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글-내글내생각] 책
일병 송기화 [Homepage] 2009-02-22 11:06:13, 조회: 976, 추천:22
-쓰잘데없이 깁니다.
늦여름과 초가을의 사이였다. 낮에는 여전히 후덥지근했지만 밤이 되면 약간의 쌀쌀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요즘 나와 Y는 꽤나 죽이 잘 맞는 친구였다. 교양수업에서 만난 Y는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었다. 나는 악기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좋았다. Y는 기숙사에 살고 있었고 우리 집은 학교에서 40분 정도 걸리는 곳이었다. 우리 학교에서 지하철역까지 가는 마지막 버스는 12시에 출발하는 차였고 나와 Y는 기숙사 점호가 있는 월요일을 제외하고는 자주 그 무렵까지 놀았다. 나는 밤에 예대 건물에 가는 걸 좋아했다. 비어있는 피아노 연습실을 찾아 들어가 Y의 피아노 연주를 들었다. 30분 정도 연주를 듣고는 잔디밭이나 벤치에 앉아 싸구려 안주와 함께 맥주를 마셨다. 맥주를 마시며 시덥잖은 이야기를 나누며 시시덕거렸다. 나는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오늘 집에 일찍 갈거야?"
Y가 물었다.
"글쎄."
"가지 마. 놀자."
"너 오늘 음악회 보러 간다고 했잖아."
레포트 때문에 가기도 싫은 음악회를 가야 한다고 툴툴거리던 지난주 Y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거 1시간 반 짜리니까 그 동안만 어디서 좀 놀고 있어라. 그거 끝나고 같이 놀자."
Y의 놀자는 말은 술 마시자는 말과 치환이 가능했다.
"어디에서 하는건데?"
"세종문화회관."
Y가 대답했다.
세종문화회관 근처에 있는 교보문고를 떠올리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에서 버스를 타면 한 번에 광화문까지 갈 수 있었다. 6시 강의가 끝나고 6시 반 무렵에는 학교를 지나치는 모든 버스가 만원이 된다. 7시 반 시작이라는 애매한 공연 시간 때문에 나와 Y는 만원 버스에 올라야만 했다.
"도대체 무슨 공연인데?"
간신히 손잡이를 붙잡고 Y에게 물었다.
"현대음악에 관한 거야. 우리 과 교수님도 나오신데."
Y는 손잡이를 잡지 못하고 내 가방끈을 잡았다.
"그래서 보러 오라고 시킨거구나?"
"그런가 봐. 현대음악은 딱 질색인데."
Y가 또다시 투덜거렸다.
"현대음악이 왜?"
"너무 난해해."
현대음악에 대한 기초지식이 없었기에 나에게는 그 설명이 더 난해했다. 몇몇 정거장을 지나며 사람들이 내렸고 공간적인 여유가 생겼다. Y는 내 가방끈을 놓고 의자에 달린 작은 손잡이를 잡았다. 버스가 달리고 싱거운 설명이 계속되었지만 현대음악이란 개념은 머릿속을 뭉실뭉실 어지럽히기만 할 뿐이었다.
"내리자."
"난, 교보에 가 있을게. 끝나면 연락해."
"어, 알았어. 조금만 놀고 있어."
우리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방에서 MP3를 꺼내 이어폰을 꽂았다. 잠시 후 내 눈에 터무니없이 넓은 공간이 펼쳐졌다. 밝은 조명, 무수한 사람들, 까마득한 책의 수. 모든 것이 나를 압도한다. 그 미묘한 압박감을 즐기며 거대한 지하서점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말이 서점이지 없는 것이 없다. 악세사리, 음반, 문구, 완구, 간단한 멀티미디어 기기까지 판다. 조금만 돌아보면 음식을 파는 곳도 있다. 단순한 서점이 아니다. 책을 구경하다가 지루해지면 음반매장에서 음악을 듣는다, 배가 고파지면 푸드코트에서 먹을것을 사 먹는다. 다리가 아프면 북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며 다리를 쉰다. 얼마든지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거대한 공간이다. 딱히 사고 싶거나 읽고 싶은 책은 없었다. 그저 책들이 늘어선 책장의 사이를 걷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진다. 서림욕이라고 부르고 싶다. 나무를 보면 숲을 볼 수 없다. 이 넓은 공간 자체를 즐기기 위해 그저 정신없이 걸었다. 국내소설, 해외소설, 잡지, 수필, 시집, 만화, 다양한 종류의 책들을 스쳐지나간다. 점점 기분이 좋아진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머릿속에서 울려퍼지는 음악이라 착각한다. 신이 난다. 그리고 일본소설 코너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교복을 입은 한 남학생 때문이었다. 내 모교의 교복이거나 한 건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바지의 통을 줄였거나 기지개를 켜면 셔츠가 찢어질 것 처럼 조여져있는 것도 아니었다. 단정하게 교복을 입고 무난한 가방을 멘 학생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하지만 그 학생은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 같았다. 자꾸 고개를 돌려가며 주위를 살폈고 동작 또한 조심스러웠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호기심이 일었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학생이 책을 한 권 꺼내들었다. 전체적으로 흰색의 커버를 가졌지만 책등쪽은 약간 알록달록한 느낌이 드는 책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혹시 저 책을 훔치려고 하는 걸까? 나는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들키지 마.' 마음속으로는 학생을 응원하고 있었다. 학생은 나의 시선을 모르고 있겠지만 나는 혼자서 학생과 공범이 된 것 같은 짜릿함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학생은 책을 꺼낸 후에도 허겁지겁 가방에 쑤셔넣기는 커녕 계속 눈치만 보고 있었다. 도대체 뭘 할 생각이지? 녀석은 계속 책장을 넘겼다. 하지만 페이지를 넘기면서도 주위의 눈치를 보느라 동작은 느릿했고 괜히 나만 조바심이 났다. 슬슬 관심을 잃어갈 때 쯤 녀석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흔히 볼 수 있는 검정색 유성매직이었다. 하지만 서점에서, 그것도 주변의 눈치를 보면서 꺼낼 물건은 아니었다. 녀석은 매직의 뚜껑을 열고, 책의 한 페이지에 선을 그었다. 그리고는 재빨리 책을 꽂아놓고 자리를 떠났다.
나는 그 녀석이 떠난 자리에 섰다. 어떤 책이더라? 희고 알록달록한 책등을 찾는다. 같은 책들이 나란히 꽂혀있다. '웨하스의자'라는 책이다. 이 중에 어떤 녀석일까? 대충 감으로 가운데 있는 책을 뽑아 펼쳐본다. 대충 휘리릭 넘겨보지만 별다른 건 없다. 이 책이 아닌 것 같다. 그 옆 책을 뽑는다. 휘리릭. 순간 시야에 검은 줄이 맺혔다가 사라진다. 다시, 이번엔 조금 천천히 넘긴다. 역시, 이 책이었다.
[나는 목욕탕 창문을 열고, 욕조 안에서 그 소리를 듣는다.]
그 다음 한 문장이 검은 매직으로 지워져 있었다. 정확하게 한 문장인지는 모르겠지만 길이로 보아 아마 그럴 것이다. 책에 낙서를 한 녀석은 지금쯤 안심하고 있겠지? 갑자기 장난기가 돋았다. 책을 손에 든 채 자리를 옮겼다. 녀석을 찾았다. 교복이야 곳곳에서 눈에 띄었지만 그래도 한참동안 지켜봤던 녀석이라 그런지 곧 찾을 수 있었다. 학생은 다음 목표를 찾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녀석의 등 뒤로 다가가 녀석의 어깨를 톡톡 쳤다. 내 생각대로 학생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나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세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녀석에게 나는 씩 웃으며 내가 들고 있는 책을 보여주었다. 녀석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자, 이거-"
그때였다.
"저기요! 이 사람이 책을 훼손했어요!"
녀석이 근처에 있던 점원에게 소리쳤다. 내가 당황한 사이 녀석은 달려서 도망가기 시작했다. 뒤쫓으려 했지만 서점 직원들이 몰려들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직원들은 내가 들고있는 '웨하스의자'를 점검했고 매직으로 그어진 페이지를 확인하고는 나를 노려보았다.
"고객님, 이게 어떻게 된 거죠?"
나는 죄가 없음을, 이 책에 낙서를 한 것은 방금 도망간 학생 녀석이라는 걸 해명해야 했다. 직원들의 의심의 눈빛은 소지품 검사를 통해 내가 매직을 갖고있지 않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사라졌다. 직원들은 나에게 공손히 사과했지만 어쨌건 내가 훼손된 그 책을 사가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무언의 압박을 이기지 못한 나는 어쩔 수 없이 지갑을 열어야만 했다. 어느정도 할인이 되기는 했으나 낙서가 돼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내 돈을 내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Y를 만나자마자 내가 겪은 황당한 일에 대해 열심히 설명할 생각이었으나 공연을 보고 온 Y가 나보다 더 지친 모습이었다. 나는 말을 삼킬 수 밖에 없었다.
"왜 그래?"
"말도 마. 죽는 줄 알았어. 이어폰 좀 줘봐. 음악이, 음악이 듣고싶어."
절박한 말투였다. 나는 MP3를 조작해 그녀가 자주 연주하는 이상기억을 재생시켰다. 이어폰을 건내며 사람을 살린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이런 게 음악이지."
Y는 눈을 감고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감상했다. 대단히 만족한 표정이었다.
"그렇게 최악이었어?"
"응."
버스에 올라탔다. 올 때와는 달리 버스는 텅 비어있었다. 적당히 뒤쪽으로 가서 둘이 나란히 앉을 수 있는 자리에 앉았다. 이대로 학교로 돌아가서 아마 맥주를 마실 것이다.
"처음에 나왔던 휴대폰 버튼음으로 연주하는 건 그래도 괜찮았어. 전화기를 수십대 늘어놓고 막 치는데 좀 멋있더라. 그런데 그게 끝이었어."
"너희 과 교수님은 뭘 했는데?"
"피아노 곡이었는데 한 음만 똑같은 박자로 계속 치는거야. 잠이 와서 죽는 줄 알았어. 그런데 공연이 끝나고 나가다가 교수님을 딱 마주친거야. 그래서 인사하면서 공연 잘 봤다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데 갑자기 교수님이 '그래 Y는 우리 연주를 듣고 뭘 느꼈어?' 라고 하시는거야. 그래서 막 당황해가지고 아, 시계 초침 소리 같았다고 막 횡설수설 하니까 그걸 표현한 거래. 포인트를 잘 잡았다고 칭찬하는 거 있지? 기가 막혀서."
정확히 어떤 느낌인지는 경험해 보지 않아서 알 수 없었지만 1시간 반 동안 그런 연주같지도 않은 연주만 계속 들었다면 Y가 지친 것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갔다. Y의 짜증인지 칭얼거리는 건지 알 수 없는 말은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됐다.
"뭐 마실래?"
자기 때문에 기다렸으니 오늘은 자기가 내겠단다. 난 망설임 없이 KGB를 들었다. 맛이 중요한 게 아니고 값이 중요한 거다. Y도 나를 따라 KGB를 잡았다. 안주로는 과자를 몇 개 샀다. 맥주 네 캔과 과자 두 봉지를 손에 들고 우리는 자연대 쪽의 벤치를 향해 걸었다. 버스정류장과 가장 가까이 위치해 있는 것도 그렇고 학교에 있는 벤치 중에 자연대 쪽 벤치가 가장 넓다. 과자봉지 펼쳐놓고 양반다리 하고 앉아 수다떨기에 가장 좋다.
"정말?"
내가 서점에서 겪은 어이없는 사건에 대해 설명하자 Y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그렇다니까. 이것 봐."
가방에서 책을 꺼내 펼쳐보였다. Y가 손에서 책을 휙 낚아채가더니 '정말이네?'라며 재차 확인한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책을 돈 내고 사오냐."
"어쩔 수가 없었어. 점원이 아, 이 책을 어쩌면 좋지? 어떻게 할까? 이러고 있는데 어쩌겠어."
"점원이 예쁜 누나였나보네."
Y가 씩 웃으며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나도 따라 웃으며 맥주를 마셨다.
"그래서 이 책은 어떻게 할 건데?"
"읽어야지. 돈 내고 샀는데. 쳇."
"중간에 내용이 지워졌는데?"
"몰라."
다음 캔을 뜯었다. 과자는 얼핏 바닥이 보였다. 술보다 이야기를 중점으로 하다 보니 과자가 많이 축났다.
"쌀쌀하네. 야, 겉옷 좀 벗어봐."
"아 기숙사 가서 가지고 나오라고."
"들어가서 안나온다?"
결국 그날도 마지막 버스에 시동이 걸리는 걸 보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겉옷을 돌려받았다. 쓰레기는 Y의 몫이다.
"내일 봐."
집에 도착하자 1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졸렸지만 이상하게도 책을 읽고 싶었다. 이 이상한 사건의 마지막은 이 책을 읽는 것으로 맺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맥주와 졸음에 취해 약간 알딸딸한 정신으로, 웨하스의자를 읽기 시작했다. 소설은 그냥 그랬다. 보통의 일본소설처럼 퍼석퍼석했고 눅눅했다. 가끔은 절망이 찾아왔고 가끔은 애인이 찾아오는 이야기였다. 전체적으로는 ‘도대체 왜?’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책 전반에 깔린 건조한 우울함이 마음에 들었다. 책을 읽다가 갑자기 검은 선이 튀어나왔을 땐 굉장히 신경이 쓰였지만, 읽다보니 지워진 한 문장은 기억에서도 지워졌다. 책을 덮었을 때, 시계는 4시를 나타내고 있었다. 망했다. 라고 조그맣게 중얼거리곤 침대 위에 누웠다. 제대로 학교에 갈 수 있을까? 제 때 일어날 수 있을까? 늦잠 자면 안되는데? 잠이 들었다.
[수업 왜 안왔어?]
잠에서 일어난 내가 가장 처음 본 글이었다. Y의 문자. 시계를 보니 오후 3시였다. 교양수업은 이미 끝난 시간이었다. 왠지 답장을 보낼 마음이 들지 않아 전화기를 닫았다. 다급하게 준비하고 학교에 간다면 4시 강의는 들을 수 있겠지만, 그럴 마음도 들지 않았다. 나는 느긋하게 씻었고, 느긋하게 밥을 먹었고, 느긋하게 외출준비를 했다. 이 이상한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교보로 향했다. 지워진 한 문장이 어떤 문장이었을 지 궁금해져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집 근처에 다른 서점이나 도서관, 학교 도서관에서도 읽을 수 있겠지만 교보에서 확인해야만 옳게 끝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끝나는 것이 옳은 끝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넓은 지하공간은 평일 낮에도 사람이 많다. 다들 뭐 하는 사람들일까? 나는 걸음을 옮겼다. 어제 섰던 그 곳, 일본소설 코너를 향했다. 내가 책을 빼 간 자리는 다른 웨하스의자로 채워져 있었다. 책을 뽑아들고 페이지를 넘겼다. 72페이지. 세 번째 줄이다.
[때로는 리로리로리로, 하고 들리고, 꼬꾸르르 꼬꾸르르, 하고 들리는 그 소리를.]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어 중요한 문장이 아닐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이런 문장일 줄이야. 도대체 '리로리로리로'는 뭐고 '꼬꾸르르 꼬꾸르르'는 뭘까. 이게 옳은 끝일까? 괜히 쓴웃음이 나왔다. 책을 다시 자리에 꽂고 돌아서는 데 옆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저기요."
학생이었다.
"역시 형이었구나."
녀석은 웃고 있었다.
"어쩐지 형이라면 다시 올 것 같았어요."
화가 나는 건 아니었다. 녀석의 웃는 얼굴을 보자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지 혼란이 느껴졌다.
"그래서, 혹시 찾은 거에요?"
지워버린 그 문장을 찾았냐고 묻는 거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리로리로리로, 꼬꾸르르 꼬꾸르르."
녀석이 단어를 읊조리자 나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질문했다.
"도대체 왜 그 문장을 지운거야?"
"형, 웨하스의자 다 읽었어요?"
난 또 고개를 끄덕였다.
"'리로리로리로'라거나 '꼬꾸르르 꼬꾸르르'하는 단어는 웨하스의자에만 나오는 단어에요. 다른 어느 책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어요. 이 책에서만 존재하는, 단 한번 사용된 하나뿐인 단어죠. 그에 비하면 '나'라거나 '는', '사과', '흠칫' 따위의 단어가 들어있는 책은 이 거대한 서점에 널리고 널렸어요. '리로리로리로'와 '꼬꾸르르 꼬꾸르르'는 굉장히 특별해요. 하나밖에 없잖아요. 사람과 비슷하죠. 개개인의 사람은 서로가 하나뿐인, 남이 대신해줄 수 없는 소중한 존재라고 하잖아요."
학생은 양 팔을 벌려 내 시선을 이 공간 전체로 분산시켰다. 새삼 이 넓이에 짓눌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그 하나뿐인 단어가 들어간 문장을 지워버려도 책을 읽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웨하스의자라는 세상에서 '리로리로리로'와 '꼬꾸르르 꼬꾸르르'가 사라져 버렸는데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수많은 '은', '이', '가', '애인', '절망', '햄', '동생' 따위가 이야기를 계속 이끌어가고 결국엔 끝내죠. 웃기지 않아요? 제가 없어지더라도 수많은 자동차와 비행기와 휴대폰과 텔레비전과 책과 시험과 돈이 이 세상을 아무렇지 않게 이끌어가겠죠? 나는 하나뿐인 소중한 존재인데 말이죠."
"그래서?"
"내가 사라지더라도 이 세상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나는 나를 너무 사랑하니까요. 대신 이 세상이 아니고 책이라는 세상 속에서 내가 아닌 다른 소중한 존재들을 없애고 있어요. 내 자신을 없애는 대신이요. 그래도 아무렇지 않게 이해되는 책을 보면 가슴이 시큰해져요."
"그래서?"
"그래서라뇨?"
학생 녀석이 고개를 갸웃했다.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리로리로리로'와 '꼬꾸르르 꼬꾸르르'는 세상에 하나뿐인 존재지만 없어져도 별 문제가 없다. 너도 이 세상에 하나뿐이지만 없어져도 별 문제가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일까, 라는거냐?"
학생 녀석이 끄덕였다. 한심한 녀석. 아무리 사춘기고 사춘기 땐 세상의 모든 불행을 자기가 짊어지고 사는 것처럼 행동해도 된다지만 이건 좀 심했다.
"너도 이 책 읽었지?"
웨하스의자를 다시 뽑아 녀석에게 보여줬다. 고개를 끄덕인다.
"이 작가는 왜 그 단어들을 책에 넣었을까?"
학생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저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네 말대로 책이라는 한 세계가 있다면 그건 작가가 만들어낸 세계지. 그 작가가 자신의 세계에 어떤 단어를 넣는 것도, 어떤 단어를 빼는 것도 그 사람의 마음이야. 그런데 그런 전지전능한 창조주가 '리로리로리로'와 '꼬꾸르르 꼬꾸르르'를 넣은 이유가 뭘까?'
대답은 기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녀석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 두 단어가 있어야 이 책이, 그러니까 이 세계가 완벽하다고 생각한 건 아닐까? 이 두 단어가 없어도 세계가 무너지는 건 아니지만 완벽하지 않은 세상이 되는거야. 네가 없어지더라도 이 세상은 흘러가겠지만 완벽한 세상은 아니게 될거야. 네 말대로 널 대신할 사람은 없으니까."
"형."
학생 녀석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종교 믿어요?"
"아니, 무신교야."
녀석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네가 그런 말을 했단말야?"
Y가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그날 밤, 난 또다시 Y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잔디밭도 벤치도 아닌 제대로 된 술집이다. 둘이서 술은 거의 매일 마셨지만 제대로 술집에 온 건 처음이었다. 수업이야 하나도 듣지 않았지만 수업이 없다고 학교에 가면 안된다는 법도 없고 왠지, 이 결말에 대해 보고를 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들었다. 술이나 한 잔 하자는 말에 Y는 아무런 의문도 달지 않고 기숙사 밖으로 나왔다.
"그 반응은 뭔데? 나는 그런 말 하면 안되냐."
"아니, 의외로 너랑 어울려."
"기왕 칭찬을 해줄거면 의외라는 말은 빼달라고."
술잔에 둥둥 떠다니는 키위씨가 개구리 알 같다. Y는 늘 과일소주는 남는 술을 모아서 만드는 거라며 질색을 했다. 하지만 과일소주를 시키면 예쁜 잔에 담아준다는 문구를 보자마자 바로 키위소주를 시켰다. 일관성 없긴. 닭강정을 하나 집어먹었다. 맵다.
"그래서,"
"응?"
"넌 네가 한 말을 믿는거야?"
Y가 화채에 담긴 수박을 젓가락으로 푹 찍으며 물었다.
"응?"
"정말로 네가 없으면 세상이 불완전해진다고 믿냐고."
"나는 아직 '리로리로리로'니까."
"취했니?"
"학교에 가지 않는 학생, 매일 술이나 축내고 있는 대학생, 그 앞에서 같이 마시고 있는 너. 다 '리로리로리로'고 '꼬꾸르르 꼬꾸르르'같은 거지. 조금 더 나이를 먹고 일을 하게 되면 우리는 '은'이나 '는', '이', '가', '했다', '그래서'따위가 될거야. 세상에 널리고 널렸지만 없으면 무언가 어색해지는. '리로리로리로'가 아닌 '뻐꾹뻐꾹'이나 '야옹'같은 사람이 될거야. 하지만 학교에 가지 않는 학생이 사라진다면 뭐, 별 일 있겠니?"
"취했네."
"있잖아. 그 초침소리피아노곡. 똑같은 음이 똑같은 박자로 계속 연주되잖아. 완벽한 규칙성을 가지고 완벽하게 통제되고 있지만 완벽한 음악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니."
다시 생각해봐도 곤욕이라는 듯 Y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사실 '그래서', '그리고', '그렇지만'은 같은 박자에 맞춰 같은 음만 치는 피아노연주 같은 거라고 생각해. 규칙적이지만 지루하지. 서로 다른 음들이 서로 다른 박자로 소리를 내는 게 낫지 않을까? 나도 너도 '리로리로리로'도 '꼬꾸르르 꼬꾸르르'도 그런 의미에서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이 주정뱅이야."
그리고 우리는 꽤나 늦도록 술을 마셨다. 세상을 아름답고 완벽하게 하기 위해서.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2-25 15:19)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1
15:21:16
상병 김예찬
아, 기화씨의 첫 글을 보았던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이런 경지까지 올라오셨군요.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2009-02-22
11:12:21
상병 김예찬
그리고 가지로- 2009-02-22
11:13:13
상병 김예찬
아, 이걸 제가 처음 읽고 처음 리플을 달았다니 뭔가 기분이 좋군요. 2009-02-22
11:13:43
일병 이신호
점점 글을 읽어도 글씨만 읽고 내용을 파악하지 못하는 경지에 오르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런............ 2009-02-22
11:28:31
병장 김민규
이런 맙소사,
가지로- 2009-02-22
11:38:32
병장 김민규
그건 그렇고 기화님의 감수성이 와닿는 부분이 참 많네요. 이어폰 꼽고 교보를 거닐며 느끼는 막연한 압도감이라든가, 그 '연주'에 대한 감상이라든가(크크크크)
아, 어서 저것을 나의 일상으로 만들어야 할 터인데. 한없는 그리움에 커피한잔으로 추억들을 그려 봅니다. 2009-02-22
11:50:21
병장 이한준
아- 아아아아아아!!!
가지로.
전 기화님의 글에서 여성적인 필체를 느낍니다. 그래서 좋아요. 전 여성 작가가 좋거든요.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기화님의 글에는 작가의 일상이 섞여있다는 생각도 합니다. 너무나 리얼한, 너무나 와닿는, 그래서 더욱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그런 소중한 일상이요.
너무나 잘 읽었습니다. 왠지 눈물이 날 것 같네요.
"학교에 가지 않는 학생, 매일 술이나 축내고 있는 대학생, 그 앞에서 같이 마시고 있는 너. 다 '리로리로리로'고 '꼬꾸르르 꼬꾸르르'같은 거지. 조금 더 나이를 먹고 일을 하게 되면 우리는 '은'이나 '는', '이', '가', '했다', '그래서'따위가 될거야. 세상에 널리고 널렸지만 없으면 무언가 어색해지는. '리로리로리로'가 아닌 '뻐꾹뻐꾹'이나 '야옹'같은 사람이 될거야. 하지만 학교에 가지 않는 학생이 사라진다면 뭐, 별 일 있겠니?
(……)
나도 너도 '리로리로리로'도 '꼬꾸르르 꼬꾸르르'도 그런 의미에서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있는 게 아닐까?" 2009-02-22
12:06:23
상병 이석재
왠지 세상을 굴러가게 하는 사람들은 바보, 멍청이라고 했던 어느 책의 내용이 기억나는군요. 너무나도 잘 봤습니다. -가지로- 2009-02-22
12:15:16
일병 노지성
실화라고 생각하고 읽다가...멋지군요.! 2009-02-22
12:57:35
병장 박정순
아,,, 가지로- 2009-02-22
14:04:32
상병 김형태
가지로- 2009-02-22
14:24:59
일병 김유현
배고파요. 맥주 마시고 싶어요. 서점 가고 싶어요. 서림욕 하고 싶어요. 어떡할 거에요. 응? 응? 2009-02-22
14:26:11
상병 김형태
멋져요, 눈을 부비부비하며 뜨고 뜻하지 않게 컴퓨터를 키게瑩嗤, 이런 글을 읽으라는 게시였군요, 주말을 따듯하게 보낼 만한 좋은 글이네요, 매일 사랑타령이나 하는 저와는 무척달라 멋져요- 2009-02-22
14:27:16
상병 윤영준
이게 뭔가요.... 드디어 기화님 글이 더욱 만개하는 건가요?
뭔가 슬프면서도 아련하면서도 즐거운 이 기분은 뭐지?
<가지로>- 가야지요. 2009-02-22
14:57:39
상병 김요셉
노코멘트. <가지로> 2009-02-22
16:11:51
상병 류선웅
노코멘트..<가지로> 2009-02-22
17:19:50
일병 송기화
헉. 2009-02-22
17:25:01
병장 이한준
차라리 '송기화 전집' 을 통째로 들어서 가지로 가면 좋겠어요.
아아. 퇴궐이 눈 앞에 있는데, 기화님의 글을 더이상 못본다는 것이 너무 아쉽습니다. 2009-02-22
17:29:13
병장 김민규
오, 훈훈하군요. 이건 거의 역사적인 일? 책가지란 이런 것이다라고 턱 던져주니 노코멘트 하지 않을 수가 있나. 에이, 새침떼기 기화님-
브라보, 당신을 응원합니다. 2009-02-22
17:39:17
병장 김무준
잘 읽었습니다. 2009-02-22
18:07:21
상병 최한들
와우-
가지로는 위에서 다 외쳤으니 불필요 하겠군요. 왠지 늦게 읽은 것에 대해 죄책감마저 드는 글이예요.
리로리로리로, 라니... 다 읽고 나서 어린왕자가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요. 2009-02-22
18:56:46
상병 민현준
이 나이쯤 먹은 사람들이면 누구나가 한번 쯤은 생각해봤던 내용이 아닌가 싶네요.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내가, 내가 사라져도 아무렇지 않은 세상에 대한 이유없는 거부감.
내가 특별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세상을 받아들이는 순간 어른에 조금 근접해 가는거겠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재료로 너무나 멋지게 요리해 주셨습니다. <가지로> 2009-02-22
19:29:20
상병 최한들
악, 전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재료였는데요.
누구나 공감이라... 크큭 2009-02-22
19:35:45
병장 김대운
아 막 스무살때 혼자 그냥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었드랬죠.
광화문 거리에서 어디가 어딘지 헤매다가 우연히 무지막지하게 큰 건물에 무슨 문고라는 것이 있길래 딱히 갈데도 없고 들어갔었죠. 들어가자마자 잘못 들어왔나 싶었드랬죠. '분명히 문고면 서점인데 여기가 서점인가' 남쪽 섬나라 총각에게는 그런 엄청난 규모의 서점은 충격이였어요. 음흐 그때 '위대한 패배자'를 샀더랬죠. 그리고 별파리다방도 처음으로 가보고 ..읽다가 잠깐 스무살때 내 모습을 본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어요. 2009-02-23
02:49:49
일병 권홍목
꺅
이건 뭐라 기분을 표현할 말이 없으니
가지로-
기화님의 글을 읽고 있으면,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도란도란 얘기하고 싶은 기분이 들더라니, 이 글에서 그 느낌이 절정이 되는 듯! 2009-02-23
08:47:10
상병 장형순
가지로. 이분 점점.... 2009-02-23
08:50:32
일병 오효섭
잘읽었습니다 ,. 하하 흐음,. 2009-02-23
10:56:01
상병 김형조
평범한 일상 속에서 이러한 의외의 감성을 이끌어내시다니..
가지로- 2009-02-23
11:14:01
상병 백권우
잘읽었습니다. 정말 맘에 와닿는 이야기네요. 가지로. 2009-02-23
12:15:21
병장 김한송
아 좋네요 2009-02-23
13:26:31
상병 우용식
글이 마음속에서 녹아내려요
찻잎이 물에 울어나듯이
준비가 되어있는 따끈한 물이라면
더욱 잘 울어나겠죠?
이제야 제 마음도 조금은 따뜻해 졌나봐요.
가지로. 2009-02-23
13:50:17
병장 신대웅
단편집하나 냈으면 좋겠네요 쩜쩜
가지로 2009-02-23
14:07:45
상병 정근영
와, 이분 요즘 아주 펑펑- 터트리는군요.
기화씨가 아직 일병이어서 다행이군요. 혹시나 먼저 가면, 그동안 심심해서 어떡할 뻔했어요, 흐흐
기화씨 글을 볼때마다, 왠지 김지민씨가 자꾸 오버랩되는걸요.
'가지로-'를 외치는 순간, 이 글에 달린 수많은 '가지로-'와 같이 별 의미없고 흔한 단어가 될 것 같아서, 저는 가지 Go- 할래요. 킥킥 2009-02-23
15:22:54
병장 김동욱
지금까지 나온 가지로가 전혀 아깝지 않은 글이네요.
저 역시 하나 보태도록 하겠습니다.
가지로. 2009-02-24
00:27:30
상병 박은규
퍼가요~(하트) 2009-02-24
13:47:39
상병 박은규
농담이에요. 잘 봤습니다. 추천! 2009-02-24
13:59:00
상병 손근애
가지로.
정말 멋지네요. 나중에 기화님 글 후기를 써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심하고 담담하게 세상을 담아내다니. 후후. 2009-02-24
15:52:41
일병 이상훈
전 여기서 영원히 송기화님 글을 볼 수 있을까요?
2010년은 안온다고 들어서요..
가지로 - 2009-02-24
18:25:51
병장 이창섭
'은''는''이''가'가 되기 싫은 마음 때문에 요즘 괴로운 한 사람입니다. 제 어깨를 한번 토닥여주는 글이군요. 리로리로리로 꼬꾸르르 꼬꾸르르~ 추천 꾸욱. 2009-02-25
02:21:05
병장 이우중
드디어 이 글을 읽었습니다. 요 며칠 읽어야지 읽어야지 했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았어요.
잘 읽었습니다. 이제 가지로 가도 될 것 같아요. 2009-02-25
09:37:59
상병 이동열
이제서야 고백하건대 지금까지 저는 기화님이 만담가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기분 나쁘게 들리실지도 모르지만 이야기'꾼'같은 느낌이었는데- 이글을 읽고나니 생각이 확 바뀌는군요. '저'라는 존재가 무엇이기에 자의적으로 누군가를 재단한다는 것인지...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리고 부럽습니다. 나날이 나아가시는 모습이- 2009-02-25
12:16:30
일병 송기화
이야기꾼 하면 안될까요(...)
그게 좋은데.
그나저나 여러분 모두 감사합니다. 2009-02-25
12:35:28
상병 김세현
부라보입니다 하하 2009-02-25
14:14:31
병장 박문희
도저히 꼬꾸르르로는 살 엄두가 안나네요.
저는 '기왓장'정도로 살고 싶어요. 그렇게 흔치는 않은 삶으로요.
그냥 문득 떠오른 단어입니다. 하하.
멋진글 잘 읽었습니다.
가지로! 2009-02-25
14:26:20
책마을
가지로 올 때가 되었죠. 2009-02-25
15:20:15
일병 이상훈
캐리어도 가야죠!!
캐리어 - 2009-02-26
20:35:34
일병 윤석진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09-02-27
09:16:36
병장 이지훈
이미 가지로 왔군요
추천은 아까 눌러버렸고...더 이상 어떻게 이 글을 찬양해야하죠? 2009-02-28
09:06:51
상병 황호상
너무 잘 읽었습니다. 가지도 이미 와버렸고, 뭐라 말을 덧붙이기도 싫네요.
마지막 한 문장이 가슴에 아련히 와닿습니다. 2009-03-02
13:32:22
상병 이동현
참 좋은 글입니다 2009-03-03
18:02: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