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월 통합 월베-내글내생각] 이별 후, 사색노트  
병장 최경빈   2009-04-18 01:27:24, 조회: 218, 추천:1 

당신은 네모난 방 안에 서 있다. 천장이 낮은 방의 체크무늬 벽지는 정갈하다. 차분하게 배치되어 있는 단순한 가구 몇 가지를 당신은 찬찬히 훑어본다. 오래된 가구들의 나뭇결이 온화하다. 당신은 천천히 손을 뻗어 가운데의 둥근 테이블 가를 매만진다. 손가락 끝에 와 닿는 느낌은 당신의 예상보다 젊고 요란스럽다. 당신은 손을 떼고 시선을 옮긴다. 찬장에는 색 바랜 찻잔들이 진열되어 있는데 저마다 모양새가 다르다. 귀퉁이가 깨진 잔이 있는가 하면 만들다 그만둔 듯한 잔도 있다. 그 중 가장 새것처럼 보이는 잔에 시선이 머문다. 당신은 천천히 다가가 잔을 집는다. 잔은 파스텔 톤의 아름다운 꽃들이 그려진 것이 제법 고풍스럽다. 당신은 잔에 차가 아직 담겨 있음을 알고 입술을 갖다 대려다 그만둔다. 조심스럽게 찻잔을 내려놓고는 다시 걸음을 옮긴다. 단단한 오크나무로 짜여진 책장에 책들이 꽂혀 있다. 당신은 손을 내민다. 당신의 손가락이 책의 길 위를 걷는다. 그 순간, 당신의 시선을 쫓아 바삐 걸음을 옮기던 손가락이 갑작스레 걸음을 멈춘다. 손가락이 멈춰선 곳엔 자그마한 노트가 꽂혀 있다. 당신은 살짝 갸우뚱하고는 노트를 꺼내 든다. 노트의 붉은색 표지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다. 페이지를 스르륵 넘기며 대충 훑어본다. 그리 양이 많아 보이진 않는다. 당신은 잠시 망설이다 결정을 하고는 노트를 집어 들고 테이블에 가 앉는다. 테이블 위엔 흔해빠진 회색 전화기 한 대와 스탠드 하나가 놓여 있다. 당신은 스탠드의 불을 켜고는 의자를 당겨앉는다. 페이지 첫 장엔 떨리는 글씨체로 쓰여 있다. ‘이별 후, 사색노트’


이별 후, 사색노트


0. 일관성

일관성의 울타리는 좁은 길을 강요했다. 쉽지 않은 일이다. 예상을 빗나간 감정 앞에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제멋대로인 소용돌이에 심장이 휩싸일 때면 손에 쥔 펜이 어지러워 방향을 잃었다. 주저앉아 고개를 들면 제각기 뛰어다니는 감정들이 울타리를 부수며 놀았다. 한 놈이 다른 놈을 잡아먹는가 하면 이따금 잡아먹힌 놈이 배를 째고 나와 거꾸로 잡아먹기도 하였다. 난 울타리를 간절히 부여잡았다. 글은 써내려져가야 할 일이다. 난 고막을 막고 눈을 감고 울타리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간혹 울타리가 부서져도 걸어야 할 길은 변함없을 터였다. 


1. 이별

이별은 그저 가슴 한구석이 겨울날의 손끝처럼 저릴 뿐이었다. 같은 길을 걷던 우리는 갈림길을 만났고 서로의 손을 놓았을 뿐이다. 많은 것이 변한 듯하지만 3년 전을 돌아보면 그리 다를 것도 없다. 그녀는 그녀의 길을 걷고 나는 나의 길을 걷는다. 우리의 길이 잠시 하나였다는 사실이 우리의 걸음 자체를 변화시키진 못한다. 결국 나도 그녀도 쉼 없이 걸을 뿐이다.



2. 비현실

놀랍게도 그녀는 아직 내게 비현실적이다. 3년이란 시간은 그녀에게 범접하지 못했다. 그녀의 아득한 신비는 현실의 창검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미소는 꿈결 같았고 눈물은 영롱했다. 내뱉는 숨결에선 겨울과 봄이 사뿐히 마주 앉았고 입술에 맺히는 단어들에선 소나기의 시원함과 들판의 푸르름이 어우러졌다. 꿈같은 사랑의 끝은 그 역시 꿈과 같아, 달콤한 이별의 꿈을 꾸는 나는 천사의 인간미를 찾아 헤매며 현실의 자락을 붙잡다.


3. 결여

그녀에게 결여되었던 건 무엇일까. 그녀는 목말라했다. 우리는 갈등했다. 사랑은 결코 평등하지 않았다. 내 조심스러움과 무심함은 두 개의 칼날이 되어 가위처럼 그녀의 사랑을 찢었다. 조각난 마음은 아이처럼 울었다. 난 그녀를 사랑했다. 그러나 난 충분히 쏟아 붓지 않았다. 결국 애타게 나를 갈구하는 그녀에게 사랑을 붓자 그녀는 떠나갔다. 그녀에게 필요했던 건 나도 사랑도 아닌 갈증의 해소였을 뿐이었나.


4. 전화기

손가락의 세포는 무의식의 지배를 받았다. 익숙하게 자리를 잡은 검지가 전화기 버튼 위에 군더더기 없는 사선을 그었다. 적당한 정도의 압력이 가해질 때마다 수화기에선 전자음이 났다. 칠음계로 담을 수 없는 날카로운 소리가 익숙하여 마침내 멜로디가 되었다. 의식은 그제야 수면 위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똑딱이던 손가락이 멈췄다. 검지의 가느다란 떨림은 마음 속 바다의 해일이 되었다. 귓가에 윙 소리가 난다. 손목은 수화기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는 양 맥없이 꺾였다. 능숙한 손놀림이 기억한 그대는 새벽안개가 되어 의식의 달 앞에 누웠다.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5. 시간

나의 시간은 잠식당했다. 그녀에게 잠식된 시간이 그녀를 지울 수 있음을 나는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는 나의 의식과 무의식에 스며있어 그녀로 흥건히 젖은 나의 하루는 아침부터 밤까지 질퍽인다. 오늘은 눈 같은 비가 왔다. 내리는 비를 삼키다 못해 꾸역꾸역 토해내는 땅 위에 물이 고였다. 언젠가 해가 뜨면 웅덩이가 마르고 땅은 숨을 쉬겠지만 되찾을 호흡을 떠올리기엔 땅이 너무 젖었다. 그러나 강이 늘 그 자리에 있음에도 흐르는 물은 새로움을 안다. 투명한 위로로 가슴을 쓰다듬을 뿐이다.


6. 섬

우리는 섬이 되었고 그녀와 나 사이엔 바다가 누웠다. 그녀는 손이 닿을 수 없는 저 멀리 수평선 위에 떠있다. 파도가 그녀의 미련이라 생각한다면 그건 과대망상일 것이다. 파도는 그저 밀려오고 쓸려나간다. 의미를 부여하는 건 나의 몫이다. 지금의 난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고픈 마음이 없다. 이제 그녀는 나와 교감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교감을 느낀다면 그것이 설령 진짜 교감일지라도 받아들여서는 아니 될 일이다. 파도가 미련이라 생각한다면 파도는 미련이 될 테지만 난 교감이라는 허울 좋은 유혹을 구겨 바닥에 던져버렸다. 파도는 그저 밀려오고 쓸려나간다. 내가 던진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교감은 파도를 타고 넘으며 제자리에 머문다. 난 멀리 바다와 하늘이 만나는 흐릿한 선을 응시한다.


7. 글귀

그대가 쓴 글자들이 심장 위에 쿵하고 떨어졌다. 그대의 감성을 몰랐던 걸까 잊었던 걸까. 그대의 글귀는 선명하고 싱싱했다. 심장에 가을바람이 지나갔는데 그 바람의 색깔은 내가 입힌 듯도 했다. 그대의 글귀는 하얀색 도화지가 되어 내 붓을 기다렸나보다. 내가 입힌 나의 색은 그대가 되어 노랗게 떨어졌다. 우리의 추억은 살아 숨 쉬는 바랜 사진이었다.


8. 희망

내 희망은 하늘 냄새가 나는 연보라빛이다. 저녁의 노래가 눈가를 적셨다. 젖은 눈가는 당혹스러웠다. 억지 감성을 살해한 건 몇 달 전의 일이다. 학습 된 감동에 속는 내가 어리석고 가여워 행한 일이었다. 무덤 앞에서 나는 제법 담담했다. 그때의 하늘을 잿빛이었고 해는 밤을 향한 걸음의 종착지에 서 있었다. 다시 뜬 해가 저녁의 의자 위에 앉아있을 줄은 몰랐다. 노을은 보라빛으로 불탔다. 내 희망은 고요한 하루의 소멸 한 가운데에서 스며나온 한 자락 음색이었다. 생존한 내 감성은 저무는 낮이 되어 눈꺼풀에 안겼다.


9. 무의미

슬픔은 온전히 슬픔이지 못했다. 가여운 내 언어들은 바싹 마른 쓰레기가 되어 버려졌다. 사색은 사색 그 자체로 의미가 있어야 할 터였다. 허공에 떠도는 단어들이 달고 있는 ‘나’라는 꼬리표를 난 감당해낼 수가 없다. 내 단어들은 그녀와 달랐고 사랑과도 달랐다. 존재와 동떨어져 존재하는 단어들은 고아가 된 아이였다. 감정의 기록이 무의미함을 기록하는 모순이 퍽 버겁다. 그녀와 사랑과 희망을 써내려나가는 펜 끝에 눕는 글자들이 질식하여 시체가 되는구나. 헛되다.


검정색 노트의 중간 정도에 도달했을 즈음, 누군가 당신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당신은 그다지 놀라지 않은 채 뒤를 돌아본다. 당신의 뒤엔 짧은 머리의 남자가 서 있다. 남자의 눈에선 죽어가고 있는 오래된 바다가 보인다. 당신은 어쩌면 남자가 자신을 동정해 주길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신은 표현하지 않는다. 그보다 강한 어떤 예감이 스쳤기 때문이다. 남자는 억세지 않은 손길로 당신을 일으킨다. 남자의 손길에서 정중함이 묻어난다. 당신은 다시 한 번 남자의 눈을 응시한다. 남자는 건조한 표정으로 묵묵히 당신의 눈길을 받아낸다. 당신의 응시가 또 다른 생각으로 바뀔 즈음, 남자가 입을 연다. 

- 읽어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이정도면 충분해요.

남자는 당신을 문까지 안내하고는 이내 문을 닫아버린다.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6-10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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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10
09:34:35 

 

병장 고승철 
22.114.1.15   글의 색감이 참.. 이쁘네요.......... 내용은 무거운것도 같은데.. 
색이 있는글 같아 참 좋아요. 2009-04-18
10:31:05
 

 

병장 김우현 
18.1.11.19   3.결여 

'내' 조심스러움과 무심함은 두 개의 칼날이 되어 가위처럼 '그녀'의 사랑을 찢었다. 조각난 마음은 아이처럼 울었다. 

'내' 라는 그리고 '그녀'라는 존재를 '그녀의' 그리고 '나' 라고 바꿨더라면 

저는 아마 발랄한 모니터 액정과 눈을 마주친채 울어버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2009-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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