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글-내글내생각]앓음다웠던 8년의 기억과의 재회  
상병 문두환   2008-08-12 02:42:38, 조회: 609, 추천:5 

햇수로 벌써 8년이 지난 일이다. 스물에 몇 해 더해 짧게 살아온 인생이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사실 굉장히 쑥스러운 일이지만, 누구나 자신이 살아온 과정을 되돌아보면 인생의 전환점이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내 스스로 나의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방점을 찍을 수 있는 시기가 20대 전후로 오밀조밀 몰려있음에 굉장히 놀라게 된다. 

지금도 일백 퍼센트 유효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세상에 운명이라는 것은 없고 오직 일정한 확률을 갖는 변수의 조합으로 세상이 존재한다고 믿던 때가 있었다. 무엇을 근거로 그리 확신하며 살았는지 지금은 알 수 없으나 그때 그 시절 그 어느 날에 길거리를 걷다가 눈길을 사로잡는 여자애를 만났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 아이로부터 모든 욕심과 동기가 발동되었다. 조금 오버해서 표현하자면, 삶의 ‘목적’이 생긴 셈이었다. 그때 나는 수능 점수가 인생의 모든 것을 대변하는 것처럼 떠드는 선생님들에게 지쳐 있었고, 이율배반적으로 공부를 하면 할수록 떨어지는 수학점수에 절망하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도서관을 찾아갔고 그곳에서 프로이트를 만났고 니체를 만났고 아르뛰르 랭보의 기이한 삶을 만났었다(하지만 중요한 건, 나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시를 쓴답시고 까불고 다니면서 정작 자신이 쓴 시를 뒤 돌아 앉으면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했던 그 치기어림을 깨닫기에는, 그때의 나는 너무도 오만했고 지적허영을 부리는 것에 심취해 있었다. 그러던 그 때에 그 아이를 만났다. 그 아이를 따라 가다 보니 나는 어느새 “두발자유, 체벌철폐”의 피켓을 들고 사람들 앞에 서 있었고 어느 날에는 희귀병 어린이 돕기 성금을 모금하고 있었고 어느 날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도서관에서 스터디를 하고 있었다. 세상을 과학적으로 바라보고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해서 타인에게 말하는 그녀의 말솜씨는 부러움의 대상이었고 한 줄 글을 쓰더라도 남과 다르게 돋보이는 글 솜씨는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 애처럼 되고 싶었다. 타인의 시선을 잡아 끌 정도로 말을 하고, 글을 쓰고 싶었고 무엇보다도 남들이 감탄할 정도로 똑똑해 지고 싶었다. 그랬다. 인정받고 싶었다. 그래서 누군가가 무심코 던져 준 ‘Rogue of state’를 열심히 탐독했고 이해되지도 않던 파울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를 읽어대곤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고 나는 대학에 갔다.

아마도 그곳에 간 것은 어찌 보면 나에게는 굉장히 큰 행운이었다. 웃는 돌. 제 7회였는지 8회였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때 내가 그곳에 간 것은 ‘자원봉사’의 자격이었다. 곧 이어 열릴 국제무용제를 준비하는 일이었다. 뜬금없이 산에 올라 꽃을 캐고 작은 언덕만한 쓰레기장을 치워 주차장을 만들고 언덕을 삽으로 파서 계단을 만들고 손으로 흙을 쌓아 무대를 만들었던! 모든 노동을 인간의 손에 의지한, 그러면서도 자는 사람 절대 깨우지 않고 새벽 4시까지 불을 피우고 둥글게 모여 춤을 추다가 7시에 일어나 다시 일을 시작했던, 원시공동체는 저리 가라고 할 정도로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었다. 물론 이 곳에 간 것도 순전히 놀러 오라는 그 아이의 권유에서였지만 나는 그곳에서 명상을 하면서 처음으로 나의 진정한 모습과 대면하게 되었다. 나 좀 봐달라고 아우성치는, 입 끝으로는 아름다운 말을 올리면서 실제로는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모순덩어리의 나를 보게 된다. 눈을 감고 명상을 하는데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왔다. 억울한 것도 분한 것도 없었는데 수도를 튼 것처럼 마냥 눈물이 계속 흘렀다. 이제까지 내가 해 왔던 그 많은 말들과 이상은-무척이나 인정하기 싫었지만-다름 아닌 나 자신의 만족을 위한 것이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는 것은 일종의 자신과의 화해였고 나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는 개안(開眼)의 과정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우연히도 찾아가 문을 두드렸던, 편집실에서의 생활. 다소 건방지다는 오해를 심어줄 법한 인상을 가진 나를 데려가 밥을 사주고, 잘 먹었냐고 묻는 말에 기껏 한다는 말이“식당 밥이 다 그렇죠, 뭐.”였던, 싹싹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나를 무척이나 따뜻하게 감싸준 사람들을 만났다. 사람은 왜 사람 속에서 살아가야 하며 조직은 사람을 사람은 조직을 생각해야 한다고, 선배라는 말보다 가족이라는 말이 더 어울렸던 그 사람들과의 시간은 나를 몇 년이고 편집실에 잡아뒀다. 매일 보는 얼굴들이 그렇게도 좋을 수 없었고 간혹 지루하긴 했지만 기획회의와 취재와 밤샘 원고 작업과 원고가 마감 되는 새벽 4시 즈음에 소주와 함께 뜯는 족발(!)은 그 무엇과도 대체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무엇보다도 나의 이름이 새겨진 활자매체가 발간된다는 매력과 책을 한 권 한 권 낼 때마다의 굵은 배움, 그리고 아이들과의 소소한 추억이 그토록 끈질기게 나를 버티게 했던 힘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학교를 떠났다. 집을 떠났다. 사바세계를 이탈 해 지낸 지 1년이 조금 넘어선 어느 날 사바세계로 돌아간 적이 있었다. 지하철 스크린도어 저편으로 짧게 깍은 머리를 애써 감추듯 촌스러운 모자를 푹 눌러 쓴 이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아마 그날은 유난스럽게도 이 곳 저 곳에서 들려오는 친구들의 취업 소식과 취업을 준비하는 후배들의 이야기가 많았었던 것 같다. 나에게는 높은 토플 점수도 없었고 이렇다 할 자격증도 있지 않았다. 지금 내가 가진 것은 지난 4년 동안의 대학생활에 대한 기억과 사바세계로 돌아간 이후의 자잘한 계획 몇 개가 전부였다. 손에 뿌듯하게 쥐어진 것은 없고 밥벌이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사실에 문득 당혹스러워진 기분이었다. 그때 지하철이 굉장한 기계음을 내며 들어서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마침내 스크린도어에 반사된 이와 나는 눈을 마주치게 된다. 

웃음이 나왔다. 지난 8년의 시간이 활동사진처럼 머릿속에서 재생이 되고 친구들과 주고받은 E-mail과 편지의 글귀들이 머릿속 사방 가득히 채워지면서 짤막하게나마 머릿속에 들었던 당혹감은 쉽게 뭉개지는 듯 했다. 어느 덧 ‘성과 없는 과정’은 의미가 없다고 치부하고 외면하는 세태에 나 역시 자연스럽게 동화되었었나 보다. 지금 내가 내린 결정과 앞으로의 계획과 꿈, 그 모든 것들이 둔한 손짓으로 나를 만져가며 스스로의 껍질을 벗겨내는 변태의 과정에서 나왔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10대 아이들이 흔히 겪는 ‘성장 통’처럼 칡넝쿨처럼 기어오르며 나를 괴롭혔던 고민들과 스스로의 한계에 부딪힐 때의 절망감, 밤새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던 그 모든 것들이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나를 성장시켜 온 양분이 되었다는 것을 그때 다시금 알게 되었다.

이제 나는 나에게 조금 더 솔직해 질 수 있을 것 같다.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인지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의 두 가지 명제 사이에서 크게 갈등하지도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나에게 있어 과정이란 말 그대로 목표로 다가가는 하나의 방식일 뿐이며 내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나의 모습에 다가가기까지 그 과정의 모습이 어떠한 것이든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님이 분명하다. 지난 나의 모습에 반성은 있을 수 있지만 후회는 있을 수 없다. ‘잘’ 살아왔으리라는 자신감이 아니라 ‘열심히’살아왔기에 지난 삶을 후회하는 것은 여태껏 쌓아왔던 모든 것들을 부정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서툴고 거친 글이 참으로 길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별 교훈이 없는 글을 친구의 미니홈피에서 읽었던 글귀로 서둘러 마무리 지어야겠다.


“당신을 믿고
나를 믿고
그리하여 고민하되 두려워하지 않으며
힘들어 하되 후회하지 않기를”


두려움은 이미, 저-만큼 달아나 있다.



덧 - 
참, 이 아이디는 도용(음, 그래도 본인에게 통보는 해 주었어요)해서 만든 것인데, 다시 자기소개를 올리지 않아도 되겠지요? 도용이 나쁜 건 알겠지만, 어쩌겠어요. 게시판에 들어와 보고 싶은 걸(먼 곳). 이곳에서 읽는 많은 분들의 놀라운(때로는 소름이 돋는) 글 덕분에 남은 이곳에서의 생활마저도 쉬이-지날 것 같다는 예감이 드니까요(웃음).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08-28 19:23)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8-12-08
20:17:08 

 

병장 이동석 
  글 내용과는 별개로, 죄송할뿐입니다. (흑흑) 

저 같은 경우엔 십대때 성장통을 겪지 않아서 
이제와 성장통을 겪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게 다 한국 입시교육 때문이라고 여기기도 했지요. (웃음) 2008-08-12
06:18:35
 

 

병장 이태형 
  개안의 과정이라니, 그 느낌이 무척 궁금하네요. 
왜 서둘러 마무리를 지으셨나요, 더 쓰셔도 되는데(웃음) 

잘 읽었습니다. 
저도 후회하지 않고, 두려움이 멀리 달아난다면.. 2008-08-12
07:12:01
  

 

병장 주해성 
  아 담백하네요. 어떠한 양념도 필요없는 기름기 쫙 뺀 쇠고기같아요. 
가지로~ 2008-08-12
07:42:23
  

 

병장 노요셉 
  좋은글이군요 잘읽고 갑니다 2008-08-12
08:02:07
  

 

병장 박종석 
  가지로! 2008-08-12
10:32:44
  

 

병장 윤형주 
  과거를 발판삼고 성찰하여 미래로 도약하는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다만 한가지, 

사람이 살아가는데 두려움이란 것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의사는 환자를 두려워해야 하고, 상인은 고객을 두려워해야하는 것처럼요. 

두려워하되 두려워하지 말고 신중하게 움직이자는 게 제 생각입니다. 2008-08-12
12:10:14
  

 

상병 이동열 
  전 정말이지 두환님이 말씀하시는 개안의 과정을 겪고 싶네요(울음) 

여기서 다행히 책마을을 만난건 행운이지만요(웃음) 2008-08-12
14:06:32
  

 

병장 허기민 
  마지막 문단 잘 읽었습니다. 마음의 키가 훌쩍 크신 거 같아 부럽습니다(웃음). 2008-08-12
15:09:26
  

 

병장 김준호 
  지난 날에 대한 후회는 지금의 나와 나의 관계 모두를 부정하는 것이겠지요. 

좋네요. 2008-08-12
15:25:08
  

 

병장 송재민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글 중간에 나오는 '웃는 돌' 에 대해 잘 모르겠네요. 2008-08-12
15:42:50
  

 

병장 이승익 
  좋은 글 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인지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의 

두 가지 명제 사이에서 크게 갈등하지도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요즘 제가 가장 고민하고 있는 두가지 명제 이네요. 

저도 어서 스스로에게 더 솔직해 져야 할텐데요. 2008-08-12
15:49:45
  

 

병장 이동석 
  전 앉은 키만 훌쩍 커버린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울음) 

이러저러하게 책마을에서 많이 언급되어온 성장통 후일담류의 글이지만, 
잔잔하게 도드라지는군요. 
두환님의 정식적인 활동을 위해서라도 어서 커뮤니티가 안정되야 할텐데. 2008-08-12
18:02:52
 

 

상병 문두환 
  /동석님 
그렇게 미안해 하시면 제가 되레 미안해 지잖아요. 
책 마을에서 많은 분들의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니까요(웃음). 

/재민님 
'웃는 돌'은 '홍신자'분(현대무용가)이 설립한 곳으로 연 1회 국제무용제와 
명상캠프 등을 운영하는 곳입니다. 지쳤을 때 한번 쯤 들르면 정말 좋아요. 2008-08-13
10:57:08
  

 

병장 송재민 
  /두환님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원시공동체 분위기라면 솔깃하네요. 2008-08-13
11:30:23
  

 

병장 이동석 
  웃는돌, 입력하겠습니다. 2008-08-13
14:25:39
 

 

상병 문두환 
  /재민님, 동석님 

무엇보다도 좋았던 것은...그곳에 오는 여성분들의 평균 미모 수준이었습니다(두둥). 

하하. 농담이었어요. 하지만 정말 개성 가득한 사람들이 모여서 
무언가를 '하기'위해서 아이디어를 짜고 서로를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존중해줄줄 아는 분위기는 죽산 웃는돌만의 매력임은 확실합니다. 

사바세계로 나가게 되면 6~8월쯤에 또 한 번 가볼까 합니다. 
매년 6~8월 사이에 행사가 있으니까요. 2008-08-13
16:21:03
  

 

이병 고광복 
  저는 여전히 자만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제 자신을 그럴싸하게 포장해 남들에게 보여주는데 급급해 제 진솔한 모습을 알지 못하는 것 같은데...(흑흑) 
자신의 진정한 모습과 떳떳하게 대면할 수 있는 문두환 분대장님이 대단해 보일 따름입니다. 

저 역시 군생활을 하면서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고민으로 제 진정한 내면을 찾아가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그리고 많은 좋은 말들을 적어주셨는데, 그 중에서 "조직은 사람(개인)을 생각하고 사람(개인)은 조직을 생각한다"는 말이 참 마음에 와 닿습니다. 제가 요즘 많이 생각하게 되는 부분이라서 그런가 봅니다.(웃음) 

좋은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2008-08-13
17:40:41
 

 

병장 이동석 
  두환님, 
웃는돌에서 웃으며 뵙겠습니다. 껄껄. 

아름다운 여성분들이 있는곳은 그게 지옥 끝이라도 찾아가는 움직이는 돌 2008-08-14
21:14:00
 

 

병장 이동석 
  이게 아직 여기있다니, 
(오타때문에 계속 잘리는군요. 흑흑) 
가지로 2008-08-28
19:2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