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서명 : 번역은 반역인가
· 지은이 : 박상익
· 출판사 : 푸른역사
· 출판년도 : 
· 감상평 : 

== 일러두기 == 
  
 * 글의 매끄러운 흐름을 위해 부득불 낮춤말을 사용합니다. 
 * 본문에 있는 김용옥의 육두문자는 읽는 이로 하여금 거부감을 느끼게 할 수도 있으나 이 글의 주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부분이므로, 너그러이 넘어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훌륭한 문장을 졸렬한 문장으로 바꾸지 않기 위해 '제 시각'이라는 양념을 최대한 뺐습니다. 독서 감상문에도 다양한 형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또한 너그러이 넘어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서문 == 
  
 필자가 번역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사회 비평가로서의 경력을 쌓기로 마음 먹은 2005년 경의 일이다. 나름대로 사회 보는 눈이 쓸만하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전업 사회 비평가의 생계 능력에 대해선 회의적이었다. 그래서 부업으로 할 수 있는 걸 찾아 봤고, 그 결과 번역이란 게 눈에 들어왔다. 번역은 외국어 공부에도 도움이 되고, 글쓰기 능력까지 향상시키니 사회 비평가의 부업으로서 정말 최적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글을 쓰는 지금, 필자는 씁쓸한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다. 대한민국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또 하나 발견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번역계는 지금 그 중요성에 비하여 형편없는 대우를 받고 있다. 어느 경제학자가 번역가의 1년 수입이 자신의 3시간 강의료보다 적다고 비웃었다지 않는가. 인문학의 위기가 괜히 찾아 온 것이 아닌 것이다. 
  
 하여, 이에 대한 글을 쓰지 않을 수가 없다. 사실 '쓴다'라고 했지만, <<번역은 반역인가>>라는 책에서 '대한민국 사회의 척박한 번역 환경'이란 주제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부분만 모아 윤문했을 뿐이다. 이런 글을 자신의 글인 양 행세하는 나 자신도 부끄럽기 짝이 없다. 혹여, 이 글에 부족한 점이 있다면 그건 필자의 미숙한 편집 솜씨 때문이지, 결코 이 주제가 하잘 것 없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주시면 감사하겠다. 좀 더 다양한 자료를 탐독한 후에 더 성숙된 글을 쓸 것임을 약속 드리며, 본 글을 시작한다. 
  
  
 == 본문 == 
  
 한국 사회의 번역 문화는 척박하기 그지없다. 예나 지금이나 오역과 비문(非文)으로 가득한 번역서들은 독자들에게 좌절과 환멸을 안겨주고 있으며, 동서양의 주요 고전들 중 상당수는 아예 번역조차 안 되어 있다. 유럽과 미국의 대학에서 행해지고 있는 동양학 연구가 '번역'을 그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것과는 달리, 기이하게도(!) 우리 대학의 서양학 연구는 번역을 연구 업적으로 인정조차 하지 않고 있으며, 그 결과 주요 학술 고전에 대한 연구 번역은 일부 학자들의 여가 선용 차원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는 형편이다. 
  
 번역자의 대우에 대해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보기로 한다. 요즘에는 해외 서적을 번역할 때 대부분 저작권료를 줘야 한다. 책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보통 정가의 6% 수준이다. 번역자는 대개 정가의 5~6%를 인세로 가져간다. 예를 들어, 정가 2만 원짜리 책을 한 권 번역했는데, 초판을 2천 부 찍고 인세가 6%라면 번역자에게는 240만 원이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책은 초판 1쇄로 그 생명을 다한다. 4인 가족 기준, '한국에서 보편적이고 정상적인 문화 생활을 하며 살기 위한 비용'이 월 305만 7,972원이라고 하니, 매달 한 권씩 번역서를 낸다고 해도(!) 표준 생계비에 턱없이 모자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김용옥이 전 대우그룹 회장 김우중에게 토로한 글쟁이의 신세 타령은 피부에 와 닿는 점이 있다. 번역자의 신세도 이보다 나을 것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육두문자를 곁들인 김용옥 특유의 걸쭉한 입담을 들어보기로 한다. 
  
 "저는 올해(1990년) 일곱 권의 책을 출간했습니다. 이렇게 무리를 한 것은 제가 현재 살고 있는 공간이 너무 비좁아 80평짜리 집을 하나 봉원동에 짓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도박벽 때문에 도박판에 돈을 대느라고 그렇게 많은 소설을 썼습니다. 저는 올해 건축에 대느라고 죽으라고 썼습니다. 
  
 그런데 제 주변의 아무것도 모르는 교수 자식들이 절 만나면 뭐라 하시는지 아십니까? '야, 너 교수 때려치우더니 돈 벌었더구나. 책 내기만 하면 얼마나 돈이 쏟아지겠니?' (그러나) 제가 내는 책들은 인문과학 서적이며 이문열 씨의 소설과는 그 자릿수가 다릅니다. 인문과학 서적의 베스트셀러라는 것은 히트 쳐야 만 부면 주저앉습니다. 참 실망스럽지요. 사천 원짜리 책 만 부면 그 10% 인세가 사백만 원입니다. 
  
 이렇게 따지면 일 년에 다섯 권의 베스트셀러를 내도 제 수익은 이천만 원, 팽팽 놀아 처먹는 교수 새끼들 일 년 월급도 되질 않습니다. 제 어깨는 떨어져 나갑니다. 이 주길노므새끼들이 날보고 베스트셀러 작가 부자라는 겁니다. 이런 개새끼들 아가리 놀리는 것을 쳐다보면 울화통이 치밀어서, 야 이 개새끼들아, 너희들이 받아 처먹고 있는 월급이 얼마나 엄청난 액수인가를 좀 알아라 하고 외치고 싶고, 정말 이 시대의 지성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반성하게 됩니다. 이 썩어빠진 죽일 놈의 새끼들! 내가 베스트셀러 작가냐? 너희들 처먹는 돈 가치의 천 분의 일만큼이라도 이 사회를 위해 일했나 생각해봐라! 죄송합니다. 좀 흥분했습니다. 도대체 너무도 모릅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너무도 모릅니다. 남이 얼마나 정직하게 사는지 도무지 너무도 모릅니다." 
  
 김용옥의 지적처럼 세상에 글 값처럼 싼 것도 드물 것이다. 한때 고려대학교에서 교수 생활을 했던 김용옥이니만큼, 교수들이 받는 경제적 대우와 전업 글쟁이들이 받는 인세 수입의 엄청난 격차가 누구보다도 피부에 와 닿았을 것이다. 
  
 이런 사정을 고려한다면, 아직 대학에 자리 잡지 못한 박사급 연구자들에게 생계 수단을 겸하여 번역 작업을 해볼 것을 권유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열악하기 그지 없는 시간 강사 수입도 번역료에 비하면 훨씬(!) 나은 수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막상 교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여건 속에서 번역을 거들떠보지 않는 것도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한국학술진흥재단에서 과제로 선정되면 원고지 150매 내외의 논문 한 편으로도 많게는 2천만 원까지도 연구비를 받을 수 있는데, 1년 내내 매달려야 겨우 한 권 낼까말까 하는 번역 일에 누군들 관심을 기울이겠는가. 게다가 대부분의 국내 대학에서 번역은 연구 실적으로 인정 받지도 못하는 것이 우리의 딱한 현실이다. 번역에 투입하는 시간과 노력으로 차라리 논문을 쓰는 것이 훨씬 큰 보상을 받는 구조인 것이다. 
  
 이런 현실을 타개하려면 조직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번역 사업은 막연히 시장 논리에만 맡겨서는 안 된다. 19세기 말 일본의 메이지 정부는 번역국(飜譯局)을 설치하여 국가 주도하에 수천, 수만 종의 서양 학술서를 번역했고, 그것은 일본 근대화의 견인차가 되었다. 고대 중국의 불교 수용 역시 대대적인 번역 사업과 함께 시작되었으며, 10세기 이슬람 문명의 황금기 또한 그리스 고전을 아랍어로 번역하는 폭 넓은 지원에 힘입은 바 있다. 우리가 널리 알고 있는 중세 서유럽의 '12세기 르네상스' 역시 광범위한 번역 사업이 기폭제가 되어 꽃을 활짝 피운 사례다. 즉, 이들의 공통점은 정부 또는 공적 기구의 전폭적 후원을 받아 번역 사업을 진행했다는 데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번역 사업은 시장 논리에만 맡겨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나라에서 진행되고 있는 정부 차원의 번역 지원은 1999년부터 본격 시행되기 시작한 한국학술진흥재단의 '동서양명저번역 지원사업'이 전부다. 2002, 2003, 2004년에는 예산이 15억 원씩 책정되다가 2005년에는 2억이 늘어 17억 원으로 책정되었다. 4천 5백만 국민을 위한 지적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투입되는 정부 1년 예산이 서울 강남의 아파트 한 채 값이다. 그나마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언 발에 오줌누기'란 비판을 면하긴 어렵다. 
  
 그러나 정부 탓만 할 일도 아니다. 무릇 국민은 그 수준에 걸맞은 정부를 갖기 마련이다. 외면당하는 인문학과 무너져 내리고 있는 우리의 독서 문화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번역을 통해 축적한 텍스트의 양은 경쟁국들에 비해 상대적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날로그 시대가 가고 디지털 시대가 밀려오면서,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인문학 전통은 시들어가고 젊은 층은 독서를 점점 멀리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디지털화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이며, 독서량 저하 추세 또한 세계적인 현상이다." 그야말로 무지에서 비롯된 주장이긴 하지만, (백번 양보해서) 우리는 그런 주장을 할 처지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역사를 잠시 살펴보자. 
  
 18세기 유럽에서는 각종 출판물이 어찌나 범람했는지, '교양의 위기'가 식자층의 두려움을 일으킬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와는 정반대로, 독서량이 너무 적어서가 아니라 '독서 과잉'으로 인한 위기였다. 18세기에는 독서량 증가 현상을 두고 논쟁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당시 사회 지도층은 독서가 너무 지나치게 보편화되는 것을 두려워 했다. 특히 하층 계급의 독서량 증가가 가져올 위험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다. 예컨대 자유주의의 비조(鼻祖)로 알려진 존 로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을 찬성하지 않았다. 자유주의 정치사상가 로크의 인식이 이 정도였으니 다른 식자층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들 대부분은 무지를 자비로운 신이 하층 계급의 비참함을 덜어주기 위해 내려주신 아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우려에도 불구하고 독서 풍조의 확산은 좀처럼 멈출 줄 몰랐다. 
  
 이런 근대 서유럽의 역사적 경험은 우리와는 아주 다르다. 18세기 말에서 20세기 말까지 자국어에 의한 활자 문화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서유럽과는 달리, 우리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벗어 던진 20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본격적인 모국어 출판 문화가 시작되었다. 지각생도 이런 지각생이 없다. 서유럽인들이 지금 당장은 활자 문화를 멀리할지도 모르나, 활자를 매개로 한 정신 문화로 되돌아오고자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돌아올 수 있다. 그들의 계좌는 넉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겨우 텍스트 축적의 필요성에 대한 문제 제기를 시작하고 있고, 급격한 환경 변화로 말미암아 그나마 간신히 돋아나던 싹마저 시들어가고 있는 형편이다. 텍스트의 황금기를 갖지 못한 우리에게는 '르네상스(부활, 재생)'란 말도 가당치 않다. 우리에게는 새 역사를 '창조'하는 일만 남아 있는 것이다. 
  
 현 단계에서 우리의 희망은, 자유롭고 독립적인 사고를 할 줄 아는 젊은 학자들의 노력 이외에는 달리 없어 보인다. 여건이 허락하건 않건, 때가 오건 오지 않건, 해야 할 일이라면 누군가는 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노력은 '출판 운동'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이렇게 출판된 양질의 텍스트 하나하나는 우리 사회의 지적 인프라를 형성하는 소중한 벽돌이 될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김용옥의 말을 들어보기로 한다. 
  
 "… 필자는 우리나라 동양 학계의 발전을 위하여 불가불 하나의 구체적 제안을 하지 않을 수 없는데, 각 대학의 동양학 부문에서 나오는 석박사 학위 논문을 가급적 번역 위주로 회전시켜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언뜻 생각하기엔 학위 논문이 어떻게 번역이 될 수 있느냐고 지금까지의 통념으로 저항감을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일본을 실례로 들지 않더라도, 우리나라 교육 체제가 모델로 생각해 온 유럽과 미국의 여러 대학들에서는 지극히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사실이다. 이것은 특히 논문의 대상이 번역이 부재하는 고전일 경우에는 거의 100%에 가까운 기정사실이다. 
  
 우리나라에 지금 동양학도의 수가 급증하고 있다. 그리고 각 대학에서 동양학 관계 논문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많은 인재들이 창조적인 청춘의 중요한 시기를 논문 쓰는 데 바치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들의 귀중한 노력이 연결점을 가지고 계속 축적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새롭게 원점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다. 즉, 대부분의 논문이 자기 혼자 읽고 마는 논문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낭비를 좀 더 창조적으로 조직화해야 하지 않을까? 
  
 … '관한 논문'을 쓰는 일은 그것에 대한 철저한 지식이 없더라도 가능하다. 해석이 안 되는 부분은 슬쩍 넘어갈 수도 있고, 또 책을 다 읽지 않더라도 동초서초(東抄西抄)하여 적당히 일관된 논리의 구색만 갖추면 훌륭한 논문이 될 수도 있다. 허나 번역의 경우는 전혀 이야기가 다르다. 그 작품의 문자 그대로 '완전한' 이해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모르는 부분은 슬쩍 넘어갈 수도 없고 또 전체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부분의 철저한 해석조차도 불가능하다. 그리고 모든 인용 출전에 대한 완전한 조사를 강요 당한다. 그야말로 에누리 없이 그 번역자의 스칼라십이 완전히 노출된다."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중에서… 
  
  
 == 결문 ==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거인 안타이오스는 대지의 여신 테라의 아들이다. 그는 그의 발이 어머니인 대지에 닿아 있는 한 문자 그대로 천하무적이었다. 헤라클레스가 그와 대결하게 되었을 때 헤라클레스는 꾀를 내어 안타이오스를 번쩍 들어 공중에서 목을 졸라 죽여버렸다. 발이 땅에서 떨어진 안타이오스는 이미 썩은 통나무 같이 무력한 존재였다. 안타이오스로 비유하자면 서양의 동양학 연구는 자신의 대지에 발을 디딘 셈이고, 우리의 외국학 연구는 발이 땅에서 들린 셈이다. 21세기는 지식정보사회라고 말은 요란하지만 우리 모국어의 컨텐츠는 초라하기 그지 없다. 더욱 큰 문제는 이를 개선할 의지마저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2005년 4월 12일 오후 서울 플라자호텔 별관에서 개최된 'LG경제연구원' 창립 19주년 세미나에는 서울대 명예교수 송병락과 재경부 차관보 박병원, 그리고 베인&컴퍼니 한국지사 대표 이성용이 패널로 초청됐다. 이날 이성용은 대담한 주장을 펼쳤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MBA를 거쳤다는 사회자의 소개를 받은 그는 '한국에서 서비스 산업이 잘 육성되지 않는 것은 언어 문제 때문'이라고 진단하면서 영어공용화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만약 공용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한국의 서비스 산업은 '국제 시장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1백 년을 내다본다면 한국어는 경쟁력이 없다."고 '깜짝 놀랄 만한' 주장을 하기도 했다. 
  
 이성용의 주장을 '깜짝 놀랄 만한' 주장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의 주장에 반감을 느끼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지적이 정확하게 우리의 미래를 꿰뚫어보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섬뜩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특단의 조치 없이 현재의 상황이 지속된다면 1백 년 후의 한국어는 이성용의 주장대로 십중팔구 경쟁력을 잃고 말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풍토가 척박하고 조건이 나쁠지라도 절망은 금물이다. 덴마크의 한 철학자가 말했듯이, 그것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기 때문이다. '일을 하려 해도 여건이 허락치 않아서'라고 말하는 것은 핑계이다. 또 '때가 오면'이라고 말하는 것도 자기 임무를 도피하는 수작일 뿐이다. 낭중지추(囊中之錐)란 말이 있다. 능력과 재능 있는 자는 언젠가는 인정 받을 날이 오고야 만다. 번역가가 그 하는 일의 중요성에 비해 터무니없이 낮은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엄연한 현실이다. 아니, 번역 그 자체가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고 있다. 그러나 비관할 일만도 아니다. 한국 사회가 멸망하기로 작정을 하지 않은 이상 번역과 번역가에 대한 대우가 현 수준에서 머물 수는 없다. 한국은 망하지 않는다. 끝까지 정도(正道)를 걸어라. 합당한 대우를 받는 날이 올 것이다. 
  
  
 == 참고문헌 == 
  
 # 박상익 지음. 번역은 반역인가. 푸른역사. 2006. P.9-10, 148-159, 203-206, 220, 223-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