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선물한다는 것은 예술적인 행위이다 (상병 주영준/051201) 
 
 
 
 
휴가에서 복귀하는 날, 하나의 비일상에서 또 다른 비일상으로의 전환을 준비하는 날, 하나의 신성한 의식처럼 나는 동행할 도서들을 천천히 골라나갔다. 최근 들어 학부생적인 학습에 묘한 매력을 느낀지라 우선 몇 편의 개론서를 준비하고, 다음으로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꿈을 실천하기 위한 도구로써 몇 편의 소설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권, 더 가지고 가자는 생각으로 산 지 오래 되었으나 여지껏 읽지 않은 책들을 쌓아놓는 서가의 한 구석으로 시선을 던졌다. 아무리 부대에 도서 반입 기준이 일정하지 않다지만 대략 100%에 육박하는 확률로 반입이 금지될 몇 권의 책들과 마지막으로 들고 갈 한 권으로 집어들기에는 지나치게 무거운-물리적인 차원에서-책들, 그리고 여전히 보고 싶은 마음이 잘 들지 않는 책들의 사이에서 '작은 풍요'를 발견하였다. 아. 대학에 입학해서 처음으로 선물받은 책이었는데. 아직도 안 읽었구나. 헤에. 한심해요. 라는 생각으로 책을 집어들고 페이지를 펼쳤다. 내지 첫 페이지에는 스캔이라도 해서 보여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 글씨가 이렇게 적혀 있었다.

'2002. 3. 8. 항상 진지한 고민으로 살아가는 영준. 얼큰'

2002년 3월 8일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먼지 얹힌 상념들이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 대학에서 처음 맞는 여성의 날이네. 아마 열심히 행사 준비를 했었겠지. 수업 같은 것은 진즉에 포기하고 아침부터 학생회관 주위를 서성이다가 오후에는 행사하러 나갔겠지. 그래. 종묘공원이었다. 종묘공원에서 여성의 날 행사가 있었다. 기억들이 빛 바랜 먼지를 떨치고 색을 찾아간다. 종묘공원을 일상적으로 점거하고 계시는 할아버님들께서 '이거 이러다 남자가 여자한테 맞고 사는 날이 올꺼야. 세상이 잘못 돌아간다니까. 어. 저봐라. 남자도 있네. 이런 한심한 놈 같으니' 하는 타령을 들었던 기억이 생생해진다. 헛. 새내기 발언을 했던 쑥쓰러운 기억도 떠오른다. 창피한 기억은 안 떠올라주면 좋으련만. 발언 중에 흥을 돋우려 학생증을 꺼내 '저 정말 84년생이라니까요' 라고 강변했던 기억까지는 하고 싶지 않은데. 쳇. 아 맞다. 그 날 내 '나선형 인생'이 나선형 궤도에 안착하게 하는 데 가장 지대한 공헌을 했던 (일테면. 신문사 가 봐야 별 거 없으니까 교지편집위원회 들어가. 라고 내게 지른 타대학 편집위원회의 모 선배랄까) 윤종근이라는 녀석을 약속도 없이 마주치기도 했다. 그런저런 일들이 있었다. 하지만 책을 받은 기억은 없는데.

봄의 색조가 어린 디자인의 '작은 풍요'를 앞에 두고 그 날을 찬찬히 다시 떠올려본다. 책 없이도 떠오른 기억들은 잠시 옆으로 밀어내본다. 기억. 기억. 아침에는 학교를 갔을 것이다. 학생회실 아니면 편집실을 기웃거리며 선배들과 노닥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 확실하다. 그러다가 '얼큰' 이라는 선배를 봤고, 아마 내가 책을 사달라고 졸랐을 거다. 아니, 옆에 있던 '게보린' 누님이 책좀 사주라고 했었나? 혹은 얼큰씨가 그냥 책 사준다고 나를 데리고 학내 서점으로 갔을 수도 있겠다. 확실한 것은, 오전 중에 학내 서점에 갔다는 것이고, 나는 작은 풍요를 선물 받았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철굴을 받고 싶었는데 왜 철굴이 아닌 작은 풍요였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 날의 앞의 반나절이 이렇게 떠오른다. 쳇. 3월 2일에 입학하였을 테니 만난 지 기껏해야 일주일도 안된 후배-비록 일주일간 꽤 많은 일들이 있었다고는 해도-에게 '항상 진지한 고민으로 살아가는 영준'이라니 너무한다(게다가 지금은 미안하다). 재미난 글귀다. 그리고 고마운 글귀다. 인생에서 사라질 뻔한 지난 어느 날의 반나절의 기억을 실루엣이라도 보여준다는 것은. 고마운 책이다. 인생에서 사라질 뻔한 지난 어느 날을 떠올려보게 한다는 것은. 그리고 그러한 기억들로 잠시나마 행복한 미소를 그려볼 수 있었다는 것은.

고참 기수표 목적암기에 열을 올리던 이병시절, 초도 휴가를 나와 친구에게 '야, 광욱이형 잘 지내냐?' '응? 무슨 광욱?' '그 있잖아. 얼굴 큰. 전국대두협의회 의장님. 박광욱' '박광욱은 개뿔. 박건욱이잖아' 라는 에피소드를 내게 선사하며 잠시 울게 만들었던 얼큰씨가 떠오르기도 한다(박광욱은 병 제 오백팔씹몇기 고참이었다).좋은 선배였다. 큰 얼굴만큼 때로 엄하기도, 큰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어려 보이는 얼굴만큼 따뜻하기도 한 그런 선배였다. 세상 일이 이리저리 요동치는 동안 무수한 일들이 사이를 가로질렀기에 자주 보지는 않는 그런 선배가 되었지만-생각해보니 자주 보는 선배라 할 만한 분들이 이제는 없다. 슬프다-보고 싶은 그런 선배다.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지. 아. 한 선배는 공익으로 한 선배는 독일로 유학을 가는 것을 환송하는 어느 술자리에 부비적거린 날이었 것 같다. 이렇게 그에 대한 추억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와 함께 하던 시절에 대한 추억들도 떠오른다. 일기 같은 것과는 도통 친하지 않기에 쉽사리 떠올라지지 않는 시절들. 지금보다 다섯 배쯤 게으르고 다섯 배쯤 냉소적이며 다섯 배쯤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다섯 배쯤 격렬한 심장을 가지고 있었으며 다섯 배쯤 기만적이었던 청춘을. 그 시절에 쓴 글이라고 남아있는 것은 교지에 썼던 비문투성이의 글 한 편 뿐인데. 그런데. 그런데. 선배의 한 줄 글귀가 그 시절을 내게 추억하도록 한다. 한 줄이면 되지 않느냐고 귀에 속삭이면서 말이다.

책을 좋아한다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책 외에 별다른 취미가 없는 녀석이다 나는. 그럼에도, 인간 관계를 조립하는 능력이 모자란데다가 무례하기까지 한 성격 덕분인지 거의 책을 선물받지 못하였다. '작은 풍요'를 제하고 나면 두 권 정도가 기억난다. 바나나의 '키친' 이런 글귀가 있었다. '작은 휴식을 선물하는 기분으로. 해랑' 헤에. 책을 선물할 때는 본명 따위는 쓰지 않는 센스를 가져야 하나보다. 박민규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생일 축하한다. 건강히 제대. 어쨌든. 싸움은 끝나지 않았으니까' 라는 글귀였다. '삼미'를 내게 선물한 그에게 예전에 선물한 책에 써 준 글귀인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에 대한 화답인 것이리라. 이것으로 선물에 대한 내 생활의 이야기는 끝. 왜냐하면 책을 선물하고 선물받는 것에 대해서는 나는 그 정도밖에의 경험이 없다. 

그러나 책을 선물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몇 권 받아보지도 못하고 몇 권 줘보지도 못한 나는 감히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 어떤 특별한 강렬한 확신은, 반복되지 아니하여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이니까. 받을 때도 매번 행복하였고, 줄 때도 마찬가지였다. 책을 선물하는 것은 예술적이며 정치적인 행위이다(별다른 뜻이 있는 말은 아니고, 아주 멋진 행위라는 것을 강조하는 수사에 불과하니 이해 안 간다고 괘념치 마라). 당신이 선물하는 책은 그리고 당신이 책에 써서 선물하는 글귀는 얼큰이형이 내게 선물했던 책과 글귀와 마찬가지로,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책을 선물받은 시절의 이야기들과, 책을 선물한 사람이 이야기와, 책을 선물한 사람과 함께 걸었던 시절이 이야기를 해 주게 될 테니까. 책을 선물하자. 책의 속지 첫 장은 항상 비어 있으니 글을 써서 책을 선물하자. 현대 사회에서 미디어의 통제권을 위해서는 수십조의 돈이 필요하다. 수십조의 돈이 없다면 당신은 그저 '어이. 이봐. 우리좀 봐 달라고. 젠장. 우리 이야기에 한번쯤은 귀기울여 달라고' 라는 간단한 말을 하기 위하여 알 카에다의 조직원이 2001년 9월의 어느 모의고사 날 감행했던 것과 같은 신묘막기한 에어쇼를 연출해야 한다. 그런 서글픈 세계 속에서, 책의 속지 첫 장은 항상 비어 있으며 책은 일반적인 상품에 비해 결코 비싸지 않다. 당신과 책을 선물받는 사람간의 은밀한 소통의 통로는, 선물받는 사람만을 위해 준비한 당신만의 글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당신은 겨우 책 값 몇천 원을 지불함으로서 독재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당신이 선물한 책을 어느 날 서재 구석에서 보고 잠시 행복한 미소를 그릴 누군가를 생각하며 우리 책을 선물하자. '책을 선물하는 행위'가 문화적 헤게모니를 쟁취하게 될 때 까지, 그래서 필자도 책들을 좀 선물받을 수 있는 행복한 그 날까지 우리 모두 책을 선물하는 것을 습관화하자.





병장 최세훈 (2005-12-01 10:42:26)  
사실 책을 선물하기란 쉽지 않죠. 받는이의 취향도 고려해야 하고...부담스럽지 않아야 하지만 뭔가 의미있어야 할 것도 같고. 이것저것 따지게 되거든요. 
이제는 헤어진 사람에게 '돌아가고 싶은 날들의 풍경'을 선물했었는데, 옛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헤에. 어쨌든. 글 잘 읽었습니다. 영준씨한테 마구마구 책 선물을 해주고 싶어지는데요?  

상병 김동석 (2005-12-01 10:44:14)  
저는 생일때만 되면 친구들보고 다른 선물 필요 없고 책 한 권씩 사달라고 합니다. 그 편이 부담도 없고, 읽으면서 '아, 이 책은 누가 몇 번째 생일에 선물해준 거였지'하면서 그 친구를 떠올리게 되죠. 제가 선물해준 책도 누군가의 책장에 있을 걸 생각하면 기분 좋고요.  

상병 엄보운 (2005-12-01 12:38:07)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맛깔나네요.  

상병 박민수 (2005-12-01 13:32:32)  
저 또한 선물로 많이 받아보았다거나, 줘봤진 않지만, 책을 주고 받는 행위를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입대 해서는 책갈피도 만들어서 주곤 했었죠. 전역하는 선임에게, 책을 즐겨 읽는 후임에게.
그렇게 선물을 할 때마다 서로간에 통하는 알 수 없는 교감을 감지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 또한 하나의 소통이겠죠.
책 앞에 써진 짧은-혹은 길 수도 있겠지만- 문장을 보며 느꼈던 감정을 마음에 담고 그 책을 읽었을 때,
왠지 모르게 그 책을 선물해 준 사람의 감정-짧은 문장이 그 사람의 목소리가 되어 귀에서 이명처럼 울리는 것만 같은-이 곳곳에서 느껴지는 것만 기분, 경험 해보지 않으셨나요?
치뤄야 할 값어치 보다 훨씬 값진 선물을 하고 싶다면, 책을 선물하는 건 어떨까요.
책, 선물 받고 싶군요. 음. 아.  

병장 백윤화 (2005-12-01 14:37:12)  
여자친구와 함께 서점을 돌면서 맘에 드는 책들을

이미 준비한 쇼핑바구니에 하나 하나씩 쌓았었죠

계산할즈음이면 
10만원에 가까운 가격에 놀랐던 기억이 더욱 남네요

책값이 장난이 아니예요....  

병장 손영청 (2005-12-02 00:26:47)  
저도 많이 받아보진 못했지만 책선물받는 거 정말 좋아합니다...
제 친구들은 보통 저한테 책아니면... 취향이 뭔지 모르겠다며 문화상품권, 도서상품권 이런 거 주더라구요.
정말 책만큼 남는 게 없는거 같습니다..  

병장 김동환 (2005-12-02 13:20:17)  
책선물 좋죠.(웃음)
문제는 저에겐 책선물을 주는 사람이 없다는 거지만. 흑흑.  

병장 이준오 (2005-12-05 08:36:27)  
책 선물은 신사의 센스!  

상병 이준희 (2005-12-05 08:58:27)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앞으론 잘 고르고 고른 책을 선물하는 습관이 생길것 같습니다!
덕분에요..  

병장 이상곤 (2006-01-13 09:07:40)  
음...몹쓸 M*Xim이란 잡지에서 이성에게 선물해서는 안될 Top 1로 책이 뽑혔던 적이 있나보더군요. 내 동기들이 친구 생일 선물로 책을 선물하겠다고 말했다가 무슨 원시인 취급 당해서 결국 접었던 적이 있는데 이 글로 다시 용기를 되찾았네요..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