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다는 것에 대하여
병장 이승현 03-07 13:32 | HIT : 268
오래전 어릴 적에 외국에서 살던 고모가 보내주신 퍼즐을 맞추던 기억을 떠올려 본다.
수백 가지 낱개로 된 퍼즐들을 밑그림을 보며 하나하나 인내심과 기대를 갖고 끼워 맞추던 그때, 나는 천천히 모습을 갖추어 가는 이국적인 산과 성냥갑 같은 집들, 호수인지 강인지 지금은 어렴풋한 퍼즐판 속의 아름다운 풍경을 막연히 스위스의 어딘가가 아닐까 하고 상상했었다. 그러나 나는 그 퍼즐을 결국 완성하지 못했다. 잃어버린 퍼즐 조각이 몇 개 있었던 것이다.
휴가를 나가 교보문고 같은 큰 서점에 들릴 때면 나는 흡사 옛날 알렉산드리아의 광대한 도서관에 들어선 순례자가 된 듯한 망연한 기분에 젖곤 한다. 이 수많은 책들 중에서 내가 집어들 하나의 책은 무엇일까. 우연히 손에 닿은 이 책, 우연히 눈길이 머물게 된 구절들. 천천히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에 귀기울이며 생각해 본다. 얼핏 우연을 가장한 몇 가지 선택과 만남의 배후에 내가 알지 못하는 오래된 계획, 어떤 운명을 주관하는 누군가의 섭리가 있는 것은 아닐까. "마침내" 책장을 넘기던 손을 멈추고 예기치 않게 마주치게 된 한 구절을 거듭해서 바라본다.
" 움직임 속의 움직임"
나는 내 곁을 스치며 지나가는 나처럼 책을 찾아온 수많은 사람들의 움직임 속에서 동굴 속 호수 아래로 가라 앉는 노틸러스호와 네모선장의 최후가 기록된 <신비의 섬> 마지막 권을 다시 제자리에 꽂아 넣는다. 나는 네모 선장의 유언과 같은 그 구절을 아마 죽을 때까지 기억하게 될 것이다. 비록 그것이 우연한 계기일지라도.
지난 몇 년 동안 독서에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여 오면서 최근에 이르러 한 가지 느끼는 바가 있다. 처음 독서를 시작할 때, 서로 아무 연관도 없고 시대도, 주제도 너무나 동떨어진 책들을 손에 닿는 대로 집어삼키며 스스로 분열과 혼란을 거듭하던 그때의 파편과 같던 독서의 기억이 지금에 와서는 몇 가지 주제들을 중심으로 모여 들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조각을 맞추듯, 퍼즐처럼.
나는 상상해 본다. 평생에 걸쳐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그 수많은 낱개의 책들이 맞물리고 어울려 하나의 풍경, 하나의 주제를 만들어 내지 않을까. 내가 지금껏 읽어온 책들과 앞으로 읽게될 책들이 어떤 하나의 책으로 모두 수렴되어 내겐 결국 그 하나의 책만 남게 되지 않을까.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은 단테의 신곡을 늘 지니고 다니며 사색의 단초로 삼는다. 수없는 책들과의 편력 끝에 그의 손에 남은 것은 신곡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마지막 퍼즐 조각은 바로 자신이 쓰게 된 <그리스인 조르바>인 셈이다. 그의 영혼의 수기는 그리스인 조르바와의 만남과 헤어짐에 이르러 완성되므로. 그러니 이제 막 내 영혼의 수기 첫머리를 쓰기 시작한 내가 여행 중에 늘 몸에 지닐 책 한 권을 발견하려면 얼마나 더 많은 책들 사이를 여행해야 할까. 마지막 조각, 마지막 책은 아직 요원한 이야기일 뿐이며, 길고 먼 지난한 투쟁의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분명 하나의 조각,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확신을 얻은 것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이 우리의 정신, 명확히 말해 우리의 의식성의 주관하에 이루어진다고 한다면, 또 융이 말하듯 "보다 높은 의식성"을 목적으로 하여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경험을 대신하여 우리에게 지혜를 더한다면, 인생이란 제한된 시간 속에서 최대한 많은 양서를 읽는 것은 더할 바 없이 좋은 일이다. 동시에 그에 더불어 책을 많이 읽은 것만큼이나 그것이 우연이든 선택이든 내가 만나게 된 책들을 서로 정교하게 맞추고 이어붙여 하나의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어 가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보다 높은 의식성이란 그림이 가진 색의 세밀함과 표현의 독창성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 아닐까.
오래전 내가 잃어버렸던, 그리고 결국 찾지 못했던 퍼즐 조각을 다시 찾는 마음으로 책을 하나씩 읽어 나간다. 나의 새로운 퍼즐 그림은 또다시 미완성으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가 알겠는가? 나는 나의 마지막 조각을 내 손으로 쓰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책도 그저 하나의 표상, 하나의 방편, 또 인생 그 자체가 아닌가. 언젠가 표시해두었던 보르헤스의 시는 이 글의 마지막을 위해 준비해 두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마침내, 내 인생의
숨겨진 열쇠를 발견하였네.
프란시스코 데 라쁘리다의 운명,
빠져 있었던 문자,
애초에 신이 인지한 완벽한 형상을,
오늘밤이라는 거울에서
의심할 바 없는 영원한 내 얼굴에 도달하네.
원이 완성될 것이고,
나도 그렇게 되기를 고대하지.
< 보르헤스 - 추측의 시 중에서>
상병 진규언
서로 아무연관 없는 책들에 이리치이고 저리 치이며, 분열과 혼란을 겪고 있는게.. 지금의 제 모습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쭈욱 거치다보면, 책을 고르는 눈도 높아질테고.. 그래서 그 양서들을 섭취한다면, 나중에.. 언젠간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겠죠. 라는 희망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토록, 깔끔한 언어로 정리해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자신의 책 1권을 지어야 한다. 많이 와닿네요.. 03-07
병장 김준성
인생이라는 긴 여정의 끝에서, 아쉬움보다는 퍼즐을 완성했을 때의 느낌을 가지고 싶습니다.
책이라는 것을 통해 완성될 수도 있겠고, 다른 것을 통해서 완성될 수도 있겠죠.
지금의 이 허무함 또는 불안감은 아직 채워지지 않은 퍼즐에서 오는 것이겠죠? 03-07
병장 배진호
전 때로 그런 상상을 합니다..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는 나.. 그것이 원래 나의 책이 아닐까라는 그런생각을 말이죠.. 책에 제가 오염되는 느낌도 가끔 받습니다.. 그것이 오염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죠.. 오염이라는 표현이 기분이 이상한 느낌도 들지만.. 그냥 순수에서 멀어짐으로 해석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03-07
병장 이승현
규언/ "자본주의 역사강의" 저도 동일한 동기를 가지고 지금 읽고 있습니다. 규언님의 후기가 훌륭한 참고가 됩니다. 우리는 아마 처음부터 그 선 위에 서서 지금까지 온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준성/ 동감입니다. 그리고 허무는 결국 극복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지금의 이 불안함과 막막함이 또하나의 퍼즐일지도 모르겠네요. 03-07
상병 서동영
많은 생각을 하게 하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03-07
상병 박상호
지금의 전 여러 조각의 퍼즐을 잃어버린듯 하네요. 그리고 그 잃어버린 퍼즐들을 못 찾을지도 모른다는, 그 퍼즐들을 제 자리에 끼워넣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조바심내고 불안해 합니다. 이런 제 막연함들 또한 맞춰 가야 할 한 조각의 퍼즐이라 믿습니다. 승현님만의 책 그 한권, 꼭 완성하시길 빌겠습니다. 글 잘 읽었어요. 笑 03-08
상병 김재영
근데 교보문고 가면 꼭 화장실 가고 싶지 않던가요? 03-08
병장 이승현
재영/ 저는 잠실 교보문고를 주로 가는데 화장실은 아직 가보지 못했습니다.
광화문쪽은 정신이 없더군요. 다음엔 화장실에 한번 들려봐야겠습니다.(웃음) 03-08
병장 배진호
어쩌면 서로는 책방에서 지나쳐간 인연일 수도 있었겠군요....
책이라는 공통 분모 아래서... 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