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고마비 天高馬肥 
 병장 김광철 04-03 14:09 | HIT : 141 



 천고마비 天高馬肥

 어느새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무섭도록 새파랬다. 그렇다. 그것은 확실히 '무서웠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시퍼렇게 날선 칼이 수직으로 떨어질 것 같았다. 그 서늘함에 눈이 시렸다. 부산히 날아다니던 잠자리들은 어느새 쌍쌍이 짝을 지어 날고 있다. 꼬리와 꼬리를 기묘하게 맞물린 놈들은 힘겹게 4쌍의 날개를 놀렸다. 시린 눈을 깜벅이며 잔뜩 움츠려있던 그는 잠자리들의 결혼비행을 보며 다소 안도한다. 

' 그렇지 역시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지. 하늘이 높은 이유는 말을 살찌우기 위해서야.'

 사자성어에는 본래 없는 인과관계를 억지로 끼워 넣으며, 그는 잠자리들의 그 기묘한 비행에 동참하려한다. 그가 힘겹게 연약한 날개로 삭막한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려는 순간, 무엇인가 날카롭게 번쩍이며 낙하하는 것이 보인다. 아니, 낙하라기보다는 불시착하는 비행기, 그것보다는 추락하는 투신자살자에 가깝다. 어떤 기대도 가지지 않고 다소곳이 추락한 그것은 죽은 잠자리의 시체다. 6개의 다리를 가슴에 모으고 날개는 V자로 접은 채 널브러져 있다. 잠자리에게는 눈꺼풀이 없기에 그 큰 겹눈을 감겨줄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안타깝게 여긴다. 

 그때, 갑자기 여기저기서 마치 희미한 가랑비처럼 수명다한 잠자리들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추락하는 잠자리들의 곱게 접힌 날개는 마지막 반짝임으로 하늘에 빗금을 그어 내렸다. 어느 화가가 파란하늘을 그리다가 마음에 들지 않아 물감나이프로 갠버스를 북북 그어버린것처럼, 잠자리들의 은빛날개는 사선으로 푸른 창공에 날카로운 흠집을 내고 있었다. 

 다소곳이 낙하하는 그 조그마한 시체들을 보며 그는 <메그놀리아>의 한 장면을, 하늘 가득히 소나기처럼 쏟아지던 그 수많은 개구리들을 떠올린다. 개구리들이 요란스레 소리를 내며 떨어져 창문을 부수고 도로에 깔려 도시가 온통 피투성이가 된 놈들의 시체로 뒤덮이는 장면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그에겐 개구리가 소나기처럼 떨어져 배가 터지고 피바다를 이룬 그 장면보다도, 仄鳧?풍경이 더욱 무섭고 기괴하게 느껴졌다. '톡. 톡' 하며 가랑비처럼 가냘프게 떨어지는 잠자리의 작고 메마른 소리는 이상스럽게도 시끄럽게 아스팔트를 때리며 떨어지던 개구리들보다 더욱 그로테스크하게 들렸다. 배가 터져 창자가 나오고 피투성이가 된 개구리보다, 어디 몸 한구석 상한 곳 없이 곱게 날개를 V자로 꺽고 다소곳이 6개의 다리를 모은 채, 눈꺼풀 없는 커다란 두 눈을 부릅뜬 순교자의 모습으로 죽은 메마른 잠자리의 시체가 훨씬 끔찍했다. 

' 왜 그럴까?'

 그는 곰곰히 생각해보다가 끝내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러 적당히 타협한다. 시체가 떨어지기엔 너무나 하늘이 푸르고 맑았다고, 시체라고 하기엔 너무나 곱고 다소곳했다고, 역시 가을은 하늘에서 시체갸 떨어지기엔 적당한 계절이 아니라고.

' 그래서 메그놀리아에서는 배경이 여름이었던거군'

 그는 감독의 혜안에 감탄하는 척하며 남이 볼 새라 재빨리 떨어진 잠자리들을 발로 비벼버린다.

' 하늘이 높기 때문에 말이 살찔 수 있는거야. 풍성한 가을에 시체라니 말도 안되지.'

 산산히 조각난 잠자리의 잔해를 보며 그는 애써 자위한다. 사자성어에 억지로 끼워넣은 인과관계를 그는 굳건히 믿고 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의 찜찜함은 어쩐지 지울 수 없었다. 

 멋 훗날, 그리고 어느 맑은 가을날, 수명다한 잠자리가 파란 하늘에 은빛 흠집을 내는 무렵, 고개를 젖히고 유심히 관찰한다면 그는 높고 맑은 하늘이 감추고 있는 싸늘한 칼날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제서야 비로서 옛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리라. 하늘이 높음에도 말은 살찌는 것이라고. 가을이 풍요와 수확의 게절만은 아니라고. 그래서 가을 하늘에 떨어지는 잠자리는 서글프고 끔찍한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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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작년 늦가을, 이등병 시절에 쓴 글이로군요.
 그 시절 가을은 왜 그리 서글프고 쓸쓸했는지.
 그리고 그해 겨울은 왜 그렇게 춥고 길었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