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글-내글내생각]접속의 로망  
병장 이현승   2008-09-19 07:58:05, 조회: 577, 추천:5 

<1> 접속의 로망 


지금에 와서는 많이 다르지만, 어렸을 적 내가 고대하는 떨림의 순간은 지금 자행되는 만남의 사건들과는 본질을 달리 하는 것들이었다.  

<영웅본색 : ......아 그럼 OO도서관 아시겠네요, 그럼 내일 정오에 도서관 시계탑 밑에서 뵐 수 있을 까요.> 

<Madonna : 내일은 학교 풍물패 모임이 있는데.. 모레 정오가 어떤지요. 그때라면 가능할 지도 몰라요. 그런데.... 우리 서로 어떻게 알아보죠? 제가 삐삐가 없어서 말예요. 그쪽에 대해 아는 거라곤 홍콩 누아르를 좋아한다는 거하고 스미스를 즐겨 들으신다는 거 밖에 없거든요. ^^>

<영웅본색 : 그럼 이렇게 하죠. 제가 바바리코트를 입고, 한 팔에 LP판을 옆에 끼며 비둘기 모이를 주고 있으면 어떨까요.>   

<Madonna : 좋아요. 전 긴 생머리에 흰 머리띠를 할게요. 노란 원피스를 입고요. 제가 그 앞으로 가서 뭉크의 화집을 보여 드리면 되겠죠?>


푸르스름 빛나는 스크린 위에서 ㅡ 비록 손길은 닿지 못했지만 만남의 첫 개요는 그렇게 발발 될 것이다. 한번도 만나지도 목소리를 듣지도 못한 그들은 오직 스크린에 새겨진 글들을 증거 삼아 그들의 얼굴을 그려낼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일까. 과연 그의 언어만큼이나 멋지고 아름다운 사람일까. 큐피트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다프네처럼, 그들은 그들의 완성되지 못한 몽타주를 기대감과 상상으로 채우며 고대한다. 물론 한껏 미화 되는 게 사실이지만 그 또는 그녀를 만나기전 떨리는 기다림의 순간을 만끽하는 것만으로도 그 어리석음은 충분히 용서 받을 수 있다. 

인터넷과 핸드폰이라는 친절하지만, 그래서 더욱 불쾌한 통신도구가 발달 하고 나서는 이런 기대감은 우스운 것이 되었다. 새로운 타인과 접속하고 싶다면, 핸드폰 번호를 알아내거나 미니홈피 주소를 알아내면 된다. 만약 그 모두가 없다고 한다면, 없다는 것 자체가 소통불편의 사람이라고 얘기한 셈 쳐버린게 된다. 그는 빈민이거나 부적응자거나 삶을 잠시 유예해 놓은ㅡ궁인 또는 중과 같이ㅡ 사람이거나 아무튼 간에 연애할 준비가 덜 되어있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단지 통신수단이 없다는 것만으로 그렇다. 

어찌하여 결국 전화번호를 알아낸다면 성공이다. 짤막한 글도 부칠 수 있으며, 목소리도 들을 수 있고, 정히 그대 얼굴이 궁금하다면 영상통화를 ‘생각대로’ 이용할 수도 있다. 상대가 거부한다면, 필경 찔리는 데가 있는 것이다. 미니홈피주소를 습득 했다면 더욱 용이하다. 비록 뽀샵으로 떡칠한 사진이지만 얼굴 윤곽은 파악이 가능하며, 설령 일촌 공개로 되어 있다 해도 그들의 친구에 홈피를 가면 그네들 사진 중에 한 컷은 그녀(또는 그)의 사진이 있을 터이니 말이다. 그뿐인가. 요즘엔 친절하게도 100문 100답이나 다이어리 따위를 올려두어 그 사람이 뭘 원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굳이 시시콜콜하게 물어 알아가지 않아도 파악이 가능하다. 그러므로ㅡ 고전적 데이트의 산실인 덕수궁 돌담길을 천천히 걸으면서 상대를 알기위해 뻔한 질문 한마디 꺼내는 건 살떨리는 일이다. 아 그거요? 제 홈피에 올려놨잖아요. 그런거 하나 안보고 오나. 저한테 관심이 없나 봐요 흥,, ........

한편, 이런 식의 풍경도 있었다. 늦은 밤, 목소리가 듣고 싶어 그녀의 집에 전화하지만 그녀 아닌 다른 그 누가 받아 허둥지둥 하기도 했다. 그 몇 번의 헛손질이 무안해질 무렵엔 용기를 내어 전화를 걸고서, ‘OO이 친군데요 혹시 OO이 있어요?’ 라고 말하며 까다로운 중간자(그녀의 친지들이다)를 거쳐야만 했다. 그렇게 어색하기 짝이 없는 전화를 끊은 나는 그녀의 어머니에게 ‘아니 너는 왜 그렇게 싹퉁머리 없는 친굴 뒀니?’ 라고 뒷담화를 당할지 모르나 ‘얘 혹시 너 남자친구 생겼니?’ 하는 기쁜 오해(?)를 받을 가능성도 있었다.  누군가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 조금은 거추장스럽고, 부끄러운 일이 될지 모르나 그만큼의 무례를 무릅쓴 통화는 더 값지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이 시대, 우리는 중간의 물리적이거나 공간적인 장애물들을 가볍게 제치고 직접적인 대상에 닿아 원하는 소통을 이룩할 수 있는 환상의 조건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새뮤얼 버틀러가 말한 것처럼 큐피트의 화살도 최신식 활과 금촉일 때 더 빠르고 감정의 명중률을 높여줄지 모른다. 만약, 대상과 소통하고 싶다면 직접적으로 메신저를 키거나, 핸드폰으로 전화를 하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핸드폰 밧데리가 다 되었다는 것도 한두번이야 봐줄만한 일이고, 정 안되면 핸드폰 꺼놨다는 핑계도 대지 못하게 문자까지 인질로써 잡혀줄 수 있다. 점점 더, 상대의 즉각적인 반응이 오길 기대하는 것이다. 조바심, 기다림, 까치발 등등 이런 단어 따위는 진작에 닳아 없어진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그도 그럴것이 이미 기계들은 검색-목록-제목-클릭만 하면 어느 새 원하는 음악이 선택되고, 손가락 힘도 안 들어갔는데 ‘터치’만 하면 제깍 말을 듣고 움직이기에, 인간에게 이런 식의 숨가쁜 반응속도를 희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뜨겁고 빠른 인스턴트식 마음의 쟁취를 벌인 후에 우리는 더욱 차갑게 식을 가능성을 좀 더 내포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직접적인 통신도구가 우리의 주 소통 수단이라면, 그것들을 통제함으로써 더욱 가혹한 처사가 우리에게 강림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핸드폰 번호를 바꿔 버린다면, 홈피를 닫아버린다면, 이메일에 답장을 하지 않는 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그녀에게 연결 할 수 있을까. (한 가지 진실은 그 방법이 매우 쉽다는 데에 있다!)그녀에게 향했던 무수한 거미줄(WEB)을 모두 끊어 버린다면, 나는 현실에서의 그녀에게 가 닿을 수 없다.  

또다른 측면에서 사랑의 상처를 메우고, 추억을 지우는 일 또한 더 힘들어 졌다. 지워야 할 존재들은 많아지고, 취해야 할 행동도 늘었다. 사람사이 사랑의 흔적이야 평생을 끌고 가는 사람도 있을 만큼 아픈 것이지만, 일련의 불씨들을 깔끔히 정리하는 것이 개인을 위해서나 떠난 그녀를 위해서나 진취적인 방향에서의 리셋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헌데, 요즘은 메신저 대화 기록이나, 소중한 문자, 같이 찍었던 사진, 동영상, 미니홈피 등등, (이것들은 헤어진 순간부터 밀린 카드고지서 마냥 튀어 나온다)에 이르기까지, 사소한 것들에서 부터 상대의 흔적이 묻어 나오는 것이다. 물론 지우는 방법은 ‘딸깍’ 한번으로 끝날지 모르지만 클리셰가 묻어나는 수많은 존재들을 켜켜이 쌓아둔 마음속은 쉽사리 떨고 일어나기 어렵다. 

그렇다. 세상의 모든 현상들에겐 ‘반대급부’라는 압도적인 명제가 존재한다. 발달이 있으면 후퇴도 있고, 가장 가치 있는 일이었던 것이 그 언젠가는 한낱 치부에 불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하철에서 삐삐를 그녀에게 던지며 부끄러움에 뛰어가고, 시계탑 밑에서 몇 시간 동안 비를 맞으며 기다리는 90년대 대학생은, 이제 존재 하지 않는다. 아마도, 우리에게 다시 그런 시기는 오지 않을 것이다. 이미 통신도구들은 너무 비싼 몸값을 하는 존재이고, 기다림의 미학은 비경제적인 행위일 뿐이니까. 그 대신 모든 것을 삼켜 버리고 갈급한 조바심을 해결해 줄 하나의 매개물만이 그 역할을 갈음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을 막는 모든 것들을 뛰어 넘어 대상에게 닿았다고 생각 했지만, 끝내 마지막 올가미를 제거 하지는 못했다. 거대한 통신도구들은 거꾸로 인간을 사로잡아 자신들에게 종속시키고자 할 것이다. 눈치는 다들 챘겠지만, 이미 모든 일들은 더 숨차게, 더 즉물적으로 벌어지고 있으며, 그 사로잡힘과 사로잡음의 달리기 속에서 접속의 가치는 더 메마르며 곤궁해져 간다. 

나는 기술 발달의 채무를 조금씩 늦게 갚아 가길 기대한다. 모든 것이 제각기 환골탈태 하여 기술과 도구와 환경이 저만치 내달음쳐 가지만, 적어도 그 외피들 속에 감춰진 사랑과 소통의 본질은 변하지 않을 거라 믿는다. 다만, 내가 그 추억과 접속의 실패들을 조금 더 음미할 수 있게 순식간에 냉정한 얼굴을 보이지만 않길 바랄 뿐이다. 그 끝을 붙잡기 위해 비록 작은 행위일지라도 전화번호를 얻기보다 대상의 얼굴을 기억하려 하고, 핸드폰의 맨질맨질함보다는 그녀의 숨결을 떠올려 보려 노력한다. 나 하나쯤 늦춰 간다 해도 조금 불편할 뿐이지, 큰 폐를 끼치게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나는 접속의 로망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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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작을 기획 중입니다. 과연 나머지 글들이 책마을에 올라갈 수준이 될지, 또 잘 뽑아질지 의문이지만, 

제 관심 분야인 이번글 만큼은 막힘 없이 써내려가 지더군요. 

그래도 여전히 미진한 부분에 대한 반성은 어김없이 제 죄를 추궁합니다. 자꾸만 깔끔하게 글을 쓰고 싶

어도 과도한 수사와 사족들의 유혹을 이겨내기가 쉽지 않은게 문젭니다. 억지로 우겨 넣으니 살이 삐져

나오는 것 같고, 칼같이 쳐내기엔 글의 내공이 부족해 보입니다. 아쉬움을 발판 삼아 '촌철살인' 이란 말

처럼 간단한 경구로도 마음을 동하게 하는 글을 써야 겠습니다. 






수정중이었는데도 많은 리플 달아주셔서 감사 합니다/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09-22 19:38)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8-12-08
20:22:42 

 

일병 김예찬 
  가지로! 2008-09-19
08:44:02
  

 

상병 이동열 
  포스트잇- 비둘기호- 이런것들의 기억이 스쳐지나갑니다 

잘 읽었습니다- 가지로! 2008-09-19
09:32:33
  

 

병장 주해성 
  가지로! 2008-09-19
09:34:56
  

 

병장 윤영돈 
  따듯한 글이네요. 

가지로. 2008-09-19
09:48:45
  

 

상병 박문희 
  시계탑 밑의 대학생이 되보고 싶어요(울음). 
한번 폰없이 생활해보는것도 좋을듯 하네요. 
멋진 글 잘 봤습니다! 2008-09-19
09:52:55
  

 

병장 허기민 
  나머지 글들도 어서 읽어보고 싶습니다(웃음). 2008-09-19
10:38:06
  

 

상병 이우중 
  아, 
가지로! 2008-09-19
11:18:37
  

 

병장 이동석 
  아깝군요, <가지로> 스트레이트 플러쉬가 나올번 했는데, 

전 아직 안 읽어서 가지로 안 외치겠음. 흐흐. 2008-09-19
12:49:20
 

 

병장 어영조 
  글 좋습니다. 겪지 못한 로망에 대한 아련한 아쉬움이 남네요. <가지로> 2008-09-19
13:44:48
  

 

병장 이승익 
  가지로! 멋집니다. 2008-09-19
16:24:43
  

 

 
  너무 좋군요 2008-09-19
16:36: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