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순간부터 너무 익숙해져버린
어느순간부터 퍽이나 맛있어져 버린
생존의 문제를 벗어나 실존의문제를 거론하게 된 바로 그것!
그렇다. 바로 짬밥이다. 

밥이란 사람에게 있어서 어떤 존재일까? 

우리는 밥을 먹고 그 속에서, 음식을 에너지로 변화시키며 살아간다. 밥이란 녀석이 몸안에 들어와야 에너지도 만들고 움직일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동물이 아닌 “사람”에게 있어서 밥은 생존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우리는 누군가와 친해지고싶을 때, 어려운 말을 꺼내려 할 때 꼭 밥을 먹자고 이야기 한다. 회사에 중요한 목적으로 방문한 바이오들을 만날때 우리는 밥을 같이 먹는가 하면 사랑하는 사람과의 데이트도 실은 그 절반이 밥먹기 이다. 이렇게 우리가 밥을 먹자고 하는 이유는 밥을 못먹어 굶어죽을것 같은 절박한 상황에 처해서가 아니라, 밥속에 담긴 관계들을 섭취하기 위해서이다. 같이 밥을 먹게 되면 무거웠던 분위기도 바뀔수 있고 호감도도 그만큼 더 높아진다. 같이 밥을 먹는것. 그것은 생존을 뛰어넘은 실존인 것이다. 

칸트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복된 일은 마음이 맞는 사람과 맛난 음식을 먹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밥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밥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늘상 입버릇 처럼 말하는 짬밥이 바로 그것이다. 그 어원이 어디서 부터였는지 왜 짬밥으로 불리는지 알 수 없지만 그녀석은 정말로 특수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짬밥을 섭취하기 위해서는 일단 결벽증같은 것이 없어야 하고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과 먹게 된다고 하더라도 먹어야만 한다. 가끔 빨리 해치워야 하기도 하고 가끔 정말 맛이 없을 수도 있다. 엄청난 사람을 대상으로 하기에 그 섬세함은 떨어질 수 밖에는 없다. 그녀석은 당연히 엄마가 해주시는 뜨신 밥의 경쟁상대가 될 수 없다. 엄마가 해주시는 밥이 해비급이라면 짬밥은 라이트급정도에 속한다고나 할까? 짬밥 참 찌글찌글하기만 하다. 하지만 나는 이런 짭밥도 다시금 바라보아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가끔 그녀석이 너무 고맙고 이제는 퍽이나 맛있어서 짬밥을 낮추어서 표현하는 것이 미안할 때도 있기에, 고마운 짬밥을 위해 나는 정의의 사도인양 조그만 성의로 짬밥을 옹호해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다시금 짬밥을 추억하고 회상하면서 그 절하된 의미를 찾아보기 위해서... 

짬밥과의 첫만남은 참으로 낯설고 어색했던것 같다. 석양이 뉘엿뉘엿 306보충대의 하늘을 빨갛게 물들이던 그날, 하얀 입김사이로 지난 기억들이 냉혹한 현실과 까칠하게 접촉을 시도하던 바로 그날이었다. 생이별의 고통을 맛본 나이기에 식욕 따위가 느껴질리 만무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그날 나는 공동경비구역 선발에 뽑혀 팔굽혀펴기, 윗몸일으키키 등등등을 모두 마치고 늦은 저녁을 먹어야만 했다. 선발에 뽑혔던 애들은 등등등의 심사기준을 소화해 내느라 수고했다고 짜장면을 시켜주는 것이 아닐까 호들갑이었지만 정작 우리를 맞이한 것은 차갑게 식어버린 감자야채볶음, 찬밥, 찬 계란국, 단감 한 개가 전부였다. 우리를 인솔한 교관이란 녀석은 “지금부터 7분안에 식사를 마친다” 라고 말했다. 사실 먹을 생각도 없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차갑게 식어버린 감자야채볶음을 한숟갈 떠서 질겅질겅 씹어삼켰다. 한겨울에 먹는 차가운 감자야채볶음은 너무도 맛이 없었다. ‘이런 제길’ 찬밥은 모래알갱이를 씹는것 마냥 푸석거렸고 감이란 녀석은 껍질이 그대로여서 먹을수가 없었다. ‘이걸 어떻게 먹으라고 주는거야!’ 결국 껍질도 안깐 감은 잔반통에 성의없이 버려졌다. 그 후 나는 신교대에서 짬밥과 많이 친해졌다. 아니 일방적으로 그녀석을 갈구했다. 어찌나 배가 고프던지 살기 위해 허겁지겁, 후르륵, 짬밥을 먹어치웠다. 한번은 조교책상에 정량배식 후 남은 감이 있었는데 그걸 목격한 나와 동기 녀석은 감을 다소곳이 훔쳐낸 후 화장실 4번 사로에서 사이좋게 껍질도 안깐 그 감을 너무 맛나게 나눠먹었다. ‘사람이 극한 상황에 처하면 이렇게 되는구나’ 큰 웃음 한번 내뱉고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 나와 동기녀석은 유유자적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자대배치를 받은 이후부터 다시 짬밥의 효력이 시들해졌다. 냉동이라는 막강한 녀석의 등장으로 그 인기가 잠시 한풀 꺽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내 다시금 짬밥속에서 나는 실존을 발견하게 되었다. 

우선 우유와 함께 나오는 아침은 뜨거운 국물만큼 든든한 존재로 바뀌었다. 아침 청소를 끝내고 사랑하는 머리 큰 후임녀석과 밥을 먹으러 갈때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꼬박꼬박 챙겨먹은 덕택인지 아침의 싱그러움도 이제는 충분히 느껴진다. 엄마가 해주시는 아침과 비교해 보아도 아침만큼은 전혀 손색이 없다. (단, 조갯살 미역국만 나오지 않는다면) 군대리아는 가끔 찾아오는 별미이다. 따끈한 빵에 잼을 발라 먹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점심시간이면 다른 내무실 녀석들이 밥을 먹었냐며 친한척을 해온다. 그리고 하루일과를 마치고 느긋하게 저녁을 먹으러 가는 나는 그야말로 한량이다. 취사장에서 이런 저런 관계속에 푹 빠져서 실존을 논하기도 하고 그속에서 웃음지어 보기도 한다. 

바로 이것이 짬밥이다. 그 속에는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의 정성이 들어가있고 그것을 한입 배어무는 사람들은 서로의 애정을 나누어주긱도 한다. 훈련이라도 나갈라 치면 짬밥은 너무나도 맛있을 수 밖에 없다. 허나 요즘 잔반통에 버려지는 그녀석들을 보고 있을라면치면 가슴한구석이 아파온다. 결코 그 안에 들어있는 관계와 정성은 우습게 볼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속에는 취사병들의 정성도 들어가 있고 전우들의 관계도 녹어들어 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하루속에서 오늘도 짬밥은 맛이 없고 어떻고 저떻고 떠들어대기 보다 오늘만큼은 그 안에 들어있는 정성과 의미를 곱씹으며 맛있게 짬밥을 섭취했으면 한다. 그래! 짬밥도 밥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