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우씨의 글을 읽고 떠오른 생각, <보론이고 싶습니다>
마지막 칼럼이라는 제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댓글을 달다가 댓글이 길어져서 그냥 올립니다. 메인 게시판에 올릴까도 생각하다가 논의의 집중을 위해서, 가지에 올립니다. 죄송해요. 훌쩍.
괜한 비판이나 섣부른 단견이 아니라, 좀 더 나아가기 위해 <보론이고 싶습니다>가 이 글의 제목입니다.
진우씨의 글에 대해 세 부분에서 할말이 있습니다.
하나는 문화의 ‘향유’에 관한 것인데, 진우씨의 글에서 문화의 향유가 '소비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 만들고, 다른 누구는 누리는 형태를 띤 문화 향유의 과정-특히 소위 대중문화라는 영역에서-은 ‘소비’의 틀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다고 봅니다. 물론, 이 소비는 티켓을 사는 행위로 일단락이 나는 것이 아니라 극장에 들어가는 것만으로, 문화생활을 향유한다는 옵션을 자신을 위해 구입하는 모양새의 세태를 의미합니다. 누구나 문화 생산자가 될 수 있지만, 모두가 꼭 그래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허나, 문화와 관련된 소비자의 ‘합리적 구매’에 대해 백날 마르고 닳도록 이야기 해봤자, 내 돈으로 내가 사고 싶은 것을 사는데 왠 참견이냐 라는 시큰둥한 답변이 돌아올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소비로 대표되는 ‘향유’의 함의는 진우씨의 글처럼 우리 것에 대한 보다 높은 선호와 지지를 통해 ‘우리 문화를 향유하자’는 주장이 자칫 ‘우리 농산물을 사랑하자’와 다름 아니게 되어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문화 다양성의 관점을 지나치게 좁게 만들 우려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문화 다양성의 관점을 한국 문화에 대한 적극적 옹호와 투자, 소비의 관점이라기보다는 그저 문화가 담아내고 또한 재생산하는 '삶의 모습'들을 지켜가자는 '생존'의 의미에서 파악하고 싶습니다. 문화를 생산하는 사람과 문화를 누리는 사람과, 문화가 담아내는 내용들이 다양해지는 것, 그리고 그 대척점에 선 문화를 통한 삶의 획일화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모습이 문화의 다양성이요, 문화의 존재 의의 아닐까요. -우리가 여기에 있었다-는 무형적인 목소리와 같이 말이죠.
월드컵 거리 응원이 즐거운 것은 이렇듯 누군가 주체가 되어 이끄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는-예전에 언급한 것처럼, 유감스럽게도 비장애인으로 주로 제한되지만- 간단한 구호와 몸짓으로 자신이 거리 응원이라는 문화의 한 주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응원 도구와 옷차림 역시 생산의 한 양상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여기에서도 대기업들이 끼어들면서 문화 생산의 개념보다 차린 밥상에 와서 밥을 먹는 꼴이 되고 있지만요.
두 번째는 문화의 소통문제인데, 저는 문화의 소통을 굳이 ‘한국적인’ 콘텐츠에 초점을 맞추는데서 시작하여야만 하는가에 대해 동의하지 않습니다. 제가 그나마 좀 관심이 있는 것이 영화라서, 부족할게 분명하지만 영화 이야기를 조금 하겠습니다. 홍상수의 영화-<생활의 발견>, <극장전> 등- 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쉬이 공감하거나 소통할 수 있는 ‘한국’사람은 얼마나 되는지 저는 궁금합니다. 그리고 그 메시지를 보운씨가 말했던 것처럼 한국의 ‘보편적인 정서’라고 정말 부를 수 있는가에 대해, 그리고 과연 한국사람이면 그에 공감할 수 있는가에, 저는 의문을 던질 수 밖에 없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경험일지 모르지만, 저는 그 영화들을 몇 번이나 보고 관련된 이미지와 영화 표현의 개념, 미학 전반에 관한 공부를 곁들여야 그 영화와 소통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영화 생산자인 감독의 작가주의나, 관객의 무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지향하는 층위가 다른 것 입니다. <스파이더맨>을 보는 관객이나 감독은 홍상수의 영화에 비해 오히려 더 소통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기대하고 보여주려는게 빤하니까요. 물론, 진우씨가 말씀하시는 문화의 친숙한 요소-초코파이, 티켓다방-들은 일반 대중들이 영화에 더 친숙하게 다가가는 매개체가 되고 공감의 여지를 높일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 역시 한국 문화가 지향해야 하는 마스터플랜이 아님은 물론이고, 영화 전체를 보면 결국 하나의 흥밋거리가 되는 '소재'일 뿐입니다. 천 만을 모은 태극기 휘날리며나 실미도를 보면 내용적 측면에서는 한국 근대사의 비극을 다루고 있어 ‘한국적’인 것 같지만, 그것을 꾸며내는 방식은 영락없는 헐리우드의 재판과 다름 아니라 봅니다. 그런 영화들로 세계에서 인정을 받는 것은 우리 영화가 '작은 헐리우드화' 되었다, 혹은 헐리우드 못지 않게 잘 찍는다-라고 스스로 소개하는 꼴밖에 되지 않을까 심히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또 다른 천만 관객 영화인 <왕의 남자>인 경우에는 아직 해외에서 어떤 평판을 듣는지는 모르겠지만-사실, 이건 전혀 중요하지 않지만 어쨌든- , 그 영화가 가진 힘은 전통적 요소의 재현이 아니라 '놀이'를 중심으로 한 네 인물의 갈등과 대립, 자유와 욕망을 담은 드라마이기에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곤룡포가 빨간색이든 보라색이든 하는 '사실적' 요소는 영화와 소통하는데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봅니다.
물론, 저도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제 삶을 구성하는 기억의 일부로서의 친숙한 문화에 대한 애정이자 옹호입니다. 단지 내가 사용하는 언어와 내가 종종 접하게 되는 친숙함을 '소통'이라 부르고 옹호하는 것은 친한 친구라고 무조건 그가 옳다고 말하는 것이 진정한 우정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다른 맥락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문화가 지향하는 소통의 의미는 사회 대 사회, 국가 대 국가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학로나 인사동을 ‘문화의 거리’라고 부르지만, 대학로 근처에도 못 가본 숱한 대한민국의 사람들에게 대학로를 문화와 연관지어 말하는 것은, 트라팔가 광장의 넬슨 동상은 이순신 동상보다 위풍당당하다고 말하는 것만큼 쌩뚱 맞은 일일지 모릅니다. 언급하신 한강의 기억 역시 마찬가지겠지요. 즉, 한국문화라고 어떤 일정한 범주를 누군가 묶기엔 그 범주는 여전히 제한적일 수 밖에 없고, 그 결과 정체 모를 ‘한국 문화’를 옹호하자는 주장은 외국인들은 이것을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우월감이 아니라, 같은 사회 내부에서도 이해하지 못하고 마는 괴리감만을 유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결국, 문화는 누가 만들든 만드는 사람의 기억과 받아들이는 사람의 기억과의 접점에서 인정받고 소통되는 것이지, 단지 소재나 언어, 환경과 사회의 문제로 제한한다면 그 테두리 밖의 많은 소통의 가능성을 놓치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덧붙여 저는 민족이라는 말을 '싫어합니다'. 나라는 존재는 타인을 전제로 인식할 수 있듯 우리 민족, 민족의 특성 등의 말들은 다른 민족을 전제하고 타 민족과 구별되는 독특한 무언가를 상기시킵니다. 그런 요소들이 없다면 그게 오히려 거짓이겠지만, 민족에의 강조는 진우님이 언급하신 것처럼 국수주의나 배타성의 불길한 징후입니다. 저는 앞서의 이유로, 그리고 다음에 언급할 한국 사회의 지역적 집중을 이유로, 정체불명의 그 ‘한국적 정서’에는 한국사람이면 100% 소통할 수 있다는 것에 부정적인 시선을 줄 수 밖에 없습니다.
세 번째로는 기범님이 말씀하신 부분과 닿아있는 것인데요. 저는 우리 사회에서 영화가 마치 한국문화의 첨병인 것처럼 여겨지고, 월드컵 거리응원이 이토록 열렬한 것의 공통점 중 하나는 지역을 넘나드는 행사다라는 것을 꼽고 싶습니다. 제가 생각지 못한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멀티플렉스의 힘으로, 한국 웬만한 도시에는 극장이 있습니다. 영화를 안보는 사람은 있어도, 극장이 없어서 못 보는 사람은 많이 줄어들었단 말입니다. 그리고 월드컵은 대형 화면을 설치한 곳만 있으면 됩니다. 대도시마다 있는 야구장, 축구장, 극장, 대형 화면을 준비한 술집까지 전국에서 일어나는 응원의 물결이 가능한 이유입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왜 다른 문화들이 성장하지 못하고 호응 받지 못하는 가를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바로 문화의 지역적 격차입니다.
조승우가 열연했다던 <지킬박사와 하이드> 라는 뮤지컬이 엄청난 흥행을 했어도, 지방 순회공연을 오기 전까지 그것은 그저 다른 나라 이야기입니다. 이런 말들이 문화 생산자들을 향하는 비판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문화 구조가 서울로 집중되어 있고 지역적으로 특색 있는 문화 인프라 구축에 번번이 실패하고 있는 행정가, 기획자들을 탓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런 문화 집중이 점층적으로 문화 소외를 더욱 심화시킨다고 생각합니다. 압구정이나 청담동을 문화의 선두거리라 생각하며 자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문화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 결코 소통할 수 없습니다.
진우 씨가 말씀하신 것처럼, 문화의 소통의 한편에는 분명 문화 향유자로서의 사람들이 맡아야 할 역할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한국’문화가 하나의 상품처럼 세계의 것들과 경쟁을 하고 어깨를 나란히하며 인정받고 하는데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의 것을 알리고 해외에서 여전히 한국 사회의 일원으로 한국을 그리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일이 되겠지만, 한국 사회 안에서도 여전히 소비되는 수준이 다르고, 지역적 격차가 존재하는 그런 문화라면 저에게는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영화 <헤드윅>을 보면서 성적소수자에 대한 생각을 되새기고, 루이제 린저의 <삶의 한가운데>를 읽으며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비록 다른 시대, 다른 나라에서 다른 언어를 쓰며 살았던 작가지만 얇은 깊이나마 그녀와 소통을 시도해보고 싶습니다. 저는 언제까지나 사람의 삶을 확장해주고, 서로의 삶을 담아내고 즐겁게 만들어주는 삶의 이야기로서의 문화를 희망합니다.
얼마 전, 아멜리 노통브의 인터뷰를 보았습니다. 이번 작품의 메시지가 뭐냐라는 기자의 질문에, 메시지는 무슨, 문화는 즐거운 게 아니냐며 반문했습니다. 월드컵이 남기고 간 것들 중 그나마 가장 가치있는 것은 아마 직접 옷을 꾸미고, 응원도구를 챙기고 자신의 육체를 움직이고 소리치는 그 간단한 행위들이 몸서리치게 재미있다는 사실일 겁니다. 저는 그게 문화라 생각합니다. 원시시대의 문화가 개인이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에서 비롯되어 집단으로 퍼져나갔듯, 문화는 그러한 것이었으리라 상상해봅니다.
이야기가 꽤나 새어버린 감도 있고, 급히 서둘러 두서가 없기도 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진우님이 의도적으로 생략하신 부분을 비집어 꺼낸 것 같은 느낌도 들지만, 다양성과 언어의 덫에는 깊이 공감함에도 불구하고 - 여담입니다만, 저는 소피아 코폴라의 <Lost in translation>을 보면서 저 영화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영어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한국 사회’에 집중되는 그 편애에 저는 공감할 수 없기에 길게 써봤습니다. 오히려 삐딱한건 저일지도.
병장 김동석 (2006/06/22 20:33:26)
저도 밑의 칼럼에 대한 글을 쓰려고 했는데, 하고픈 말을 상원님이 다 써주셔서 제가 따로 덧붙일 필요가 없겠네요. 공감합니다. 더불어, 상원님. 군생활 좀더 하시면 안될까요. 칼럼이 보고싶...
병장 한상원 (2006/06/22 20:49:09)
절.대. 안됩니다!(단호) 동석 씨를 비롯한 다른 분글 못 보는건 제게도 아쉬움이에요.
그래서 저는 전역할 때 대현씨를 위한 선물 겸 한아름 퍼갈 생각인데, 동석씨 부탁드려요. 큭큭.
병장 엄보운 (2006/06/22 21:24:30)
너무 안일하게 답글을 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번뜩 드는 글입니다. 내일 다시 한 번 정독하고 글을 달겠습니다. 아아. 당신이 있어서 얼마나 기쁜 지.
병장 노지훈 (2006/06/23 04:15:49)
브라보!
상병 안대섭 (2006/06/23 08:23:05)
적절한 상원씨
상병 조주현 (2006/06/23 09:45:31)
저도 그런생각했어요 보운씨,
여튼, 이래서 좋아
병장 한상원 (2006/06/23 12:54:22)
본문을 조금 수정했습니다. 역시 글을 급하게 쓰면, 다음날 부끄러워 진대니까요.
병장 박진우 (2006/06/23 15:57:01)
보운님의 글. 기대반, 걱정반 으로 기다리고 있어요. 아흥~
병장 김동환 (2006/06/23 17:54:20)
저도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보고 그런생각 했었는데.
국제적인 만남을 위해 영어공부 열심히 해야겠어요.(먼산..)
상병 박진욱 (2006/06/24 04:55:21)
뒤의 두개는 넘기더라도 첫번째의 건에 관해서는 뭔가 전개를 하고 싶은데 능력이 안되네요.