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책마을의 욕망과, 라캉의 욕망 : <세미나11>  
상병 박원익  [Homepage]  2009-09-02 06:49:15, 조회: 277, 추천:3 

  한 동안 제초를 나가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톨스토이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이번 기회에 정직한 육체 노동에 매진하면서 소위 말하는 '형이상학적인' 사변을 일체 생각하지도 않겠다고 결심하면서 나름 열심히 일을 하겠다고 자부했습니다. 낮에는 땀흘리며 일을 하고, 밤은 성경을 읽으며 묵상에 빠지는, 스토익한 생활을 꿈꾸며 제초를 시작했지만, 차마 성경은 손에 잡히지 않아, 라캉의 <세미나11>을 읽었지요. 이 사람이 강의한 텍스트는 정말이지 성경다운 데가 있어서, (그의 구절들은 구약의 금언과 신약의 비유로 넘쳐나지요) 어떤 의미에서는 제 경건한 욕망을 대리만족 시켜줬달까요. 그러나 잠시 뿐입니다. 그의 텍스트를 노트에 정리해가면서 묵상했던 내용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가면서 상당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가령 제가 사모하는 바디우와 달리 전혀 체계적으로 사유를 정리하지는 않았지만, 누구보다 더 멀리 나아가는 지적 모험을 감행했던 것입니다. 요컨대 그는 "정신분석의 토대"를 규명하겠다, 그것의 근본개념Grundbegriff을 재고하면서 프로이트의 정신으로 돌아가겠다고, 세미나의 초두에서 벌써 그렇게 선언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충격적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어느 영역에서 이러한 선언을 할 수 있습니까? 제 전공이 경제학이니 여기에 빗대어 말하자면, 주류 경제학에서 '이윤'이나 '가치' 혹은 '효용'이라는 어찌보면 경제학의 근본개념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의 기원이 완전히 망각되고 있다고 누가 감히 '선언'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사람은 지금까지 딱 한 명 있었지요. 그는 마르크스입니다. 그런데 주류 경제학의 영역 내부에서 그런 선언을 했다가는 학계에서 당장 <파문>을 당했겠지요. 안 그래도 이 세미나가 채록된 것은 그가 프랑스 정신분석협회에서 파문을 당한 이후였지요. 물론 그가 쫓겨날 때 학회는 <파문>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겠죠. 이는 오히려 라캉이 빗대어 표현한 겁니다. 무엇에 빗대었냐면 유대공동체에서 파문당한 <스피노자>에 스스로를 빗댄겁니다. 스피노자가 후일 집필한 <에티카>를 읽으면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리게 되는데, 그는 한때 CF의 구절을 빗대자면 "너희들이 신을 알어?"라는 겁니다. 사람드은 이것이 학문의 자유를 억압한 종교공동체의 폐쇄성의 폐단이라고들 흔히 이야기하지만, 실은 그런 문제가 전혀 아닙니다. 스피노자가 살았던 세계에 '신'은 야곱과 이삭과 아브라함의 신인 동시에 철학자-과학자-예술가의 신이기도 했습니다. 동시대인인 라이프니쯔만 봐도 알겠지만, '신'은 당대의 인식론적-학문적 근본개념이자 토대였지요. 사람들은 당연히 그것에 대해 그것이 '전제'인만큼 잘 알고 있다고 봤겠지만, 그가 <에티카>에서 신에 대해 서술한 것을 보면 거기서 그는 이미 그러한 근본개념의 기원이 완전히 망각되고 있다고 선언한 겁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신에 대한 '표상'(관념)만을 갖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것이 뭔지를 모른다는 겁니다. 이로써 스피노자 역시 '유물론자'의 대열에 합류합니다. 이로써 그는 응당 파문당해야 마땅한 인간이 된 것이이죠. 

  다시 경제학으로 돌아가자면, 스피노자=라캉은 최근의 '신자유주의'의 조류에 경종을 올리며 학계에 '파문'을 일으킨 폴 크루그먼과 동일한 수준에 있지 않습니다. 그는 최소한 자신의 정적과 학적에게 "너희가 경제학을 알아?"라고 말하진 않겠지요. 이렇게 그는 '파문'을 일으킨 대가로, 정신분석 학계의 무수한 학파의 리더(융, 클라인, 크리스테바))와 마찬가지로, 모종의 반신자유주의 경제학파의 '리더'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건 라캉이 주류정신분석학에 대해 단순한 이견을 제출한 게 아니라, 다름 아닌 그것의 토대, 전제, 근본개념(무의식, 반복, 전이, 충동)을 다시 사고할 것을 요청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실로 부르주아 경제학의 공리계를 형성하는 '가치'개념을 다시 사고할 걸 요청한 마르크스에 버금가는 '행위'입니다. 2000년 전에 이 행위의 모범을 보인 사람은 예수였지요. 이들은 모두 '토대'를 언급하고 재사유하려는 제스처가 얼마나 위험천만한지를 몸소 보여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끝까지 나아가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그토록 위대한 인물로 만들었던 것은 그들이 훌륭한 인격자여서가 아니라, 바로 그들의 독특한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현존, 존재감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예수에 대한 음모론(예수는 실존한 인물이 아닌 역사적 허구이다)을 제기하는 백치 같은 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신약 텍스트에 작용하는 독특한 욕망이야말로, 예수라는 허구적 인물을 '현존'하는 것으로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라캉 역시 세미나에서 분석가의 현존, 특히 분석가 자신의 욕망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특히나 교육분석(분석양성과정)에서 강조되는데, 라캉에게 더욱 흥미롭고 또한 절박한 문제는, 타인의 욕망과 무의식에 대해 한가하게 논평하는 게 아니라 정작 그것을 해석하겠다고 자처하는 분석가 자신의 유별난 포지션(욕망)입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겸손해질 걸 요구한 게 아니라, 오히려 이 욕망을 끝가지 밀고 나갈 것을 원했습니다. 이것은 정신분석이 제도권에서 생각하는 것과 달리 얼마나 위태로운 토대에 기초하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공분을 살만한 일입니다. 사실 무의식에 어떤 성적 소망이 있는지를 발견하고 그것을 치료하는지가 라캉의 관심사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해서는 무의식이 볼인식된다고 단언하지요. 어찌보면 이는 신을 인식하는 것은 그것에 대한 표상에 있는 게 아니라, 신에 접근하고자 하는 독특한 주체의 욕망(사랑)에 달려 있다고 단언한 스피노자와 유사한 제스쳐입니다. 즉 우리들(분석에 무지한 일반인이든 전문적인 분석가이든)이 무의식에 대해 어떻게 머릿 속에 떠올리든지, 그런 수준에서 그것은 여전히 몰인식되며 그것은 오히려 예기치 못한 만남 속에서만 인식될 수 있는 겁니다. 다만 이 만남은 분석가의 욕망과 맞딱뜨리는 예기치 못한 만남이지요. 이렇게만 보면, 그는 이론에 대한 실천의 우위를 설파하는 도덕가처럼 보이지만, 문제는 그런 데 있지 않습니다. 그는 무의식을, 그것을 해석하겠다고 자처하는 분석가의 고유한 무의식적 차원의 욕망에 맞딱뜨리면서 어떻게 자신이 고유한 증상을 형성하는지에 대해 몇 번이고 반복(실로 무의식은 이 반복 속에서만 마주칠 수 있습니다.)해서 이론화했으니까요. 중요한 건 이 모든 것을 몇 번이고 각종 도식과 모델(유전학에서 구조주의 인류학 등 광범위한 영역에서 원용된)을 몇번이고 재이론화한 라캉의 '욕망'입니다. 그리고, 라캉의 욕망 앞에서 저의 욕망, 지나치게 이론적인 사유 속에서 놓친 건강한 삶의 회복에 대한 제 욕망이 터무니 없을만큼 우스꽝스러워진 겁니다.

  제가 책마을에 다시 접속해서 놀란 것은, 제 글에 대해 형성된 어떤 여론에서 생각지도 못한 '만남'에 마주쳤기 때문입니다. 무의식은 바로 그렇게 해서만 (예기치 못한 만남 속에서만) 조우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몇몇 분들의 문제제기가, 제가 읽던 라캉의 문제와 공명한다는 점에서 놀랐는데요. 가령 정근영님은 일전에 제가 쓴 글에 빗대어, 제 글이 뿜어내는 독특한=나이에 맞지 않은 아카데믹한 후광에 휩싸여 있지 않냐고 반문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제 글에서 뿜어나는 것들이 다 일종의 '스펙타클'이 아니냐는 겁니다. 이것은 정말 맞는 말인데, 라캉 역시도 시각충동에 대해 다루며 사람들에게 볼거리(스펙타클)을 주며 매혹시키는 것들이 다 일종의 '눈속임'에 기초해 있다고 말합니다. 정근영님은 바로 그것을 말한 것이지요.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근영님이 이 현상을 '전이'tranferance라는 용어로 정리했다는 점입니다. 알다시피 '전이'는 라캉이 '무의식', '반복', '충동'과 더불어 문제삼는 근본개념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정근영님의 회의적인 반응 역시, 전이 현상에 포함되는덴요. 정신분석에서 일어나는 전이현상은 피분석자가 분석가에게 모종의 '권위'를 부여하는 제 현상입니다. 그것에 순응하든, 회의적이든 무관하게 말입니다. 다시 무의식의 문제로 돌아가 봅시다. 사실 라캉은 무의식(의 욕망)이 궁극의 비밀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문제는 무의식이 자신의 비밀을 분석가에게 너무 손쉽게(내 욕망은 바로 이런 거였어!라고 말할하며 분석가에게 볼거리를 주는 식으로) 보여준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무의식은 자신의 욕망에 대해 거짓말을 합니다. 그것은 분석가에 대해 하는 거짓말이지요. 엄밀히 말해 분석가의 욕망에 대해 어떤 위장을 펼쳐 보인다는 겁니다. 이 모든 게 '전이'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실로 환자들은 자신의 무의식적 욕망에 대해 주제 넘게 왈가왈부하는 분석가와 모종의 관계를 맺습니다.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며 사랑에 빠지든가, 그를 역으로 되비판하든가 말입니다. 어찌되든 분석가는 이것에 속지 말아야하는 동시에, 그러한 현상을 바로잡기 위해 "저는 분석가인 동시에 여러분과 같은 한낱 인간입니다."라는 거짓 겸손을 떨지 말아야 한다고 라캉은 경고합니다.

  이에 따라 저 역시 "이 모든 말씀은 저에게 과분합니다."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의 욕망에 유별난 데가 있다는 걸 인정하고 거기에서 저는 출발해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 글에 관해 형성된 '전이'를 기쁘게 받아들이며, 제 욕망이 무언가 여러분들의 신경을 건드렸다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이 전이 현상에서 주목해야할 점은, 분석가에 대한 과도한 신뢰에서든 혹은 비판적 의식에서든, 이 모든 것은 분석가의 욕망에 대한 모종의 방어기제라는 겁니다. 무엇에 대한 방어일까요? 라캉은 그것을 '거세불안'에 대한 방어라고 말합니다. 확실히 전이 속에서 전이를 촉발시킨 자에 대한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지나친 치켜세움이 존재합니다. 정근영 님은 제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마치 제가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듯 말씀하듯이 말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무의식(또한 책마을의 집합적 무의식)을 드러내는 것인데, 이 무의식 자체가 흥미로운 게 아니라, 오히려 무의식 너머에 무엇이 숨겨지고 있는지가 흥미로운 것입니다. 우리는 무의식이 이미 '너머'에 있는 불가사의한 것이라는 낭만주의적 생각에 사로잡혀 무의식의 '너머'가 있다는 걸 생각조차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라캉은 무의식은 오히려 표면에 불과하고 그것이 그 너머에 있는 것을 은폐한다고 말입니다. 그 '너머'는 무엇일까요? 라캉은 그것을 '실재'real라고 말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분석가와 피분석자 모두를 사로잡고 있는 불가능성입니다. 이것은 전혀 어려운 이야기가 아닌데, 다시 말해 아무리 분석가와 피분석가가 자신의 문제적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쳐도 여전히 맴돌게 되는 어떤 중심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라캉은 이러한 중심을 맴도는 상황을 욕망과 구분되는 '충동'으로 호명합니다. 다시 말해 욕망의 대상에 도달하지 못하면서 끊임없이 실패하면서도 여전히 '만족'에 도달하는 충동 같은 게 존재한다는 겁니다. 88만원 세대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그들에게 실재란 어떻게 보여질 수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불가능성'이 무엇인지를 담화 속에서 발견하는 것 뿐입니다. 가령 책마을과 같은 공동체에서, '소통'에 대해 혹은 '사유'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거기에서 도달하는 것은 오히려 소통과 사유의 불능입니다. 우리를 지탱하는 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사유와 소통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그런 불가능성 때문이지요. 다시 말해 우리는 역으로 사유와 소통의 결핍감을 더 잘 즐겨야 하는 어떤 곤궁 속에 빠져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라캉이 환자들이 자신을 고쳐달라고 달려오는 것은, 사실 자신의 증상을 더 잘 즐기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 역시 우리 자신의 기묘한 충동의 만족에 도달해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라캉은 분석의 종료가 바로 이 충동의 차원에서, 이러한 만족의 균형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돌리는 데서만 가능하다고 단언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불가능성과 가능성의 좌표를 옮기는 행위에서 궁극적으로 성취됩니다. 가령, 우리가 사유와 소통에 대해 이야기 위해 억압되어야 하는 것은 1차텍스트 그 자체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책마을을 더 많은 풍성한 논의로 채울 무수한 방법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불가능한 것은 '정말로' 라캉과 칸트를 읽는 것이지요. 다른 모든 것들은 허용되어도, 그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남아야 우리들의 '젊은' 욕망을 지탱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한편으로 이들에 대한 동경 역시 남아 있어야만 책마을에서의 왕성한 논의가 가능해지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이 '불가능성'에서 저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 역시 라캉과 칸트를 제대로 읽어본 바 없기 때문이지요. 여기에 만약 전이가 있다면, 제가 칸트와 라캉에 대해 혹은 맑스에 대해 더 잘 말할 수 있고 더 잘 하는 위치에 있다고 간주하는 데 있습니다만, 사실은 그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은 너무나 뻔한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간주하는 것은, 앞서 말했듯 저와 독자들 모두를 사로잡고 있는 곤궁에 대한 방어기제일 뿐이지요. 만일 제가 유별난 데가 있다면 단지 저 자신의 욕망에 관한 것 이지요. 저는 앞서 말한, 기묘한 균형상태(칸트와 라캉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지만, 너무 많이 이야기해서는 안된다는....)를 깨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라캉이나 맑스의 욕망에 필적할 수 없다면, 책마을 정도에서는 이러한 욕망이라도 가져도 되지 않겠냐고 생각합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10-13
10:12:25 

 

상병 정택민 
  겨우겨우 따라잡으며 독해했습니다. 이해율이 몇 퍼센트나 될 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는 분석가에 대한 과도한 신뢰든 비판적 의식이던, '거세불안'에 대한 방어와 더불어 '남근선망' 의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봅니다. '거세불안'에 대한 방어만으론 과도한 신뢰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가 힘들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욕망이란게 불완전하고 이중적일 수 있는 만큼 두 가지의 논리로 보다 잘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아, 이것은 물론 사족입니다. 글 전체에 대한 의견이나 비판은 차마 제시할 수가 없군요. 제 스스로도 잘 모르기 문에..흑흑 

글 잘읽었습니다. 자꾸 마지막 문장에서의 '책마을 정도'에 집중하게 됩니다. 하하 2009-09-02
09:13:13
  

 

상병 홍명교 
  굉장히 고심한 흔적이 보입니다. 사실 라캉의 '대파문'에서부터 분석가의 욕망까지 이렇게 친절하게 설명한 글도 없을겁니다. 원익씨가 아닌 척하면서 실은 굉장히 독자들을 의식하고 배려한다는 느낌이 드네요. 
저에게 <세미나11>을 접한 경험은 그 자체로 경악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글로써 쏟아내는건 왠지 저의 몫이 아닌것만 같아서 주저하다보니 한달이 넘게 지났네요. <세미나11> 강독 시리즈로 쭉 써보시는거 어때요. 원익씨도 공부되어서 좋고, 거저 먹는 저도 좋고. 2009-09-02
11:01:43
  

 

상병 박원익 
  정택민/저는 오히려 라캉의 이해가 대단히 역동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거세불안'에 대한 방어는 사실, 분석가와 환자 모두를 사로잡고 있는 결핍, 불능성, 무력감에 대한 방어라고 이해한다면, 왜 전이현상이 일어나는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지요. 가령 제가 라캉에 대해 발언하는 위치에서, 여러분들의 욕망을 위협한다고 생각된다면, 이것은 전형적인 '전이'현상입니다. 그러나 전이현상에서 은폐된 것은, 제가 누군가의 욕망을 위협하는 게 아니라, 저의 현존 혹은 저의 욕망이 저와 여러분의 욕망 모두가 위태로운 토대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이지요. 인간의 욕망은 대단히 불완전하고 이중적이기 때문에, 그것이 '거세'에 기초해있다고 생각합니다. 

홍명교/사실 세미나 11은 글로 써가면서 읽어야 읽히더라고요... 사실 저도 준비해볼까 생각중인데, 직장도 좀 바뀌고 바빠서 그건 엄두도 못내겠네요...... 2009-09-02
14:34:55
  

 

상병 정성근 
  스파노자에서부터 라캉까지의 느낌은 마치 몽테뉴의 그것과 비슷하군요. 회의라는 부분에서만 놓고 보자면 말이지만... 결국 기반이 되는 모든 근거에 대한 부정이 되는건가요. 

스펙타클에 대해서는 저도 어느정도 공감이 오는 중입니다. 결국 저 또한 100% 이해했다고 장담할 수 없으므로(사실 누구라도 100% 이해는 불가능할 겁니다. 박원익씨 자신도 말이지요) 눈속임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랄 수도 있지만. 

결국 책마을 또한 일종의 모순이라 볼 수도 있겠군요. 소통과 사유를 추구하나 오히려 그것은 그것이 결핍된 곤궁속에서 성립되는 것인가요. 그나저나 마치 술잔같군요 인간의 욕망이란. 자칫 조금만 기울여도 넘쳐버리는 모양새처럼 말이지요. 2009-09-02
15:31:22
  

 

상병 박원익 
  정성근/글쎄요, 오히려 저는 '근본개념'(라캉의 경우에는 프로이트로 돌아가자는 문맥으로 받아들여야하고, 책마을의 경우에서는 1차텍스트로 돌아가는 이야기이지요)으로 돌아가자는 구호를 옹호했습니다만, 회의주의에 관해서 라캉이나 스피노자는 몽테뉴와 공유하는 게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 글이 스펙타클이자, 눈속임이라는 것 자체는 맞지만 저는 그러한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령 분석가의 권위는 허구이지만 이 허구를 통해 욕망에 관한 진실을 말할 수 있다는 라캉의 가르침을 되씹어보아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2009-09-03
00:06:55
  

 

병장 김태완 
  원익 / 예전 원익님의 88만원 세대의 욕망을 위해란 글을 읽고 사랑으로 불리는 원초적 욕망을 대체할 어떤 것이 과연 우리의 무의식이나 본능들에 존재하여 사랑에 대한 갈망과 얽매임을 억누를 수 있을까하는 질문을 드렸습니다. 원익님은 인문학 바다에서의 사유와 탐구를 원초적 욕망을 대체할 역할수행 대상으로 제시하셨고 그것이 이미 그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무엇이든 빨리 질려버리고 한가지 일에 지속적으로 매진하지 못하는 저로선, 잠시나마 욕망을 불식시킬 수 있는 무언가를 발견한다 쳐도 그것이 제 삶의 울타리 내부에 존재하는 인간의 본능으로 생각할 수 있는 욕망 즉, 리비도를 완전히 잊게 할 수 있을 지에 대해 회의적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라캉이 무의식의 너머에 무엇인가 있음을 주장하며 이것을 '실재'로 일컬은 것에 상당한 흥미를 느꼈습니다. 무엇이든 내 관심분야를 벗어난 것들은 거기에 외부성이 부여되고 쉽게 수용되어 버립니다. 정의되어져 있는 것들은 이미 진리로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예중 가장 대표적인 예가 수학입니다. 수학은 가장 완전하면서 불완전한 학문이라 합니다. 이는 가정에서 이끌어낸 법칙들이 참 많기 때문입니다. 가령 리밋트를 무한대로 보내서 수렴한 항을 영으로 가정하여 답을 이끌어 낸 것을 참답이라 생각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태양이 지구주변을 돈다.’에서 ‘지구가 태양주변을 돈다.’로 정박하기까지는 참으로 힘든 여정이 따랐습니다. 종교를 앞세워 탄압받던 갈릴레이 갈릴레이의 외침은 이제 본받아야할 이야기로까지 숭배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와 더불어 지구는 태양을 돈다는 이론은 진리의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지구가 태양 주변을 도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전세계 사람들은 당연히 예스로 답변할 것입니다. 이에 반박할 근거따윈 없습니다. 저 또한 이를 진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은 지구가 태양계에서 아주 먼 거리의 점을 기준점으로 원뿔의 원둘레형태로 돌고 있는 것이라면? 또는 지구는 자전하기만 하고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려 하는데 그 주위의 공간이나 어떠한 알 수 없는 힘이 사람을 태우는 에스컬레이터처럼 지구를 돌리고 있는 것이라면? 아니면 실상은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인데 우리가 다 속고 있는 것 이라면? 이러한 식으로 생각해 보니 내가 알고 있는 사랑은 그리 위대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잘 알지 못하기에, 또는 사랑으로부터 오는 쾌락과 여운이 주는 달콤함 때문에 이를 우상화시켜 숭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원익님의 스펙타클이 전이를 일으키는 순간이었습니다. 물론 여전히 모종의 방어기제는 강하게 작용하고 있으며 근거가 턱없이 부족한 반론은 기존의 진리들을 깨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늘구멍같은 흠집을 내어 그 구멍을 토대로 구멍의 크기를 늘려나가기만 하면 결국 진리로 일컬어지던 것을 파괴할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보여집니다. 자신의 곤궁함을 받아들이고 수많은 논의로써 전이를 일으키자는 원익님의 의견에 박수를 보냅니다. 님의 욕망에 필적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욕망이지만 그래도 님의 스펙타클에 반하여 늘 님의 글이 나올 때마다 힘겹게 다 읽어보고 있답니다. 님과 같은 책마을에 서식하는 괴수분들이 이러한 텍스트들을 하나씩 던져주시면 거기에 대해 사유하고 논의에 동참하는 한사람분의 역할 정도는 할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부끄럽지만 저도 나름 '책마을 정도'의 일원이니까요. 2009-09-03
11:42:18
  

 

병장 양동훈 
  태완// 기실, post-Kuhn의 시대에서 이미 과학에 '진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어떠한 패러다임도 '진리'로 믿어질 뿐, '진리'라고 말할 수는 없게 되어버린 것이지요. 이도 역설이라면 역설이겠지만.. 2009-09-03
12:32:18
  

 

상병 박원익 
  김태완/그러고 보니 김태완 님의 댓글을 읽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지면과 시간의 한계상 다 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먼저 하고 싶은 말은, 욕망은 본능의 수준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즉 자신의 욕망이 아무리 본능적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매개'된 것이지요. 이것은 우리가 피해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욕망의 수준에서만, 그것이 본능적이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의 원초적인 성향에 관한 진실을 고백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욕망에 대해 이런저런 진실을 고백하는 게 이러한 '전이'라는(자신의 욕망에 대해 고백할 것은 강요당하고 취조당하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가 아니면 가능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욕망이 욕망의 주체에 대한 진리를 말한다는 관념은 지극히 자연스러우면서도, 또한 지극히 인위적인 상황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라캉은 언어학의 화용론을 끌어들이면서, 자신이 뭔가를 욕망하는지의 여부를 지시적 차원에서 진실되게 말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이미 화행적으로 거짓이라는 이야기를 하지요. 말하자면 자신의 욕망에 대한 일련의 정당화는 필연적으로, 다시 말해 화행적으로 거짓이라는 겁니다. 당연히 욕망에 대한 정당화는 항상 어떤 꾸며냄 허구를 내포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러한 거짓을 쥐어짜내는 건, 그러한 욕망의 주체가 궁지에 몰렸을 때입니다. 분석가는 이 때문에 피분석자의 욕망 너머에, 그를 궁지에 모는 무언가가 즉 실재가, 그 욕망을 구성하는 '불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이 '확실성', 그것은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의 확실성에 필적하는 확실성이라고까지 라캉은 이야기합니다. 

바로 이 '실재'라는 건, 고정불변한 실체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분석적 개입을 통해 변경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실재가 단순히 무의식의 욕망에 대한 이런저런 표상, 스펙타클의 수준에서 보여지는 게 아니라, 어떤 근본적인 '개입'을 통해서만 "충동의 수준에서" 변경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어떤 상황에서 "불가능해 보이는" 어떤 것이, 가능할 수 있다는 원칙을 천명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것만이 피분석가가 자신의 증상을 향유하고, 자신의 욕망에 대한 끝 없는 변명과 고백을 멈추는 효과를 낳지요. 분석가의 욕망은 바로 이 욕망의 불가능성 주위를 순환하는 "충동"의 회로를 변경하려는 관심에서 표출되지요. 이것이 제가 라캉의 정신분석에 흥미를 느끼는 이유입니다. 2009-09-03
16:37:35
  

 

일병 이준혁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요소는 실재계밖에 없으며, 
상상계와 싱징계는 거짓된 범주로 보인다 

ㅡ질 들뢰즈 


라캉이 실재를 무의식 너머에 있는 것이라고 표현했나요? 세미나를 다 읽어보진 못했지만 무의식과 의식의 구분에 대해서는 라캉이 언급을 회피했다고 알고 있는데, (프로이트처럼 무의식/의식으로 구분된 설명은 하지 않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무의식과 실재의 관계에 대한 지형학적인 설명이 존재한다면 좀더 읽어봐야 겠군요. 2009-09-04
13:48:09
  

 

상병 김 건 
  라캉의 분석학에서 이르자면 책마을의 소통과 사유는 1차 텍스트를 완벽히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더욱 궁핍하며, 이러한 충동에 있어서 우리는 1차 텍스트에 관해 완전히 이해하려고 지향하도록 하되 그 자신의 욕망이 충족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중도'가 필요하다는 것일까요? 

어렵네요. 정말. (땀) 

+ 으, <세미나11>을 읽어보도록 해야겠어요. 2009-09-04
22:30:21
  

 

병장 정근영 
  와우 
사실 원익씨에 대한 글을 올리면서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었는데, 이 글을 보니 약간의 찜찜함이 가시는군요. 감사합니다. 

사실 저는 '전이'라는 말에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만, 이 글에서 나오는 '전이'는 약간 어렵군요. 제가 원익씨를 치켜세운 건 맞습니다만, 원익씨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말은 동의하기 어려운걸요. 그렇다면 원익씨가 원익씨에 대해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도 또 다른 전이가 아닌지요. 

'우리가 사유와 소통에 대해 이야기 위해 억압되어야 하는 것은 1차텍스트 그 자체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책마을을 더 많은 풍성한 논의로 채울 무수한 방법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불가능한 것은 '정말로' 라캉과 칸트를 읽는 것이지요. 다른 모든 것들은 허용되어도, 그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남아야 우리들의 '젊은' 욕망을 지탱할 수 있는 것이지요. ' 

무엇보다도 이 문장이 와닿는군요. 맞아요. 진실로 불가능한 것은 라캉과 칸트를 읽는 것이지요. 그리고, 진실로 필요한 것도 또한 라캉과 칸트를 읽는 것이구요. 

잘 읽었습니다! 2009-09-05
21:35:20
  

 

상병 박원익 
  이준혁/정확히 말해서, 라캉은 무의식은 열리자마자 닫히는 그러한 박동운동으로 규정하지요. 말하자면, 우리는 '증상'을 통해 그것 이면에 무의식이 있다는 걸 알지만, 정작 그것에 대해 언어적으로 분절화한다면, 말하자면 그것을 일단 해석해보면, 거기에는 '무의식'이라고 할만한 게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지요. 예를 들어 어떤 남자의 행동이 동성애적 욕망의 표현이라고 말해도, 그렇게 말해놓고 보면 그 행동의 무의식적인 측면은 증발해버립니다. 말하자면 무의식적 차원이 언어적 해석이 아직 도달하지 못한, 다른 데로 옮아가는 것이지요. 라캉은 이러한 끝 없는 해석의 악순환 자체를 추동하는 무의식에 주목했지요. 그리고 그러한 악순환을 구성하는 또 다른 근본적인 심급이 있지 않을까라는 의문으로 옮겨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2009-09-07
06:25:13
  

 

상병 박원익 
  김건/오히려 저는 '불가능성'이라는 범주가 사기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불가능하'다는 것은, 물리적인 장벽이 있다거나 그런 거라기보다는, 우리들이 자기 발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사태에 더 가깝지요.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1차텍스트를 읽는 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정근영/제 진의가 제대로 전달榮摸 그야말로 감사할 일입니다. 


상병 진수유   2009-09-03 14:53:10, 조회: 113, 추천:0 

* * *

원익님의 친절한 글 잘 읽었습니다. 글을 읽고 느낀 점을 간략히 써보겠습니다. 저는 사실 책마을에 들어올 때부터 한 가지만을 목표로 삼고 의식적으로 실천하려 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저 배움'이었습니다. 그래서 쉽사리 글을 작성하기는 언제나 망설여졌고 제가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다른 이들의 생각들, 분석들, 분석 도구들, 공부의 궤적들을 담담하게 받아들여보고만 싶었던 것입니다. 책마을에 들어올 때마다 저는 모든 글을 읽지는 않습니다. 주로 예찬, 원익, 명교님이 각자의 자리에서 진행시키고 있는 어떠한 흐름에 관심을 두고 그들이 원하는 욕망(?)이란 대체 무엇일지를 계속적으로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세 분을 이렇게 묶게 되면 서로가 기분 나빠 하실지도 모르겠는데요, 그만큼 책마을에서 존재감(as you said)있는 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저는 사실 인문학에 대해 굉장히 무지한 사람입니다만, 제가 느끼는 인문학이란 그러한 흐름을 공부하는 행위에 다름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이 짧은 글은 원익님 당신 자체에 대한 분석을 염두한 것입니다.

“만일 제가 유별난 데가 있다면 단지 저 자신의 욕망에 관한 것 이지요. ... 그리고, 라캉의 욕망 앞에서 저의 욕망, 지나치게 이론적인 사유 속에서 놓친 건강한 삶의 회복에 대한 제 욕망이 터무니 없을만큼 우스꽝스러워진 겁니다. ... 다시 말해 제 글에서 뿜어나는 것들이 다 일종의 '스펙타클'이 아니냐는 겁니다. 이것은 정말 맞는 말인데, ... 이에 따라 저 역시 "이 모든 말씀은 저에게 과분합니다."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의 욕망에 유별난 데가 있다는 걸 인정하고 거기에서 저는 출발해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ㅡ 상병 박원익, [독서후기]책마을의 욕망과, 라캉의 욕망 : <세미나11>

위의 글을 읽었을 때 저는 원익님께서 무엇보다도 본인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모습에서 특별한 인상을 받습니다. 원익님께서는 라캉을 이야기할 때는 거의 빠지지 않고 원익님 스스로에 대한 분석을 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원익님의 무의식이 감추고 있는 그 너머를 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라캉이 언급하는 '불가능성'이란 그런 의미에서 원익님께 '이중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닐까 하고 넘겨짚어 봅니다.. 책마을의, 그리고 '원익' 자신만의) 원익님의 욕망은 1차적으로 스펙타클에 대한 욕망(무수한 욕망들 중 이것도 하나겠지만 최소 책마을에서는 두드러지게) 이라고 생각됩니다. 스펙타클에 대한 욕망은 원익님의 무의식 너머에 있는 실재를 위장하는 전이로써 존재하는 것이지만 원익님은 그것이 존재감을 부여한다는 측면에서 지금 하고 있는 일련의 작업을 지속시키고 싶은 것입니다. 원익님께서는 분석가이자 피분석가이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분석을 당하는 자신이 그것에 대해 수용적이든 비판적이든 상관없이 본인의 실재에 도달하기 위해 끝까지, 말 그대로 끝까지 밀어 붙여보고 싶은 의지를 갖게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원익님께서는 또한 그 실재(불가능성)가 무엇인지를 '이미' 알고 계실 것 같습니다. 아무리 분석가로써, 피분석가로써 맞닥뜨리는 문제적 상황을 벗어나려 해도 여전히 맴돌게 되는 어떤 중심이란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에 라캉이 말하는 '충동'이 있고, 원익님만의 그러한 '충동'이란 공교롭게도 책마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은 아닐지. 그리고 동시에 그러한 '충동'이 원익님 뿐만 아니라 책마을의 모든 무의식에 내재하는 것이고.. 어쩌면 원익님이 라캉을 통해 밝혀 내고자 하는 진실은 그런 식으로 확장될 가능성이 있기에, 원익님은 스스로에 대한 분석을 그러한 가능성에 접목시켜 확장-지속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가령, 우리가 사유와 소통에 대해 이야기 위해 억압되어야 하는 것은 1차텍스트 그 자체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책마을을 더 많은 풍성한 논의로 채울 무수한 방법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불가능한 것은 '정말로' 라캉과 칸트를 읽는 것이지요. 다른 모든 것들은 허용되어도, 그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남아야 우리들의 '젊은' 욕망을 지탱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한편으로 이들에 대한 동경 역시 남아 있어야만 책마을에서의 왕성한 논의가 가능해지는 겁니다. ... 제가 라캉이나 맑스의 욕망에 필적할 수 없다면, 책마을 정도에서는 이러한 욕망이라도 가져도 되지 않겠냐고 생각합니다." ㅡ 상병 박원익, [독서후기]책마을의 욕망과, 라캉의 욕망 : <세미나11>

이것은 책마을을 향하는 동시에 원익님 자신을 향한 발언일 것입니다. 저는 원익님의 욕망을 지지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원익님의 '개인적인' 불가능성에 대해서는 제가 아주 해 드릴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점에서 다소 죄송한 마음까지 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는 말할 수 없겠지만요. 저도 분석을 행했다는 점에서 어쩌면 우리 모두는 또다시 어떤 중심을 맴돌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돌파구는 있을 것입니다. 분명히.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10-21 10:57)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10-01-27
13:27:02 



상병 박원익 
  이렇듯 자세하고 꼼꼼한 '독자'를 만나는 건 굉장한 행운인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좋은 독자'가 되어야 하는데, 여전히 노력할 점이 많다 하겠습니다. 2009-09-03
16:05:54
  



병장 김태완 
  저또한 지금의 원익님의 욕망에 지지를 표하는 바입니다. 2009-09-07
00:5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