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이 글은 원익씨의 『신자유주의는 나쁘다, 그러나 참여 민주주의는 ‘더’ 나쁘다』에 대한 독서후기입니다. 우선 저는 이런 원익 씨의 글에 관하여 많은 논의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밝힙니다. 그런 의미에서 약간의 요약을 덧붙입니다. 어쩌면 비약일 수도 있습니다만, 시도해보는 것이지요.

  1.

 한나 아렌트로 대표되는 참여민주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이 주요한 논점인 것 같군요. 우선 글에서 나타난 한나 아렌트의 생각을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의 주는 신자유주의의 위협 혹은 전체주의에 맞서서 ‘공론공간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론공간이란 쉽게 생각하면 정치권리, 정치적 행태가 이루어지는 포괄적 공간이라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자세히 짚어보면 공적공간이란 서로서로에게 환원될 수 없는 복수의 주관들이 어우러져 ‘취미판단’을 내리는 공간입니다. 취미판단이란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 나오는 판단의 형태 중 하나입니다. 그거은 판단과 판단을 내리는 근거사이에 어떠한 필연적 연결고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근거와 판단사이에는 개인의 어떠한 가치관이나 취향, 그리고 주관등이 개입하기 때문에 그것을 필연적인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민들레가 ‘니콜은 정말 귀여운 여자다’라고 판단을 내렸다고 합시다. 이 판단에는 ‘니콜’이라는 특수자가 ‘귀여운 여자’라는 보편개념으로 포섭되는 인과관계는 필연적이지 않습니다. 이게 무슨 소린고 하니, 만약 해바라기가 ‘니콜’을 판단한다면 그는 ‘니콜은 섹시한 여자다’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판단은 해바라기의 주관, 취향, 가치관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필연적이지도 않고, 그렇기에 민들레와 다른 해바라기의 판단도 그른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죠. 그것은 결국 판단이란 개인의 주관이 개입해서 내린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에 반해 과학적 판단은 ‘계산’될 수 있는 것에 의해 자동적으로 도출되거나 추론될 수 있는 판단의 형태입니다. 함수를 생각하면 쉬울 것 같습니다. f(x)라는 함수는 x에 무엇을 대입해도 등식에 의한 필연적 결과를 내놓기 때문입니다. f(x)=2x라는 공식이 있다면, 민들레가 x에 1을 대입하든 해바라기가 1을 대입하든 답은 2라는 하나의 필연적 결과만을 내놓게 되죠. 이를 바탕으로 아렌트는 신자유주의적 조류는 경제적 이익이라는 과학적 판단의 형태로, 공적공간을 점유하고 파괴하는 현상이라고 봤습니다. 그리고 ‘왜’ 공적공간의 파괴가 일어나느냐 라는 이유에 대해, 경제적 이익이라는 과학적 판단의 신자유우의적 정치행위가 오직 그 자신만이 유일한 정치적 동기로 고려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짚고 있죠. 그래서 한나 아렌트는 결론적으로, 점유되고 거세된 공적공간 자체의 복귀(다시 다양한 취미판단이 공존하는)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2.

 이에 원익 씨는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습니다.(편의상 비판의 주체는 모두 원익 씨로 하겠습니다) 비판의 주요 핵심은 공적공간에 대한 정의인 듯 보입니다. 아렌트가 공적공간을 서로서로에게 환원될 수 없는 복수의 주관들이 어우러져 ‘취미판단’을 내리는 공간이라고 정의했다면, 원익 씨는 공적공간이란 아렌트가 주장한 것에 덧붙여 본질적으로 적대antagonism을 기반으로 하는 공간이라고 정의합니다. 다시 요약하면 원익 씨는 본질적으로 공적공간이란 ①자유로운 의견의 교환 과 ②적대antagonism를 기반으로 한 ‘헤게모니’ 모두를 갖추어져야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공론공간’이란 바로 <u>소수세력이 아무런 매개 없이 자신을 보편적인 것으로 주장하는</u> 미친 내기 속에서만 바로 그러한 내기에 의해 재구성된 긴장과 적대에 의해서만 자신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론공간은 그것을 불법적으로 점유한 헤게모니적 세력에 ‘의해서만’ 활성화된다. 
                    - 박원익의 『신자유주의는 나쁘다, 그러나 참여 민주주의는 ‘더’ 나쁘다』 中

 핵심을 밝힌 이 문장에서 모든 것을 찾아 볼 수 있는데요. 밑줄 그은 부분에서 보이듯 원익씨도 공적공간에서 이루어지는 판단과 교환자체가 ‘취미판단’이라는 것에는 수긍하는 듯 보입니다.(사실 이 부분은 자신이 없습니다) 다만, 신자유주의의 정치적 동기인 경제적이익에 대한 판단이 아렌트와 다른 것 같습니다. 아렌트는 그것을 ‘과학적 판단’으로 규정하고 ‘취미판단’이 공존하는 공적공간에서 축출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원익 씨도 축출해야 할 대상이라는 점에서는 입장이 같지만, 과학적 판단이라는 형태를 띤 신자유주의의 경제적 이익 자체도 일종의 ‘취미판단’이라고 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렌트가 외부에서 끼어든 반-정치적인 ‘과학적 판단’에 의해 파괴되고 점유되는 공적공간을 복원하자고 주장할 때, 원익 씨는 내부에서 ‘가장 정치적’으로 발생한 신자유주의의 점령을 오히려 그와 같은 형태인 적대antagonism을 통해서 새로운 헤게모니로 바꿔야 하지 않나 라는 의견을 내보이는 것이죠. 이에 따르면 아렌트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렌트(혹은 참여민주주의자)들이 하려는 공적공간의 보존은 그 자체로 아직 초원을 뛰노는 코끼리를 동물원에 가둬 보호하듯, 그 생동력 자체를 무력화시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한나 아렌트가 복구하려는 공적공간에, 원익 씨는 ‘살롱’의 이미지를 덮어씌우는 거죠. 차를 마시고 논쟁을 벌이지만 논쟁 후에는 집에 들어가서 뿌듯해 하며 바로 잠드는, 실천이 부재한 ‘살롱’으로서의 공적공간에 분노하면서 말이죠.

  3.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저는 이런 원익 씨의 비판을 다소 이해하기 힘듭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이해는 하되 수용하기가 어렵습니다. 신자유주의적 조류가 지극히 정치적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반-정치적임을 부인할 순 없습니다. 신자유주의적 조류는 말하자면 본질적으로 ‘반-정치적 정치성’을 띄고 있습니다. 말장난이 아니라, 정치적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정치성 혹은 정치공간 자체를 공격하는 목적을 행하고 있다는 거죠. ‘반-정치’라는 목표아래, ‘정치성’이 일종의 수단적으로 쓰이는 형태입니다. 그래서 저는 신자유주의적 조류 아래 지금에는 공적공간 자체의 파괴 혹은 붕괴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제적 이익이라는 유일무이한 정치적 동기에 의해 공격당한 공적공간이 이제 존재하긴 하는 건가요? 원익 씨의 비판은 그 바탕에 정치권리라는 건, 다시 말해 공론공간이라는 것은 소멸될 수 없음을 기반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파괴되고, 억압되어도 공론공간이라는 것 자체는 존재한다. 그렇기에 존재하는 공적공간을 동물원에 가둬 보호할 생각 말고, 되찾아서 우리가 타고 다니자. 라는 요지의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이죠. 하지만 과연 공론공간은 항상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일까요? 

 어떤 경우에도 공론공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어쨌든 ‘외양’을 유지하며 되살아난다. 그리고 그것은 다음과 같은 역설, 즉 스탈린 시대의 우스꽝스러운 표현에서 드러나는 것과 같은 “압도적인 다수의 찬성표에 의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습니다.”에서 드러나는 단락을 함축한다. 안건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면, 나머지 반대표를 던진 소수는 어디로 갔는가? 스탈린이 대답하기를, 그러한 반대행위는 만장일치를 이룬 보편성에서 스스로를 배제하는 행위로 간주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뒤틀린 논리 속에서, 하나의 유에 속한 부분은 다시 그 유에 완전히 겹쳐버리는 불법적 단락으로 도약한다. 요컨대 공론공간은 바로 그러한 비약적인 ‘틀짓기’를 필연적으로 내포한다. 
                    - 박원익의 『신자유주의는 나쁘다, 그러나 참여 민주주의는 ‘더’ 나쁘다』 中

 맞는 말입니다. 공론공간이 필연적으로 적대를 통한 틀짓기와 긴장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에 저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저는 어떤 경우에도 공론공간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원익 씨의 말이 의문입니다. 권리 자체란 발리바르도 말했듯이 자연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항상 사회적입니다. 쟁취하고 획득하는 것은 사회적 개인들이었지만 말이죠. 그렇기에 정치 권리도, 공론공간도 사멸할 수 있다고 봅니다. 완전한 사멸이 아니더라도, 그것이 역할을 하지 못할 경우에는 사멸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두 개의 상아와 긴 코를 잃어버리고 절뚝거리는 코끼리를 더 이상 코끼리라 할 수 있을까요? 원익 씨와 반대로 돌아가 봅니다. 원익씨 말대로, 저도 ①자유로운 의견의 교환 과 ②적대antagonism을 기반으로 한 ‘헤게모니’ 이 두 가지가 공론공간의 필수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다시 말하자면 둘 중 어느 하나라도 발현되지 않을 경우, 그것을 공론공간의 사멸 혹은 소실로 정의할 수 있다는 말이죠. 지금의 공론공간에서는 ①자유로운 의견의 교환 이 소실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②적대antagonism을 기반으로 한 ‘헤게모니’(약간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는 가장 헤게모니다운 형태로 신자유주의에 의해서 행해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허나 저는 그와는 별개로  ①자유로운 의견의 교환의 소실로 인해 ‘공론공간이 사멸하고 있다.’ 혹은 ‘사멸직전이다.’ 라고 과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공론공간을 복구, 혹은 생성해야 한다는 아렌트의 생각에 일정부분 동의하는 것입니다. re-헤게모니에 의한 자연적 복구도 어느정도 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말그대로 ‘어느정도’일 뿐입니다. 공론공간을 파괴하는 형태로 나타나는 신자유주의적 조류에 대한 대항으로 헤게모니를 주장한다면 순서를 혼동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신자유주의적 조류에 의한 공론공간의 파괴는 과거의 헤게모니화와는 조금 달리 사유해 봐야하는 문제 아닐까요? 자연적 복구는 공론공간이 다른 형식의 헤게모니화를 통해서 회복될 수 있을 정도의 타격을 입었을 때만  가능할 일입니다. 앞에서도 밝혔듯, 신자유주의적 조류는 ‘반-정치적 정치성’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거기에 대한 대응은 그것의 ‘정치성’에 대항해서 새로운 헤게모니를 만드는 것으로는 부족할 것입니다. 두 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져야겠죠. ‘반-정치적인 목표’에 대한 대응과 그것의 ‘정치성’에 대한 대응이 그것입니다. 저는 그 두가지 측면 중 ‘반정치적인 목표’에 대한 대응으로 공론공간을 복구 혹은 생성하는 것을 선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상황은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습니다. 공적공간은 대부분 붕괴직전에 처해있죠. (그리고 그 때문에 대부분의 권리들도 연달아 차츰 박탈되는 형국입니다. 씁쓸하군요) 공론공간을 가지가 무성한 나무로 비유해 봅니다. 공론공간에서의 정상적인 헤게모니는 ‘하나의 가지’를 중심 줄기로 만드는 형태가 되겠죠.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적 조류는? 하나의 가지만을 남겨놓고 모두 쳐내는 형태로 가고 있습니다. 과거 헤게모니화하에서 남아있는 반대자들에게 스스로를 배제할 권리가 주어졌다면, 지금은 스스로를 숨길 가지조차 남겨놓지 않는 형국이지요. 점점 반대자들이 옮겨갈 가지는 줄어들고 한 구석으로 몰리고 있지 않나요? 그러니까 설령 적대antagonism을 통해 다시금 공론공간을 헤게모니화한다고 해도 이미 숨이 넘어가고 있는 그것을 다시 점령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두 상아가 잘리고, 긴 코를 상실한절름발이 코끼리를 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것입니다. 저는 공론공간의 파괴와 배제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신자유주의적 조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공론공간의 복구 혹은 생성이라는 형태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공론공간의 복구 혹은 생성은, 이미 그 자체로 자유주의적 조류에 대항하는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헤게모니화는 다음 순서이죠. 그것은 아직 상실된 것이 아니라, 온전히 강탈된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말합니다. ’살롱‘이면 뭐 어떤가요? 일단 모이기라도 해야 누군가와 적대하기도 하고, 또 수군수군 거리다가 찻잔도 집어던질 수 있는 것 아닌가요?

 그래서 저는 공론공간의 복구 혹은 생성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나무에 새로운 새싹을 많이 틔우던지, 가지치기라도 해서 가지가 풍성한 나무를 기르자는 거죠. 물론 이러한 공론공간의 복구와 참여주의가 ‘쁘띠', 다시 말해 소시민의 소심한 심성을 옹호하는 것이라는 원익 씨의 아픈 지적에는 동감합니다. 다만 저는 지금에서, 과연 진정한 ’쁘디 브루주아petit-bourgeois‘란 존재하는가? 라고 묻고 싶습니다. 아시다시피 ’쁘띠 브루주아petit-bourgeois‘란 아이러니하게도 어떠한 특정 계급을 지칭하는 말이 아닙니다. 쁘띠 브루주아petit-bourgeois는 노동계급과 자본가 계급사이에서 미약한 물적 토대를 기반으로 그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가변적 위치입니다. 그렇기에 쁘띠 브루주아petit-bourgeois는 결국 노동계급이나 자본가 계급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원익 씨가 지금 말하시는 ’쁘띠‘란 신자유주의적 담론에 의해 구성된 확정되고 고정된 중산층으로서의 ’쁘띠‘아닌가요? 그래서 저는 공론공간의 복구를 통해서 진정한 ’쁘띠 브루주아petit-bourgeois‘가 생성된다면 그것만큼 기쁜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필연적으로 그들은 언젠가 자신의 계급을 자각하고(그것이 무엇이든) 거기서 움직이게 될 테니까요. 그래서 ’쁘띠‘에게 이별하고, ’쁘띠 브루주아petit-bourgeois‘와 안녕을 인사해야 하지않나 싶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신자유주의에 의해 파괴된 공론공간을 복구하는 것의 부작용이 아니라, 부수효과가 될 수도 있다는 거죠. 공론공간은 다시 복구 혹은 생성하는 것. 그래서 다시 최종적으로는 re-헤게모니화 하는 것. 이것이 올바른 순서이고 지금의 정세에 가장 맞는 ’철학의 새로운 실천‘쯤의 위치에 서 있지 않나 싶습니다. 

조문희 >
해기씨는 글을 참 잘쓰세요. 

앞서 원익씨의 글을 제가 읽기로는, 공론공간에 영속성과 보편성을 전제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그보다는 공론공간이 '역사적'인 형태로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 싶네요. 

해기씨는 현대 사회에서 자유로운 의견의 교환이 소실되고 있는, ‘공론 공간의 소멸’이 문제라고 말씀하셨는데, 원익씨가 순서를 혼동하기 이전에 해기씨가 문제가 되는 사태를 혼동하신 것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원익씨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은 해기씨 말대로 “적대antagonism을 기반으로 한 ‘헤게모니’(약간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는 가장 헤게모니다운 형태로 신자유주의에 의해서 행해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진짜 문제는 신자유주의의 적대적인 헤게모니에 대한 ‘적대’를 말할 수 있는 틈새를 오히려 자유로운 의견이 지나치게 많이 말해지는 상황이 틀어막아버리고 있는 것이죠. 

보충하자면, 1) 여기서 ‘자유’로운 의견이란 진정 자유로운 의견은 아닐 것이고, 이데올로기적 주체로 호명된 한에서만 자유로운 의견일 겁니다. 2) 또한 자유로운 의견의 발화 와 교환 은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겠죠. 아마도 해기씨가 이런 입장에서 자유로운 의견 교환을 이야기하셨던 거라면, 그것은 소실되고 있다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해기씨의 글을 읽기에는 그런 의미에서 이야기된 것 같지는 않네요. 

해기씨는 공론공간을 복구 혹은 생성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둘은 감히 말하건대 같은 맥락에서 논의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 많고 다양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특히 정치적인 차원에서라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지젝을 따라 이렇게 말해볼 수도 있겠지요. “번성하는 다양성이 적대적인 다이애드를 대체함에 따라 사라지게 되는 간극은 결과적으로 단지 사회 내부의 상이한 내용들 사이의 간극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과 비사회적인 것을 가르는 적대적 간극, 즉 어떤 것이 사회적인 것인가라는 보편적 관념 자체에 영향을 미치는 간극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원익씨가 적대를 이야기하는 이유고, “참여민주주의가 신자유주의보다 더 나쁜” 이유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공론 공간을 복구하는 것이 아니라 적대에 기반한 새로운 공론공간의 창출이고요. 

살롱에서는 결코 찻잔을 집어던지는 일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살롱의 인간에게 살롱은 하나의 세계, 매트릭스니까요. 살롱과 살롱 바깥의 경계는 살롱 바깥에서만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책마을 사람들이 공부하는 것의 대의 아닐까요.

김예찬 >
제 생각에는 '역사적'이라는 표현을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이해한 바가 맞다면, 
'역사적'이라는 표현은 영속/보편과는 거리가 먼, 오히려 반대되는 표현입니다. 공론 공간이 역사적인 형태로 존재한다는 말은, 공론 공간이 곧 "자신이 가진 어떤 역사적 역할을 마칠 때, 또 역사의 흐름에 따라 성격이 변화하거나 또 사라질 수도 있다", 는 뜻 같습니다. 

'신자유주의-JA유민JU주의-세계화'가 정말로 反 정치적인 것은, 공론공간을 너무나 자유주의적으로 장악시키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원익님은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어떤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이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위기를 지키기 위해서 신자유주의를 물리쳐야 한다! 는 일반적인 주장에 대하여 사실 진짜 적수는 '신자유주의-참여민주주의'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슬라보예 지젝은 그런 의미에서 "진짜 전체주의는 바로 신JA유민JU주의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자, 그렇다면 왜 JA유민JU주의가 '적대'의 틈을 막는지, 오히려 자유민주주의가 정말로 전체주의적인지 한번 짚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오늘 날엔 너무나 많은 입장에서 너무나 많은 의견들이 떠다니고 있습니다. 

어제 블로그 서비스인 이글루스에 들어가서 추천글 목록을 보다가 너무나 깜짝 놀랐는데요, 바로 대한민국에서 말그대로 '종北주의자'부터 '전쟁통일론자'까지, 극과 극은 물론이고 또 그 사이에 있는 수많은 포지션들의 글이 나열되고 있더군요. 물론 뭐, 여기서 특정 절반의 의견은 이야기되지도 못했던 수십년 전에 비하여 표현의 자유가 보장될 만큼 민주화가 된 것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기도 하죠. 보통 많은 사람들이 이 정도 표현의 자유를 민주화의 성과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구요. 그런데, 이러한 '표현의 자유'가 과연 정말로 자유로운 의견에서 등장한 것일까? 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 역시 JA유민JU주의는 전체주의에 비해서 이렇게 다양한, 혹은 자신에게도 반대되는 의견들까지 수용하는, 정말 좋은 체제다! 라고 넘어갈 수 있느냐는 말이지요. 혹시, 정말로 체제를 위협하고, 세상을 뒤바꿀 수 있는, '적대'는 다양한 의견들 속에 섞여서 백화점처럼 진열되고, 이러한 진열대에서 자신을 열심히 홍보하고 있는 다른 의견들에 묻혀서 고객들에게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아니, 혹시 이러한 '적대'는 백화점 직원에 의해 진열대 더 구석에,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지요.

이러다가 피아노 치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왈칵 드는군요 헉.


민해기 >

"자신이 가진 어떤 역사적 역할을 마칠 때, 또 역사의 흐름에 따라 성격이 변화하거나 또 사라질 수도 있다.". 그렇군요. 그런 ‘역사성’이라면 영속성이나 보편성을 전제한다고 보기는 힘들군요. 공론공간이 그런 역사성을 따른다면 소멸할 수도 있다는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핵심은 지금의 현상을 ‘공론공간의 소멸(혹은 그 과정)’으로 보느냐, ‘공론공간의 과도한 자유주의적 확장’으로 보느냐 일 것 같습니다. 

 저는 물론 여전히 전자의 포지션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는 얘기되지도 못했던 의견들을 포함한 많은 의견들이 지금에 등장하는 것이 과연, ‘신자유주의-자유민주주의’로 인한 것인가? 또 설령 그것이 ‘신자유주의-자유민주주의’를 기폭제삼아 터져 나왔다고 해서 그것을 진정한 ‘발화’의 형태라고 볼 수 있는가? 가 의문시됩니다. ‘발화’는 대부분 어떠한 지속적인 ‘교환’을 통해서 진정 ‘발화’로서의 위치를 획득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저는 지금 겉보기에 ‘자유롭게’ 제출되고 있는 의견들이, 실상은 전혀 발화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교환’할 수 있는 ‘공론공간의 소멸 혹은 파괴’때문일 것입니다. 어쩌면 과거에는 표출되지 못했던 의견들이 다양하게 제출되는 것 현상은, 그것들이 표출되어야 했을 공간을 잃고 부유하게 되었음을 뜻하는 건 아닐까요? 

 저도 예찬 씨가 말씀하신 ‘이글루스’ 나 ‘다음 아고라’ 같은 공간을 다시 한 번 살펴봤으면 합니다. 그 같은 공간이 과연 ‘공론공간’으로서의 힘과 요건을 갖추고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①의견의 자유로운 교환 과 ②적대antagonism을 기반으로 한 ‘헤게모니’. 어떤가요? ①번에 대해서는 개인차가 있을 듯하지만, 저는 그런 공간에서 진정한 의미의 자유로운 교환은 이루어지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개인 네트워킹에 의한 점 형태 넓어져 봤자 면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할 뿐이죠. 입방체를 이루는 것이 극히 드물죠. 이러한 입장을 묻어두고 일단 저는 ‘이글루스’같은 경우에도 ①의견의 자유로운 교환이 가능하다고 가정하겠습니다. 하지만, ②적대antagonism을 기반으로 한 ‘헤게모니’ 이건 어떤가요? 과연 이전에는 생각할 수도 없는 다양한 의견이 쏟아져 나오는 ‘이글루스’(예를 들자면)같은 공간에서 ‘헤게모니’같은 것이 가능하리라 보십니까? 전 아니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그곳은 공론공간으로서의 요건을 다 갖추지 못했고, 즉 ‘공론공간’이 아니라는 거죠. 적어도 지금 현재는. 

 다양한 것처럼 보이는 의견의 발화와 교환(처럼 보이는 것)은 공론공간에서 축출된 자들이 밖에서 구축할 수밖에 없었던 하나의 ‘부유하는 아웃네트워킹’을 보여줄 뿐입니다. 이미 ‘이글루스’같은 공간은 역설적으로 공론공간이 이미 점령당했다는 것. 그 점령세력이 필요치 않는 나머지 대부분의 가지들은, 다시 말해 공론공간들은 파괴당하고 배제 당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죠. 그렇다면, 형성되지도 않은 ‘부유하는 아웃네트워킹’에서 ‘적대’를 실현하는 것은 핀트가 맞지 않는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누굴’ 적대할 것이며, ‘어떻게’ 적대해야 하는 거죠? 
 (뱀발로 지금 대부분의 아웃사이더들이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부유하는 인사이더’라는 생각은 여기서 나왔습니다.) 

 말하자면, 우리 모두는 진열대 뒤편 창고에 몰려있지 않나 싶습니다. 진열대 한 구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저는 새로운 진열대를 만들던가, 진열대에 우리가 들어갈 자리를 구축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봅니다. 그런 저이기에 ‘이글루스’ 등의 모습은 공론공간의 생성 혹은 복구에 관해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만, 역설적으로 그것의 한계도 크게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