19:24:41
 

 

병장 노요셉 
  아따 글 잘쓰십니다 
가지로~ 2008-09-09
11:14:16
  

 

병장 이동석 
  기차에서 마시는 맥주에 한표, 
따따따따따 따닥 따따따따따 따닥, 하는 운율에 한표. 
옛 여자친구가 예뻐졌기에 한표 

총 세표로 가지로행이 결정되었습니다. 2008-09-09
13:18:01
 

 

병장 이동석 
  ...아주 강한 맹동석의 위험한 물질입니다... 

...이러한 맹동석 물질에 더 이상 사고 일어나지 않도록... 

그건 그렇고 이런 오타를 두번씩이나, (하하) 
'맹동석'이라는 이름 땡기는데요? 흐흐. 2008-09-09
13:29:03
 

 

병장 노요셉 
  맹동석..크크크크크크 2008-09-09
13:42:54
  

 

상병 강수식 
  주해성 병장님, 노요셉 병장님, 이동석 병장님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꾸벅) 

그나저나, 이런 오타들이(허허) 
몇 번이나 쳐다봤지만 워낙 멍한상태라서...(변명변명) 
맹동석.. 
제가 이동슥 병장님 생각을 너무 많이 한 나머지(응?) 
하하. 안심하세요. 
저는 어디까지나 여자를 사랑하는 주의랍니다.(웃음웃음) 

이 글은 빠져서 쓰다보니까 너무 길어졌네요. 
너무 감정에 치우쳐서 썼다고나 할까요. 
읽으시는 분들이 지루하실까봐 걱정입니다.(울음울음) 2008-09-09
16:38:05
  

 

병장 이동석 
  하하, 오타도 찝어낼만큼 집중해서 봤습니다. 2008-09-10
06:29:27
 

 

병장 이태형 
  <가지로> 외칩니다. 2008-09-10
10:05:21
  

 

병장 황인준 
  이런 좋은 글을 왜 진작 못봤을까요. 
잘 읽었습니다. 

대학가서 가장 어렵고도 재밌는 공부는 사람 공부더군요. 
확실히 우리나라는 사람 공부 하는 방법을 전혀 안 가르쳐주는 것 같아요. 
쩝. 
가지로 
를 외치고.. 
동석님 이 글 옮겨주셔야죠? 2008-09-10
10:16:54
  

 

병장 이동석 
  더 많은 분들이 가지로를 외쳐주시길 기다렸습니다. 흐흐 
가지로 갑시다. 2008-09-10
11:30:33
 

 

병장 이재민 
  와우! 
브라보! 

가지로! 2008-09-10
14:48:24
  

 

상병 김세현 
  요즘 유행하는 botton의 소설들이 떠오르네요! 히히. 보셨나요? 안보셨으면 한번쯤! 2008-09-11
20:02:29
  

 

상병 강수식 
  버튼? 보튼? 하하. 
무지한 저에게 가르침을 좀 더 내려주심이..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호기심 지수 100000% 올라갔습니다. 웃음) 

그나저나 
처음으로 책가지로 왔네요. 
이 감격. 감사드립니다! 2008-09-11
20:56:10
  

 

상병 김세현 
  알랭 드 보통..<우리는 사랑일까? 영제목 essay on love>, 또 남녀의 연애에 관한 한권..,그리고 <불안>...앞 두권은 생뚱맞은 제목 그리고 난해한 번역으로 알아먹기 힘든 부분이 많지만 남녀 사이에서 일어나는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밀도높고 공감을 자아내는 통찰들로 가득차 있는 듯 하구요..<불안>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가지는 불안에 대한 원인과 그에대한 해결책에 대한 이야기들이고요..나온지는 좀 됐는데 요즘 주위에 읽는 사람들이 많이 보이더라구요 크크...예리하고 잔잔한 botton의 사고가 무척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암튼 뭐 후회는 안하실겁니다! 2008-09-11
21:21:13
  

 

상병 강수식 
  우와와. 설명 듣기만 했는데도 뭔가 딱 느낌이 오는군요.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좋은 정보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크! 
오늘도 이렇게 보물하나 얻어가는군요!(웃음웃음) 2008-09-11
21:34:19
  

 

상병 장태순 
  Gut... 이 말밖에는 안나옵니다. 잘 읽었습니다. 2008-09-11
22:42:46
  

 

병장 노요셉 
  왜나는너를사랑하는가? 보통씨의 책이 맞을꺼에요, 
이책역시 남녀사이의 연애관점을 바탕으로 쓴 소설인데 
흥미읽게 잘 읽혀내려가는거 같네요 이책도 추천드려요~(웃음) 2008-09-12
09:06:50
  

 

상병 강수식 
  노요셉님. 
제가 굉장히 궁금해하는 부분에 대해서 보통씨가 글을 쓰셨군요. 
갑자기 막 읽고 싶어집니다. 
한 번 구해봐야겠어요. 
추천 감사드립니다(웃음) 
그나저나 가을인데도 날씨가 너무 덥네요(울음) 2008-09-12
10:48:17
  

 

병장 문두환 
  아, 정말 좋은 글이네요. 더불어 옛생각도 새록새록 떠오르는 뭐 그런. 으흐. 2008-09-17
19:41:47
  

 

상병 김현준 
  언어뒤의 언어라는 표현 정말 좋은데요. 잘 읽었습니다. 2008-09-21
13:34: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