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장] 철학적 신념과 동료 모으기
병장 이기범 2009-09-15 13:56:00, 조회: 2, 추천:0
철학적 신념과 동료 모으기 - 알랭 드 보통 '불안'을 읽고
내 대학생활은 그리 평범하지 않았던 것 같다. 뭐 내가 특별히 잘난놈이라던가 유별나다고 말하려는게 아니다. 내 의도였는지 아니면 타의였는지 어찌되었건 나는 어느새 스포츠권이라 불리우는 집단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 테두리안에서 2년이란 시간을 보냈다.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 일들은 사회 곳곳에서부터 발생된 문제들이었는데, 이런 각기 다른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각각의 사건에 대해 내가 느끼는 감정에는 공통된 것이 있었다. 상처. 너무나도 괴로웠던 상처들. 사실 상처란 단어를 쓰기가 좀 거북한데, 그것은 나 자신을 불쌍히 여기고 타인의 관심을 갈구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마치 책마을에 수도 없이 올라왔던 ‘사랑’타령에 관한 글들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지금은 그 감정에 대하여 면죄부를 주고 싶은데, 이는 이런 성향들이 지금 이야기 해볼 ‘불안’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며 내가 받았던 그 상처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너무나도 높은, 아무리 소리치고 몸을 들이대도 꿈쩍도 않던 현실의 벽. 난 그 사회의 거대한 위압감에 상처를 받았다. 그리고 또 한가지가 더 있는데, 바로 사람들의 무관심, 혹은 싸늘한 시선이다. 전자의 상처는 분노 등의 방법으로 표출되었지만, 후자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던 것 같다. 그저 끊임없이 넘어질 뿐이었다. 나에게 싸늘한 시선을 날려주었던 그들을 미워하고 증오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었다. 그런 마음이 생길지언정, 그들을 비난할 수 없었다. 나는 그들이 아니기에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으므로, 우리의 소통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이것이야말로 진정 깊은 상처 였다. 그렇다면 내가 그들을 비난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들을 원하고 있었다. 그들의 관심과 도움을 원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나와 함께 하기를 기대했었다. 그것은 바로 알랭 드 보통이 말하는 사랑에 대한 욕망이었다. 나는 그 사랑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불안에 떨어야 했던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불안에 떠는 이유에 대해 명쾌하게 이야기 한다. 우리가 세상에서 차지하는 자리에 대해 불안해 하는 이유는 그 자리가 우리가 사랑 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더 나아가 나 자신에 대한 실망 혹은 만족으로 이어진다. 사랑을 받을 수 없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신뢰할 수 없다고 보통은 말한다. 실로 통쾌한 말이 아닐 수 없다. 가슴속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그 말할 수 없는 무언가를 대신 설명해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으로, 보통은 다섯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가 그것이다. 각각의 방법에 대해 보통은 쉽고 부드럽게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데, 특히 나는 철학의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어떤 전율이 일었기 때문이다. 위에서 내가 느낀 불안을 그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 다른 사람들의 인정은 두 가지 이유에서 우리에게 중요하다. 물질적인 면에서 보자면, 공동체로부터 무시당할 경우 신체적으로 불편하고 위험할 수 있다. 심리적인 면에서 보자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존중하지 않을 경우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유지할 수 없다....]
그렇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그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해 상상하게 되고, 그 생각이 구체적으로 그려지자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린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주기를 바랬는데, 그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보통은 그런 경우, 상처를 받는 대신 먼저 그들의 생각이나 행동이 올바른 것인지 검토해 보라고 말한다. 근거 없는 싸늘한 시선, 비난 등에 상처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 사람들의 인정을 바라며 자학하는 습관을 버리고 그들의 의견이 타당한지 자문해 보라고 말한다. 그러다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릇된 관점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한다. 이 부분에서 쇼펜하우어의 말을 인용한다.
[...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피상적이고 하찮다는 것. 그들의 시야가 편협하다는 것. 그들의 감정이 지질하다는 것. 그들의 의견이 빙퉁그러졌다는 것. 그들의 잘못이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면 점차 그들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관심을 갖지 않게된다..... 그러다 보면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그들을 필요 이상으로 존중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이렇게 통찰력 있는 눈을 갖기 위해선 확고한 철학적 자기 신념이 필요하다. 그런 시야를 갖기 위해 끊임없는 사색과 철학적 탐구가 이어져야 할 것이다. 나에게도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 분명 찾아 올 것이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더 큰 것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가령, 책에는 ‘그러나 이 경우 불편함을 감수하여야 하는데 그것은 주변에 친구가 없어진다는 점이다.’ 라고 고백한다. 물론 이 말 자체로 사람에 대한 욕망이 부질없는 것이라고 판단해서는 안되겠다. 단지 그 사람들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을 뿐. 그런데, 만약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의 발견과 더불어 서로에 대한 유대감, 사랑의 욕망까지 챙길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사람들이 늘어나고 점점 더 큰 형태로 발전해 나가면 언젠가는우리가 원하는 무언가를 쟁취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질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모두가 느끼고 있는 개인의 불안을 서로의 발견으로, 그리고 유대감으로, 뭉쳐서 그것을 자연스레 사회의 불안으로 유도해 낼 수 있다면-
한 가지 상상을 해보자.
사회가 불안하다. 불안은 해소해야 제맛이다. 어떻게 해소해야 할까. 쉬운것부터 생각해보자. 우선 우리 학생들이 가장 피부로 느끼는 문제. 그래 대학 등록금 문제가 있을 것이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등록금은 대부분의 대학생들의 경제적 불안을 야기 한다. 부모님께 타서 해결하고는 있지만 죄송한 마음이 이만저만 아니다. 본인이 벌어서 내려고 하면 이것 또한 앞이 막막하다. 여기서 불안한 마음이 생긴다. 사회적 기준, 그리고 시선에 내가 녹아들지 못하는 것 같은 기분. 그리하여 내 위치가 낮아져 나를 아무도 사랑해주지 않을 것 같은 기분. 그럼 이제 해결해보자. 어떻게? 나와 같은 불안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을 찾는 거다. 많은 방법이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단적인 예로 일단 학생들의 대표기구라고 할 수 있는 학생회의 공약을 잘 살펴보자. 그리고 등록금 인하 내지 동결의 공약이 있는 선본에 투표하는 거다. 자, 이제 그 선본이 당선이 되었다. 그럼 이제 등록금은 내려가느냐? 아니다. 공약은 실천되기 전까지는 그저 공약空約일 뿐이다. 자 우리 학생회 사람들이 학기가 시작하기 전부터 등책위에서 학교측과 많은 논의를 했지만, 결국 동결을 실현하지는 못했다.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하느냐? 학생들의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 서명을 받고 캠페인을 벌이자. 총회를 열고 본관을 점거하자. 이게 쌍팔년도 방식이라고? 그렇다. 확실히 낡은 방법이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어떤 방식으로든지 학생들의 의견을 모아 학교측을 설득할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다. 더 이상 쌍팔년도 방식이 통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방법을 우리 모두 머리를 싸매서 토론해보도록 하자. 자, 이런 일련의 과정속에서 우리는 우리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서로 각자가 짊어진 불안을 보면서 무언가 알 수 없는 안도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나와 같은 사람이 또 있구나. 동질감, 유대감이라고나 할까.
이것은 궁극적으로 생각해보면 나와 같은 지위를 원하고 욕망을 느끼는 사람들에 대한 연대이다. 우리는 우리와 비슷한 논리를 가진 사람들을 찾아야 한다.(혹은 만들어 내야 한다) 해서 그 논리를 기초 삼아 우리에 대한 자존감을 다시 되찾고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기쁨이 존재 할 수 있을까. 그 길이 분명 쉽지 않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좌절하지 말자. 위에서도 말했듯이 우선은 나 자신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자. 나의 생각을 비난하는 사람들에 대해 냉정하게 판단을 내리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자. 하여 그들의 의견이 옳지 않다면 과감히 귀를 닫아버리고 나와 같은 사람을 찾는데 힘을 쏟자. 그 편이 더 나으니깐. 사실 이것은 매우 오만한 생각처럼 느껴질 수 도 있다. 허나 다른 사람들의 태도를 생각해보면, 여태까지 내가 그들을 너무 ‘과하게’ 존중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우리를 비난하는 정도 만큼 우리의 양심에도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