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글-독서후기] 청춘의 종언 그 후
상병 김무준 2009-01-07 18:56:55, 조회: 373, 추천:3
청춘의 종언을 읽었다. 그들의 대화를 읽으며 답답했고, 아팠고, 슬프고, 화가 났다. 프린트한 종이를 들고서 몇 시간을 읽었다. 무기력증에 빠져 있었다. 터무니없는 목표로 향하는 공부와 넘쳐나는 상상을 이성이 내리눌렀다. 지금 여기서 무엇을 준비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짧은 사회생활과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이곳에서의 경험은 내실보다는 페르소나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고졸 나부랭이는 무시당하기 일쑤였고 학력으로 인한 부당한 대우는 어딜 가나 존재했다. 소위 말하는 스펙이란 부분에 있어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스무 살 청년에게 사회는 차가웠고, 냉담했다. 그렇다고 다시 대학을 갈 만한 여건은 되지 못했다.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공부와 지식의 습득 뿐.
이성은 한계를 부르짖었다. 아무리 지식을 쌓고 정보를 습득한들 뚜렷한 결과물이 없다면 무시당한다. 이는 스무 해를 살아오는 동안 굳어진 관념이었고, 진리였다. 실질적으로 지난 일 년 간 이십 년 공부보다도 많은 공부를 했다한들, 고등학교 졸업장보다 빛나는 것은 남지 않았다. 학력은 여전히 고졸로 적혀있었고 전공은 영어로 표기되어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전공이라 부를만한 거라도 있다는 사실이랄까. 이마저도 혀가 굳어 미군을 만나도 생활영어밖에는 할 수 없으니 이걸 전공이라 부르자니 부끄럽기 그지없지만, 남아있는 간판이라면 간판이니까. 간판은 변하지 않았다. 입에 개 거품을 무는 노력은 아니었더라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음에도 현실에 있어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었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계획을 세웠다. 퇴사와 동시에 공부를 시작하고 사 년제 대학교에 입학해 제법 그럴싸한 간판을 달고, 졸업과 동시에 그럴싸한 회사에 입사, 이 년 정도 돈을 모아 이탈리아로 유학을 가겠다는 그럴싸한 계획이었지만 이마저도 이성이 내리누른다. 불과 오 개월 남짓한 시간 만에 그럴싸한 대학 간판을 달 수 있을까. 졸업 후에 괜찮은 직장을 얻을 수 있을까. 늦은 나이에 이탈리아로 유학을 간들 무얼 하겠나. 지난 세월동안 현실에 길들여진 머리는 철저히 현실적인 사고의 과정을 늘어놓았다.
가장 큰 문제는 돈이다. 누군가는 우리 세대를 물질적 풍요를 바탕으로 살아가는 세대라 말한다. 말이 살아가는 이지. 팔십-팔 만원 세대니 아이엠에프 세대보다도 힘든 경제상황에 직면해 있다느니 하는 와 닿지 않는 문제는 둘째 치더라도, 아무리 노력해도 구 만원을 넘지 않는 수당과 잦은 야근과 아무런 성과 없는 작업의 반복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똑같은 이십대인데도 정규직 직원은 이번 달 월급이 백팔십 만원을 찍었다고 좋아서 노래를 부르고, 설날 보너스인지 뭔지가 나왔다는데 불과 그보다 두세 살이 적은 비정규직 직원은 보너스는커녕 지난달 야근 수당도 없다. 피부에 느껴지는 금전적 추위는 아무리 노력한들 육 개월 남짓한 시간에 한 학년 대학 등록금과 재수비용을 감당할 수 없음을 부르짖었다.
모든 이들이 비슷하기야 하겠냐마는 주위를 둘러보아도 보다 나은 환경에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이들은 쉬이 보이지 않는다. 빵빵한 실탄지원 앞에 당당히 전쟁터로 향해 고지를 점령하는 개구리의 모습은 통도사에 살고 있다는 황금개구리를 만나는 확률만큼이나 줄어들었다. 네이버의 만화작가들은 쓸쓸한 현실에 엄마 친구 아들이라는 캐릭터를 창조하기에 이르렀다. 어디에나 있다는, 심지어 우리 어머니들에게도 한명씩 꼭 존재한다는 엄마 친구 아들은 육남매의 다섯째로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 부산대를 전액 장학금으로 입학하고, 과외로 학비를 충당하고 있다는 훈훈한 소식을 전해준다. 그래서 어쩌라고. 잔인한 이야기일지 몰라도 어머님은 그가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사실은 꼭 빼놓고 말씀하신다.
나라를 지키겠답시고 쥐뿔도 없는 애국심을 쥐어짜 어린 나이에 자원입대를 했는데, 현실은 딱딱하게 변해만 갔다. 나이가 찬 스물 일고여덟 되는 형들은 차라리 공사가 편하지 않느냐고 말한다. 인정할 부분은 인정해야 하는 것이,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는데다 현실과 동떨어져 있으니 마음만은 편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할 말은 있다. 나라를 위해 청춘을 바치고 있는데 나라는 정작 필요한 것은 주지 않았다. 선생들이 공부해라, 공부해라 해서 공부했더니 정작 공부로 먹고살 수 있게 해주지는 않았듯 지켜라, 지켜라 해서 나름 열심히 지켰는데 그 나라 안에서 살 수 없도록 만들어 놓으면 어떡하라는 것인지. 대꾸 없는 물음만 하늘에 반짝이고, 터뜨릴 수 없는 분노만 쌓이다 세이노라는 양반의 글을 만났다.
삶이 그대를 속이면 분노하라. [분노를 느끼는 사람만이 닫힌 문을 세게 쾅쾅쾅 두드릴 수 있다. 용수철처럼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당신의 삶을 이 거친 세상에서 우뚝 홀로 세울 수 있도록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피 튀기듯 노력하라.] 영감이라고 부를 나이의 아저씨가 스무 해를 현실로 살아온 이에게 말했다. 틀린 게 아니야. 너희들 잘못이 아니야. 청춘의 종언을 읽으며 그들의 대담에서 분노를 터뜨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이제와 우리에게 그런 말을 던진들 무슨 소용이 있냐는 까닭이었다. 돌이켜보면 사회가 옳다고 주장하는 잣대아래 이렇게 살아야만 한다고 교육받았고 우리가 가는 길이 바른 길이라 믿고 걸어왔는데, 눈을 비비고 앞을 보니 시커먼 낭떠러지가 아가리를 벌리고 우리를 삼키려 든다. 그럼 우리를 벼랑 끝으로 내 몬 이들이 우리를 되돌려 세워 다시 길을 걷게 도와주던가. 죽을 고비 앞에 서서 두려움에 벌벌 떠니 이제 와서 한다는 소리가 너희 잘못이 아니야 라면 우리는 무얼 하면 된다는 말인가. 분노는 쉬지 않고 터졌고, 주체할 수 없는 화만 뱃속에서 맴돌았다.
그러다 같은 고민에 빠진 이십대를 만났다. 그들이 제각각 속에 품고 있는 것이 두려움이라면 두려움이었고, 슬픔이라면 슬픔이었다. 마주한 술자리에서 소주를 기울이며 현실적 문제에 마주쳤다. 책마을의 글을 모아 문집으로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대화였는데, 별 관심이 없었던 것이 문집에 참여 하겠다 선언하지도 않았고 귀찮은 일에 말려들 생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온 게 말인지라 앉아서 술만 기울이기는 뻘쭘해 걱정을 늘어놓았다. 막말로 우리가 현실이라는 전쟁터에 뛰어들었을 때 쌀도 밥도 술도 나오질 않는 문집이라는 것에 누가 시간을 쪼개 달려들겠느냐고. 잠깐의 침묵이 흐르는 동안 다들 많은 생각에 빠졌다고 회상한다. 누군가 말했다. 해보지 않은 일에 대해 애써 걱정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이십대니까.
그동안 짓눌려오던 현실이 후두둑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열정을 갖고 살자는 연초의 다짐이 떠올랐다. 어떤 계기로 타오르던 열정이 식었는지는 몰라도 빠져있던 기둥하나가 다시 솟았다. 말 한마디에 쉽게 무너지니 말 한마디에 쉽게 일어서는 것일까. 단순하기만 한 이 사고구조에 왜 현실을 대입해 놓았던 것인지.
그럼 이 흘러가는 시간을 어떻게 이용해야 할까. 책을 읽는다. 텍스트를 통해 생성되는 이미지의 재창조와 뜻의 해석은 대부분 그 창조과정에서 변하거나 형태가 바뀌지만 그래도 책을 읽어야한다. 혹자는 한국문학이 죽었다 푸념하고 더 이상 읽을 텍스트는 생성되지 않는다 한탄할지 몰라도, 책을 읽어야한다. 한국문학이 죽든 살든 읽을 가치가 있는 텍스트는 여전히 생산된다. 해석에서 출발하는 의의 변질이 존재하더라도 텍스트가 전달하고자 하는 본래의 의미는 쉽사리 변하지 않는다. 글쟁이가 억지로 텍스트를 꼬아놓지 않는 한 텍스트는 해석 가능하기에 텍스트라 불린다. 독서는 다양한 세대와의 대화 과정이고 사유를 공유하는 장이 된다. 이를테면 소통이리라. 지금의 우리는 말에 길들여졌다. 구어적 표현이 아닌 문어적 표현에는 알 수 없는 거부감마저 생겨난다. 이 거부감이 폭력적 주입식 교육과정에서 탄생한 것이라면, 정말 우리의 교육방식이 잘못되었다면 거부감을 다시 부정하는데서 새로운 학습이 출발한다.
책을 통해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체험하고 배우지 못한 것들을 채워 나가야한다. 현실이 주장하는 스펙을 채운들 영혼의 빈자리는 채울 수 없다. 자리에 모인 이십대들은 소통에 목말라 있었고 배움에 굶주려 있었다. 우리의 윗세대가 우리에게 잘못된 길을 강요했다 할지라도, 그들의 잘못에 책임지지 못하는 굴욕적인 모습을 보인다 해도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아야한다. 누구도 삶을 대신 살아주지는 않으니까. 우리의 윗세대 역시 우리와 같은 과정에서 스스로의 자리를 개척했으리라. 경작된 토지에는 분명 쌀이 열렸고 보리가 익었다. 독서는 수확이다. 삼십대가 쓴 글이든 사십대가 쓴 글이든 오십대가 쓴 글이든 독서를 통해 우리는 그들과 대화하고 소통하며 억눌린 무언가를 공유할 수 있다. 서로가 존중해야 할 부분은 존중하고 배워야 할 부분은 배워야한다. 우리가 꼬장꼬장한 할배들과 같아질 이유는 없지 않은가.
책을 읽음과 동시에 대화해야한다. 우리는 모두가 소통에 목말라있다. 사유의 흔적을 공유하고 싶고 현실의 쓰린 아픔, 사람과 사랑의 상처를 달래고 싶다. 쓰디쓴 현실의 맛을 음미하려면 우리가 대화해야한다. 대화는 술자리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고,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도 진행될 수 있다. 왜, 어째서, 무슨 이유로 우리가 멀어졌던가. 디지털이 급속도로 발달하며 대화는 빠르고 쉬워졌을지 몰라도 사람 냄새나는 인간적인 대화는 점점 사라지고야 말았다. 어쩌면 우리는 엄지와 검지를 놀려 보낸 텍스트의 수에 걸 맞는 대가를 치루고 있으리라. 보이지 않는 아날로그의 선은 우리 스스로가 끊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 지나간 세월의 흔적을 되새겨 카페에 모이고 술집에 모여 왁자지껄한 대화를 나누어야 할까.
우리는 디지털에 익숙한 세대다.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을 이용해 소통하면 되는 것이다. 클릭 한 번으로 텍스트를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 어디에나 마련되어 있고, 원고지보다 쉽게 텍스트를 생산하고 분배할 수 있다. 뜨거운 사람 냄새는 나지 않더라도 뜨거운 열정의 향기는 맡을 수 있다. 치열하지 않아도 좋다. 개집에서 개들이 싸우는 것을 십년이 넘도록 지켜보면서 무얼 느꼈던가. 촛불을 들고 아들과 형제와 싸우는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느껴왔던가.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변해야한다. 촛불을 들고 광화문으로 나섰던 이들이 아름답게 느껴졌던 이유는 무엇이었나. 하나의 뜻으로 평화롭게 소통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지난 몇 세기동안 여러 경험을 통해 평화적인 대화로도 소통은 가능하다는 것을 역사가 가르쳐 주었다. 그 소통의 과정이 텍스트이든 대화이든 아날로그적인 만남이든. 우리는 대화해야하고 만나야한다.
책 읽기와 소통에서 생성되는 원인모를 분노는 현명하게 해결해야할 필요가 있다. 사회에 대한 분노, 기성세대에 대한 분노, 현실에 대한 분노, 스스로에 대한 분노는 모두 그 방향을 돌려 스스로를 담금질하는 원동력으로 삼아야한다. 불행과 정진은 종이 한 장 차이다. 비교에서 시작된 분노는 스스로를 나락에 떨어뜨릴 수도 있지만, 스스로를 갈고 닦는데도 이용할 수 있다. 누가 불행이 비교에서 시작 된다 불평했던가. 글을 쓰고 싶어도 글을 쓸 줄 모른다고? 돈을 벌고 싶어도 어떻게 벌어야할지 모르겠다고? 문화 대통령으로 불리는 서태지도 날 때부터 마이크를 잡고 태어나지 않았고, 빌 게이츠도 처음부터 돈방석에 앉은 건 아니다. 성공했다고 평가받는 이들의 대다수는 현실과 스스로에 분노할 줄 알았고 그 분노를 다르게 이용할 줄 알았다. 주먹으로 벽을 때린다고 해서, 소중한 것들을 깨어 부순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시간에 맡겨버린다고 해서 분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화는 속에 담아두지 않고 밖으로 표출해야한다. 그래서 우리는 글을 쓰고, 대화를 나누고, 문화를 소비하며, 스스로를 돌이켜 볼 줄 알아야한다.
우리의 월급이 고작 십만 원 밖에 되질 않더라도, 우리가 십만 원짜리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십만 원을 번다고 해서 굶어죽지는 않았다. 잘 곳조차 없어 길바닥에 뒹굴었다 할지라도 우리는 얼어 죽지 않았다. 배운 것 없는 몸뚱이 뿐이라도 사지 멀쩡한 우리는 막노동판에 뛰어들거나 생산직에 몸담거나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다. 지금도 대학로에서는 한 달 이십 만원 남짓한 돈으로 꿈을 향해 나아가는 선배들이 있다. 꼭 엄마 친구 아들이 아니더라도 악착같이 현실과 실랑이를 벌여 꿈을 꾸는 청춘들이 있다. 손에 쥔 것이 없다고 부끄러워 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는 이십대다. 사회에 내던져진 제 앞가림도 못하는 힘없는 짐승일지는 몰라도, 청춘이라는 절대 시들지 않을 봄이 있다. 해보지 않은 일에 두려워 할 필요가 있을까. 좌절은 두려움 앞에 무릎 꿇었을 때 찾아오는 것이다. [어떠한 절망의 골짜기에도 바닥은 없다. 한없이 밑으로 떨어진다 할지라도 우리를 산산조각 낼 바닥은 없다는 것이다.]라는 어느 할배의 말처럼.
오스카 와일드는 우리는 모두 시궁창에 살지만 우리 중 몇몇은 별을 바라본다고 했다. 가슴에 빛나는 별을 담을 공간마저 남지 않은 이십대가 있을까. 나는 이십대다. 하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을 품고 살기에, 현실에 대한 경험하지 않은 두려움에 떨기에는 너무나 젊다. 내 삶을 증명해내기 위해 사유하고 분노하고 나아가야한다. 별을 따기 위해서는 하늘에 올라야한다. 누구도 인간이 달에 발 딛을 수 있으리라 믿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달에 닿았다. 누구도 별을 딸 수 없다 생각할지 몰라도, 모두는 알고 있다. 별을 따려는 움직임 만으로도 아름답게 빛날 수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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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1
15:17:14
병장 정병훈
하루에 한편씩 뽑아드는군요. 대단합니다.
이놈의 이십대의 성질 파악하기는 이제 좀 지겨운 감이 있습니다. 결국 답은 나오지 않고 개인적인 가치 속에서 계속 정진해야 되는게, 답답함도 있는것 같습니다. 키워드를 '이십대'에서 이젠 좀 바꿔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말이에요. 지겨워서. 풉
글은 읽지 않았지만, 시간내서 읽어 보겠습니다. 재밌겠죠. 위에 씨부린건 개소리. 2009-01-07
19:01:54
일병 송기화
으핫.
밑에건 번호가 갖고 싶었기에 보내지 않았지만 요건 <가지로>가야죠.
이런걸 읽고 타오르는거죠. 2009-01-07
19:29:34
병장 이동석
이성으로 비판하고, 의지로서 공감하겠습니다. (음?)
그렇다면 다음분께선 실천-에 대해 이야기하면 되는건가요? 2009-01-07
20:54:08
병장 이동석
저는 대체로 공감하나, 극복을 개인-의 몫으로 돌리며, 분노를 표출해야할 대상이나 방법론에 대해선 비판적입니다.
물론, 시대의 극복은 엄연히 개인의 몫이 중요하긴 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는 막노동을 아무리하고, 생산직을 하며 몇 탕을 뛰어봐야 절대로 개발경제시대처럼 야학을 나오고, 집장만을 하며 부모나 가족을 부양할수 없습니다. 더 정확히는 그 시대처럼 그런 기적이라도 바라며 벽돌을 나르거나 프레스를 찍기엔 지금은 너무나 절망적입니다. 일을 아무리 해도 빈곤은 해소되지 않는다- 그건 비관도 나약함도 아니고 엄연한 현실이니까요.
심정적으로 무준씨의 이 패기넘치는 글에 무한 지지를 보내고 싶지만, 그러기엔 우리가 상대해야할 벽이 너무 완고해서 말이죠.
그러나 전 무준씨의 마지막 말에서 다시 희망을 느낍니다. 별을 따려는 움직임만으로도 아름답게 빛날수 있습니다. 2009-01-07
21:22:21
상병 김준태
지금 이 순간에도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현실이라는 녀석은
너무도 단단하고 절대 깨어질 것 같을 뿐입니다. 얄궂은 두 손으로
때리고 긁어내고 할퀴어 보았자 그저 코방귀만 뀔 뿐이겠죠...
누군가 말합니다. 자신을 가져라 너희는 이십대니까.말하는 입술이 닳고
듣는 귀가 문드러질만큼 많이 들어도 도무지 자신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을 가져봅니다. 아직 별은 빛나고 있고 또 우린 꿈을 가지고 있고
우리 가슴 속에희망이 느껴지니까요 게다가 이십대잖아요... 2009-01-08
01:24:04
병장 양홍석
아아 무준씨의 이런글을 얼마나 읽고 싶었던지, 잠시 파견다녀왔습니다,
하지만 또 가야됩니다. 얼마나 걸릴지는 누구도 모르는군요 하아. 2009-01-08
06:59:52
병장 김민규
y=x^n의 삼, 사차함수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그냥 y=ax 정도의, 그래 a도 떼버리고 y=x라도, 노력한 만큼은 돌아온다는 믿음을 깨지 않아 줬으면 좋겠는데, 현실은 y=√x 군요. 아무리 일해도 해결되지 않는 빈곤의 굴레는 20대를 일치단결시켜 30대적 삶을 살도록 강요하고 있어요. 과거 유월의 선배들이 어느새 제도속에 안주해버린 자신의 30대를 보고 비관했다면, 지금은 그냥 애초부터 그런 상태이니-
시스템적인 문제라면 뭔가 맞서야 할 것인데, 마땅히 누구에게 정조준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냥 돌아가는 모든 상황들은 우리의 이런 인식마저도 음모론으로 만들죠. 쏟아야 할 것이 무어며 배워야 할 것이 무언지 잊혀진 시대에서 우리는 <마이크로소프트적 인간>이 되기를 갈망하는지도 모릅니다. 절대적 표준화, 전세계를 아우를 수 있는 유창한 외국어, 힘있는 기술력, 그리고 빌이 은퇴 직전까지 개발최고책임자로 있었듯이, 완전한 성실성까지.
그냥, 구글 할까요? 좀 빠져 보이고, 현지화에도 아직은 미진한 구석이 많고, 성실성보다는 천재적 독창성으로 승부하는. 그냥 자기 좋아하는 주제에 올인해서 걸어보면 안되나요? 쳇, 그들마저도 공룡으로 변해가고 있으니, 모델은 없는 건가요? 2009-01-08
11:22:41
상병 김용준
제 덧글은...제 독서후기로 남겼습니다.
가지로-! 2009-01-08
11:26:36
병장 문두환
방편이라면 뭘 못해-라는 말을 듣고 따끔-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네의 세상경험과 성숙도로 따져보았을 때 볼 수 있는 시야라는 것이 굉장히 제한됨에도 우리는 조금 멀리 떨어진 먼 거리의 목표를 보고 그것을 향해 내어있는 몇 개의 길만 찾을 수 있는 것 같아요.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는 생각은 아니지만, 정말 방편이라면 뭘 못할까요.
가끔은 그 방편을 찾는 것 마저도 공짜를 바라는 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어요. 무언가를 하고 싶고 또 하겠다고 찾아온 이들이 조금이라도 자신의 노력과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고 하면 곧바로 돌아서버리는 모습들을 보면서 같은 세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그것이 소위 말하는 요즘 애들'20대'의 특징이었던 건지 뭔지는 아직도 모호합니다만. 그것을 20대의 특징으로 규정짓자니 굉장히 일반화의 오류같고, 또 그렇지 않다고 하자니 뭐 저부터가 큰 노력 없이 무언가를 성취하고 싶다고 욕심내는 것을 보면 좀 헷갈리거든요.
여러번 클릭해서 보고 있는데,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이렇게 밖에 적히질 않는군요. 그러니 다음에 꼭! 보자니깐요. 저는 글보다는 이빨이 더 나은 것 같아서요. 켁. 2009-01-08
13:56:09
병장 양홍석
팔십-팔만원 세대, 누구보다 어려운 세대 따위의 시시껄렁한 말들은 이미 귀속에서 메아리 칠 만큼이나, 많이 들어왔던 말이죠, 맞아요. 근데 아직까진 그 추위를 느껴보진 않았어요. 이제 24살, 궁입대전에는 스물부터 스물둘까지, 그 나이때에 사회의 추위를 느끼기엔 아직 너무 솜털이 보송보송했었죠.
그 솜털카파안에서도 느껴본것이 있어요, 시급 2800원, 시급 3000원, 시급 3400원
다들 이렇죠, 고등학교까지 배운것들은 돈 버는데는 전혀 쓸모가 없었어요, 그것을 활용줄을 몰랐다고 해도 틀린것만은 아니예요, 학교는 지식을 가르쳐주었지만, 그것을 써먹는 방법은 하나도 알려주지 않았으니까요.
뜨거운 심장을 가진 젊은이들이 고작 해봐야 시급 3000원에서 허덕이고 있는걸 봤어요.
그들이 일하고 있는 곳은 10여년간 배워왓던 지식들을 전혀 쓰지 않는 것들 뿐이였어요.
능력이 있는데 그것을 써먹지 못하는 것- 그것뿐이라고 생각햇죠.
그 능력을, 그 지식을 써보고 싶었어요, 단지 수십만의 저글링이 아니라, 하나의 디파일러가 되고 싶었던거죠. 학원강사를 하기로 맘먹고, 그간 배웠던 것들을 총 정리하기 했어요.
그래서 학원강사가 되엇죠, 그 나이때에 시급 몇만원 이상을 받고 일했어요.
내가 무슨 말이 하고 싶은걸까요.
배운것을 써먹어라? 알바는 학원강사로 해라? 고기잡는 그물 만드는 법만 알려주고, 방법따윈 알려주지 않는 학교에 대해서? 팔십-팔만원세대에서 우리들의 대처법?
이런걸까요? 시시콜콜한 이야기, 어디서나 들을수 있는 이야기, 또 들어왔던 이야기.
맞아요, 그런거예요, 하락장에도 상승주는 있다는 진부하지만, 실존하는 그런 이야기가 하고 싶었어요, 단체에 속해있다고 그 단체의 능력을 내 능력인 마냥 생각하는 사람들, 혹은 그 반대인 사람들, 세대가 이래서 나 또한 이렇다고 비관하는 사람들, 그것을 핑계로 스스로에게 관대해지거나, 혹은 비관적이거나, 하지 말자는 거예요.
시대가 이렇다고 성공하는 사람이 없나요? 취직하는 사람이 없않아요, 아뇨 충분히 많다고 생각되요. 그 사람들이 그리 특별한건 아니잖아요. 혹시 우리중에 세대만을 비관하며 우울해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을까봐 이렇게 끄적이네요.. -이게 덧글인지.. 2009-01-08
15:00:18
병장 홍석기
분노를 뽑아 봅시다. 요가 파이어
가지로- 2009-02-03
08:4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