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극의 정치적 올바름 - 불학 입문 










주말동안 불경을 잡고 읽어봤습니다. 재미있더군요. 재미랄까. 재미군요. 읽는 사람에 맞추어 텍스트는 해독되고 읽히기 마련이라지만 조금 심했나. 여하튼 후기입니다. 독서후기로서의 주로 파고든 책 제목은 금강반야경, 묘법연화경, 대방광불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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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아래 새로운 것 따윈 없고, 호모 사피엔스가 첫 돌도끼로 허공을 가른 이래 유래 없는 사유 따위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말마따나 후학은 괴롭고 어떤 사유도 선배들의 것에서 엿보게 되는 현실 속에서 좌절할 따름입니다. 그 언제라도. 과거를 살아간 이들을 미몽에 찬 무지한, 혹은 어리석었던 이들로 치부하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미진함을 드러내는 것이겠지요. 독서와 학습은 곧 자신의 멍청함을 깨닫는 행위라고, 그래서 생각합니다. 겸손함을 배우는 과정이랄까요. 




국내 모 환타지 작가가 작중에서 말했듯, 선인의 우매함과 현실에 젖어있음을 꾸짖을 수 있는 것은 젊은이의 특권이지만 그러면서도 그 자신은 결국 그들이 그토록 욕하던 선인의 모습을 닮아간다 하였지요. 그것도, 선인들이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소신 있고 패기만만한 젊은이들에게는 안타까운 얘기입니다만, 어느새 저 자신도 그렇게 되어가는 모양입니다. 결국 어쩔 수 없어 라거나, 혹은 그나마 요 정도는 바꾸자 정도로 말이죠. 왜냐하면 이미 선인들도 고민했었지만 어쩌지 못했음을 알기에. 그렇다하더라도 모순은 고쳐야겠습니다만, 과연 어떻게, 왜 고쳐야 하는지를 모르겠군요. 하하. 왜 우리는 사회적 모순과 정치적으로 편향된 것을 거부해야하는 걸까요. 대체 왜. 극단적으로 말해서, 내가 다른 사람을 때리면 왜 안되는 겁니까. 그리고 그 모든 폭력이 거부되어야 하는 게 맞다면, 대체 어떻게 세상의 모순을 없애야 하는 겁니까. 그 모든 고민을, 선인들은 이미 행하였고, 결과적으로 세상은 아직 이 모양이라는 것이 꽤나 슬픔이겠죠. 아직 선인들이 개척하지 못한 새로운 분야, 새로운 지식을 우리가 개척해야하는 이유는, 여기서 출발한다고 생각합니다. 허나 앞서 말했듯, 선인이 생각하지 않은 것이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방대하고 심오하지요. 배움의 절망이란 그러하기에 시작됩니다.  




대체 왜, 서로를 존중하고 모든 폭력에 거부해야하는지, 이론을 극한에서 사유해서 예와 염치를 만들어 내는 사고를 행한 이가 석가와 주자입니다. 조금 더 개인과 사회에 각각 치우쳐 있다는 차이와, 속해있던 문화권의 특질에 따른 특징을 고려하더라도 둘은 꽤나 상반된 의견을 보이는데요, 중요한 건 둘 다 결국 세상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곳으로 만들기 위하여 근간이 되는 ‘이치’로서의 예와 율경이 어떻게 성립할 수 있는지를 세계의 근간에서부터 사고하여 남겼다는 점에 있습니다. 따라서 불가와 성리학은 둘 다 일종의 실천철학(올곧게 이론철학이거나 실천철학인 철학이 어디 있겠습니까만은)이겠죠. 이미 다들 아시다시피 기대승과 이황의 논쟁 등도 다 예와 예의의 성립 부분에 입각하는 논쟁이었기에 그 중요함이 있습니다만 그 얘기는 나중에 주자서절요 독서후기에 남기도록 하고, 다시 불가의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아시겠지만 불교는 종교라고 하기엔 조금 다른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절대자를 상정하여 그에 의한 창조와 존재, 윤리관을 수립하고 그 종지를 일컫는 것이 종교라고 한다면 말이죠. 불교에는 신이 없습니다. 석가를 칭송하기는 하지만 석가 당신의 말마따나 세상에는 8,억6천만 나유타의 부처가 있으며 그들 하나하나가 정각자(옳게 깨달은 이)입니다. 석가 자신이 그들과 동격인 하나의 부처이며, 부처는 따라서 신의 이름이 아니라 ‘깨달은 자’를 뜻하는 뿐입니다. 그러므로 불경은 신의 말씀이 아니라 정각자 부처의 ‘깨닫는 방법’과 ‘깨달은 뒤의 실천 내용’을 설하는 내용일 따름입니다. 단순히 말한다면 말이죠. 




익히 유명하다시피, 석가는 깨달음, 즉 견성을 위해 출가하여 고행을 합니다. 석가의 출가는 곧 세상을 고 苦로 이해하였기에 그 고의 질곡에서 빠져나올 방법을 깨닫길 원하였기 때문입니다. 흔히 비유로서, 석가가 보고 들은 생의 고를 생로병사의 4고라 칭하지만 이는 석가가 가르친 고의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언제나 그렇듯 조악한 비유로 인하여 이해의 본말이 전도되는 상황에 처하고 있습니다. 석가가 가르친 진정한 생의 고란, 삶의 윤회를 인식하지 못하고 한 꺼풀짜리 세상과 육신에 집착하여 보다 큰 기쁨인 해탈을 보지 못하고 있으며 곧 타들어가 무너질 가옥 안에서 웃으며 떠드는 어린 자식들(법화경 중)에 같다 하였습니다. 삶의 윤회는 결국 이 세상에 존재함 자체를 우리가 벗어날 수 없으며, 존재 자체로서 고통스럽다는 내용에 해당합니다. 그럼으로서 석가는 서로 욕하고 상처 입히며 무시하고 더럽히는 사랑이 박약한 인간의 모든 번뇌가 존재 자체에서 비롯된다 설하고, 그러므로 일차로서 이를 끊어내고 결국 존재 자체를 벗어남으로서 해탈해야한다고 설하는 것입니다. 허나 이는 궁극적인 지향점이 아니며, 그 불법의 최종 지향은 자신의 존재도 잊고 중생도 잊으며 중생 모두가 멸법하는 대승의 이치를 수행하는 것에 해당합니다. 




석가 자신의 수행은 이같은 소승과 대승의 이치를 포괄합니다. 고통과 자학으로 점철된 고행에 염증을 느끼고 곧 이어 자신을 잊는 무상무념의 수련을 추구하고는, 결국 무상무념에서도 역시도 무상함을 느끼어 마지막 고행을 수행하고 그 직후 견성을 이룩합니다. 이후 석가는 깨달음을 전파하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일깨우는 역할을 하지요. 그 과정으로 석가가 설한 내용이 소승, 특히 금강경의 내용에 해당합니다. 공, 없음, 그리고 없음도 없는 것. 그런 공에 대한 추구가 곧 견성이고 깨달음입니다. 인간의 고란 곧 세상의 윤회 속에 자신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며, 세상의 윤회를 끊어내는 유일한 길을 바로 모든 걸 다 잊는 것이고 잊는 것도 잊는 것이라 말하는 겁니다. 금강경의 무명무무명 無明無無明, 명도 없고 무명도 없는 그 한 구절 말을 가리키지요. 깨달음 자체를 설하는 내용인 동시에 소승의 중심 교리를 상징합니다. 보통 금강경의 경명은 금강반야바라밀경으로서 금강석과 같은 지혜(반야 般若)로서 미혹의 이 세계에서 피안으로 도달한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그러나 이같은 구마라습의 번역과는 달리 현장법사의 번역에 따른 경명인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의 의미가 보다 더 본 경의 내용을 잘 설명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금강과도 같이 견고한 번뇌를 잘라낸다는 지혜의 경전이라는 의미입니다. 금강경에서의 번뇌란 곧 수행자를 현실에 천착하게 만드는 모든 것으로서, 보살의 경우는 분별 分別함을 번뇌로 삼는다 합니다. 즉 생각하고 판단하며 느끼고 자신과 타인과 중생과 자신의 신체에 대해 사유하는 자체가 곧 번뇌이며, 따라서 보살의 보시는 보시함도 없고 보시하지 아니함도 없으며, 보시 받는 중생도 없고 중생이 없는 것 역시도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적확하게 말한다면 금강경의 가르침은 자유입니다. 극한의 자유를 얻어냄으로서 사유하고 존재하는 번뇌를 끊어내고, 따라서 모든 고통의 연쇄에서 한발짝 물러설 수 있는 그러한 자유를 손에 넣으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얻는 자유는 세상의 말로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비법, 법이 아닌 것에 해당합니다. 허나 사유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기 위한 수행과 사유 역시 또한 존재의 사유이며, 따라서 자유에 속박되는 번뇌 또한 끊으라는, 비비법의 가르침이 여기 연이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럼으로서 아라한(더 이상 막힘이 없는 지혜를 손에 얻은 보살 혹은 부처)은 아라한이 되며, 아라한이 아라한이 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는 (아라한은 단지 언어로서 아라한이라 일컫는 것에 불과하므로), 수다원(성인이 되었다)에 들었으며 그러나 수다원에 들었다고도 할 수 없는(수다원 역시 그저 그러함을 일컫는 것일 뿐이므로) 그런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소승의 극한의 경지에 해당하는 진정한 공이며 비어있지도, 비어있지 않지도 않은 상태에 오르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그런 상태도 없습니다)  




여기서 설명 중에 적시된 소승은 동남아 계통에서 흥성한 소승불교와는 다릅니다. 소승불교의 경전은 금강경과 같은 반야경이 아니며 그들의 경전은 다른 것입니다. 아상도, 인상도, 중생상도, 수자상도 잊고 보시도 잊고 잊은 것도 잊는 것. 그와 같은 진정한 멸법, 법도 아니고 비법도 아닌 그런 견성과 멸각을 이뤄내는 일종의 단계적 수순으로서 금강경의 사상은 대승불교의 사상에서 소승이라 일컫는 것입니다. 석가 자신이 묘법연화경에서 최고의 지혜, 극의 가르침이라 일컬으며 설한 내용에서 나타나지만 대승은 일법승으로서 유일한 법이지만 그 법이 너무도 크고 넓어서 단번에 가르칠 수 없어 석가께서 직접 나누어 쪼개었으며, 그 가장 하승의 도리가 곧 금강경에서 설하는 소승에 해당합니다. 대승은 소승을 얻은 정각자가 행하는 것이고 소승을 얻지 못한 자가 행하면 그 큰 법에 짓눌리어 삿되게 실천할 수 있기에 위험하다 하였으며 진정 멸법(아상 我相, 인상 人相, 수자상 壽者相, 중생상 衆生相의 제 상에서 영원히 벗어난 지경)으로 모든 중생을 이끌어 고 苦를 멸하는 그런 실천을 대승이라 일컬은 것입니다. 일법승이란 따라서 자신의 멸법을 이뤄내는 것을, 대승은 모든 이의 멸법을 이끌어내는 것을 칭한다고 설명하면 적절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수행의 방법을 설한 수행본기경이라던가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의 진리를 설한 육도집경 등 본연경이나 석가의 생존 당시 설하신 내용을 후대에 엮은 아함경 등의 부분은 그러나 조금 초점이 다르게 됩니다. 특히 율경의 지켜야할 계율들에 이르면 위에서 언급한 일법승의 멸법 사상과 무관하게 보이는 엄격한 계율들이 존재하며, 우바새 우바이(재가 불교 수행자)들이 지킬 계율조차도 엄격합니다. 이 부분은 석가의 철학에서는 가장 외적인 부분으로 치부되지만 실은 불가가 실천철학이기 위한, 혹은 붓다 자신이 초기에 추구하였던 본원에 해당하는 사상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정진, 즉 수행과 극한적 사유는 정각 正覺의 길에 필수이며 절대로 거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화엄경은 가르칩니다. 화엄의 앞부분인 입법계품에서 가르치길 보리심(정각을 향하는 마음)은 그 자체로 지극하나 그것만으로는 불가하며, 진정으로 애욕을 끊어 정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수행과 정진이 불가피하다고 합니다. 우선 애욕을 끊고, 그 연후에 멸법을 좇으며, 그럼으로서 대승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가에서 윤리는 이와 같은 연유로 성립할 수 있습니다. 




정각을 향하여 이르기 위해서는 멸법을 행해야 하나,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인간의 육에 갇힌 자신의 사유를 이끌어 자유를 향할 마음을 내어야 합니다. 이는 단순한 사유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애욕을 끊고 고통을 견디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렇기에 희노애락애오욕을 견디고 온갖 욕정을 참아내며, 다른 생명과 존재를 귀히 여기도록 단련하고 세상을 변용시키지 아니하는 방법을 율법으로 정하여 배우고 따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연히 율법은 강도 높은 덕성과 절제를 전제하여 구성되며, 타 존재에 대한 존중과 자기 수행을 중심으로 구성되게 되는 것입니다. 불가에서 도리를 따르고 타인을 존중하는 모든 윤리는 불가의 멸법에서 출발하여 멸법을 향하는 것으로 지향됩니다. 막힘이 없는 지혜인 화엄 십지품은 그 연유에서 얻어지며 닿지 않는 곳 없는 깊고 넓은 마음을 통해 이제 사람들을 구원해 내는 것입니다. 




허나 조금 다릅니다. 불교는 실질적으로 사상의 형태를 띄고서 종교적 방향성을 제시하기 때문에, 계율보다는 견성에 보다 큰 방점이 찍혀 있으며 계율이라는 이름의 윤리관은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되기 쉽습니다. 계율은 어디까지나 정각 正覺을 돕는 요소로만 작용하며 심지어 정각 正覺을 이뤄낸 선사들은 계율을 무시하는 행태까지도 보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지요. 이는 석가가 무리를 이끌고 탁발 생활을 한창 하던 도중에 한 비구가 옛 아내와 동침하여 아이를 출산한 이후에 비로소 수행자를 온갖 애욕에서 끊어내기 위해 계율을 세웠다는 사실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즉 정각을 견성한 이후의 존재는 이미 극한의 ‘자유’를 깨달았기에 애욕에서 끊어내는 것에 목적이 있는 계율에 천착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되겠지요. 




허나 교리가 아닌 현실의 관점에서 본다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불교의 계율은 우바새, 우바이에 대해 완화된 형태로 부과되어 현실 윤리로 적용됩니다. 화랑이라는 이름의 신라시기 우바새에게 부여된 세속 5계와 같은 윤리관이 불가의 이름을 달고 존재하듯이 불가의 윤리는 본래 현실에 천착하여 발생하여 현실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브라만에 의해 편파적으로 형성된 윤리관에 반대하고 보다 더 존재 개체들을 존중하면서도 현실 속의 부조리함을 극복적인 윤리관 형성이 당시 시대 과제였기 때문에, 석가는 근본에 천착하여 언제고 적용가능한 그런 윤리를 세우려 시도한 것이고 그로 인하여 불교의 사상관에 연계하여 강력한 윤리가 탄생하였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이는 일종의 실천철학으로 읽을 수 있으며, 불가를 이론철학의 관점에서 읽을 때와 전연 다른 모습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예학은 한국토 내에서 불교 이상으로 주된 실천철학으로 자리했었던 성리학의 주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불가와 유가 모두 예를 현실의 부족한 인간 상을 보다 더 완성으로 이끌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으며, 현실적으로 예와 율 자체를 목적으로 적용했습니다. 예기와 율경은 현실 사회에 적용하기 위한 것이며 불가의 율경은 복잡다난한 현실에서의 원인을 욕망과 제 상에 대한 집착으로 상정하여 그에 대한 대응으로서 사회를 제도하는 것에 목적을 두는 형태로 발현합니다. 따라서 불가는 일종의 실천 철학이자 현실에 지극히 천착한 사상으로 봐야하며, 실재로도 브라만 카스트에 귀속되던 당대의 모순은 물론 후대에 생성될 수 있는 모든 모순과 억압을 멸법으로서 탈피하려는 시도를 나타낸다고 하겠습니다. 




요약합시다. 불교에 대한 흔한 오해는, 정과 욕을 끊고 수행하는 종교로의 이해나 혹은 부처라는 신에 대한 다신교적 숭배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불교 자체는 종교라기보다는 일종의 실천 철학 체계에 가깝습니다. 그 엄격한 규율과 예절은 모두 극한의 사유의 결과로서 도출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흔히 오해를 사는 부분인데 불교의 사원에서 숱한 법상들을 세워놓는 것은 숭배할 대상을 가리키기 위함이 아닙니다. 불상들은 선각자로서 업을 끊고 깨달음을 얻은 이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조악한 비유지만 이를테면 이순신 장군 동상 같은) 그들에게 숭배하는 것은 후기 불교(라고 해봐야 기원전) 일각에서 제기된 석가의 신성화 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불교의 가르침과 전혀 다른 것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또한 불교의 수행자가 지향하는 성취 목표인 정각, 피안, 열반 역시 기존의 흔한 오해처럼 극락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부정하는 것도 아닌, 심지어 존재에도 얽매이지 않는 진정한 자유의 덕성을 함양하는 것을 열반이라 칭하며, 이는 사회에 속하여 그 자체로서 폭력인 인간 존재에 대한 회의로서 일종의 정치적으로 올바름을 지향하기 위한 극한적인 태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붓다 자신이, 최소한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에서는 극락의 열락을 설한 적은 없으며 그가 말씀하신 정각은 극락조차도 처하지 않는 무궁한 열락의 이 차원에 존재를 멸하는 것에 해당하게 되겠습니다. 붓다는 자신을 잊는 수행인 무념무상이 극한에 닿을 수 있다고 설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그것은 소승에 해당한다고 말하였습니다. 다만 그와 같은 공의 개념은 말이나 글로서 담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염화미소나 사자후가 따라서 선종의 가르침에서 큰 위치를 점하게 됩니다. 반대로 교종은 아마도 언외언의 깨우침을 향하는 율법과 계율 자체에 천착하여 깨달음을 얻고자 했기에 경전에 집착했던 것으로 보이며 선각자로서의 석가 자신에게 천착하는 것으로서 설명 가능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꽤나 현대의 사회과학도에게서도 많이 보이는 사상적 현상이, 불도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보인다는 점은 흥미롭습니다. 석가가 열반한 해는 대략 4천년 전이고, 비로소 우리는 조금이라도 불가에 가까워졌다고 해야 하나요. 석가의 사상을 이제야 따라간다고 과언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어쨌든. 석가 자신도 평가하지 않음을, 무한히 모든 것을 잊고 잊는 것조차 잊는 것을 말했다고 제겐 읽힙니다만 이는 읽는 이 개인의 판단에 따라 다를 수 있다고 치고 넘어갑니다. 




과연 석가 자신이 접했다는 극한 그 너머의 세계엔 뭐가 있을까요. 끝간데 없는 광대무변한 지혜를 얻었다고 했고 그런 자를 아라한, 부처라고 일컫는 것이니 만큼 이 성찰은 형이상학적인 것이기보다는 우리의 현실 자체에 천착하는 것이라고 따라서 저는 생각합니다. 머리 깎고 산에 들어가야만 깨닫는 것은 아니겠지만, 다 집어치우고 입산하여 득도의 길을 걷는 건 어떨까요. 차라리. 




주1) 아상 : 자신의 신체 등 육신을 허위임에도 진실로서 믿는 것, 또는 삿된 진리를 진정한 깨달음이라 믿고  

           좇는 것 

주2) 인상 : 자신은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생물이나 혹은 비생물과는 다른 존재라고 집착하는 믿음 

주3) 중생상 : 중생 대중이 아상이나 인상에 집착하여 고의 질곡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 

주4) 수자상 : 자신의 수명에 집착하고 명이 중요하다고 믿는 허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