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 야(初夜)
프롤로그
석현이 얼마 전 레코드 가게에서 산 퀸의 앨범은 ‘Made in heaven'이었다. 동성연애 때문이라는데, 에이즈로 죽은 보컬 프레디 머큐리의 유작이란다. 퀸을 안지는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2년 전에 한 멤버가 사라진 것이었다. 프레디는 1997년에 죽었다니까. 부연 설명을 알고 나니 괜시리 앨범이 울적해 보였다. 덩달아서 무거운 가방을 매고는 학교에 가야되는 처지가 석현은 서글퍼졌다. 석현은 고3이었고, 버스 에 서서 다리를 까딱꺼리며, 이어폰에 흘러나오는 퀸의 노래를 나지막히 립씽크 한다.
‘You don't fool me, You don't fool me......'
절묘한 배경음악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바보가 될 것 같은 찜통 같은 더운 여름이 시작되고 있었다.
* 석현은 부산으로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 지난 사흘을 생각했다. 몸은 피곤했으나 쉽사리 잠은 오지 않았다. 이 사건은 어떻게 보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의 죽음은 갑작스러웠다. 할머니는 작년 봄 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점점 기력이 쇠하시더니, 이내 병으로 앓으시게 된 것이다. 또한 노환이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연세이신지라 이성적으로 생각하자면, 혹은 다른 친구의 이야기라면 같이 슬퍼해 줄 수 있을지언정, 그러려니 납득할 수 있을 터였다. 막상 자신에게 어떤 죽음이 가까이 닥쳤을 때 대처하는 방법을 석현은 아직 알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일은 석현의 담임선생님의 다급한 목소리로 시작되었다.
“석현아, 얼른 가방 싸서 집에 가라”
석현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선생님을 바라보았던 것 같다.
“할머니 위독하시다고 집에서 전화 왔다.”
다급한 손놀림으로 가방에 대충 책을 우겨넣었었나. 펜이 하나쯤 떨어졌던가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급하게 가방의 지퍼를 올렸다. 한 쪽 어깨에 가방을 둘러매고 선생님에게는 대충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교실을 뛰쳐나왔다.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불규칙한 소음이 복도에 가득 찼다. 머리 속은 그런 소음 같은 것들이 엉켜버리고 있었다.
장마가 언제 끝났는지도 모르게 햇볕은 쨍쨍하고 날은 후덥지근하다. 저 아래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바람도 왠지 소금기가 끼어 석현에게는 찝찝하게만 느껴진다. 시간은 한창 지열로 도로가 어른거리는 두 시. 산 중턱에 있는 학교에서 버스정류장까지는 20분 정도가 걸린다. 마음이 급하다. 급한 마음에 뛰다 걷다를 반복한다. 야속하게 햇살은 오히려 어깨를 찍어 누른다. 내 몸의 무게와, 가방의 무게와 마음의 무게와 땀으로 젖어버린 옷의 무게, 심지어는 내리막의 경사까지 무릎의 하중을 더 하는 것 같다. 버스 정류장은 마음만큼 쉽게 닿을 수 없는 것이었다.
버스를 타고 30분쯤 뒤에 석현은 집에 도착했다. 석현의 어머니는 한참 서울로 올라 갈 준비 중이다. 아버지에게는 전화를 해놓았노라고, 아마도 회사에서 바로 그곳으로 갈 것 같다고, 지금이 두시 반인데, 4시 20분 기차를 예매해 놓았노라고, 그러니 적어도 3시 10분까지는 갈 채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석현은 약간 맥이 풀렸다. 다급하게 나온 것 치고는 아직 시간의 여유가 있다는 것이 그를 허전하게 했다. 하지만 그곳에 빨리 갈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었다. 할머니가 위독하시다 한들 갑작스럽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석현은 교복을 벗고 가벼운 세수를 하고 방에 들어와 약간의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었다. 약간 피곤하기까지 했다. 고3이랍시고, 야간자율학습이 끝난 후에도 동네 독서실을 다니며 1시 정도까지는 공부하는 편인지라(물론 가서 놀거나 멍하니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잠은 충분하지 않은 편이었다. 잠깐 눈을 붙일 요량으로 침대에 누웠다. 손깍지를 하고 머리를 괴니 어느새 잠이 들었다.
“석현아, 일어나. 가자.”
30분 쯤이 지난 걸까. 석현의 어머니는 평소와 달리 조금 굳은 말투로 석현을 깨운다. 아, 할머니. 잠깐을 잠든 사이에 석현은 할머니의 꿈을 꾸었었다. 석현을 깨우는 어머니의 굳은 말투는 좀 전까지 꿈에서 생생하게 본 할머니가 사실은 서울의 한 대학 병원에 누워있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시켜주기에 충분했다. 얼른 일어나 대충 얇은 이불을 개고 가방에 적당한 소지품을 챙기고는 석현은 어머니와 함께 집을 나왔다. 그리고 택시를 잡았다.
“부산역이요.”
낮 시간이라서 그런지 차는 그다지 막히지 않는다. 아마도 부산역에 도착해서도 20분 정도는 열차 시간을 기다려야 하리라. 창밖을 바라보면서도 휙휙 지나가는 풍경은 석현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난 설날에나 보았던 할머니의 모습을 조심스레 떠올려보는 것이다.
아직 오후의 열기가 남아있는 부산역에는 피둥피둥 살이 찐 비둘기들이 지천이다. 열차 시간이 좀 남은 것을 확인하고 석현은 과일주스를, 석현의 어머니는 커피 한 캔을 매점에서 산 뒤 말없이 마셨다. 서울행 새마을호 4시 20분차 개표중이라는 안내판을 확인하고 긴 열차의 한 칸에 몸을 실었다. 미끄러지듯 떠나는 열차. 열차가 떠나고서야 석현은 혜경의 호출기에 메시지를 남기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찜찜한 마음이었지만, 지금은 사실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객차 복도에는 도시락 판매원이 돌아다녔다. 서울 사는 친척들을 보러 갈 때마다 열차 안에서 먹는 도시락은 별미였지만, 오늘만큼은 그다지 신경이 가지 않았다.
서울역에 도착했을 때는 하늘이 온통 어두워지려는 찰나였다. 오랜만에 올라온 서울의 정취를 만끽하기도 전에 당장 수많은 차중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S대학병원으로 향해야 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중환자실 접수처에서 할머니의 이름을 확인했다.
“예? 중환자실에 그런 환자가 없다구요?”
“예, 저희가 이름으로 검색을 했는데, 그런 분은 안 계십니다.”
석현과 석현의 어머니는 당혹스러워한다. 분명히 이 병원 중환자실이라는 연락을 받아 놓은 상태였다. 석현의 어머니는 불현듯 생각이 떠올랐는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아...어쩌면 벌써 돌아가셨는지도 모르겠다. 빨리 장례식장으로 가보자.”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석현은 그 말을 듣고서야 정말 할머니가 돌아가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급하게 발걸음을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병원을 잘못 찾은 것일 수도 있겠지. 돌아가신 게 아닐지도 몰라. 발걸음만큼 이나 많은 생각들이 재빠르게 스쳐지나갔다. 물론 돌아가셨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온 장례식장이지만, 안내판을 확인하고 석현은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당황한 것은 석현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였으리라.
‘○○호 故 ○○○ 님. 상주 ○○○’
* 석현은 기차 창문에 기대어 장례식장에서 눈물 한 방울을 흘리지 않던 자신을 떠올려본다. 어떻게 그렇게 담담할 수 있었을까, 그저 놀랍기만 하다. 수많은 흐느낌 속에서 그는 마치 이방인처럼 표류했었던 기억이 난다. 발인을 할 때도, 심지어 선산의 할아버지 묘 옆에 땅을 파고 하관을 하는 순간에도, 그 순간에 하얀 국화 한 송이를 헌화하면서도 석현은 잠깐 코끝이 찡했을 뿐이었다. 석현의 부모님과 집안 어른들은 조의금이나 유품, 그리고 할머니가 사시던 시골집 문제 등을 의논하기 위해 남았고, 고3이라는 제약 때문에 석현만 홀로 부산행 기차에 몸을 실은 것이었다.
사실 석현에게 할머니는 커다란 의미가 있는 분이었다. 석현의 아버지는 한참 중동 건설붐이 일었던 80년대 초반 석현이 태어나고 얼마 있지 않아서 장기 출장을 가버린 것이었다. 그 출장이 몇 년 이상이 될 것을 안 석현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떠난 뒤 얼마 안 있어 석현을 할머니에게 맡기고 아버지가 계신 곳을 떠났단다. 석현의 기억에는 없었던 일이므로 알 턱이 없었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버지의 일은 계속 바빠서 국내에 들어올 길이 없었다. 간혹 편지가 왔었더라는 것을 나중에 초등학생이 되고서야 할머니가 꺼내 준 옛 편지를 통해 알 수 있었으나, 석현이 그것을 그 당시에 읽었던 기억은 없었다. 석현이 일곱 살이 되기까지, 그러니까 석현의 부모가 그곳에 관련된 모든 일을 끝내고 올 때까지 석현의 양육은 오롯이 석현 할머니의 몫이었던 것이 되겠다. 물론 석현의 할아버지도 있었지만, 할머니에 비해 다정다감한 성격은 아니었고, 때문에 할머니를 더 따랐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존재를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느껴본 적이 없던 석현은 7살이 되어 이젠 할머니 곁을 떠나 부산이라는 낯선 곳에 가서 부모님과 함께 살아야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할머니의 곁을 떠난다는 것을 실감할 수 없었던 석현은 어리둥절하면서도 그 전날과 다를 바 없이 지냈다. 다만 그날 밤 할머니가 석현의 손을 꼭 잡고 훌쩍이는 소리를 잠결에 들고 깨었을 때서야 왜인지 목이 메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나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날 밤은 뒤척였던 것 같다. 그 탓에 그 다음날 부산으로 내려가는 기차에서는 줄창 잠을 자서 아무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린 손주녀석을 위해 계절마다 달여 먹이던 쓰디쓴 보약을 이제 더 먹지 않아도 되나 하는 것은 그 당시 석현의 유일하고 어리석은 기대였다. 몇 년 만이라 부모님은 석현에게 많은 사랑을 베풀어주었다는 것을 이제는 느낄 수 있었으나, 시골의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석현은 점점 더 멀어져 갔다. 얼마 안 있어 들어간 학교는 더욱 석현의 가슴을 죄었던 것 같다. 그리고 늘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명절이나 방학에 잠깐 보는 것을 빼고 할머니는 점점 석현의 가슴 속에서 사라져 갔던 것이다. 석현은 장례식에서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은 자신의 메마른 감정을 수험 준비의 각박함 탓이라고 치부하기로 했다. 객차 창문에 빗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석현은 잠을 청하기로 했다.
* 피곤했던 탓일까. 객차 내에 종착역을 알리고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울려 퍼질 즈음해서야 석현은 기지개를 켰다. 부산역은 가는 날과는 달리 추적추적 비가 오고 있었다. 살진 비둘기들은 비 탓인지 몇 마리를 제외하고는 광장에 보이지 않았다.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다가 그 와중에 참고서 사라고 큰아버지가 찔러준 만 원짜리 몇 장이 생각났다. 부모님도 이틀 뒤에 오신다고 적당히 용돈도 쥐어서 보내신 터였다. 버스 몇 분 기다리기도 힘들다는 생각에 택시를 잡아타고 좀 더 자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시골 할머니댁(이제는 뭐라고 불러야 하나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으나)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부산에 잘 도착했노라고 연락을 하고 택시를 탔다.
문을 열고 들어간 집은 을씨년스러웠다. 이틀의 공백이 석현에게 주어질 것이었다. 시계를 쳐다보니 네 시쯤 되었다.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 석현은 일단은 학교에 전화를 걸었다. 다행이 쉬는 시간 즈음이었고 1분쯤을 기다리다가 담임선생님과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선생님, 저 석현인데요, 예, 잘 돌아왔습니다. 고맙습니다....그런데 저 오늘은 바로 학교로 갈 수 없을 것 같아요. 예, 좀 그래서요. 예, 내일 뵙겠습니다.”
선생님은 고3인 석현의 공부를 걱정하셨다. 직업정신인지, 진짜 제자 사랑인지는 먼 훗날에서야 알게 되겠지만 어쨌든 오늘 당장 야간자율학습을 하러 오냐는 물음에는 조금 어이가 없기도 했다. 쓴 웃음이 났다. 그래, 내가 고3은 고3이구나.
석현의 성적은 나름 서울의 명문대를 노려 볼 정도로 괜찮은 편이었다. 정작 그 자신은 그런 공부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늘 강요되는 공부에서 그다지 벗어나려고 해본 적도 없다. 평범한 학생이었다. 적당히 친구들과 운동을 즐기고, 음악을 듣고, 공부를 하고. 무엇인가를 강요하는 이들은 그 강요하는 틀에 대해서는 수용자들이 가치판단을 하기 원치 않으면서도, 그 틀 안에서는 능동적이길 바라는 이율배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모습들이 우스웠다. 그러다 갑자기 혜경의 생각이 났다. 석현은 다시 수화기를 들어 혜경의 호출기 번호를 눌렀다. 호출기에 녹음되어 있는 조지 윈스턴의 피아노곡은 석현이 녹음해 준 것이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녹음된 음성 메세지를 확인했다. 석현은 호출기를 사달라는 것이 가져올 의문의 눈초리가 싫어서 혜경의 메시지 함을 같이 사용하기로 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걱정스런 혜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연락도 하나도 없고, 집에 전화해도 아무도 안 받고, 살았어? 죽었어? 이렇게 많이 메시지를 남겼는데, 대답 한 번은 해줘야 하잖아. 뚝”
미안한 마음이 들어 석현은 바로 메시지를 남겼다.
“나는 살았는데, 할머니는 돌아가셨어. 왜, 많이 아프시다고 했었는데. 기억나지? 이틀 전에 돌아가셔서 장례치르러 서울 다녀오는 길이야. 내일 학교 가야해서 나는 먼저 왔어. 아직 수업하겠네. 나중에 연락해.”
* 수동적인 틀 안에서 능동적이길 바라는 주변의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듯 보였던 석현은 사실 자신의 능동적인 틀을 서서히 개척한 상태였다. 주변 친구들은 있던 사랑의 감정마저 잠시 접어두도록 압박 당하던 98년의 수능이 끝나는 겨울의 문턱. 친구들이 당하던 압박을 석현 역시 당하고 있었던 걸까. 그 주말에 석현은 어머니에게 학교 야간자율학습이 끝나고 동네 독서실이라도 가서 좀 더 오래 공부를 하겠노라고 말했다. 석현의 어머니는 별 말 없이 동의하였고, 방학은 매우 갑갑해져 갔다. 스스로 판 무덤이니 큰 불만은 없었다.
생각해보면 묘한 일이었다. 독서실에서 중학교 때의 친구 몇몇을 재회하게 되었다. 그 중 한 친구는 그 독서실에 다니는 어느 여학생을 좋아하고 있는 상태였고, 석현은 그 친구에게 독서실 한 켠에 마련된 휴게실로 종종 끌려가 그 친구와 여학생의 이야기가 어색해지지 않도록 적당한 추임새를 넣었던 것이다. 물론 다른 친구들도 가끔씩 동원되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그 여학생이 혜경이었다. 몇 번을 끌려 나가는 사이 점점 그 상황을 즐기게 되면서 알게 된 내용은 이제 고2가 되는 석현과 그 무리보다 그 여학생이 한 살이 어리다는 것과(정확하게는 1월 생이라 두 살이 어리다는 것) 이 근처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여고를 다닌다는 것 정도가 되었다. 주로 그 둘의 대화는 공부하다가 모르는 문제에 관련된 것이었고(주로 혜경 쪽에 관련된), 성적이 좋았던 석현은 가끔 친구의 문제풀이가 막힐 때마다 넌지시 힌트를 주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혜경은 직접적으로 석현에게 말을 거는 경우가 많아졌고 참을 성 없는 그 친구는 어느새 다른 여학생과 친해진 상태였다.
날씨가 점점 풀리는 2월 말의 어느 일요일, 석현에게는 첫 여자 친구가 생겼던 것이다. 다른 친구들처럼 진도에 대해 여기저기 떠벌리지는 않고 다녔지만, 나름대로의 스킨쉽도 있었다는 것을 알면 부모님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성교제를 떳떳이 밝히지 못하는 석현의 작은 의문점이었다.
어두침침한 제 방 침대 벽 쪽에 쪼그려 앉은 석현에게는 굳이 연락하려고 해도 할 데가 없었다. 친구들은 다들 학교에 있을 터였다. 석현은 열아홉이 적지 않은 나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가치관이 명확하진 않아도 말도 안 되는 궤변에 흔들리지 않을 나이 정도는 되었다고 굳게 믿었다. 많은 친구를 사귀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어떤 재미에 휩쓸려서 친구를 사귄 것도 아니었다. 마음에 맞는 친구들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혼자였다. 테레비도 있었지만, 굳이 보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 시간은 따분한 오후 뉴스라던가, 아니면 애들이나 보는 유치한 인형극이나 만화를 할 공산이 컸다. 그런 프로그램 따위 별 흥미가 없었다. 그래서 가방 속의 워크맨을 꺼냈다. 여전히 워크맨에는 ‘Made in Heaven' 앨범이 걸려 있었다. 보컬리스트 프레디 머큐리의 유작. 그래서 ’Made in heaven'인걸까. ‘I was born to love you'라고 시원하게 외치던 사랑의 메신저는 어느새 귀에서 ’Too much love will kill you'라는 서글픈 운명에 대해 노래하는 죽음 앞에선 처량한 양으로 변했다. 너무 많은 사랑은 당신을 죽이게 될거야. 사실 너의 지금의 고독은 너무 많은 기대와 집착 때문이라고.
여전히 들리는 애절한 절규. 책상 위는 온통 문제집, 참고서 투성이다. 별 기대 하지 말고 공부나 하라는 걸까. 눈을 감고 조용히 노래을 듣다가, ‘it's winter's fall' 따위의 가사는 왠지 상황에 맞지 않는 것 같아 음악을 꺼버렸다. 감았던 눈을 뜨니 주변은 조금 더 어두워 있었다. 책꽂이에 높낮이가 맞지 않게 꽂아진 뾰족뾰족한 책 봉우리가 마치 무서운 괴물의 이빨과 같이 보였다. 일순간 외로움과 두려움이 석현에게 밀려왔다. 나는 정말 혼자인걸까. 더 이상 어둠은 싫다. 석현이 일어나 제 방에 불을 켜는 순간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혜경이였다.
“오빠 괜찮아? 나 저녁 시간이라 잠깐 전화 했어...잘 갔다 온거야...?”
“응, 연락 못해서 미안해”
“그런 말 왜 해...더 힘들텐데...”
“..............”
“오빠 밥은 먹었어?”
“아니, 별로 생각 없어. 기차 안에서 뭘 먹었더니.”
“그래도 뭐 먹어야지.”
“괜찮아.”
“밤에 독서실 오면 뭐라도 좀 먹을까? 아니다...오늘 안 오겠구나...”
“그래, 오늘은 좀 그럴 것 같다.”
“그래...뭐라고 해줄 말이 없네...오빠 어렸을 적에 할머니 손에서 컸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마음 많이 아프겠다...”
“생각보다 아주 심하지는 않아. 다행인가...”
“.......”
“어쨌든 공부 열심히 하고, 나중에 보자.”
“어....”
제길, 똑같이 갑갑한 이야기를 해버렸네. 석현은 마지막 멘트를 후회했다. 공부 열심히 하라니. 자신도 제일 무신경하게 넘기는 말 아닌가. 나도 별 수 없는 이 땅의 고3인가. 자신의 입에서 이런 상투적인 말이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전화를 끊은지 5분도 안 되어서 석현은 다시 외로워졌다. 자신을 알고 생각하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은 마치 배고픈 사람이 음식 간을 보고 그 감질맛에 더욱 배가 고파지는 원리와 비슷했다. 석현은 음식보다 사람이 그리웠다. 대화가 그리웠다. 온통 자신의 대학 진학에 관련된 것으로 점철된 이야기 따위는 오늘 정도는 벗어나고 싶었다. 어차피 내일부터, 물론 간단한 위로의 말이 곁들여지겠지만,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8시가 넘었다. 혜경이 다니는 학교의 야간자율학습은 9시 40분 쯤 끝난다. 10시가 좀 못 되어 독서실에 도착하는 편이라고 했다. 석현이 다니는 학교의 자율학습은 10시가 돼서야 끝날뿐더러, 무엇보다 조금 멀리 있어 버스를 타고 오는 시간이 있었다. 그러면 한 10시 반 좀 못 되어 도착한다. 가끔씩 혜경은 미리 도착해서 자그마한 쪽지에 이런저런 얘기를 담아 석현의 책상에 올려놓고는 했다. 맨날 기다렸을 혜경의 마음, 혹은 가끔씩 보이는 투정 섞인 퉁명스러움이 조금은 이해되기 시작했다.
‘오늘은 내가 한 번 가볼까.’
석현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혜경을 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그렇다고 여고 교문에 홀로 서서 밀려나오는 여고생들의 시선을 감당하기는 오늘 같은 날엔 꽤나 부담스러웠다. 재수가 없으면 그 학교 어느 선생님께 걸려서 한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독서실을 가는 것도 웃긴다. 오늘 같은 날.
석현은 수화기를 들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수화기를 내렸다. 텔레비전을 켰다. 왁자지껄한 드라마. 한 번도 보지 못한 드라마였지만 약간은 수다스러우면서도 우스운 가벼운 가족 코미디물이라는 것을 이내 깨달을 수 있었다. 몇 번씩이나 작위적인 웃음의 찬스가 석현의 눈앞을 스쳐갔지만, 석현은 그냥 텔레비전을 꺼버렸다. 그리고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음성 녹음은...”
“삐- 혜경아 나 석현인데...삑, 녹음이 취소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배가 고파서 그런 걸 거야. 그러니 뭘 먹으면 좀 낫겠지. 중국집에 시킬까, 아니면 닭이라도 한 마리...상점번호 안내 책자를 다시 덮고 석현은 수화기를 들었다.
“음성 녹음은...”
“삐-.....나 석현인데, 미안한데...저기...괜찮으면...학교 끝나고 우리 집에 좀 와줄 수 있을까...? 전에 한 번 근처에 왔었잖아, 안 되겠지....?”
“삑, 녹음 되었습니다.”
후우...석현은 한숨을 내쉰다. 바보 같은 자신에 대한 원망을 늘어놓았다. 사실은 점점 밤이 두려워졌던 것이다. 집 안에 아무도 없는 밤이 마치 주변 모든 사람들이 영영 떠나버린 결핍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엄마 손을 꼭 잡지 않고는 잠을 자지 못하는 아이처럼, 석현은 누군가와 함께 함으로서 외로움을 극복하려는 자기 자신이 너무 초라해 보였다. 아무리 어떤 이성적인 유대 관계를 가진 사이라지만, 그래도 늦은 밤에 독서실이라는 행선지가 분명한 여자애를 집에 들이는 것도 웃긴 일이다. 평소의 석현이라면 분명 잘못이라고 여겼을 일이었다. 지금도 석현은 갈등하고 있는 중이었다. 듣기 전에 지워버리면 되려나, 곧 그런 생각을 하였다. 다시 석현은 수화기를 들었다. 9시 20분이었다.
“메시지 청취는, 삐-, 비밀번호르, 삑삑삑삑,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흠...알았어. 갈게. ?동???호 맞아? 아직 아무 것도 안 먹었지? 혹시 뭐 먹고 싶은 거 있음 또 음성 남겨줘.”
* 아뿔싸, 석현의 머리는 점점 복잡해져 갔다. 이 시간에, 집에 그것도 여자애를 부르다니. 다시 오지 말라고 해야하나. 하지만 석현은 도저히 홀로 어둠을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삐죽삐죽 튀어나온 책 봉우리도 무서웠고 홀로 아무도 없이, 연락할 사람도 없이, 그것도 할머니의 장례에 갔다가 홀로 고3이라는 이유로 내려와서 방안에 쪼그리고 있기 싫었다. 그냥 학교에 가서 창가에 있는 자리에 앉아 야경이라도 바라보는 것이 옳았던 걸까. 그런데 왜 이리도 나는 안절부절 못하는 거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잖아. 석현은 다시금 이 불안함을 곱씹어 보았다.
이 불안감의 근원에 대해서 만족스러운 원인을 밝혀내지 못하던 석현은 잠깐 수학 참고서를 꺼내보았지만, 그것이야 의미 없는 행동일 뿐, 그것이 어떤 시원한 답을 줄 수는 없었다. 대충을 훑어보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석현은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석현은 가만히 현관에 다가갔다.
“누구세요.”
“혜경이.”
당연히 누구인지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지금은 열시가 조금 넘은 시각. 그러나 의례적인지, 이 시간에 혜경을 부른 자신의 미안함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인지 굳이 누구냐고 물어보게 되었던 것이다.
“철컥.”
교복차림의 혜경. 등에는 당연히도 가방이, 손에는 작은 봉투가 들려있다.
“에이...미안하게...오지 말지...그러다 나중에 부모님이라도 아시면 혼날텐데.”
“...............”
그녀는 대답대신 한 발을 현관에 사뿐 내딛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발을 다시 끌어서 먼저 내딛은 발 옆에 가지런히 놓았다. 몇 초간의 정적. 석현은 가만히 현관문을 닫고 문을 대충 잠근 다음, 손에 든 쇼핑백을 받아들었다.
“빵이랑 음료수 좀 사왔어.”
쇼핑백 안에는 투명 플라스틱 포장지에 들어있는 샌드위치 몇 개와 캔음료수가 들어있었다.
“들어와....”
석현과 혜경은 어색하게 거실에 마주 앉아 있다. 말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는 석현을 위해 혜경은 싸온 샌드위치를 부려 놓았다.
“힘들었겠네...”
“아냐, 나 사실 그다지 힘들지 않았어.”
“그래도 오빠 할머니 이야기 종종 했었잖아. 시골에서 있었던 일도 조금은. 물론 어렸을 때라 기억 잘 안 난다고는 했지만.”
“그랬었나...그런데 사실 이번에 좀 놀랐어.”
“왜?”
“나는 할머니를 사랑한다고까지는 생각지 않았지만, 그래도 좀 놀랐어. 부모님이 외국에서 돌아와서 학교가기 전 할머니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으니까. 얘기했었지? 부모님이 어렸을 때 외국으로 가셔가지고 할머니 손에 몇 년 맡겨지게 되었다고. 아주 많은 기억이나 추억 같은 것은 아니지만, 할머니에 대해서 은연중에 정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굉장히 슬플 줄 알았어. 막상 위독하시다는 말을 듣고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 안에서 정말로 걱정했었단 말야.”
혜경은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신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서울에 도착했어. 할머니가 계신다는 병원으로 가서 중환자실로 찾아갔는데, 할머니의 이름이 없는거야. 나는 병원을 잘못 찾아 왔나 했는데, 어머니는 직감적으로 혹시나 벌써 돌아가시지는 않았나, 그래서 장례식장으로 가봐야 하는 건 아닌가 하시더란 말야. 그 생각이 들고 장례식장으로 가서 할머니의 이름을 확인했을 때만 해도 정말로 가슴이 주저앉는 듯한 느낌이었어. 심지어 어떤 다짐을 했었냐면, 너무 많이 울면 안 되겠다, 그런 생각까지 했었거든.”
“슬프면 우는 게 당연한데 뭐하러 그런 생각을 했어....”
“그런데...정작 빈소에 할머니 영정을 보고 났는데도 눈물 한 방울이 나지 않더라. 발인 날에도 심지어 관이 땅에 묻히는 순간까지도. 나는 내가 이렇게 정 없고 독한 줄 몰랐어.”
다시 대화는 끊겼다. 석현은 어색하게 샌드위치를 하나 들었다. 자그맣게 한 입을 베어 물고는, 그제서야 음료수 캔을 땄다. 오물거리는 소리. 가끔 양상치가 사각거리면서 석현의 입에서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늦었지만 조용하고 조촐한 저녁식사였다.
“내일은 학교에 갈거야?” 혜경이 묻는다.
“아마도 그래야겠지... 근데 너 집에 안가도 돼?”
“아직 10시 반인 걸 뭐. 보통 독서실에서 1시에 들어가잖아. 오늘 하루 안 간다고 독서실에 전화했으니까, 거기서 집에 전화할 일은 없잖아. 집에서도 괜히 전화할 일 없구.”
“괜히 거짓말 시키는 것 같아서...”
눈도 안 마주치고 내뱉은 석현의 힘없는 말에 혜경은 잠시 쓸쓸한 미소를 지었으나 석현은 보지 못했다. 혜경이 말을 꺼냈다.
“생각해봤는데, 아까 오빠가 그렇게 정 없고 독한 줄 몰랐다면서. 난 오빠가 되게 사람 좋아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우리 만난지야 열달 남짓이지만, 우리 이렇게 되고 나서, 아니 그 전에도 오빠는 나한테 되게 잘 해주었는데...”
“그랬었나...”
“이왕 이렇게 된거 부탁하나 할게. 물론 지금 기분이 좋지 않다면 들어주지 않아도 좋아.”
“뭔데?”
“오빠 방이랑 예전 앨범 좀 보여주면 안 돼?”
석현은 잠시 망설이면서 생각했다. 방은 어질러져 있던가. 아까 대충 씻고 갈아입은 옷들은 세탁기에 넣었나. 그러고 보니 가기 전에 청소는 안 했던 것 같은데. 에라 모르겠다. 석현은 승낙해 버린다.
“그래, 그러자 그럼.”
석현은 굳게 닫아 놓았던 방문을 열었다. 초인종 소리가 들리고 일부러 닫아놓았던 문이다. 딸깍, 형광등 스위치를 누르는 소리가 나고 불이 켜졌다.
“미안해, 방이 좀 지저분하지...”
“뭘, 양호한데. 내 동생 방보다 백배쯤 낫다.”
둘은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혜경은 차분한 시선으로 천천히,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석현의 방 구석구석을 눈에 담는 것처럼 보였다. 석현은 얼굴이 붉어졌다. 침대 귀퉁이 아래 한 짝 던져진 양말을 발견하지 못하길 간절히 바라면서. 다행이도 혜경의 관심사는 책상으로 옮겨졌다.
“아, 생각보다 문제집은 별로 없네. 고3이면 하늘까지 문제집을 쌓아놓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뭐야. 성적은 좋은 편이잖아. 일부러 나 놀리려고 방 보여준건가?”
“아니야...그런거. 이게 다가 아니라 학교에도, 독서실에도 몇 권씩 있어.”
“그렇구나. 훗. 농담이야. 근데 뭐야 이 포스터는?”
“그냥 좋아하는 밴드야. 퀸이라고.”
“그렇구나...참, 사진 보여줘.”
“아, 안 까먹었네. 부끄러운데...민망한 사진들도 있고.”
“보여주기로 했잖아.”
혜경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조른다. 석현은 그런 웃음에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남의 관심조차 부담스러워 했던 석현이 종종 공부를 방해하곤 했던 혜경을 마음에 품을 수 있었던 건 바로 저 웃음의 힘이었다. 서랍에서 작은 포켓 앨범들을 꺼냈다. 커다란 앨범은 안방을 뒤져야 하는데 그러기는 너무 귀찮고, 일단 네댓 권이라도 되고 석현의 사진 중심으로 되어 있으니 일단 오늘은 이것으로 만족하자고 혜경에게 이해를 구했다. 혜경도 거기까지는 이해했는지 수긍하는 눈치였다.
* 첫 번째로 집어든 사진첩은 중학교 때의 사진이었다. 중학교는 남자학교였고, 바닷가 애들은 상당히 거셌다. 석현 역시 외향적이지는 않았지만, 괜시리 어깨에 힘을 주고 눈을 부릅뜬 시절이었다. 만만하게 보여서는 점심시간에 반찬 하나 제대로 사수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수학여행을 웃기지도 않는 선글라스를 끼고 찍은 사진을 보고 혜경은 키득거렸다. 웃통을 벗고 농구를 하는 사진이며, 그닥 지금의 석현으로서는 탐탁치 않는 사진들 뿐이었다.
두 번째 사진첩은 조금 오래된 사진으로 초등학교 고학년 때의 사진인 것 같다. 아직은 순진한 눈망울을 하고 있고, 중학교 때처럼 머리를 밀지 않아서 한결 선이 고와보였던 시절이다. 친구들과의 즐거운 생일잔치 등의 모습이 담겨있는 사진첩이었는데, 한 사진에서 한 여자애와 석현 둘이서 찍은 사진이 나오자 살짝 웃으며 흘겨보기도 했다. 한 사진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나, 1학년 때였나 운동회의 사진이었는데, 계주 대표로 뽑혔다가 넘어지고 속상해서 울고 있는 사진이었다. 그 사진은 초등학교 때 몇 번이고 몰래 찢어버리려고 하다가 어머니의 만류로 그만 두었던 것이다.
세 번째로 집어든 사진은 비교적 최근의 사진들과 부모님이 외국에서 돌아오신 후부터 석현이 초등학교 입학할 때까지의 사진이 섞여 있었다. 그 사진 중에는 바닷가에서 석현이 팬티바람으로 뛰어다는 사진이라든가,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망가지기로 작정하고 이상한 포즈로 찍은 민망한 사진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얼른얼른 넘기려는 석현과 제지하려는 혜경 사이에 작은 실랑이가 일었다.
“좀 천천히 보자, 오빠.”
“안 돼, 뭐 이런걸 보려고 그러냐?”
어느 새 석현과 혜경은 조금 분위기가 밝아진 것을 느꼈다. 석현의 마음 한 구석에 작은 죄책감이 몰려왔다. 이 자식아, 할머니는 오늘 땅에 묻히셨다고!
그렇지만 어느새 마지막 앨범을 들었다. 석현은 그 또래의 남학생들이 그러하듯이 그렇게 정리정돈을 잘 하는 편은 아니라서 앞 앨범도 어떤 사진이 들어있는지, 어떤 기준으로 그런 분류를 했는지 펴보기 전에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번이 마지막 앨범이다. 마지막 앨범을 펴고 첫 사진은 석현은 기억도 안 나는 아주 어린 시절의 사진이었다. 석현은 아버지의 무등을 타고 있고, 어머니는 그 옆에 있는 사진이다. 어디서 찍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살이 통통하게 오른 석현은 제법 귀여웠고 맑은 날씨에 어디 공원이라도 가서 찍었는지, 배경 또한 예뻤다. 혜경은 한참이나 그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 장을 넘겼다.
다음 장 사진은 역시 어느 해의 석현의 생일 파티 사진이었다. 3학년 때였나, 4학년 때였나, 그 해 생일은 석현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잠시 들렀었던 것 같다. 생일 케 앞에서 석현과 할머니는 포즈를 취했다. 혜경이 물었다.
“할머니셔?”
“응.”
말없이 사진을 넘긴다. 공교롭게도 다음 사진에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시골집 마루에 앉아 찍은 사진이었다. 어렸을 때지만, 가끔 큰집이나 작은집에서 사촌들을 데리고 시골집에 오곤 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그 때 누군가가 찍어준 사진이었을 것이다. 그 다음 사진은 중3때인가 추석에 온 가족이 모두 모여 시골집 마루에서 찍은 가족 사진이었다. 그 다음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어색한 포즈의 사진이었다. 이런 사진첩이 있었던가. 기억도 가물가물한 시골 유아원에서의 재롱잔치 사진도 한 켠에 끼어있었다. 어떤 사진에는 글도 못 읽을 정도로 어려보이는 석현이 손에 ‘피노키오’ 동화책을 들고 있었다. 어느새 마지막 사진첩은 혜경의 손에서 석현의 손으로 넘어갔다. 석현은 어떤 사진을 한참동안 바라보기도 하고, 또 다시 앞으로 앨범을 넘겨서 보았던 사진을 다시 보기도 했다. 고등학교 입학식 때의 사진이며, 설날에 찍은 사진이며, 온통 사진들에는 할머니가 찍혀있었다.
툭.
앨범에 무언가가 떨어졌다. 그것은 석현의 눈에서 떨어지는 것이었다.
툭.
툭.
툭.
떨어지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석현의 앨범 넘기는 속도는 더뎌졌다. 다시 중간쯤으로 돌아가서 석현의 손이 멈춘 사진은 할머니의 독사진이었다. 영정사진처럼 곱게 분칠한 그런 사진은 아니었지만 가무잡잡한 피부와 주름은 석현이 할머니하면 떠올리는 원형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그 사진의 주인공은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석현의 할머니였다. 석현은 눈물을 멈추지 못하고 계속 흐느끼기 시작했다. 다시 몇 장을 넘겼다. 석현의 생일 파티에 할머니와 찍은 사진이다. 석현은 포켓 앨범을 덮고 앨범을 가슴에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슬프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때 그랬잖아요...10년만 지나면 석현이 대학 가겠다고. 좋은 대학 가는 거 보고 결혼하는 거 보고 증손자도 보고 간다고 그랬잖아요, 할머니 그랬잖아요...그랬었잖아요...이제 얼마 안 있으면 대학도 갈 건데, 그거라도 보고 가지 이렇게 가면 어떡해요. 흑흑.....”
석현은 서럽게 울었다. 앨범을 안은 채 얼굴을 무릎에 파묻고. 혜경은 처음에 잠시 당황스러웠으나, 이내 석현의 울음에 대해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냥 당분간은 가만히 내버려두기로 했다. 서럽게, 서럽게 석현은 꽤나 오래 그렇게 있었다.
“이렇게 얼굴도 안 보고 가버리는 게 어딨어요? 흐흑...”
석현은 목이 멘 목소리로 계속 뭐라고 중얼거렸다. 훌쩍 거리던 콧물도 이제는 코 안에 가득 들어찼는지 이젠 잘 훌쩍거려지지도 않았다. 혜경은 거실에 있던 휴지가 생각났다. 말없이 일어나 거실에서 휴지를 들고 울고 있는 석현에게 내밀었다.
“실컷 울어. 그래야 좀 풀리지. 근데 좀 닦고 울어. 여기 휴지.”
석현은 휴지를 받는 대신에 혜경에게 부탁했다.
“불 좀 꺼줄래. 얼굴 보여주기 부끄러워.”
혜경은 석현 방의 불을 끄고 다시 석현의 옆에 앉았다. 석현은 말없이 휴지를 받아서 얼굴에 범벅된 눈물이며 콧물은 닦았다. 흐느낌의 관성은 쉽사리 그치지 않았고, 간헐적으로 딸꾹질이 올라왔으나 어느 정도 눈물은 그친 상태였다. 혜경은 그런 석현의 등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떨림이 전해져 왔다.
“독해지고 무감각해지고 무신경해 진줄 알았어. 이제 나는 그냥 그렇게 무표정한 사람이 되어가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
“아냐, 오빠 그런 사람. 그런 사람 아닌 것 같아.”
“할머니가 계절마다 다려냈던 보약을 그만 먹어도 생각했을 때, 그 어린 마음으로 쾌재를 불렀을 거야. 사실은 할머니를 떠나 부모님께 왔을 때 며칠은 잠을 이루지 못했었나봐. 확실치는 않지만. 부모님과 지낸 시간은 사실 그다지 길지 않아. 그것에 부모님의 나에 대한 사랑이라든가, 내 부모님에 대한 생각을 작게 만드는 것은 아닐테지만, 어쨌든 이제 낮시간 동안은 학교에 가서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배워야 하는 나이가 돼서야 부모님과 살게 된 거니까.”
석현은 조금 격앙된 목소리에서 이전의 차분한 목소리로 조금 되돌아왔다. 혜경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석현은 말을 이어 나갔다.
“삶에서 갑자기 없어진 할머니를 나는 의아해하지 않았어. 부모님은 너무도 잘해주셨고, 할머니는 종종 볼 수 있었으니까. 지금서야 하는 말이지만, 삶은 당연히 이런 것인 줄 알았어. 내가 어떻게 자라든 내 아주 어린 시절을 오랫동안 보고 알고 있는 것은 할머니뿐이야. 어린 시절 나는 할머니가 삶에서 사라진 줄 알았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가끔씩 확인했지만 멀어져 갔고, 마음속에서는 사라져 갔던거야.
그러니 전혀 의아하지 않았겠지. 상황은 슬퍼야 되는 상황인데도, 다른 사람들이 모두 빈소에서 흐느낄 때도, 장지에서 흐느낄 때도 나는 이해할 수 없었어. 할머니가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 지금의 내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생각을 했던 걸꺼야.“
“오빠 말이 맞는지도 몰라. 지금 오빠 상황이 바뀌는 건 아니잖아...물론 많이 슬프기야 하겠지만.”
“아니야, 나는 중요한 걸 잊고 있었어. 할머니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어. 있고 없고가 지금 내 상황에 영향을 줄 수 없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어. 그걸 이제야 집에 와서야 간신히 이렇게 펑펑 울면서야 알아낸거야. 바보 같이. 상황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구.”
혜경은 석현의 등에 올려놓은 손을 떼고 석현의 등에 천천히 몸을 숙였다. 머리를 자신의 팔에 고인채 혜경은 그렇게 석현의 등에 엎드렸다.
“오빠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정확히는 몰라. 하지만 힘냈으면 좋겠구, 언젠가는 나도 이해할 수 있었음 해. 사람을 사랑한다기에는 우리는 너무 어린건지 모르지만,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지금 이렇게 슬퍼하는 걸 볼 수 있어서 한 편으로는 고마워.”
* 석현은 파묻었던 고개를 들고 서서히 몸을 세웠다. 석현의 등에 기대고 있던 혜경은 같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어둠 속에서 혜경과 석현은 서로 지긋이 바라보았다. 어둠 속이라 눈동자는 정확히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따뜻한 눈빛이라고 그들은 믿었다. 혜경은 팔을 뻗어 석현의 어깨를 짚더니 이내 석현의 목덜미를 꼭 끌어안았다. 여름밤이었지만 그다지 덥지 않았다. 오히려 석현에게는 따뜻하게 느껴졌다. 약간 땀 냄새가 섞인 샴푸냄새까지 19년 동안 처음 석현에게 연애의 감상을 준 혜경이었다. 석현도 혜경의 허리를 감싸 앉았다. 약간 통통하게 살집이 있는, 그러나 뚱뚱하지 않고 오히려 귀여운 허리가 교복 위로 석현의 팔에 닿았다. 석현도 혜경의 어깨에 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것은 참 따뜻한 것이구나.
스르륵 서로를 감고 있는 팔이 풀렸다. 혜경의 손은 석현의 어깨를 짚었고, 석현의 손은 혜경의 옆구리에 닿은 채로 둘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천천히 석현의 입술이 혜경의 입술로 향했다. 두 입술 사이의 거리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들은 어렸지만, 서로의 삶에 얽혀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가는 중이었다. 서투른 입맞춤.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숫기없는 석현은 생각보다 서툴렀다. 혜경 또한 마찬가지였으나, 조급하지 않고 끈기 있게 입맞춤을 이어나갔다. 서로의 타액이 아쉽다는 듯 말라붙어가고 있었으나 석현은 입을 뗐다. 그리고 허리에 있던 손을 어깨로 옮겨서는 혜경을 침대에 눕혔다.
혜경은 짐짓 놀라는 눈치였으나, 손을 가슴팍에 모았을 뿐 별다른 행동은 없었다. 석현은 혜경의 앞머리를 쓸어올려 가벼운 키스를 하고는 혜경의 손을 풀고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석현의 손은 무척이나 떨리고 있었으나 어느새 블라우스의 단추를 모두 풀어내었다. 그들은 서툴렀으나 둘이 나신이 되기까지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창가에 비치는 먼 가로등 불빛에 서로의 실루엣을 보면서도 그들은 아무런 말이 없었고, 혜경은 부끄러운지 얇은 홑이불을 덮고 가슴팍으로 꼭 끌어안았다. 석현은 홑이불 속으로 들어가 혜경의 옆에 누웠다. 혜경은 어느새 석현의 팔을 베고 누웠고, 둘은 돌아누워 마주 보았다. 석현은 다시 혜경의 머리를 끌어안아서 부드럽게 입 맞추었다. 그러기를 관두고 석현의 눈에서 눈물이 나왔다. 흐느끼지는 않았지만 석현은 조용히 눈물 흘렸다.
“왜 울어.”
“아냐. 아냐.”
혜경은 석현의 머리를 가슴에 품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가슴이었다. 콩닥 대는 심장소리가 들렸다. 석현이 누군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기로는 기억나는 한 할머니 이후에 혜경이 처음이었다. 그 생각이 들자 잠시 멈추었던 눈물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그저 둘은 말이 없이 몇 분을 흘려보냈다. 불현듯 석현이 일어나서 말했다.
“우리 오늘 같이 잔거지?”
“갑자기 무슨 소리야, 오빠. 우리 잔 거냐니?”
“그렇다고 하면 안 될까? 그렇다고 하자”
혜경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이내 옷을 입었고, 석현의 집에서 나오게 되었다. 벌써 시간은 자정을 반이나 넘기고 있었다. 할머니를 앗아간 야속한 날은 달력 너머로 사라졌다. 석현은 혜경을 집까지 바래다주기로 마음먹었다. 천천히 걷기 시작하였다. 어느새 인가 비는 그쳤나 보다. 하늘은 그지없이 맑았고 별도 많았다. 또각거리는 구두소리와 터벅거리는 샌달 소리. 두 발걸음의 경쾌한 합주를 비집고 혜경이 말문을 열었다.
“아까 사실 조금은 무서웠는데, 그렇게 해줘서 많이 고마웠어.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뭐가 고마운데?”
“그냥, 그러다가 만 거.”
“고맙다니. 우리, 같이 잔거잖아.”
“그렇구나, 맞네.”
“오늘 있어줘서 너무 고마웠어. 아마 네가 없었으면 나는 밤새 뭔지도 모르는 찝찝함 때문에 잠도 못 잤을거야.”
“나도 옆에 오빠가 있어서 좋아. 기분 안 좋을텐데 굳이 바래다주는 것도 그렇구.”
석현은 대답 대신 혜경을 향해 한 번 씨익 웃어주고는 혜경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혜경의 무거운 책가방을 받았다. 아침이면 이런 무거운 책가방을 들어야하는 자기 자신을 되새기듯이 그렇게 씩씩하게 받았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시간은 짧다’라는 넌센스적 명제의 역이 성립한다면, 자신은 정녕 혜경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확신하는 석현은 혜경을 바래다 주는 시간이 너무나 짧게 느껴졌다.
석현은 돌아오는 길을 홀로 걷다가 집 앞에 있는 놀이터를 찾았다. 그리고 그네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지난 며칠 동안을 돌아본다. 명절이나 가끔 뵌 할머니는 분명 지금 내게 물리적으로 그다지 큰 존재는 아니었기에 그런 것이라 믿었다. 그 상실을 믿고 싶지 않았고, 그리고 믿을 수 없었던 것에 대해, 슬프지 않았던 것에 대해 그렇게 변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는 명절이라도 볼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라든가, 혹은 대학 입학 따위나 결혼 따위가 할머니를 미소 짓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은 흩어져 버렸다. 얼마나 석현에게 할머니가 소중한 사람이었나 하는 감정은 앨범에 들어있는 사진을 보고서야 생생히 재현되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이제는 세상에 없다는 것. 아직도 머리 속에 담아두지 못한 많은 유년의 추억들을 이야기해줄, 자신의 속성이 몇 년의 세월에 걸쳐 스며들어 있을 사람을 다시는 보지 못한다는 것이 사진을 보고서야 떠올랐던 것이다. 석현은 자신의 유년 또한 이제 스스로 간직하고 감내해야 하는 것임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석현에게 유년이 소멸되는 순간은 또 다른 시절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사실 소멸되었다기 보다는 옮겨갔다는 것이 옳다. 점점 사라질 사람과 그 속에 나누었을 자신의 기억이 함께 사그라들 것에 대해 석현은 깊이 생각해본다. 석현의 기억은 할머니를 거쳐 부모님께로, 여러 친구들에게로 옮아갔던 것이다. 물론 그 사람들의 기억도 석현에게 옮았을 것이다. 살면서 사람에 대해 얼마만큼의 애정으로 기억을 끌어 앉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기로 했다. 마냥 사라질 것만 같고 지금 같은 수험 생활 같이 무의미 할 것 같다.
* 사흘 전, 아니 이제 정확히는 나흘 전 그날, 할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기 불과 몇 시간 전 점심시간, 한 무리의 여자애들은 이제 100일 남짓 밖에 남지 않은 수능에 대한 부담으로 울음을 터뜨렸었다. 좌중은 잠시 숙연해졌으나 늘 밝은 한 친구는 더 어두운 이야기로 상황을 회피하려 들었었다.
“어차피 요번 달에 세상 다 멸망하니까, 밥이나 먹어. 노스트라다무스가 그랬대잖아. 1999년 7월에 공포의 대왕이 내려와서 지구가 멸망한다고. 공부 안 해도 돼.”
“하하, 내일부터 학교 나오지 말자.”
생각보다 농담이 잘 먹혀서, 교실 분위기는 다시 좋아졌었다. 7월은 아직도 1주일 정도가 남았지만, 적어도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은 석현에게는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진 것이었다. 그의 유년의 세상은 할머니의 죽음으로 끝이 났으므로. 그리고 그의 사춘기는 혜경과 함께 이제 곧 시작된 셈이므로. 타인에게 기억을 서로서로 옮긴다는 것이, 그렇게 세상을 지탱해 나가야한다는 것이, 그래야만 전화 한 통 할 곳 없는 홀로 있는 컴컴한 집에서 벗어날 수 있거나, 누군가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그런 누군가를 이제는 잃고 싶지 않다는 사랑의 감정이, 새 세계가 시작된 석현의 첫날밤이었으므로. 석현은 집으로 들어와 자명종을 6시에 맞췄다. 침대 옆에는 커다랗고 무거운 가방을 다소곳이 놔두고.
에필로그
지난 밤은 없었던 것만 같다. 햇살은 눈 부셨고, 학교는 좀 늦어도 괜찮을 터이지만, 늦고 싶지 않았다. 등교 시간의 버스는 덥고 갑갑했다. 그 갑갑함에서 벗어나고 싶어 석현은 이어폰을 꽂았다. 아차, 테잎을 바꾸지 않았구나. 여전히 워크맨 속에는 퀸의 “Made In Heaven" 앨범이 들어 있을 것이다. 망설이던 석현은 이내 테이프를 처음으로 되감기 시작한다. 괜찮아. 오늘은 지구가 멸망한 뒤의 또 다른 세계이니까.
‘Made In Heaven’ 앨범의 첫 곡은 ‘It's a beautiful day’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