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오랜만이다라는 생각을 하며 아직까지 실천 활동을 위해 학교에 남아있는 절친한 동기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어. 나다."
"준연이냐?"
"응."
"오랜만에 전화하네. 짜식."
"어.. 요새 이것저것 일이 좀 있어서."
"그러냐? 난 오티 다녀왔다. 너도 오지 그랬냐. 벌써 08이야. 시간 참 빠르다."
"뭐 08? 나참. 완전 꼬맹이들이겠네."
"네 자리 하나 비워뒀다. 빨리 제대해라. 내가 물을 주고 있을께. 꽃을 피우는건 네가 되었으면 좋겠다."
"......"
이제 나는 더이상 새내기가 될 수 없다. 어딜 가도 처음은 아닌 것이다. 처음 가는 술집은 있어도 술집이 처음은 아니며, 처음 만나는 여자가 있어도 여자가 처음이 될 수는 없다. 대학에서 앞으로 내게는 새로운 곳, 새로운 사람, 새로운 관계에 맞닥뜨려 어설프게 몸 둘 바를 몰라하는 상황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보다 익숙한 곳, 익숙한 사람, 익숙한 관계 속에서 느긋하게 손을 흔들고 있을 때가 더 많은 것임을 나는 알고 있다. 새로운 운명 속으로 내 삶을 옮기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처지가 그저 씁쓸하지만은 않다. 새내기는 될 수 없지만 제대 후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는 다시 태어나면 20대로 태어나고 싶지는 않다고 하셨다. 뜨겁게 피어오르던 청춘의 열정도 좋지만, 너무나 뜨겁고 막연했던 나머지 다시 그 시간을 살아내야 한다는 일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는 것이다. 하여, 아버지가 돌아가고 싶어 한 시기는 40대였다. 내일을 예측할 수 있는 생. 부대낌도 뜨거움도 없지만 고여 있지만은 않은 시간들을 선택하신 것이다. 그래도 나는 새내기가 될 수 있는 청춘(젊음)이 아직은 부럽기만 하다.
새로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는 없을지라도 이왕에 왔던 길을 물릴 수 없는 나이는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벌써 그런 나이가 되었다고 말하기엔 아직 이르지만, 이미 벌여둔 일까지 팽개쳐버릴만큼 난 용기가 있지는 않다. 나는 새삼 수많은 가능성의 씨앗들을 품고 있는, 마구 젊기만 한 청춘들이 한없이 부러워졌다. 물론 이 청춘들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지금의 상태가 뿌듯하기는 커녕 답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더욱이 스스로 대학이 어떠한 곳인지 조차 모르기에 숨을 옥죄는 느낌이 들기도 할 것이다. 현실성 있게 스스로를 그려볼 수는 없을지라도, 바람을 가지고 미래를 그려볼 수는 있어야 할 텐데 지금 사회를 생각해 본다면 장래 희망조차 뚜렷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앞으로 무엇인가 되어 한 사람의 몫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으리라고 어찌 예감할 수 있단 말인가.
자기 안의 씨앗을 발견하는 일. 발견한 씨앗을 흙 속에 심고, 물을 주고, 싹을 틔우고, 줄기를 내뻗게 하고, 꽃을 피우고, 마침내 열매를 맺게 하고, 그 열매 속의 씨앗이 다시금 누군가의 씨앗이 되게 하는 일. 그것만큼 삶에서 중요한 일이 또 있을까? 삶이란 곧 씨앗을 찾는 일과 씨앗을 다시금 열매로, 다시금 더 많은 씨앗으로 돌려 놓는 일이 아닐까. 씨앗을 찾기 위해 겪는 실망과 좌절, 노동 그 모든 것이 삶이 아닐까. 그런데 가만! 글을 쓰고 읽는 것 또한 씨앗을 발견하려고 하는 노력은 아닐까. 거듭 스스로를 발견해가는 과정이 아닐까. 어쩌면 글을 쓰는 것이나 글을 읽는 것은 내 속에 감추어져 있는 새로운 씨앗, 새로운 정체성을 찾는 일이 아닐까.
19세기를 풍미한 혁명가이자 철학자인 '마'아저씨는 모든 사물의 내적 연관을 설명하면서 '인간적인 일 가운데 나와 무관한 일은 없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옳은 말이다. 그런데 하물며 나 자신에게 있었던 일들, 자신이 앞으로 겪을 숱한 실패와 시행착오들이 나의 씨앗과 어찌 무관할 수 있을까. 우리가 겪는 모든 세상의 경험들이 -밥을 먹으며 옷을 입고 잠을 자는 일같은 일상적인 것 조차- 우리를 일으켜 세울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겪게 되는 경험, 우리가 펼쳐드는 책, 우리가 가만히 읊조리는 문구가 우리를 일으켜 세울 것이라고 믿는다.
어쩌면 나는 이 조촐한 글을 통해 아버지처럼 어른 흉내를 내고 싶어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땅속 깊은 곳에 씨앗을 품고 허둥거리는 청춘을 향해 "괜찮아, 괜찮아."라고 말해줄 수 있는. 어쩌면 나는 우렁우렁한 젊은 청춘의 목소리를 다시금 듣고 싶어, 아버지처럼 40대가 아닌 새내기로 돌아가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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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장 김현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은 전역일수를 생각해 봤을 때 준연씨는 좀 이른 고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하하, 농담이예요 농담!!)
사람들은 드라마나 영화, "남의 삶"을 왜 좋아할까 하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래서 나온 결론은,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미 놓쳐버린, 혹은 잡을 수 없는 가능성을 경험하고 싶어서' 라는 거. 이건 '죽음에 대한 공포', '불로불사' 와도 연결이 될 것 같아요.
불사의 전제조건이 언제나 '불로'인 이유는, 젊음 속에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지요.
2008-02-20 11:26:13 | ipaddress : 52.2.6.64
04|상병 이태형
마 아저씨는 누군가요!
마르크스인가?
삼국지의 마초는 아닐테고(...)
무식이 자랑은 아니건만.. 크윽.
스스로를 발견해가는 과정, 정체성을 찾는 과정이라는 것에 동의합니다.
2008-02-20 12:52:44 | ipaddress : 18.33.9.102
02|병장 이기중
저는 오티는 커녕 과방에도 가서는 안될 나이가 되어버렸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무척 씁쓸하답니다.
2008-02-20 13:02:23 | ipaddress : 56.4.2.227
03|병장 김영훈
새내기가 될 수는 없더라도.. 단지 씨앗이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될 수 없겠죠. 언젠가는 거쳐가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씁쓸함을 달래보곤 합니다만, 어렵네요 역시.
2008-02-20 13:21:17 | ipaddress : 56.13.1.14
02|상병 김준호
전 내일 나가면 신환회에 가볼까 생각중이랍니다. 허허
아직 같이 갈 수 있는 동기들이 있기에 밤 늦은 시간에 가서 동기들끼리 수다를 떨며
새내기들과 면담을... 허허
자고로 면담은 술에 성실하게 임하는 사람들만 가능한 법이라 새내기들 여럿... 허허
근데 그 다음 날 있는 새터엔 도저히... 새터에 궁인 오면 재미 없잖아요 흐흐
덧. 저는 제 동기가 준연님 친구분과 같은 말을 하면 연락을 끊... 허허허
2008-02-20 13:53:45 | ipaddress : 16.1.161.78
02|일병 박종윤
김군인가 보구만(으핫핫)
으아, 나도 빨리 전역해야 되는데; 복귀해야지 으X으X...
2008-02-20 14:07:51 | ipaddress : 26.144.1.29
04|병장 정성원
확실히 대학 처음 신입생환영회나 입학식보다.
전역후에 학교 복학해서 다니는 것이 더 떨리고 어색할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때와는 머릿속에 안주해 있는 사상이나 생각 계획등이 많이 현실적으로 바뀌어 있겠죠
저에게 있어서의 군생활은 정말로 한번쯤 제자신을 되돌아볼수 있는시간이 되서 그런지
후회는 없습니다. 과거는 과거일뿐 현재가 중요하니까요(웃음)
2008-02-20 16:27:27 | ipaddress : 18.65.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