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 나들이 때 있었던 일입니다. 크리스마스에 가장 친한 친구 녀석들 두 명이 홍대쪽 클럽에서 공연을 한다더군요. 그 날 중요한 약속이 있어 비록 같이 가서 응원하고 같이 땀을 흘려주지는 못했지만 공연이 끝나고 뒷풀이가 한창일 자정 무렵에, 제 친구들과 함께 공연했던 멤버들 술자리에 눈치없이 합석을 했었더랍니다. 다행히 모두 좋은 분들이라 마음이 맞아서 그 날 새벽 다섯 시 가까이 서로 다양한 이야기를 하며 술잔을 기울였었죠. 그 중에, 눈에 띄는 한 분이 계셨습니다. 기타를 맡으셨던 80년생 형이 계셨는데 너무나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어요. 제 친구와는 어느 대학생 연합 동아리에서 만났다고 했습니다. 어느 순간엔가, 제 친구가 제게 해주었던 짧은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짧지만 가슴이 지잉- 했던 어떤 이야기가. 제 친구에게 귀엣말로 물어봤습니다.


靑春., 혹시 그 분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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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의 마지막 총회 때에, 한 고학번 선배가 취업준비 때문에 내년부터는 활동을 못할 것 같다는 요지의 짧은 작별인사를 교탁에서 한 다음에 후배들에게 백지 한 장을 주며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의 손으로 청춘. 두 글자를 백지에 적어 달라고. 




지나간 일을 떠올리던 도중에, 소주잔을 들며 그 형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거 알아요? 사람들이 쓴, 청춘. 두 글자를 보면 이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구나, 혹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구나. 하고 다 보여요.” 


아! 하고 저는, 가만히 오른쪽 검지손가락으로 허벅지에 청춘. 하고 써보았습니다. 한 번은 한글로, 한 번은 한문으로. 푸를 청에 봄 춘. 아주 천천히 말이지요. 갑자기 부끄러워졌습니다. 내 청춘은 얼마나 따뜻하지 못한가에 대하여, 그리고


내 청춘은 얼마나 푸르지 못한가에 대하여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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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월, 책마을과 처음으로 맺은 인연이 여기까지 왔습니다. 책 좀 읽고 산다고 자부하던 제게 이곳은 하나의 컬쳐쇼크였어요. 난무하는 담론들과 교환하는 독서 리스트의 수준은 끼어들 틈이 없었습니다. 그 때부터 였을겁니다. 하루에 한 권씩 읽어내려갔던 것이. 너무나 분해서, 나하고 비슷한 또래들이 이렇게 좋은 책을 읽고, 이토록 훌륭한 사유를 하고, 이렇게 멋진 글을 쓴다는 것이 너무나 억울하고 분해서. 끼니조차도 걸러가며 책을 읽었습니다. 비록 40여 일만에 신경성 위염이 도져서 병원에 입실하는 바람에 버닝하던 페이스는 잃고 말았지만, 병실에서도 세 권의 책을 읽을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하나 둘씩 독서후기를 남기고, 살아온 이야기를 덤덤하게 털어놓았던 것이 의외로 주민분들게 좋은 평을 받게 되어, 5월에는 필진이 되는 영광도 맛보았고, 8월에는 김동환 예비역 병장의 뒤를 이어 리장까지 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어찌나 기뻤던지요, 책마을을 위해서 무언가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 비록 리장 취임과 동시에 보급창 서버는 하얗게 날라가버렸지만서도.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이 울타리 안이라는 곳은 사유할만한 텍스트와 우리네 삶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것들에 대하여 담론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참 만나기 힘든 곳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군 생활 하면서 참으로 많은 것들을 얻어갑니다. 이 책마을이라는 곳에서. 비록 오랜 방공호 생활 속에서 책마을은 많은 이들에게 잊혀졌지만 그래도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따뜻한 격려의 말 한마디씩 던져주시는 몇몇 분들을 볼 때마다 저는 가슴이 벅찹니다. 유례없는 지적호황을 누렸던 2006년 전반기에 견주어 보면, 아직은 많이 모자라지요. 그래서 여러분들의 글 하나 하나가 소중한 때이기도 합니다. 타는 목마름으로, 글을 써주시기를 당부드립니다. ‘나는 여러분들과 이런 소통을 하고 싶었노라’고. 


위에서 언급했던 기타치셨던 형님이, 군대시절 이야기를 하는데 저는 적잖이 놀랐습니다. 인트라넷 동아리의 초창기 멤버셨던 게지요. 현재 안타깝게도 아직 자리를 정하지 못한 미완의 필름을 만든 몇 사람 중 한 분 이셨습니다. 제가 책마을 이야기를 해주니까 놀라더군요. 당시만 하더라도 미완의 필름, 책마을, 인다소울, 인다 큐알. 모두 게시판을 전전긍긍하며 작은 걸음을 하던 때였으니까. 요즘에 이르러서는 수십, 혹은 수백 명의 회원을 가진 대형 커뮤니티로 명맥을 이어져 온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니까 몹시나 행복해 하는 그 형님의 표정을 저는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제게 그러더라구요. 너무나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 요즘도 꾸준히 만난다고. 힘든 시기에 의지할 수 있었던 이들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런 듯 하다고. 그러니 저도 이곳에서 만난 인연 소중히 하라는. 그런 요지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이제 저는 나갑니다. 아직도 많이 두렵습니다. 2005년 새해의 어느 추운 겨울날에, 입영통지서를 들고 의정부로 향할 때만큼이나, 저는 여전히 두렵습니다. 그러나 헤쳐나가지 않으면 안되겠지요. 프란츠 카프카의 말처럼, 구원은 매 순간 자신을 헌신하는 데서만이 이루어질테니까. 내가 아닌 그 무엇도 푸르지 못한 나의 청춘을 그 처연한 이름만큼이나 푸르게 만들어 주지는 못할 테니까. 그저 살아갈 뿐입니다. 살아감으로써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내가 이곳에서 무엇을 얼마나 배웠는지를, 그리고 그 배움을 어떤 방식으로 실천할 것인가를. 영화 ‘시네마 천국’에서 알프레도가 토토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람은 각자 좇아야 할 별이 있다’ 라고. 깊이 새겨둔 말입니다. 요즘같은 시대에 자신이 좇아야 할 별을 좇는 다는 것, 그리고 그 신념을 지켜낸다는 것, 아마도 그것은 전쟁이나 다름없을 겁니다. 용기를 가르쳐준 여러분들 한 분 한 분께 고맙다는 말을 건넵니다. 저는 이제 저의 전장戰場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지난 2년보다도 어떤 의미에서는 더욱 치열한 삶의 전쟁터로. 



  모든 인트라넷 동아리들에 몸담고 계신 우리 장병 동지들, 그리고 중부전선 전방에서 2년동안 제 무개념과 꼬장을 묵묵히 받아준 우리 부대원들(몇몇은 이 글을 읽을테니)에게 인사올립니다. 지금 이 시간들이 비록 기형도의 시 구절처럼, ‘모포처럼 개어둔 몇 장 슬픔’에 불과할 지라도,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뒤에 그 때로 돌아가지 못해 가슴 아플 만큼 여러분 모두의 靑春이 앞으로는 훨씬 푸르고 따뜻하기를 바랍니다. 저 역시 저 바깥 전장에서 지금보다도 훨씬 靑春다워 질 수 있도록 노력할테니까. 제 뒤를 이은 리장 김현동군을 비롯하여 여러분들의 청춘앞에 약속하겠습니다. 


단결! 






ps. 옛날처럼 전역인사 당분간 노티스 시켜주는거죠? (눈치) 전역인사 질질 끌지 않으려고 했는데, 또 찌질찌질 거리면서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는 훈계조의 인사만 늘어놓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싱숭생숭해지나봐요. 죄송합니다. 이젠 정말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